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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20. 2018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이 가장 먼저라고 말했다_강의

아이스토텔레스 범주론_철학아카데미

20181017_철학아카데미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_김진성

1장-5장


들어가기

유형을 나누고 유형에 맞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방대한 세계관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나누고 이데아는 실체 속에 넣어서 일원화 시킨다. 그리고 마치 메를로퐁티처럼 모든 것들의 범주를 몸에 빗대어 보기 시작한다. 오늘은 오르가논이라는 범주론에서부터 거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과연 서양철학을 극복할 수 있을까? 바보야 문제는 범주야!



1강, 리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은 크게 오르가논Organon(논리학), 이론학Theoretike(자연학Physica, 동물학De anima, 식물학De plantis), 실천학praktike(윤리학, 정치학), 제작학poietike(수사학, 시학)으로 나누어진다.

논리학인 오르가논은 범주론, 명제론(문장), 추리, 증명, 개연논증Topica(노포스론), 오류 논증(소피스트식 논박)으로 구성된다.

실천학에서 윤리학은 니코마스 윤리학, 대 윤리학, 에우데모스 윤리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학은 정치학과 아테네인들의 정치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김진성 선생님이 정리해주신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메타인지



주론, 목차


1장 같은 이름 다른 뜻인 것들, 같은 이름 같은 뜻인 것들, 파생된 것들 / 바탕이 되는 것 / 서술 관계 / 범주들의 열거와 명제 / 실체 / 양 / 관계 / 질 / 능동과 수동, 나머지 범주들 / 대립의 네 가지 종류 / 반대되는 것들 / 같이 / 먼저



범주, 정의


범주는 그리스어 kategoria를 옮긴 말이다. 법, 본보기, 한계를 뜻하는 ‘범’과 밭의 경계, 즉 두둑이나 추상적으로는 분류된 항목을 뜻하는 ‘주’로 이루어진 한자어로, 서경의 ‘홍범’ 편에 나오는 홍범구주를 줄여 만든 번역어이다. 홍범구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대법을 묻는 주나라 무왕에게 기자가 가르친 아홉가지 항목을 가리킨다. 기자는 오행, 오사, 필정, 등 널리 법이 되는 아홉가지 범주를 열거한 뒤 이를 차례로 풀이한다.


우리 말로 ‘있다’고 말해지는 다양한 사물의 정리, 분류한 기본 틀이나 축, 테두리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흔히 부문, 항목이란 뜻으로 원어 ‘카테고리’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문법적으로는 ‘술어’란 뜻을 갖는데, 범주들을 소개하는 4장 첫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어 카테고리 대신 ‘결합되지 않는 낱말들’이란 표현을 쓴다. 이 표현 때문에 ‘범주들’은 결합된 나탐ㄹ들, 즉 명제를 다루는 ‘명제에 관하여’와 짝을 이루는 저술로 여겨지기도 한다. Kategoria란 표현은 5장과 8장에서 비로소 쓰인다. 법률적인 의미에서는 고소, 고발을 뜻하는 말로서, 변호를 뜻하는 apologia에 반대되는 말이다.


범주론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



기본, 바탕


제 1실체를 개별적인 사물이라고 하고 hypo-keimenon이라고 표현한다. 개별자와 보편자의 논쟁에서 가장 기본이 바로 개별자이고 기본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보편자이다. 개체로 정해져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들은 제1실체인데 사람으로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실체라면 제 2실체는 동물과 자연 등이 속한다.


제1실체는 hypo-keimenon인데 이것을 subject로 본다. 이 뜻은 무엇 아래로 던져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별자로 던져진 것들이다. 바탕 아래로 빠져 나와서 형성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범주론에서는 제1실체를 개별자로 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신의 속성에 더 가까운 높은 존재가 제 1실체로 이야기가 된다. 이것을 바디우는 순수일자로 말한다.


‘있음’의 원어는 ousia이다. 이것은 다른 장에서는 ‘실체’이지만 1장에서는 einai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6세기 주석가 심플리키오스는 이 어구가 이전의 필사본에 없었다고 보고한다. ‘토포스론’의 비슷한 논의가 이 어구에 빠져 있어서 범주들의 텍스트 편집과 번역에서 생략되기도 한다. 실체가 아닌 것은 속성이 된다. 실체와 다른 속성은 9가지의 범주를 가지고 있다.



