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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26. 2018

공포와 상징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읽기 3_철학아카데미

20181025_철학아카데미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읽기_김선하

멜라닌 클라인, 상징계와 상상계


교수님의 알찬 강의


들어가기


멜라닌 클라인의 많은 이론들이 크리스테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이의 성장기에 만들어지는 주체와 객체의 문제, 경계와 주체의 문제는 평생 그 사람의 존재론의 범주와 삶의 행동의 반경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크리스테바의 중심 이론은 당연히 아브젝시옹이다. 아브젝시옹의 그전까지의 주체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라캉이나 프로이트와 다르게 어머니의 아브젝시옹을 이야기한다. 상징계가 만드어지는 시기 그리고 만들어지고 나서 단단해지는 시기에 어머니에 대한 아브젝시옹은 그 성격을 단계별로 달리한다. 그러므로 크리스테바는 멜라닌 클라인의 오이디프스의 단계론을 인용하게 된다.


오늘은 멜라닌 클라인과 크리스테바의 이론들을 비교해보면서 ‘아브젝시옹’의 관념을 좀 더 깊게 들어가보자.




멜라닌 클라인, 오이디프스


크리스테바의 많은 사상들은 멜라닌 클라인에서 가지고 왔다. 멜라닌 클라인은 죽음 충동의 근원을 시기심으로 보았다.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생명’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다. 최고의 만족이고 생명의 원천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초월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가장 좋은 것이 나에게 있지 않고 바깥에 있다는 것이 분열과 양가감정을 만들어 낸다. 젖가슴에 대해서 소유할 수 없음을 ‘시기심’으로 보고 원초적인 감정으로 가지게 된다고 멜라닌 클라인은 말한다. 마찬가지로 라캉이나 프로이트도 이러한 처음의 경험인 어머니에 대한 어떤 감정이 사디즘, 파괴본능, 리비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대상과 주체가 통합되지 않음으로서 분열증적인 상태에 이른다.


젖가슴은 비길 데 없이 좋은 계통 발생적 대상을 말한다. 젖가슴-태고적 초아자-구강-항문-남근적-오이디프스초자아-잠재적-생식력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좋은 젖가슴이라는 기준이 생기면, 나쁜 젖가슴으로 똥이나 분리, 자신과 같은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와 통합하는 과정이 자신의 존재론을 이루고, 나쁜 젖가슴은 분출 혹은 배출 함으로써 자기와 다른 존재를 인식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와 다른 혹은 나쁜 젖가슴으로 부터 ‘아브젝시옹’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맞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들 혹은 반대하는 것들은 대립하고 공격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힘이 미약한 상태에서 불안감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당연히 이 당시에 거세 불안도 가지게 된다.



투사적 동일화, 라캉


불안의 과정에 들어간 유아는 외부에 자신의 존재를 투사하여 자신의 이미지로 받아 들인다. 대상에게 투사하여 자기의 존재론을 이루고 그것을 다시 자기에게 다가와서 하나로 이룬다. 이것이 바로 나르시시즘 동일화이다. 다시 말하면 투사적 동일화는 나르시시즘적 동일화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 느끼게 되는 사디즘이 바로 투사적 동일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투사적 동일화가 너무 강화되고 깊어지면 자기와 분리가 안되면서 병리적인 부분들이 나타나게 된다. 편집대상적인 주체가 우울증적 주체로 빠지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을 지키려고 공격했던 대상이 자신이 좋아했던 젖가슴을 가진 어머니라는 것을 깨닫고 우울에 빠지고 자책에 빠지는 시기가 온다고 한다. 이것이 우울 불안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울불안이 지나가면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받아주는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되는데, 이 때 어머니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발전하면서 자신만의 상상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라캉이나 프로이트 혹은 멜라닝 클라인은 이 때가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가는, 다시 말하면 기혹계에서 상징계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크리스테바는 오히려 그 전에 일어난다고 한다.


크리스테바는 이전에 이미 상징계로 돌입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이디프스의 삼각관계’에 들어서기도 전에 상징계가 형성되어서 아이들은 자신 외의 모든 것들을 상징적으로 받아 들여서 해석의 단계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상징이 잘 만들어지면 일종의 승화가 되고, 어디에 고착이 되면 병리적이 된다는 것이 보통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잘못 거치면 어떻게 되는가?


