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_철학아카데미
20181024_철학아카데미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_김진성
5장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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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난시간에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제 5장 실체를 공부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1실체는 ‘개체’이다. 다시 말하면 종 아래 다른 종를 가질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류에 포함되지만 자신이 류가 될 수 없는 것들이 으뜸 실체이다. 그것은 개별자이면서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다. 실체는 바로 그러한 개별자를 말한다. 오늘은 다시 실체가 가진 속성과 차이점을 알아볼 것이다.
5장, 실체
실체와 차이성으로부터 나온 것들은 한 이름 한 뜻인 것들로 말해진다는 특성이 실체와 차이성에 있다. 그것들로부터 나온 술어들은 모두 개체에 대해서 서술되거나 종에 대해서 서술되기 때문이다. 으뜸 실체에서는 어떤 술어도 나오지 않는다.
으뜸 실체는 바탕이 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금 실체 가운데 종은 개체에 대해 서술되며, 유는 종뿐만 아니라 개체에 대해서도 서술된다. 마찬가지로 차이성도 종뿐만 아니라 개체에 대해서도 서술된다.
그리고 으뜸 실체는 종과 유의 뜻을, 종은 유의 뜻을 수용한다. 서술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는 것들은 모두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과 개체는 차이성의 뜻을 수용한다. 그런데 앞에서 그 이름이 공통이고 듯도 같은 것들은 같은 이름 같은 뜻인 것들이었다. 따라서 실체와 차이성으로부터 나온 것들은 모두 한 이름 한 뜻인 것들로 말해진다.
모든 실체는 이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먼저, 으뜸 실체가 이 어떤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없이 참이다. 거기서 드러난 것이 쪼개지지 않는 것이며 수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 버금 실체의 경우, 누군가가 인간이나 동물을 말할 때 이름의 형태를 보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이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질 같은 것을 나타낸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으뜸 실체처럼 하나이지 않고, 인간과 동물은 많은 것들에 대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다’처럼 단순히 어던 질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희다’는 질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나타내지 않지만, 종과 유는 실체와 관련한 질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종과 유는 실체를 어떤 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낸다. 단 종보다는 유로 말미암아 더 넓은 경계 규정이 이루어진다. 동물을 말하는 쪽이 인간을 말하는 쪽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실체, 으뜸
또 실체에는, 그 자신에 반대되는 것이 없다는 특성이 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으뜸 실체에 반대되는 것일 수 있겠는가? 예컨대, 이 특정한 인간에 반대되는 것은 전혀 없으며, 인간이나 동물에 반대되는 것도 없다. 이 특성은 실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도, 예르 ㄹ들어 양에도 있다. 정말이지 두자에, 열 등에 반대되는 것은 전혀 없다.
또 실체는 더와 덜(정도의 차이)을 수용하지 않는다. 한 실체가 다른 실체보다 더 실체가 아니라는 점이 아니라 각각의 실체는 바로 자신인 것으로 더 말해지거나 덜 말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문제가 되는 실체가 인간이라면, 그는 자신이나 남보다 더 인간이지도 덜 인간이지도 않을 것이다. 마치 어떤 흰 것이 다른 흰 것보다 더 희듯이, 그리고 어떤 아름다운 것이 다른 아름다운 것보다 더 아름답듯이, 어떤 인간이 남보다 인간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흰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자신보다 더 어떻다거나 덜 어떻다고 말해진다. 예를 들면 어떤 물체가 흰 경우도, 그것은 더 따뜻하거나 덜 따듯하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실체는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인간은 이전보다도 지금이 더 인간이라고 말해지지 않으며, 다른 것들의 경우도 그것이 실체인 한에서 그런 식으로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더와 덜을 수용하지 않겠다.