1장, 같은 이름 다른 뜻인 것들


같은 이름 다른 뜻이라 말해지는 것들은 이름만 공통이고 그 이름에 따르는 있음의 뜻은 서로 다르다. 예컨대, 실제의 사람과 그를 그린 그림이 모두 동물이라 말해지는 경우가 그렇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름만 공통일 뿐, 그 이름에 따르는 있음의 뜻은 다르기 때문이다. 정말로 누군가 그것들 각각이 동물임은 무엇인지를 제시할 경우, 그는 각각의 고유한 뜻을 제시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같은이름 같은 뜻이라 말해지는 것들은 이름이 공통일 뿐 아니라, 그 이름에 따른 있음의 뜻도 같다. 예컨대 사람과 소가 모두 동물이라 말해지는 경우가 그렇다.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공통의 이름인 ‘동물’로 호칭되고 있음의 뜻도 같기 때문이다. 정말로 누군가 그것들 각각의 뜻을 제시할 때, 다시 말해 그것들 각각이 동물임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때, 그는 같은 뜻을 제시할 것이다.


파생된 이름이라 말해지는 것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어형 변화에 의해 그 이름에 따라 호칭을 얻는다. ‘읽고 슬 줄 아는 사람’이 읽고 쓸 줄 암에서 용감한 사람이 용감에서 그 이름을 얻는 경우가 그렇다.



2장, 바탕이 되는 것(기본)


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결합되어 말해지며, 어떤 것들은 결합되지 않고 말해진다. 예컨대, 사람이 달린다, 사람이 이긴다’이며 결합되지 않고 말해진 것들은 예컨대, 사람, 소, 달리다, 이긴다이다.


있는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떤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지만, 어떠한 바탕이 되는 것 안에도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사람은 바탕이 되는 것, 즉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말해지지만, 어떠한 바탕이 되는 것 안에도 있지는 않다.


또 어떤 것들은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지만, 어떤한 바타잉 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다는 말은 어떤 것 안에 있지만 그 부분으로서 들어 있지 않고, 그것이 있는 곳과 떠어져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이 특정 문법은 바탕이 되는 것, 즉 이 머리 안에 있지만 어떠한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또 색은 모두 물체 안에 있기 때문에 이 특정한 휨도 바탕이 되는 것, 즉 이 물체 안에 있지만, 어떠한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지지는 않는다. 또 어떤 것들은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기도 하고,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식은 바탕이 되는 것, 즉 이 머리 안에 있으며, 바탕이 되는 것, 즉 문법에 대해서 서술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지도 않고,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지도 않는다. 예를들어 이 특정한 사람과 이 특정한 말이 그렇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종류의 것들은 어느것도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지도 않고,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쪼갤 수 없고 수가 하나인 것들은 어떠한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중 어던 것들이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르 ㄹ들어, 이 특정 문법은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는 것들 중 하나다.


범주간의 관계가 결국 논리학(오르가논)이 된다



실체, 속성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음 두 가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개별적인 것은 서술될 수 없으며, 일반적인 것만 가능하다. 실체가 아닌 것만이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속성은 바탕이 되는 실체에서만 존립한다. 이 두 기준에 따라 본문 네 가지 구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는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한 서술됨이고,  B는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음을 뜻한다. 일반적이고, ‘실체적인 것 / 개별적이고, 실체가 아닌 것 / 일반적이고 실체가 아닌 것 / 개별적이고, 실체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실체적인 것이면서 개별적인 것이 바로 기본이고 제1실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은 밑바탕이다. 민경인이 가장 밑바탕이면 사람은 제2실체이면서 바탕이다. 하지만 속성은 다르다. 제1실체랑 연결되는 속성과과 제 2실체랑 연결되는 속성이 다르다.



용어, 사용


kategoria는 고소하다라는 뜻으로 어떤 범주 안에 꺼내서 넣어 놓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실체적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거나 그 사람의 정체성을 범주 안으로 넣어서 ‘죄인’이라는 것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언어적으로 볼 때 그 속성은 ‘긍정’에 포함된다. 즉 ‘있음’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 단어인 apologia는 ‘부정’적인 속성이 들어있고 이것은 범주로 나온 것들을 다시 속성으로 밀어낸다는 것, 다시 원래로 돌아가서 넣어 놓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범주 안에 놓여 있던 것들이 없는 것이 되고 이것은 ‘잠재성’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3장, 서술 관계


