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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09. 2018

의식과 생명

베르그송 창조와 진화_철학아카데미

20181109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 창조와 진화_류종열

생명진화의 주요 방향들_마비, 지성,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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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콜라철학의 보편실재론과 유명론이 싸우고 있는 사이에 이것을 봉합하기 위한 노력처럼, 베르그송은 본성의 신체를 중심으로 직관을 넘어서 지성인 관념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창조와 진화 사이에서 인간존재는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에 더 가까운가? 이런 고민들을 하나씩 풀어보자.



지성과 본능, 상호침투성


식물적 삶과 동물적 삶이 서로 보완하고 대립하는지 보았듯이, 지성과 본능도 역시 대립하고 보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 이들의 활동성들은 같은 동일한 실서의 사실이 아니며, 차례로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서열이나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성과 본능은 서로 상호 침투하고 있으며, 공통적 기원의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 식물과 동물의 두 경향은 도처에서 그것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을 본다. 다른 점은 비율proportion이다. 지성과 본능도 마찬가지다. 본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지서이 없으며, 특히 지성의 가장자리로 둘려져져 있지 않은 본능도 없다. 사실상, 이것들이 서로 동반하는 것은 상보적이기 때문이며, 그것들이 상보적인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본능 속에 있는 본능적인 특성은 지성 속의 지성의 특성과는 반대 방향의 것이다. 이 양자는 서로를 오나전하게 해주기 때문에 서로 동반하고 있는 셈이다. 상호 침투와 상호 보완에 대한 견해이다.


실제로는 구체적 볹능에는 지성이 섞여 있으며, 실제적 지성에는 본능이 침투되어 있다. 게다가 지성도 본능도 엄밀한 정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원초에서 지성과 본능의 경계의 애매성이 존재한다. 이 두가지가 모두가 경향들이지 이미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다. 플라톤에서 아페이론은 베르그송의 경향에 속할 수 있다. 사물은 경향 중에서 연장, 양화등에 의해 존재에 비례관계를 갖거나 닮은 경우에 속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들 두 가지가 심리적 활동의 두 형태에서 타성적 물질에 작용하는 다른 두 가지의 행동방식을 본다면, 이런 견해는 편협된 생각이지만 장점이 있다. 지성과 본능의 이원으로 도식적인 윤관을 잡기 위해서 이렇게 생각해보자. 도식의 형태를 흐릿하게 하는 것, 그리고 도식의 도안이 갖는 지나친 기하학적 특성을 교정하는 것, 게다가 도식의 뻣뻣함을 생의 유연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본능과 지성 사이를 도식화하는 점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고대 인류의 흔적에서 손도끼의 발견을 생각해보자. 동물중에서 원숭이나 코끼리도 도굴르 사용할줄 안다. 인지적 지성능력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 첫번째 줄에서 제작적 사유의 증거가 된다. 제작된 대상을 알아채는 동물도 있다. 여우는 함정을 함정으로 간파한다. 아마도 추론이 있는 곳에는 지성이 있다.


추리는 이미 발명의 시작이다. 발명은 제작된 도구로 물질화되었을 때 완성된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한 세기가 흘렀는데 그제서야 발명이 산업에 끼친 혁명은 인간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생산력은 생산양식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도 인간관계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에서 성립한다. 소외당한 한 사람이 문제이다라고 할 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권력의 지배의 원리에서 하나가 예외이듯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자연종교의 종교성은 이 소수에 관심이다.


지성적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도구적 인간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호모파베르로 볼 때 지성을 그 근본적 방식에서 인위적 대상을 제작하는 능력이고, 특히 도구를 제작할 도구를 제작한다. 그래서 무한정으로 제작에 변화를 가져다 주는 능력이다.


본능으로 볼 때 지성적이 아닌 동물에서 도구는 그것을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도구에 대응하여 그것을 사용할 능력으로 본능이 있다.


본능에.의해서 움직이는 동물의.왕국


본능, 유기체


완성된 본능은 유기화된 도구를 이용하고 심지어는 만드는 능력이다. 완성된 지성은 유기화되지 않은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능력이다. 본능에 의해 이루어진 도구는 무한한 복잡성과 놀랄만한 단순성을 지니며, 종에 거의 불변적이나 지성이 제작한 도구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노력의 대가로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직관이 공통의 뿌리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본능과 연관을 생각한다.


