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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16. 2018

공포와 대상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_공포의 대상

20181116_철학아카데미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_김선하 교수님

무엇을 겁먹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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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을 겁먹게 되는가? 근친상간의 금지와 터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회적인 아브젝트가 개인적인 아브젝트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고민들을 오는 해 볼 것이다.

공포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대상과의 관계이고, 대상과의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지 않고 승화되지 않을 때 공포의 대상들은 더욱 많아지고 정도가 심해질 것이다.




묵시록, 환각과 관음증


환격-불안정한 대상은 고포증의 환영 속에서 시각적인 투자가 있다. 환각이 대상은 피하고 도망치고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면서 기호로만 포착된다. 환각의 시선이나 재현의 중개를 통해서 유지된다. 나머지 절차 동안 시각적 환각은 다른 것들(기타 청각적, 촉각적 환각들)을 집결시키고, 고요하고 중성적인 일상의 상징성 속에 침입하여 주체의 욕망을 재현한다.


하나의 기호나 부재하는 대상에 그리고 이 결핍의 욕망에 시각적 환각이 작용한다. 시선의 투자는 빈번히 공포증으로부터 관음증 환자 ‘쪽’으로 이끌린다. 나르시시슴의 상징성을 볼 수 있다. 관음증은 대상 관계의 구축에 있어 구조적으로 필수적이다. 관음증은 아브젝트를 향해 동요하는 대상을 보여준다. 아브젝시옹의 글쓰기를 동반하게 된다. 아부젝시옹의 글쓰기가 정지될 때 관음적 도착성이 나타난다.


오늘도 오이디프스 삼각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신경증, 상징성


투사된 은유나 환각 또는 공포증의 대상은 한편으로는 신경증의 경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튼튼하게 만들어진 상징성의 힘에게로 안내한다. 조심스러운 음소의 연결고리로 이루어진 한계는 논리적이고 이념적인 구축에 이르기까지 분리하면서만 말하는, 분리된 존재로서의 말하는 존재를 낳는다.


최초 분할의 결과가 주체, 대상이 분할이라면,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비밀을 가두어두며, 대상이 정신없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공포증의 증상에 던졌던 시선은 언어 기호로부터 충동공포와 충동공격성과 환각인 타자에 대한 자의 투자로 그 증상을 포착하기까지 상징성의 복잡성으로 화려하고 고통스러운 출현으로 이끈다.


분석의 실재 관림러기는 분석불가능한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분리라는 것의 주위에서 솟아 나온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공포증의 환각과는 다른 증상의 경험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주체 대상이라는 도식에서의 빗금은 이제 두껍고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된다.


장벽이 쳐진 채 손쓸 수 없이 소멸될 위기에 이를 정도로 상처를 입은 자아는 어떤 장소, 어디에도 없는 부분에 웅크리고 있다. 자아는 대상의 한 부분, 즉 ‘배신자’, 유령, 환영에 자신을 내맡겨 버린 것이다. 거짓자아와 거짓 대상의 흐름에서 욕망하지 않는 대상에 과감히 맞서는 자아의 겉모습과 같은 거짓 대상 대 거짓 자아의 흐름이다.


분리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가능한 이동 없는 심연이자 순수하고 단순한 균열이다. 주체도 대상도 아닌 다만 한 면은 석화작용이고 다른 한 면은 위선이다. 이같은 ‘견고한 성’에 통로를 내고 이동을 가능케 함으로써 욕망이 생겨난다. 전이 과정중에 욕망이 밝은 세계로 나올지라도, 사회적인 규범에 대한 끼워 맞추기식의 대용품에 불과하다.


환자는 치료 과정 중에 타자들을 향한 욕망의 실현으로 아브젝시옹과 만난다. 아브젝시옹의 감정은 감옥에서 나와 스스로를 이상으로 형성하는 도중에 주체가 최초로 느낀 진정한 감정이다. 자신의 아브젝시옹은 자신을 매장하지 않는 최초의 자신으로서의 접근이다.