어떤 것이 그것의 바탕인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서술될 때, 이 서술된 것에 대해 말해지는 것들은 모두 그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서술되고, 동물은 사람에 대해 서술된다. 따라서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서도 동물이 서술될 것이다. 이 특정한 사람은 사람이자 동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고 종속관계에 놓이지 않는 유들은 차이성 자체는 그 종에 따라 다르다. 사람과 학문의 차이성이 그렇다. 예컨대, ‘발 달림’, ‘날개 달림’, ‘물 속의 삶’, ‘두 발 달림’은 동물의 종들이 갖는 차이성이며, 이것들은 어느것도 학문의 종들이 갖는 차이성이 아니다. 한 학문이 두 발 달림 때문에 다른 학문과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속관계에 있는 유들은 같은 차이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상위 유들이 하위 유들에 대해 서술되고, 그 결과 서술된 상위 유에 붙는 차이성은 모두 상위 유의 바탕이 되는 것인 하위 유의 차이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장, 범주들의 열거와 명제


어떠한 결합도 없는 낱말들은 각각 실체를 나타내거나, 얼마만큼(양), 어떠함(질), 어떤 것에 얽힘(관계), 어디에(장소), 언제(시간), 어떻게 놓여 있음(놓임새), 가짐(소유), 가함(능동), 또는 겪음(수동)을 타나타낸다.


대강을 말하자면, 실체는 사람, 돼지 같은 것이며,  양은 두자, 세자, 질은 휨, 읽고 쓸줄 암, 관계는 두배, 절반, 더 크다가 되고, 장소는 뤼케이온에, 시장에라는 표현으로 범주화된다. 시간은 어제, 작년에, 놓임새는 새워져 있다. 앉아 있다로 표현되고, 소유는 ‘신을 신고 있다, ‘무장해 있다’, 능동은 ‘자르다’, ‘태우다’, 그리고 수동은 ‘잘리다’, ‘태워지다’ 같은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어느 것도 단독으로는 명제 형태로 말해지지 않으며, 그것들이 서로 결합되어 명제가 생긴다. 다시 말해, 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결합되지 않고 말해진 것들, 예를 들어 ‘사람’, ‘희다’, ‘달린다’, ‘이긴다’는 어느것도 참도 거짓도 아니다.



5장, 실체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해지지도 않고, 바탕이 되는 것 안에 들어 있지도 않은 실체가 으뜸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실체라 말해진다. 예를 들면 이 특정한 사람 또는 이 특정한 돼지가 본래적인 듯이라는 것이다.


이런 으뜸으로 실체라 불리는 것들인 제1실체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종들과 이 종듈으 유들은 버금 실체인 제2실체라 불린다. 예를들어 이 특정한 사람은 어떤 종에, 즉 사람이라는 종 안에 들어 있으며, 동물은 이 종의 유이다. 이렇듯 바로 이런 것들이, 즉 ‘사람’과 ‘동물’ 같은 것들이 버금 실체인 제 2실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으로 보건대 분명히,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진 것들의 이름 뿐만 아니라 뜻도 그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서술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은 바탕이 되는 것, 즉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말해질 때, 확실히 그 이름도 서술된다. 너는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사라믈 서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듯도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서술될 것이다. 이 특정한 사람은 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름과 뜻이 그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 서술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그 이름과 듯이 그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서술되지 않는다. 그러나 몇가지 경우, 이름은 얼마든지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서술되지만, 듯이 그것에 대해 서술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희다’는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즉 이 물체 안에 있어서 이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서술되지만 물체는 희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희다’의 듯은 결코 그 물체에 대해 서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으뜸실체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바탕이 되는 으뜸 실체에 대해 말해지거나, 아니면 바탕이 되는 그것 안에 있다. 이것은 개별적인 사례를 검토해 보면 분명하다. 예를 들면, 동물은 사람에 대해 서술되며, 따라서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서도 서술된다. 그것이 개개의 사람들 중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서술되지 않는다면, 사람 일반에 대해서도 서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색은 일반적으로 물체 안에 있고, 따라서 특정 물체 안에도 있다. 개별적인 물체들 중 어떤 것 안에 있지 않다면, 물체 일반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다른 모든 것들은 바탕이 되는 것인 으뜸 실체ㅏ에 대해 말해지거나, 아니면 바탕이 되는 그것 안에 있다. 그러므로 으뜸 실체가 있지 않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버금 실체들 가운데 종이 유보다 더 많이 실체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으뜸 실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으뜸 실체가 무엇인지를 제시할 때, 유보다 종을 제시함으로써 더 명확하게 그리고 더 적절하게 제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사람은 더 고유한 것이지만, 동물은 더 공통적인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특정한 나무를 규정하려는 사람은 식물보다는 나무로 제시함으로써 더 명확하게 제시하게 될 것이다.