인성은 지성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기 보다는 깊이 있는 본능을 다시 끌어내는 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과 공생은 인성의 새로운 파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힘은 무제한적이 아니고, 생명의 힘이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멀리까지 가기 어렵다.


생명에 내재하는 힘은 그것으로 작업하는 유기화된 도구를 창조하면서 행동을 무매개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또는 비유기화된 물질을 다루면서 도구 자체를 제작할 어떤 유기체 안에서 매개적으로 그 행동을 부여할 수 있다.


지성과 본능은 발전하면서 점점 분화되나, 결코 서로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다. 둘사이는 수적 비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성의 틀보다 감성의 흐름의 융합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곤충을 예로 들면 지성보다 본능이 필요했고, 척추동물의 경우 심적 생활의 기본은 여전히 본능이다. 그러나 본능을 대체하기 갈망하는 지성이 거기에 있다. 인간에서 선사시대의 자료상 보면 본능이 지성으로부터 결정적 휴가이다. 그러므로 지성과 본능은 하나의 동일한 문제를 푸는 우아하고 분화된 두 해결방식이다. 이 분화는 이중화의 다른 경향이며, 들뢰즈의 세분화differenciation에 가깝다.



의식, 선택


의식은 주저나 선택을 의미한다. 똑같이 가능한 많은 행동들이 어떤 실제적 행동으로 그려지지 않은 곳에서 의식은 강렬하다. 실재적 행동이 가능한 유일한 행동인 곳에서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가 햄릿이며, 후자의 경우가 동키호테이다.


사람들은 생명이 있는 존재의 의식을 잠재적 활동성과 실재적 활동성 사이에 산술적 차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의식은 표상과 행위사이의 간격을 측정한다. 간격 즉 거리가 멀수록 잠재적 활동성은 길다. 지체와 선택은 여기에 있다.


지성을 의식으로 본능을 무의식으로 방향이 전해져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행동과 관념사이의 거리는 본능에게는 결정이며 이것이 의식이 될 것이다. 이 때 의식은 우발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지성에게는 결점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이다.


둘 다 인식이지만, 본능의 경우에 인식은 무의식적이고 신체에 공연되어 있으며, 지성의 경우는 인식은 의식적이고 사유되어 있다. 베르그송은 여기서 이 두 인식은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적 관점에서 공연되는 것과 사유되는 방식에서이다. 두 개의 대상은 방향은 본성의 차이이다.


신체와 셀 그리고 의식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운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항 답이 나오겠지...


의식, 생명


본능은 공감sympathie이다. 지성과 본능은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지성은 무기물 ㅉ고으로 본능은 생명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지성은 대상의 둘레를 돌면서, 그 대상에 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각을 외부로부터 취하지만, 대상 속에 파고들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 속에 끌어 들인다.


그러나 직관이 우리들을 생명의 깊은 속에까지 이끌고 가며, 관심에 자유로운 무관심한 본능이며, 자신을 의식하고, 대상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면서 자신을 무한히 확대시킬 수 있는 본능이다. 여기서 무관심은 인식적 의식이 와해된 상태, 방심에 가깝다.


동물계의 범위에서 의식은 생명체가 자유롭게 처분하는 선택의 힘에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행위를 둘러싼 잠세성virtualite의 영역을 조명한다. 행해지고 있는 것과 행해질 수 있는 것의 차이에서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 본다면, 의식은 단순히 행동의 보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이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경과를 거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은 생물의 계열을 단선적으로 파악하고, 생명전체는 지성을 향하여 진화하고, 그 진화 도중에 감각성과 본능을 통과한다. 그런데 생물학의 가장 분명한 성과는 진화가 여러가지 분화된 선을 따라 행해졌다는 것이며, 이 두 선의 끝에 지성과 본능이 거의 분수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서 지성이 지나치게 침투된 형태로 우리 자신 소에서 경험하게 된다. 진화는 그 기원에서 침투하고 있었던 여러 요소를 극한으로까지 발전시키고 산산히 흩어지게 했던 것이다. 진화는 분해와 분화이다.




