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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02. 2018

아브젝시옹과 공포

크리스테바 공포와 권력_철학아카데미

20181101_철학아카데미

줄리아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_김선하 교수님

아브젝시옹에 대한 방법론


들어가기


초자아에 대한 강박이 강할수록 아브젝시옹은 쉽게 일어난다. 비천시하는 것은 초자아의 힘이 가장 크게 나타날 때이다. 아브젝시옹을 이용해서 정신분석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공포를 해결할 수도 있다. 아브젝시옹과 철학자와의 관계에서 항상 부정성과 긍정성 그리고 합일의 문제는 존재했다. 오늘은 아브젝시옹의 방법론을 가지고 철학과 정신분석 그리고 공포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기호에 대한 전제, 숭고함의 양면성


아브젝트가 원초적인 억압의 경계선에 위치한 비대상을 위한 기회의 미끼라면, 그것의 한 면은 육체적인 증상에, 다른 한면은 승화과정과 나란히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증상 속에서라면 아브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아브젝트가 된다. 그러나 승화 과정을 통하면 내가 아브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아브젝트는 숭고함의 경계를 이룬다. 아브젝트와 숭고함은 과정이 같지는 않지만, 그 존재자체가 똑같은 언어와 주체에 의존하고 있다. 숭고함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숭고함의 ‘대상’은 바닥없는 기억이라는 격정의 도가니 속에서 용해된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를 망각했던 환희의 정점에 위치한 대상을 역에서 역으로, 추억에서 추억으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옮기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내가 그것을 인식하거나 부르기만 하면, 숭고함은 무한으로까지 기억을 넓히는 단어나 인식의 연쇄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출발점을 잃어버리고 ‘내’가 있는 세상과 어긋나는 제3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그것은 환희이자 동시에 상실이다. 인식과 단어의 안쪽이 아닌, 항상 그것과 더불어 그것을 횡당하는 숭고함은 우리를 부풀리고 넘쳐나게 하며, 던져진 주체인 동시에 타자이자 터뜨리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일탈이자 구획의 불가능이고 완전한 결핍, 즐거움 매혹이다.



분리, 아브젝시옹


아브젝트는 충동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대상’의 가장 나약하고 공시적인 관점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통시적인 관점에서 승화작용처럼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먼저 구서오디었지만 원초적 억압(1차)가 아닌 본래적 억압(2차)을 표출의 돌파구로 삼는 가짜 대상이다. 결과적으로 아브젝트는 원초적 억압의 ‘대상’이 될 것이다.


원초적 억압은 이전부터 내가 아닌 타자로 인해 존재한 나누고 버리고 되풀이하는 과정을 거듭한 끝에 획득된 말하는 주체의 능력이다. 아브젝트는 한편으로 동물적인 본능의 영역에서 방황하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우리를 대면시킨다. 원시사회는 아브젝시옹 행위로 자신들의 문화의 중요한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과 동물, 혹은 동물성의 영역을 갈라 놓아 왔다.


다른 한편은 우리의 개인사적인 원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아브젝시옹은 언어의 자의성 때문에 외부의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어머니라는 총체로부터 우리를 벗어나도록 하는 가장 오래된 시도들과 대면케 한다.  


인간 존재를 형성하는 어머니와의 전쟁과 모방을 통해 주체는 자신이 되고자하는 ‘타자’에 동일시하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논리적으로도 연대기적으로도 이차적인 과정이다. 누군가 되기 전에 ‘나’는 분리되고 버려지고 아브젝트한 무엇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의 전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과 공존하는 동시에 영원히 그것을 약화시킨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처음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듯이 한 남자가 자신을 닮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하는 동성애적 대상 선택으로 보았다. 그 다음에는 자기 색정과 사랑의 대상에 있는 유아의 발달 단계 중 한 단계라고 서술하였다. 이 단계에서 유아는 전체에게 자신을 카텍시스cathexis하며, 자아의 발생과 상호관련이 된다. 나중에는 나르시시즘과 자아카텍시스와 관련되고, 대상 카텍시스와 반비례한다고 주장한다.



나르시시즘, 코라


기원적 억압(원초적 억압)이 상징 기능의 불안정성인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금지(자기 성애나 근친상간의 터부에 대한 방어)에 먼저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상태, 즉 특이한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충동으로 플라톤의 본능의 수용체인 코라chora를 들 수 있다.


자아에 있어서 그것의 삶과 죽음의 충동의 자아를 위하여, 아니면 자아에 대항하여 아직은 자아가 아닌 것과 대상들이 서로 관련을 맺고 구축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같은 비자아와 자아의 이중 운동 내지 반복운동은 적어도 여려 개의 원심력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충동의 반복운동을 통해 되풀이해서 원점으로 되돌아온 결과, 원심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시 타자와 결합해서 원심력을 지닌 충동 운동 자체를 근거로 하나의 기호로 재생산되어 결국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 과정은 경이로움이다.


기호는 코라와 코라의 영원한 회귀를 억압하는 것이다. 오로지 욕망만이 이 기원적인 싸움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결국 아브젝시옹이란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위기이다.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사물이나 개념에 대한)에 외관을 부여한다.