또 으뜸 실체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고, 다른 모든 것들이 그거에 대해 서술되거나 그것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이 실체라 불린다. 그런데, 으뜸 실체가 다른 것들에 대해 관계하는 방식으로 또한 종이 유에 관계한다. 종은 유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는 종에 대해 서술되지만, 역으로 종이 유에 대해 서술되지 않는다. 이처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종이 유보다 더 많이 실체이다.


그리고 유가 아닌 종들 자체는 어떤 종도 다른 종보다 더 많이 실체가 아니다.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사람을 규정으로서 제시하는 사람이 이 특정한 돼지에 대해 말을 규정으로서 제시하는 사람보다 더 적절하게 제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으뜸 실체들은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이 실체이지 않다. 이 특정한 사람이 이 특정한 돼지보다 더 실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으뜸 실체 다음으로 나머지 것들 중과 유만이 마땅히 버금 실체로서 실체라 불린다. 서술된 것들 중 그것들 만이 으뜸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특정한 사람이 무엇인지를 댈 때, 유보다는 종을 댐으로써 적절하게 지시할 것이다. 그리고 동물보다 사람ㅇ르 제시함으로써 보다 두렷하게 이를 행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들 중 어느 껏을 누군가 규정으로서 제시한다면, 예를 들어 ‘희다’나 ‘달린다’나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을 제시한다면,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들 가운데 종과 류만이 마땅히 실체라 불린다.



또 으뜸 실체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가장 본래적인 뜻에서 실체라 불린다. 그러나 으뜸실체가 다른 모든 것들에 관계하는 방식으로 으뜸 실체의 종과 유도 나머지 것들 모두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이 종과 유에 대해 나머지 것들이 모두 서둘된다. 네가 이 특정한 사람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말할 때, 사람이자 동물로서 그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말하는 것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모든 실체의 공통점은 그것이 바타잉 되는 것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으뜸 실체는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지도 않고, 또 그 안에 들어 있지도 않다. 그리고 버금 실체의 경우도 또한 그렇게,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지 않다는 점이 분명하다. 사람은 그것의 바타잉 되는 것에 대해, 즉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말해지지만, 이 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이 특정한 사람 안에 사람은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동물도 바탕이 되는 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말해지지만, 동물이 이 특정한 사람안에 있지는 않다.





민네이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그림자-실체-수-이데아’가 있다고 구분하고 있다. 그림자도 나의 일부분이지만 그 속성은 다르다는 것이다. 수도 실체이기는 하지만 속성이 다르다. 이데아도 수이긴 하지만 속성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안에 이데아를 넣었다. 그러므로 이데아가 사라지고 실체 안에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아이스토텔레스에게 실체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제 1실체가 각각 개별자이고 이 개별자 안에 모든 속성이 담겨져 있다. 이 개별자 안에는 당연히 이데아도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 개별자는 수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점이다.



민네이션, 범주


사람이 있다면 내가 저 사람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체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체적으로 다라다는 것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 실체에 포함된 속성이 다라다는 것을 말한다. 그 속성은 또한 제 1차 실체에 달려 오는 속성과 제 2차 실체에 딸려 오는 속성의 구성이 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경인 이라는 실체 안에 속해 있는 속성들은 민네이션이라는 특징, 좋아하는 색, 말과 감정들이 테지만, 민경인의 실체가 제 2실체인 인간으로 올라가면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실체적 특징들 머리, 팔, 눈과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들에 포함된 속성들은 차이점이 1차 실체보다 없어진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종에서 상위 류로, 상위 종에서 상위 류로 올로갈 수록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


민경인의 속성은 빠른 말투이다라는 것이 상위 보편적으로 올라가면 민경인-사람-호모사피엔스/제1실체-제2실체-제3실체’로 올오가면서 ‘말’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사피엔스’의 속성이 된다. 이것은 쉽게 생객해서 민경인이면 당연히 호모사피엔스고 호모사피엔스이기 때문에 ‘말’을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민경인이라고 지칭하는 순간 말을 한다는 속성이 바로 탑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은 이런식의 범주론을 가지고 있다. 실체의 스펙트럼에 맞는 개별의 속성이 담기는 것이다. 실체가 모호해지는 보편자로 갈수록 속성 역시도 보편적으로 간다.


범주의 포함관계에 따라서 속성이 달라지고, 속성이 습득되는 종류가 달라진다.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교육하는 것과 돼지와 같은 범주에서 교육하는 것은 달라진다.



