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_철학아카데미
20181108_철학아카데미
줄리아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_김선하 교수님
결핍과 공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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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젝시옹은 모든 존재들이 가지는 특성이다. 아브젝시옹이 없다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차이와 반복이 생기는 것은 아브젝시옹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공포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아이에게서 나타나는 1차 나르시시즘과 라캉의 거울단계 이전에 주체되기는 무엇인가?
공포, 결핍
오늘은 공포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분석해 볼 것인다. 크리스테바는 ‘공포란 결핍이 결핍된 은유’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 은유라는 것에서 결핍을 찾아내는 것을 생각해보라. 사실은 은유는 부재의 연속이다. 무엇인가가 꽉차있지 않고 부족하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빈 공간에서 새로운 상상력이 나온다.
부재는 상징적으로 무의식적인 환상을 만든다. 그 환상은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다. 공포는 이러한 빈 공간에서 무의식적인 환상이 가득 찼을 경우에 일어난다. 예를 들어 귀신이라는 대상이 무섭다는 것을 생가개보면, 우리의 은유 속에 빈공간이 귀신으로 가득 찰수록 더 공포가 된다. 어디서나 존재하는 귀신의 출현때문에(사실 그것은 대부분 환상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된다. 대부분의 공포영화는 비어있는 공간에, 갑짜기 출현하는 귀신이나 몬스터가 공포를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word’의 과정에서 볼 때 아이들은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두려워하는 존재에 대해서 멀어지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브젝트로서 말을 사용하면서 자신을 공포의 중심에서 멀어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어른의 경우에는 욕망에 대한 고백이 공포의 절반을 이루고, 실재로 빈공간에서 출현하는 대상에 대한 공포가 반을 이룬다. 욕망에 대한 표현과 부재에 대한 표현이 공포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쾌락원칙에서 볼 때 상징화과정에서 일어나는 신경증이 공포증일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좀 더 나아가서 ‘무에 대한 환각’이라고 한다. 비어 있음에서 공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공포증의 대상이 사라지고 충동과 압축이 일어날 때 공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은유란 무의 무한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은유에 있어서 공포란 결핍이 결핍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계속해서 무엇인가가 없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도 사라지고 이 세상도 사라지는 것이 공포의 원천일 것이다.
결핍과 공격성, 프로이트
오이디푸스의 발견과 동시에 다중 형상의, 이미 욕망과 죽음을 그 속에 항상 품고 있는 어린시절의 도착적인 성욕을 발견한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재 사싱르 참고 견뎌야 하는 어린이의 박탈감에서부터 상징 체계를 형성하는 부성적인 금지에 이르기까지. 이 언어고 곧 상징 관계가 되는 충동적인 공격성을 동반하고 형성하고 마루리한다.
결핍과 공격성은 연대기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공존한다. 공격성은 이른바 1차 나르시시즘의 환영으로부터 느끼는 원초적 박탈감에 대한 응수로 나타난다. 그것은 처음에 느낀 욕구 불만에 대해 끊임없이 복수하려 할 뿐이다.
결핍과 공격은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결핍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강박적 공격성을 배제하는 것이 되고, 결핍을 배제한 채 공격성만ㅇ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이를 편집증화하는 것이다. 말이 무섭다, 물릴까봐 겁난다’라고 할 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요인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공포와 공격성은 외부로부터 투사되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체내화에 대한 환상을 통해 공포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자체가 나를 위협한다. 그것은 말하는 것을 배움과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상징적으로 부성적인 금지가 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징계의 위협으로 또 다른 조작을 시도하는 것은 내가 삼켜버린 것은 내가 아닌 그 제 삼자이다.
프로이트, 나르시시즘
프로이트에게는 2차 나르시시즘이 발생한다. 1차 나르시시즘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전에 스스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2차 나르시시즘은 동성애에 대한 리비도를 뜻한다. 최초로 아이는 엄머와 합일해 있는 과정에서 가지고 있는 환상감으로써의 나르시시즘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머니와 분리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환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신의 존재가 자신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머니와 분리된, 박탈감에서 오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와 박탈감을 느끼면서 외부를 인식하게 되는데 있대 상징을 받아들이고 체내화하는 과정에서 말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때 여러가지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금지에 대한 공포의 다양성이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제3자적인 개입은 거세의 공포와 함께 어머니와 아이의 상징계 안에 새로운 상징이 등장함으로써 더 커진다.