나르키스소스의 위기의 순간(조금이라도 스스로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신이 결국 언제까지나 말하는 존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이제 원초적 억압은 밖으로 나와 의미를 지니게 되고 발화된다.


그 체제의 전략(배척하고 분리하고 아브젝트하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를 발견하고 상징 질서의 논증이나 추론 입증 같은 상징적인 질서에 복종해야만 한다. 원억압의 대상 또한 이때부터 지금까지의 제한되고 이성적이며 이탈된 존재임을 멈춘다. 즉 아브젝트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법칙으로서의 타자의 붕괴는 자아가 존재하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혐오스러운 한계라는 근원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로써 자아는 비자아, 충동 그리고 죽음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브젝시옹은 죽음을 거친 부활이다. 그것은 죽음의 충동을 삶과 새로운 의미 작용으로의 도약으로 변형시키는 연금술인 것이다.



철학, 카타르시스


카타르시스는 철학이 도덕적인 한계와 플라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철학의 본질적인 골칫거리인 것 같다. 카타르시스는  순수성을 확인하는 유일한 사상, 조화로운 지혜로부터 파생된다. 결국 선험적 관념론의 입장에서 카타르시스를 간주할 때, 그것은 철학으로 변형된다.


플라톤은 시인의 영감이란, 다시금 현인들이 정화하고 추리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만 국가가 소용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작용은 카타르시스의 미학, ‘묘미’를 드러내는 언어를 통해 운율과 노래로 열광에서 고통까지의 정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때 영혼은 광란과 순수에 동시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성에 대한 열정과 남성적인 욕정을 가로질러 ‘분노’와 ‘열광’을 지나는 복잡하고도 서로 이질적인 주위를 가로지르는 영혼과 육체적이며 성적이고 비열한 부정함을 일깨운다. 그러나 부정함에는 현인의 지식이 부여할 수 없는 나름의 독특한 조화와 배열을 갖는다.



철학, 정신분석


고대로부터 시적 정화작용은 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를테면 철학에 비교하여 항상 열등한 위치에 있어 왔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과 도덕형이상학기초에서 ‘준칙의 일반화’를 통해 우리가 우리 더러움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준칙의 일반화를 통한 통제로써 자유와 유희를 획득하기 위한 ‘윤리적인 훈련’을 주장하였다.


헤겔은 칸트에게는 회의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깝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경도되어 있는 까닭에 헤겔은 행위 윤리만을 고집한다. 그는 속이 빈 구조에서 순수성을 발견하는 미학적인 숭고한 정신에도 회의를 품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사적이고 광란적인 카타르시스도 거절한다. 헤겔은 부정이 역사적, 사회적인 행위 속에서 제거될 수 있으며, 또 제거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적으로는 더러움이 의식을 구성한다는 역설이 성립하지만, 더러움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의식을 견지하려는 목표에 있어 헤겔은 칸트와 같은 입장을 지닌다.


서구 사회에서는 당연한 선험적 관념론의 잔해 위에 세워진 기반인 자신의 윤리가 단단 할 수록 더욱 뚜렷해진다. 프로이트는 이원론적이고 혼동되는, 그럼으로써 윤리의 확고함을 탈중심화시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프로이트의 입장은 낯선 담론에 정신분헉의 슬픈 침묵이 감돌게 한다.


낯선 담론은 사실 공포로 인한 경악이나 열광, 혹은 광란을 모사하느라 말보다는 차라리 운율이나 노래에 가까운 소리를 냄으로써 언어적인 의사소통의 고리를 끊는다. 거세의 분석과정엔느 모방이 존재한다. 게다가 정신분석가의 해석의 말은 분석가능한 말이 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분석적인 언표의 시적인 탈중심화는 미망에서 깨어난 슬픔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한 순수성과 균형을 이루면서 아브젝시옹과 근친관계, 그것과의 공생관계, 아브젝시옹에 대한 앎을 증언한다. 결국 동일화 과정이란 환자에 대해 행해지는 정신분석가의 모든 모방적인 담론(전이와 역전이)인 것이다.


동일화 과정은 또한 언표가 단덜되면서 그 속의 정서에까지 언표를 퇴행시킨다. 그리고 담론에 운율을 부여해서, 자신의 아브젝트한 의미에 등을 돌렸던 슬픈 말의 결핍들을 다시 연결시킨다. 이것이 곧 의식의 생성이 되는 것이다.


만약 분석에 희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동일화 과정이 일어나는 자리인 것이다. 논리적이고도 분절을 몸으로 느낀 이미지로 향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또 말이 생성되는 바로 그 자리를 가로지르는 완전히 시적인 모사 속에서인 것이다. 분석적인 언어는 정화 작용의 도구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아브젝시옹에 대항하는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는 재생의 언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포증, 결핍


결핍 자체에 대한 은유는 공포증이다. 그것은 주체 속에서 기표 체계가 취약해진 흔적을 나타낸다. 여기서 은유란 언어로 이루어진 수사학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동 표상과 언어적인 재현이 결합된 사물들의 표상들이 이루는 심리 체계의 이질성이 있다.