민네이션, 고민


그럼 제1실체와 제 2실체의 차이점이 발생하는 시점은 어디인가? 양육되고 태어나면서 같은 dna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자기다움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럼 교육이라는 것이 바로 실체의 속성을 탑재하는 과정인가? 경험이 그런가?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된다.


크게 ‘경험, 이론, 인식’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다움을 만들어간다고 할 때 이것을 다시 말하면 ‘자기범주화’를 시켜간다고 할 수 있다. 그 범주들에는 육체적인 실체와 그에 따른 속성들이 탑재되는 것을 말할 수 있겠지?


transformation이라고 할 때,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하면 범주를 바꾼다는 것도 될 것이다.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범주의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범주에 담긴 속성들의 변화가 어떻게 보면 change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범주의 번화는 transform이고 그 속성들의 변화를 chang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이상한 동물사전에 보면 종류가 다른 것들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들어 있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범주가 서양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범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민네이션, 명제


범주들의 연결 속에서 잘못된 실체와 속성의 연결을 거짓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올바르게 실체에 연결된 속성을 표현한 명제는 참이라고 일컫어 진다. 범주론은 오르가논이라는 논리학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여기서부터 이제 논리적 관계가 나온다.


실체들 사이의 연결관계가 상/하, 평등연결, 포함관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사실 삶의 현실인데, 그것들이 실제를 바르게 표현하면 옳은 명제가 된다. 그러나 포함관계를 잘못 상정하거나 상하관계를 잘못표현하면 그것은 거짓명제가 된다.


이러한 명제들로 세상의 포지션이 결정된다. 정치적인 행위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명제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어디에 가치가 있고, 그것이 어떻게 분배되는 가?라는 정치학의 문제는 바로 무엇을 범주안에 넣을 것이고, 무엇을 범주에서 뺄 것인가라는 ‘존재론’의 핵심을 말한다.


사드와 같은 금기어를 말하는 사람, 조르주바타이유와 같은 에로티즘을 꺼내 놓는 사람은 사실 범주를 허물어 버리는 매우 위험한?명제를 만드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민네이션, 언어


구조주의가 왜 소쉬르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언어가 구조를 만든다고 했을까? 언어가 실제로 실체의 범주를 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언어가 정하는 범주의 구분 때문에 인간은 그 범주를 넘어서서 행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언어적 범주는 결국 실제의 범주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구조주의를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구조를 바꾸는 인간의 관념과 언어의 관계를 말한다. 언어는 계속 변한다. 실체를 그대로 언어가 반영한다기 보다는 관념이 언어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신기한건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은 이런 범주화를 내포하고 있다. 같은 범주에 어떤 것들이 포함되고, 그것들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를 표현하는 언어적 범주는 다르다. 근대화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범주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범주를 파괴하는 기술이나 실제의 물건이 있고, 그것들의 범주를 깨버리는 언어적 범주 파괴가 있다. 이러한 범주파괴를 통해서 자신의 개별 정체성을 만드는 범주가 깨져 버리면서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다시 시작하려면 ‘우리가 잃어버린 범주’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범주를 찾아야 한다. 그 범주는 레벨의 문제도 있겠고 스펙트럼의 문제도 있겠으며 그 안에 담기는 컨텐츠의 문제도 있겠다.



민네이션, 가상


범주의 개념이 한번씩 바뀔 때마다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났다. 농업혁명에서는 수렵채집이라는 실체들이 범주에 곡식과 저장 그리고 안정된 집과 같은 정착생활이 범주화되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산업혁명에서는 생산에 있어서 새로운 증기기관을 통한 기계제 공장의 등장으로 새로운 범주가 생겨났다. 그러면서 기존에 있던 범주 중에 돈은 최고의 실체가 된다.


그리고 정보화 사회에서는 비물질적인 노동으로서 금융과 주식과 같은 것들이 범주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과 같은 또 새로운 범주들이 실체라는 속성을 가지고 들어온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포지셔닝을 하고, 그에 따라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상적 실체들이 우리의 범주 안에 들어와서 제1실체와 가깝게 내려올 수록 실체들의 범주가 느슨해지면서 경계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새로운 범주에 따른 새로운 실체 그리고 새로운 계급과 사회가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있던 것들을 범주화하는 것을 넘어서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있다. 실체와 실체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섞이게 되면서 새로운 실체가 나오는데 이것이 호모파베르들이 만드는 ‘작업의 의한 도구의 탄생’이다. 이러한 이런 도구의 탄생을 통해서 인간은 또 새로운 범주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머릿속에 있는 새로운 범주가 이제 프링팅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시뮬라시옹에 의해서 가상은 현실의 실체로 내려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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