그런데 수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것이 반대되는 성질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은 으뜸 실체에 가장 고유한 특성인 것이라 생각된다. 으뜸 실체가 아닌 다른 것들에서는 수적으로 하나이면서, 반대되는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수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색은 희면서 검지 않으며, 하나의 같은 행위가 나쁘면서 좋지는 않을 것이다.
실체가 아닌 것들의 경우는 모두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수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실체는 반대되는 것들을 수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특정한 인간은 동일한 것이면서 때로는 희게 대로는 검게 되며, 또 따뜻하게 되거나 차갑게 되고, 나쁘게 되거나 좋게 된다.
그러나 다른 범주의 경우들에서는 어떤 것도 그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말과 생각이 그런 것들이라고 말하면서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말이 참이고 거짓인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앉아 있다는 말이 참이라면, 그가 서 있을 때 같은 이 말이 거짓일 것이다. 생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앉아 있다는 생각이 맞다면, 그가 서 있을 때도 그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틀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방식에서 둘은 차이가 있다. 으뜸 실체들은 자신이 스스로 변하면서, 반대되는 성질들을 수용한다. 질이 달라져 따뜻한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또는 흰 것에서 검은 것으로, 또는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된 것은 스스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제 상태에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로, 저마다 스스로 변화를 겪음으로써 반대되는 것들을 수용한다. 이와 달리, 말과 생각은 모든 점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채로 줄곧 있으며, 사물이 변하여 그것에 관해 반대되는 것이 생긴다. 누군가 앉아 있다는 말은 줄곧 있으며, 사물의 변화 때문에 때로는 참이며 때로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자신의 변화를 통해 반대되는 것들을 받아들인다는 점은 적어도 그 방식을 볼 때 실체의 특성이다.
생각, 말
누군가 바로 생각과 말이 반대되는 성질들을 수용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이는 참이 아니다. 말과 생각은 스스로가 반대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을 수용함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관련하여 겪이가 일어남으로써,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물이 있기/ 이기에,또는 있지/이지 않기에 말도 참이나 거짓인 것으로 말해지지, 그것이 반대되는 것드를 스스로 숭요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이나 생각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들 안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반대 되는 것들을 수용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실체는 그것이 반대되는 것들을 스스로 그와 같은 것을 모두 수용하기 때문에 반대되는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해진다. 그러므로 같고 수적으로 하나인 것이 반대되는 것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은 실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6장, 양
양들 중 어떤 것들은 분리된 것이며, 다른 것들은 연속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서로에 대해 위치를 갖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른 것들은 위치를 갖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수와 말은 분리된 것이며, 선, 면, 물체 그리고 그 밖에 시간과 장소는 연속된 것이다.
수의 부분들은 어느것도 그 부분들이 서로 접촉하는 공통된 경계가 아니다. 예를 들어 5가 10의 부분이라면 하나의 5와 또 다른 5는 어떤 공통된 경계에서 서로 접촉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 3과 7도 공통된 경계에서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너는 수의 경우에서 그 부분들이 갖는 공통된 경계를 전혀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항상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는 분리된 양이다.
말도 마찬가지로 분리된 것이다. 말이 양이란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길고 짭은음절로써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목소리와 더불어 발생하는 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의 부분들은 어떤 공통된
아리스텔레스,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지고 있는 존재들 간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4가지의 범주이다. 1. 반대 / 2. 관계 / 3. 결여, 소유 / 4. 모순’이다. 하나씩 들어가보자.
1.반대의 경우에는 검다의 반대가 희다라는 것처럼 반대의 경우는 둘다 참일수는 없지만 거짓일수도 있다.
2. 관계의 경우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가 참이면 다른 것도 참이 된다.
3. 결여, 소유’는 하나가 참이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참이 되는 소유의 관계나, 하나가 거짓이만 다른 것은 반드시 참이 되는 것이 소유의 관계이다.