공포가 충동과 환상을 위해 언어를 버리면서 길을 잘못 들어서서 그릇된 은유가 되는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제구실을 못한 때문이다. 치료는 공포증에 구실을 붙여 준다. 프로이트는 한스가 느끼는 공포를 합리화하고, 이 합리화가 전이로 이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포증에 대한 역투자로서 잔존한다.


정신분석적인 치료는 그 처리 방식 여하에 따라 역공포증적이 될 위험성이 있다. 즉 치료가 환상의 층위에 매달려 있다가, 그것을 빠져 나와 공포증의 언표와 공포증에서 일탈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공포증 환자는 은유성이 부족한 주체, 기호만 가지고는 은유성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주체는 충동을 그 소재로 은유를 생산해 낸다.  




민네이션, 생각


예술과 종교는 ‘아브젝트’와 관련해서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다. 특히 정화작용이나 카타르시스는 아브젝시옹을 통해서 내면에서 어떤 것을 바깥으로 꺼내서 멀리하는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종교의 경우는 인간에게서 온전하지 않은 혐오의 ‘죄’와 같은 것들을 아브젝시옹하면서 정화작용을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숭고함들을 즐겁게 여긴다.


예술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자신과 떨어뜨려서 분리함으로써 새로운 창작물이 나온다. 그 창작물은 투사적 동일시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정체성의 확장일수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하나의 ‘실체’가 되었다. 이러한 방법도 아브젝시옹이 쓰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젝시옹 이후를 생각할 수 있다. 자신에게서 어떤 것들을 분리해내는 것은 사실은 내안에서 무엇인가가 계속 생겨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세포가 그렇고, 생각이 그렇고 관계가 그렇고, 기억이 그렇다. 이러한 아브젝시옹이 너무 과하면 허무해지고, 너무 일어나지 않으면 혼란스럽고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아브젝시옹이 적절하게 일어나야 하며, 우리는 살아있고, 발생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전제가 아브젝시옹을 합리화시 켜준다.


아브젝시옹을 한 것과 아브젝시옹을 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상상계에서 아브젝시옹해서 기호의 상황으로 내려오는 것이 표현의 작업일 것이고, 이것이 예술이나 종교가 될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항상 우리는 아브젝시옹을 실천하고 있다. 말에서, 삶에서, 관계에서. 그런데 요즘들어서 발생하는


항문기적 애착은 사실은 아브젝시옹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아브젝시옹이 잘 되었으나 더 고착적인 방식으로 대상과 자신이 합일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승화로 가지 못한 아브젝시옹은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플라톤에게서 아브젝시옹은 ‘이데아’에서 현상계로 나오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브젝시옹 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질료인과 형상인에서 볼 때 질료인으로 형상인의 일부분이 아브젝시옹되어서 포함되는 것이 지금의 실체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헤겔에 있어서도 정반합을 이야기할 때 결국 ‘아브젝시옹’을 할 수 밖에 없다. 대상을 만드는 것은 실체화되고 실체화되는 것들은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연결이나 대립이나 계속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젝시옹의 정도에 따라서 연결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에게서 정은 대상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부정을 만나면서 그 중에 자기가 포함할 수 있는 것들을 아브젝시옹시켜서 포함, 흡수하고 자신의 ‘정’을 더 강력하게 만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상징계 밖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예술밖에 없다’라는 말은 이미 정해진 상징계의 툴을 자연스럽게 넘어들면서 아브젝시옹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시적언어’밖에 없다. 이것은 과히 혁명적인데 상징계는 누구도 넘나들 수 없는데 오직 시적인 언어만 이것을 비틀어서 넘어선다. 물론 예수님의 ‘비유’도 상징계를 슬그머니 미끄러져서 새로운 상상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민네이션, 인사이트


크리스테바는 공포와 대상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을 준다. 소중한 대상에 대한 강박은 그 대상이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반증에서 나타난다. 결국 자신이 아브젝시옹을 당하면서 자신에게 공포가 몰려오는 ‘상상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 표현된 인간의 상징계에서의 말과 행동은 ‘시적언어’를 통해서 확장해서 빠져나가서 새로운 상상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 많은 비유를 남겼다. 때로는 시적언어나 스토리로 자신의 언어에 묶여 있는 상징계의 살마들에게 새로운 상상계로 초청하였다. 인간은 수 많은 문제들 속에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게 된다. 상징계를 기호로 해체하고 기호계적 코라를 지나서 상상계로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유로 말하는 순간 수 많은 해석의 의미가 발행하고, 예술적인 시적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자유를 선물받는다.


공포와 대상 사이에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포의 대상과 아브젝시옹될 수록 더 두렵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직면하고 접근하게 되면 강박이나 히스테리, 정신도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how to read 라캉’에서 지젝은 상징계-상상계-실재계로 나누어서 라캉의 이론을 설명한다. 그런데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공포로 다가오는 유령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계를 열어주는 시적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종교적인 제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초월성이 발생할 때이고, 초월성이 발생하려면 기존의 실재계와 상징계에서 아브젝시옹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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