리타, 예시


리타의 예시로 부터 알아보자. 리타는 어머니에 대한 강항 질투심을 보이며 아버지를 더욱 따랐다. 한예로 15개월 경에 리타는 아버지와 단둘이서만 방에 남아 아버지 무릎에 앉아 함께 책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줄기차게 표현하곤 했다. 18개월 무렵에 리타와 태도는 한 번 더 변하여 다시 어머니를 가장 좋아하게 된다.


그와 동이세 리타는 야경증night-terrors과 동물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 어머니에게 더욱 더 강하게 고착되어 성장해 갔으며 아버지에 대해서는 격한 반감을 키워갔다. 25개월 때부터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점 양가감정이 되어 리타의 부모는 리타가 2년 9개월이 되었을 때 분석이 시작되었다.


당시 리타는 매우 뚜렷한 강박 신경증을 보였다. 리타는 강박적 습관을 보이고 자책감이 뒤섞인 착한 척과 통제 불능의 버릇없음 사이에 오갔다. 리타는 우울증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는 감정의 기본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심한 불안과 광범위한 놀이장애, 과도한 슬픔에 시달리고 어떠한 좌절도 견디지 못해 괴로워했다. 이러한 어려움들로 인해 그 아이를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리타의 사례는 리타가 18개월 무렵이었을 때 나타난 야경증이 오이디푸스 갈등에 대한 신경증적 소비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야경증의 반복으로 드러난 불안과 분노의 발작, 그리고 여타 장애들은 초기 오이디푸스 갈등에서 유래한 강한 죄책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영화


이 영화는 아들이 죽고 나서 남겨진 어머니의 감정을 드러낸다. 크리스테바의 의미론과 멜라닌클라인의 이론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영화 초반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고 늙은 여인이 예수의 발에 키스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나서 죽은 아들의 장례식이 이어진다. 왜 죽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는 그 어머니는 모든 창문을 닫고 나서 송장처럼 누워서 지낸다. 이야기의 전개는 장례식 전에 아들이 여자친구가 아들을 만나러 온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아들이 죽은 것을 모른다. 어머니는 맞이할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미안한 마음에 아들의 여자친구를 잘해준다. 어떻게 보면 자기 아들이 느끼던 여자친구에 대한 어떤 그리움이나 사랑의 감정을 투사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아들이 되어 버린 어머니가 아들의 여자친구와 즐겁게 지내면서 흥미로운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여자친구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다른 남자들의 호감이 왠지 어머니에게는 불편하다. 그 이후에 어머니는 아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아들이 부활절에 다시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던 어머니는 아들의 환상을 본다.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는 부활절 전야 축제 전에 아들과의 대화를 깊이 가슴에 남기고 부활절 전야에 아들을 찾아서 떠돌아 다니지만 결국은 아들이 부재하다는 것을 체험한다.


부활절 날 아들의 여자친구는 아들의 깨진 휴대폰을 보고 아들이 존재하지 않은다는 두려움과 깊은 실망감을 가지게 되고, 어머니는 결국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낸다. ‘아브젝트’에 점령당한 사람은 어디론가 쫓겨나고 존재할 곳이 없어진다라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이론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아브젝시옹의 시간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주체들의 애매함을 보여주는 시간들이 꽤 있다. 삶이 부조리하고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성스러움을 통해서 극복의 과정을 겪는 것은 아닐까라고 영화는 물어보는 것 같다. 애도의 시간, 애도의 기간을 오히려 종교적인 테두리 안에서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http://naver.me/5rQWRvxh



영화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상실의 대한 애도가 아니라 아들의 여자친구가 떠나는 것 자체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매우 힘들어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돌아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아브젝시옹은 계속해서 남아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서는 자연스럽게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아브젝시옹은 항상 미련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길 잃은 자는 자신을 제 3자로 간주한다’라는 크리스테바의 이야기처럼 아들의 아브젝시옹이 길을 잃게 만들어버렸다면 제 3자가 된 다음에야 그 제 3자에게 접근하고 관계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결국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희열 속에 사라져버린다.