타인들의, 타자의 아브젝시옹(나는 타자인 어머니를 게워내고 싶다), 분석가의 아브젝시옹은 세상과 맺는 유일한 난폭한 관계이다.



경계례, 아브젝시옹


경계례를 치료하는 순간에 아브젝시옹은 폭발한다. 경계례의 견고한 성이 무너져 재리는 것을 보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 무관심한 거짓 대상이 자신의 강박관념적인 가면을 잃어버리기 시작할 때, 덧없고 약하지만 진정한 주체는 중간부 같은 아브젝시옹의 출현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경계례의 아브젝시옹은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자체로 위협적이고 혐오스러워지도록 나르시시즘의 빗장을 풀고, 침투하기 쉽도록 경계를 보호하던 벽을 허물었을 뿐이다. 경계례의 타자와 대상은 없고 단지 아브젝트만 있을 뿐이다.


경계례 환자의 아브젝트는 리비도를 욕망의 대상으로 향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상징성으로 향하도록 만드는지는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논리적으로 성적인 대상의 선택에 앞서는 아브젝시옹은 종교적인 답변을 필요로 한다. 분리의 비존재나 분열의 경직성을 피하고자 종교를 끌어들이는 대상 관계의 자유 변이를 현대적 관심사로 만들려는 목적이다.


성스러움과 혐오의 문제가 아브젝시옹과 연결되면 기가 막힌 설명이 된다


사물, 질서


사물의 질서와 관념의 질서는 명제로서 서로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이 일치한다고 서양철학은 계속 주장을 했지만, 프로이트는 이것을 부정하고, 우리의 말과 대상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꿈 속에서 대상과 말은 압축이나 전치가 일어난다. 즉 사물의 질서가 관념의 질서로 나타나지 않고 환유나 은유로서 표현되는 것들로 질서들을 다시 재편한다.


라캉의 언어로 하자면 상상계적 실재계에서 상징계가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로이트, 기호


기호는 하나의 압축이다. 말의 재현과 대상의 재현 사이의 관계 매김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상의 재현이 열려진 그것임에 반해서, 예를 들면 청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시각 이미지 같은, 말의 재현은 이미 닫혀진 이질적인 총체인 음성의 이미지, 읽는 이미지, 글 쓰는 이미지, 말의 기동력이 되는 이미지이다.


말의 재현에는 음성적 이미지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기호란 음성적인 기호인 말의 재현적인 면과 시각적인 기호인 사물의 재현적인 면 사이의 압축 관계이다. 이것은 꿈의 논리에서 발견되는 압축이다.


수사학적 은유는 담론의 공시적 사용으로는 의미 작용의 단위를 구성하고, 생성과 통시론적 사용으르는 음성적, 시각적인 용소를 담론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말하는 주체가 이 압축의 가능성을 실연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 각인된 존재로서이다.


이 각인으로 인해 존재는 오이디푸스 단계로부터 뿐만 아니라, 항상 이미 담론의 세계인 섹상에 출현한 이래로 부성적인 기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라캉이 모든 기호, 의미, 담론의 뚜껑을 여는 열쇠로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할 때 아버지의 이름은 단일성, 또는 유일한 구성 작용에서의 필수 조건을 지칭한다.


그것은 또한 의미 작용의 단일성, 이를 테면 또 다른 무엇(사물의 재현 총체)과 이질적인 총체(말의 재현 총체)의 압축을 그 속에서 실현시킨다. 사물의 재현은 말의 재현 속에서 밝혀지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서로의 존재는 단일성을 밝혀내기 위한 총체이다.


기호를 구성하는 압축 기능이 실패하였을 때 그것을 지지하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붕괴 하였을 때 항상 발견되는 실패에서 일단 형성된 음성적인 이미지, 시각적인 이미지 사이의 견고성은 분열하게 된다. 이 분열을 가로질서 청각과 촉각 및 신체 운동의 시각, 즉 전신 감각을 통한 직접적인 의미작용의 시도가 나타난다.