민네이션, 생각


지성과 본성은 어떤 관계인가? 서로는 침투하고 보완하면서 함께 만들어 간다. 인간의 본성은 질료에서 오는 생물학적인 접근이다. 들뢰즈나 베르그송은 이러한 질료가 먼저 있어야했고,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것들이 지성과 서로 침투하여서 인간의 진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지성은 어떻게 보면 굳어져 있는 것, 정지한 것, 정태적인 것들을 포착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기억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본성은 움직이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동태적인 것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몸에 체화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시스템사고에서 볼 때도 다이나믹스가 일어나는 것은 멈춰진 것과 움직이는 것, 양과 음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성은 이미 정해진 것, 쪼개어서 개체화된 것에서 시작한다. 본성은 연결된 것, 발전된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항상 연결되어 있다. 지성은 그래서 잘라놓고 새롭게 붙여 놓고, 과거를 예상하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성은 다르다. 본성이 등장하는 생명체는 잘라놓으면 죽는다. 죽기 때문에 잘라서 예측하거나 예상할 수 없고, 그래서 오직 현재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앵글로섹슨계열은 의미론이 먼저 등장하고 이것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반대로 라틴계열은 질감과 심층에서 오기 때문에 기호를 주로 다룬다. 기호는 이미지를 다루는데 반해서 의미론은 의미의 연결인 상징을 다룬다. 인간이 무엇을 볼 때 그것을 기호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크게 보면 stock과 flow의 흐름인 것이다.



민네이션, 인사이트


베르그송은 1830년에 그 당시의 최신화된 생명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본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후 200년 동안 생물학은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일단 생명은 분자론에서 볼 때 셀 안에서 dna의 발현으로 자신의 형질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센트럴도그마에서 ‘dna-rna-protine’으로 변형되는 복제의 단위를 밝혀냈다. 이렇게 볼 때 본능을 dna의 발현이 어디까지인가를볼 수 있을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마빈 민스키의 경우 이러한 본성을 세포에서 일어나는, 혹은 시냅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소사이어티 개념으로 발전시켜서 ai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초미시정치학 혹은 나노정치학에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칼 로져스가 이야기하는 ‘현상학적 장’에서 그 장이라는 것은 지성이 뻗혀나간 거리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메타인지의 관점에서 메타인지가 보는 부분과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의 경계일 것이다. 심리학은 환상과 결핍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들의 재료는 본능에서 오는, 신체에서 오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의 문제일 것이다.


베르그송 이후에 들뢰즈는 본성과 지성의 대립각으로 보지 않고, 본성과 제도로 본다. 지성은 제도처럼 규칙성과 법칙성을 만들고 시스템을 만든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제도 안에서 ‘주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였다. 주체라는 것은 항상 대상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들뢰즈와 푸코는 규율권력으로서 주체를 다루기 위해서 본성은 생명으로 제도는 생명정치로 봤을 가능성이 크다.


주체 개념을 이것에서 더 나가면 제도가 메타시스템으로 확장된 국가이데올로기에서 호명이론인, 알튀세르까지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알튀세르가 후세대들에게 비판받는 호명이전에 무엇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호명이 나오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호명을 알아보는 것이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말하는 본성일 것이다. 결국 리바이어던에서 홉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고 에반게리온이나 거인의 진격 혹은 타인탄 신화처럼 인간의 확장이 도구적으로 제도를 만들고 국가를 만든다고 보는 세계관인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렇나 확장이 무엇의 확장이냐를 고민한 것이고, 본성으로 시작하지만 본능이 지성과 만나서 창조와 진화를 이루어낸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그 사이에 ‘직관’이 본능이 기억한 연결고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또 다른 깨달음은 결국 형상과 심층의 철학에서 형상은 목적인과 형상인을 나누어 가지고, 심층은 동력인과 질료인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분류를 서양철학은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가 인간의 내면에서 포함되는 순간 창조와 진화가 함께 일어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메를로 퐁티도 그렇지만 베르그송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는 생명에 대한 접근과 신체에 대한 접근을 바탕으로 지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등장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 그리고 태어나면서 래 가지고 있는 유기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인간이 발현된다고 본다.



민네이션, 고민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의미론과 기호론을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군가의 생각을 빌리지 않고서 다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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