크리스테바, 더 스퀘어


더 스퀘어라는 영화는 성인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문제들이 드러난다. 공연과 빅공연, 작품과 비 작품, 사람과 동물과 같은 경계들이 계속 등장한다. 어떤 것은 받아 들이고, 어떤 것은 버린다. 이 때 주체는 상황에 맞는 경계의 어느 편에 서게 된다.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경계라는 것은 매우 모호하고 애매하다. 나와 타자의 경계, 세상과 나의 경계, 국가와 개인의 경계, 나의 권리와 타자의 권리와 같이 매우 모호한 경계들이 사실은 더욱 현실적이다.


더 스퀘어라는 영화는 사실 경계의 이야기를 긴밀하게 다룬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이 경계의 어느편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투쟁이기 때문에 가끔 정신을 놓으면 우리는 어는 곳에서도 서지 못하고 있는 아브젝시옹의 감옥에 가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 안에 쌓여놓은 분노와 분리감, 좌절이 놀이를 통해서 실제로 들어나면서 서로 화해가 가능하기도 한다.


http://naver.me/5YJUikV5


공격성, 죽음본능


공격성의 핵심은 사디즘이다. 죽음본능도 사실은 공격본증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이라면 쾌랙원리와 관련이 있지만, 아이들도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나올 때 새로운 상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인의 삶 속에서도, 상징계에 포섭되어 있는 성인들에게도 기호계가 가지고 있는 정의되지 않음, 표현되지 않음, 충동과 야수성의 어느지점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을 추구하는 부분들이 드러난다.


또한 지식충동도 하나의 충동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지식충동은 어머니를 탐구하는 본능과 연결되고, 이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엄마의 몸은 아이들의 가장 좋은 놀이터이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이다.


정신분석에서 상징이란 억압된 것들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인간에게 잠재된 억압적인 것들이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상징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이디프스, 단계


제 1오이디프스는 멜라닌 클라인의 이론에 의하면 원초적 억압의 한계를 말한다. 대상 a는 autre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2 오이디프스는 본래적 억압을 이야기한다. 이 때 아이들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상징을 사용한다. 어머니의 몸도 상징화되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도 상징화되어서 상상계를 넘어서는 과감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의 좋은 방법론은 바로 인간세상을 상징화하여 승화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다시 경계성이 나온다.


유아는 초기에 어떤 것을 아브젝트 하는가? 자신과 동일화되어 있는 어머니와의 관계의 단절을 느끼면서 자기 스스로 서브젝트로 서기 위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모든 이에게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브젝시옹의 시간에 어머니와 자신의 동일시가 깨지면서 타자에 대한 이해와 상실감을 통한 부재와 있음의 경계를 배우게 된다.


원래는 자신과 어머니가 하나였는데 이것이 분화하면서 어머니는 괴물이 되고 어머니와 ‘모친살해’의 과정을 통해서 아브젝시옹이 일어나고 결국 자신이 주체로 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라캉이나 프로이트는 오이디프스컴플렉스에서 오직 ‘부친살해’만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에게서 드러나는 아브젝시옹의 개념에서는 ‘모친살해’를 거쳐야만 죽음을 걸과 다시 부활하는 자신의 의식이 탄생한다.



성스러움, 혐오스러움


우리는 곧 ‘공포의 권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려면 성스러운 것과 혐오스러운 것들을 만든다.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은 이미 공포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둘 중에 어떤 것이 아브젝시옹을 하고 남아 있는 것이 남아서 자신의 본질을 이룬다.


성스러움을 멀리하면 혐오스러움으로 가고, 혐오스러움으로 부터 아브젝시옹하면 성스러움으로 나간다. 이것은 순수히 크리스테바의 존재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짓기는 매우 자의적이다. 실제로 이쪽에 선을 그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스러운 것인가? 잘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선포한다고 그것이 완전한 진리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은 오히려 ‘경계’에서 왔다 갔다가 하면서 언어로는 자의성에 기반하고 있고 기의와 기표의 연결성도 낮자지는 것을 말한다. 사실 언어라는 것이 쉽게 말해지지만 실제거인 사회의구성에 따라서 따로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진다.