이러한 거세에 대한 공포, 금지에 대한 공포, 타자에 대한 공포가 계속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의미의 무게를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축적과정에서 더 큰 공포가 발생하는 것이다.
수동화, 크리스테바
의미작용 기능의 형성 단계와 마찬가지로 공포증 또한 검열이나 억압의 충격으로 은유화되기 전에 전환의 기도(능동태가 수동태로 된다)로 대체된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 세계는 타인들이 그 세계를 향하려 하거나 내가 도망치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죄책감과 금지로 인해 ‘나’는 돌아오고 후퇴하며 번민을 발견한다.
공포증의 대상은 무엇인가가 바로 그 순간, 비어 있는 기호로서뿐만 아니라 관계하는 ‘자아’로서 온 무게를 싣고, 대상 관계나 전 대상 관계에 대한 모든 의미의 무게를 품고 나타날 뿐이다. 환각에 다름 아닌 어떤 대상이 만들어진다. 체내화하는 투사에 실패하면서, 충동의 내부 투사를 시도하는 논리적이고 언어학적인 조작들을 이미 품고 있는,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이다.
언어, 탐욕
수동화나 구순성과 함께 나타나는 공포증은 어머니와의 분리 체험 이후에 나타나서, 이제는 이미 타인이 되어 버린 어미니를 재발견함으로써 생겨난다. 샌디의 사례는 결핍의 원인인 어머니 대신, 말로 가득 찬 입으로 말하면서 이 결핍과 그것이 수반하는 공격성을 치료한다. 결핍은 이 경우 곧장 구순 행위이자 언어 기표의 생산 주체가 된다.
모든 언어 행위가 구순단계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공포증의 대상을 지칭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것은 체내화의 대상ㅇ르 내부로 투사하려는 시도이다. 언어행위는 공포증의 대상에 연결되는 아브젝트가 된다.
언어 습득은 형태를 현혹하고 매혹당할 수 밖에 없는 환각이며, 그것을 통해 외부로부터 우리를 위협하는 구순 대상을 체내화하려는 헛된 시도이다. 성인 공포증 환자의 특징은 극도의 예민함. 성인 환자의 언어는 어린아이의 공포증에서처럼 언어가 실패한 내부 투사적인 역할로 원초적인 결핍의 번민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다.
공포증의 대상은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고, 주체로 하여금 가능한 한 오랫동안 결정내리기를 미루게 하려는 것이다. 그 과정은 공포증의 환각 자체인 이질적인 덩어리엑까지 이르려는 강렬한 상징 활동의 압축을 통해서이다.
주체, 대상
라캉이 말하는 ‘거울단계’ 이전에 주체는 대상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이 대상관계 이론이다. 라캉보다 먼저 시기적으로 주체를 말하는 것은 멜라니클라인에게서 크리스테바가 가지고 왔다. 그러나 여기에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에 의해서 자아가 어머니와 대상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박탈감과 함께 공격성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 때 이 공간에서 자신이 생각한 환상이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공백을 메워하고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이 되어야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자기 자신을 이미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기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관계에서고, 제 3자의 등장으로(대상2) 아버지가 대상이 된다. 아버지는 아브젝시옹해서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그것을 잘 도와주는 대상이 되고 결국 성공적으로 아브젝시옹에 의한 주체 형성이 가능하다. 그리고나서 자신을 환상에서 현실로 받아들이는 지점이 바로 거울단계인 것이다.
아브젝시옹, 공포
히스테리는 자아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자아가 없어지는 과정인 반면에 아브젝시옹은 대상과의 거리가 생기면서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젝시옹에 대한 과정이 잘 진행되면 공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박탈이 너무 심하게 오고, 제 3자인 아버지가 연결성을 만들어지주 않으면 박탈감은 곧 공격성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이론이다.
신경증-경계-정신병-망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아브젝시옹의 정도에 따라서 해소가되지 않을 때 망상으로 발전하는 것 같다.
무, 환각
은유의 형성에 앞서는 이동과 압축의 움직임은 충동의 차원(공포가 알려주는 충동의 영역), 즉 제삼의 차원을 통해 공포증의 대상은 무에 대한 환각이 된다. 은유는 무의 반복이다. 무란 무엇인가? 무는 거짓이다.