4. 모순의 관계는 긍정과 부정이다. 둘 중에 하나만 참이 된다. 둘다 거짓일수도, 둘다 참일수도 없다. 둘중에 하나만 자신의 속성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의미론적 삼각형
의미론적 삼각형 혹은 기호론적 삼각형에서 직선은 각 모퉁이에 놓인 것들이 갖는 직접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점선은 간접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사물/현실세계/pragma/be - 생각/doxa/image/idea/think - 말/logos/say - 행위/praxis/do’의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 했다.
머리(혼) 안의 생각(사유)이나 느낌(감각)은 사물 또는 대상에 대한 사유적, 감각적 표현이며, 말은 생각이나 느낌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며, 글은 말에 대한 문자적 표현이다. 사물을 닮는 혹은 모방하는 수단은 사유 능력이나 감각 능력이며,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수단은 말소리이며, 말을 나타내는 수단은 글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연속
계속’이란 개념은 서로 따로 있지만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접속이란 개념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결된 것이다. ‘연속’이라는 개념은 속성은 다른데 하나의 개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개체들이 하나 이상이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계속, 연속, 접속 등의 방식으로 관계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관계를 보았다.
민네이션, 생각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철저하게 존재론에 입각해 있다. 그것은 어느것을 존재로 볼 것이냐에서 시작해서 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 안에 포함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의 구분은 ‘자연/동물/식물/인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론은 지금 당장 보여지면서 쪼개질 수 없는 것이 으뜸실체이고 ‘종’에 속한다. 그럼 ‘종’의 상위에 쪼개질 수 있는 ‘류’가 있다. 인간은 포유류에 속하며 포유류 속에서는 어려가지 종이 있는데 지금의 현생인류는 ‘사피엔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종에서 류로 올라갈수록 외연은 넓어진다. 당연히 더 넓어진다. 그리고 류에서 종으로 내려갈 수록 내포는 깊어진다.
프랙탈로 보면 하나의 개체가 가지고 있는 멘탈모델이 그 개체가 포함되어 있는 류에 속하게 되면서 여러 종들의 연합이 곧 류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종들의 멘탈모델의 합은 류의 합을 언제나 넘는다. 칸토어의 정리가 단순하게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실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생물은 창조적 진화를 통해서 계속해서 뻗어나가고 운동하고 만들어져 가기 때문이다.
민네이션, 수
개체로 셀 수 있는 것들은 뚜렷하게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종차라는 것은 바로 셀 수 있는 것일때만 가능하다. 수로 셀 수 있는 것들은 하나의 개체들이 존재할때 그리고 다른 개체들과 어울려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수’ 자체는 실체가 아니다. 숫자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직 실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고민이 생긴다. 무한이라는 것은 한정이 없는 것인데, 그럼 ‘수’로 셀 수 없을 만큼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수로 정의될 수 없는 속성을 말하는 것인다. 무한이라는 것은 오히려 수라는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에 속하는 것이다.
수, 무, 무한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없음이 있을려면 있음이 있야 하는데, 그럼 우리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들은 원래는 있어야 하는데 혹은, 있는 것들이 지금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무’라는 것은 있어야 할 것들이 없거나 있는 것이 없어졌을 때 말해지는 것이다. 무, 수 혹은 무한의 개념은 모두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이 발생한다. 존재와 무한에서 ‘무한’이라는 개념을 레비나스가 사용한 것이다. 타자는 신비, 무한이라는 것은 셀 수 없는 주체이면서 객관화 시켜서 셀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 사람이 1명있다라는 것도 불가능하고, 다만 사람이 있다라고 하는 것만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일원론
플라톤의 이원론은 항상 존재론에서도 두갈래로 나누어진다. 영혼과 몸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진정한 존재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이데아를 인간의 영혼안에 담아두고 그 영혼이 인간의 몸 안에 있을 때에만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원인이 나누어져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이 하나에서 나온다, 이원론과 일원론의 싸움인 것이다. 이원론은 책임전가의 문제가 있고, 일원론은 미래의 비전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인 고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