종교적인 상징을 통해서 승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아브젝트된 주체는 자신의 비천시됨을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고 경계에서도 멀어져 버린다. 어떤 주체가 되었는지를 알수도 없는 상황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에서는 종교적인 의식이 버려진 자아를 상승, 초월, 승화시켜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상징계 속에 처박혀 있던 자아가 다시 기호계로 그리고 다시 상상계로 회복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상징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계를 자신이 표현할 수 있을 때 상징계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모든 상징을 인정해주어야 하는가? 여기에 보수적 관점과 진보적 관점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상징계로 나온 이상 반드시 상상계는 연결될 수 밖에 없고 서로 새롭게 상징계와 상상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징 이전에 상상계가 있었고, 언어 이후에 실제계가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구분 안에서 상상계와 실재계를 날아 다니면서 서로 안착하거나 도망간다.


상징계는 또다른 상징계를 낳고, 그 상징계는 또 다른 상상계와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상징을 계속해서 체계화 시키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의 방식이다.


성스러움과 자연스러움, 어머니와 아버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라는 것은 사실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들은 사실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호계에서 상징계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개념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감정들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고민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반드시 기호계에서 무비판적, 중립적인 표현이나 기호들이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성스러움이나 더러움이나, 진보나 보수냐 이런 것으로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민네이션, 생각


아이일 때 어땠을까 나는 4살때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나는 무엇인가 그네를 타고 있었고 사람들이 내 주위에 둘러 싸여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늘 강의로 보면 나를 투사해서 어머니가 내가 되었고, 그 어머니를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것이다.


내가 지켜줘야 하는 대상인 어머니가 공격당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대신해서 그 대상들과 함께 싸워야 했고, 그것이 매우 심한 반대 사상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라캉이 말하는 모친 살해의 단계에서 나는 오히려 모친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 강해진 것은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혹은 효자의 태도가 강해진 것은 아닌가?


누군가가 삶 속에서 없어진다, 혹은 사라진다라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비극이 도래한 일상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조금은 그런 것을 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은 아브젝시옹의 노예가 된다. 누군가가 사라진 지점에서 남겨진 이들에게는 나 역시도 그러한 사라짐을 경험하지 않을까 혹은 당사자가 되지 않을까라는 위험성도 있지만, 사실은 사라진 그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가슴이 여러번 무너지는 시간을 겪는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누군가의 떠남이 아픔이 되어서 지금도 계속 아브젝시옹의 노예가 되어 있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민네이션, 질문


그렇다면 우울증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어떤 트라우마나 골이 다시 몇년 혹은 몇십년 후에 재현되는 것일까? 또한 자폐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자신의 세계가 너무 침범당하기 때문에 아예 세상과 문닫고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민네이션, 아브젝트


아브젝시옹을 하는 주체, 당하는 주체는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계속 고민하고 걱정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해서 비천시된 그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럴 때 담론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컨텍스트 안에서 회복이 일어난다.


때론 민족, 역사, 종교가 그러한 담론의 큰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담론들을 통해서 아브젝트된 주체들이 회뵉되면서 새로운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젝트화 된 것은 이미 자신에 대한 상징의 차원이 넘어서 실재계로 나아가게 된 것인데,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관점에서 종교는 실재계에서 상징계로 그리고 다시 기호계로 돌아서 상상계까지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와 자녀의 아브젝트는 쌍방향으로 일어나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비천시함으로, 아들은 모친살해를 통해서 아브젝트함으로써 자신은 자신이 된다. 문제는 어머니는 자신을 비천시하지 않고 자신의 프로젝션으로 자녀를 계속 앉고 있으면 자녀는 모친 살해를 하지 못하고, 어머니에 속종된 개체로 성장하게 된다. 아브젝시옹 이후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브젝시옹 이후 자녀들과의 관계, 청소년기의 아브젝시옹의 단계에서의 반응 들이 고민이 된다.


오늘은 마니.졸았으나 교수님은 열심히 강의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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