분석에 무를 도입하는 것은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상의 불가능성에 직면해서도(어머니에게 남근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를 욕망의 환상으로 전환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나의 공포의 흔적 위에 존재하는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에 나를 엮어 넣는다. 나의 환각과 나약함의 원인이 되고, 나의 힘과 자본을 붕괴시킨 수단이 된 말의 연결고리들을 풀어 버리면서 글쓰기는 아브젝트에 직면했을 때, 이것ㅇ르 욕망의 환상으로 전환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공포증의 대상’, 곧 은유-환각으로 구성된 심리-충동적이고 논리적인 전략 위에서 펼쳐진다. 성인작가는 명명하고 생산하는 대상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회귀의 작용 속에서 무 앞의 번민을 발견하기 위해 언어 그 자체 속에서 일어나는 상징화 작용의 체계를 쉴새없이 변경한다.
영화 곡성, 악
영화 곡성은 우리에게 공포에 대한 많은 메타포를 준다. 곡성에서 일본인에 대한 공포는 어떤 것에 대한 결핍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무엇일까? 악에 대한 투영, 투사적 동일화가 일본인에게 전달되고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일본인을 악마로 만드는 악마가 된다.
리쾨르는 이것을 악의 외재성이라고 한다. 인간은 그 안에 악에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외재적으로 발현되지 않으면 그 악은 잠재적으로만 가지고 있게 된다. 그런데 악이 발현되는 시점에서 내면의 악과 연결되어 버리면 그것이 처음에는 하나의 흠이 되고, 그것이 내제화되면서 죄가 된다. 이러한 죄가 구조화가 되면 허물이 되는 것이다.
영화 곡성에서는 바로 이러한 악이 내제화와 구조화를 넘어서 곡성이라는 지역자체가 악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을 실현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보자. 아브젝시옹의 과정에서 제대로된 대상설정이 되지 않으면 신경증이 나타나게 되고 그 때 발생한 공백에 여러가지 상징들이 들어오면서 공포가 된다. 그러한 공포는 곧 두려움이 대상이 되면서 그것을 회피하거나 벗어나려는 공격성을 가지게 된다.
민네이션, 생각
나는 언제 공포를 느끼는가? 진정으로 나는 쾌락원칙에서 상징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신경증으로 발생하는 것일까? 다소 어려운 말이지만, 다시 말하면 대상의 불확실성이 공포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해서 불확실한 것들이 공포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공격성의 원인은 이런 대상의 불확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를 극복하는 쉬운 방법은 공포의 대상보다 욕망의 대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빈 공간, 공백에 공포의 대상의 출현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다. 욕망에 대한 출현으로 새로운 스토리가 만들어지면 공백이 메워지면서 새로운 창조효과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상징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상징들 사이에서 재구축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면 그 순간부터는 실체와 상관없이 새로운 환상과 상징이 만들어진다.
민네이션, 깨달음
하나님은 항상 어디에나 없다. 무에 대한 무의 무한반복처럼 느껴지는 공포로 여겨지기도 한다. 구약시기에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항상 보이지 않으면서 거대한 힘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대상 말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실체로 우리 가운데 등장한다.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찾아다니고 거리에서 잔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웃고 웃으면서 고통을 함께 짊어진다.
우리 자아의 공백의 중심에 십자가는 환상처럼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공포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실재로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공포를 이긴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의 진정한 핵심은 ‘무’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우리가 아무런 존재가 아닌 것로 돌아가버리는 것이 바로 공포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해결은 무엇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은 곧 ‘부활’이다. 기독교가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죽음이라는 부재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약할 수록 죽음에대한 공포가 강해지고 죽음을 피하기 위한 여러가지의 방법론을 찾아낸다. 그것이 재산축적에서부터 명예와 성적인 도착까지일 것이다.
알랭바디우의 이야기에서 ‘믿음과 용기가 현실을 바꾸는 힘’이라 것을 발견한다. 결국 믿음이 행동을 이끌어내고 사건을 만들어내는 추동이 된다. 용기가 곧 진리가 발생할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공백에 사실은 무한의 연역의 결과들이 떠다닌다. 가득찬다. 수와 무한이 가득 떠 있고 어떤 진리가 현실에서 반짝이는 순간 그것들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서 여러가지의 해석을 만들어낸다. 해석학은 그래서 항상 사건 이후에 발생하고, 사건은 항상 연역된 것들 이후에 나타난다.
민네이션, 질문
크리스테바가 이야기하는 공포에 따라서 누군가가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그것이 실재로 없음을 환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사실은 자신이 추구했던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공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