내부, 공포


육체의 내부는 안과 밖에 경계선의 붕괴와 정서의 난입 과정에서 떠오른다. 그 공유성으로 결핍을 지닌 주체의 상태를 소변, 피, 정액, 대변은 확인시킨다. 대부로 부터 분출된 아브젝시옹은 성적인 욕망의 유일한 대상인 진정한 아브젝트가 된다.


아브젝트는 겁에 질린 사람으로 하여금 타자와의 대면을 피하게 하고, 거세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만드는 침잠 속에서 모성적인 깊숙한 내부에 대한 공포를 해방하는 곳이다. 아브젝시옹은 타자를 대신하여 들어서고, 주체에게 희열을 제공하기에까지 이른다. 경계례 환자의 경우 아브젝트는 타자의 위치로 변형되어 진다. 이 경계선의 거주자는 불가능의 경험을 분류담에까지 밀어붙이는 형이상학자이다.


한 여성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경계에 들어가는 경우, 그 까닭은 상징성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삶, 말하자면 성적인 삶을 보장하는 아브젝트한 욕망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모성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논리적으로 본다는 그녀는 아브젝시옹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생각지도 않고, 마치 자신의 어미니에게 갚아야 할 빚(틀림없이 배변기에 대한)이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여성은 드물게 아브젝시옹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나 성적인 삶의 엮어 낸다. 내부적으로는 타자 속에 정박하고 있을, 그렇지만 타자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는 아브젝시옹에 대한 욕망이나 삶을 말이다. 타자 속에 정착하고 있는 그녀에게 타자가, 즉 아브젝시옹이 찾아올 때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모자이크 속에서 글쓰기를 통해 남근의 보유자, 즉 남성과 동일시하여야 할 여정을 계속해 나간다.



어머니, 아버지 살해


프로이트는 타부와 토테미즘에 성스러움을 연결시킨다. 프로이트의 추론에서 논리의 비약은 인간의 도덕은 ‘두 종류의 타부와 토네미즘’으로 시작된다. 아버지 살해와 근친상간은 두 번째 터부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종교 현상이라고 단언함에도, 그 문제에 대한 해명은 없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을 성스러움에 대입시켜서 모친살해라는 것이 종교의 내면에서 성스러움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성스러움의 한면은 살해 행위와 속죄 행위가 그것이 투사하는 모든 종류의 기제들과 강박 관념적인 의식들과 더불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관계 자체이다. 다른 한 면은 안쪽의 좀 더 내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드러나지도 않는 곳으로, 고대적 이원론에서 본다면 융합이 가능할 듯하면서도 동시에 위협하는 존재인, 취약성과 불안정한 동일성의 불확실한 공간을 향해 선회하는 부분이다.


성스러움의 내면은 주체와 대상의 비분리를 향한다. 공포와 혐오에 있어서 방어와 사회화 과정이라는 한 면과 공포와 무관심의 과정이라는 반대면이 존재한다. 종교와 강박신경증 사이의 닮은 점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스러움의 방어적인 얼굴이다. 후퇴 없이 접근해야 할 신경증으로 향한느 공포증 같은 것이다.


성스러움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의식이나 담론들은 종교들 속에서 발견되는 더러움이나 그것들의 부산물들이다. 사회적이 것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터부 즉 죽음 또는 근친상간의 측면을 약호화 시킨다.



나르시시즘, 모성


원시 유목 사회에서 문명 사회로의 이동을 통해, 아들은 최초의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한 수 ‘동성애적 감정을 느끼거나 실천’으로 기울면서 누이나 어머니를 포기하게 된다. 초기 모권적인 법칙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부권적인 조직으로 대체된다.


제 2의 가능성은 최초의 나르시시즘이다. 부정 또는 공포에 찬 상태로, 적대감으로 부푼 채 아직 그 한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나르시시즘은 고통이 부드러움과 증오를 낳는 장소, 순간과 관련 있는 정확치 않은 경계선에 존재한다.


최초의 나르시시즘이 낳은 증오는 증오 자체가 제공하는 만족을 허용치 않을 뿐더러 타자를 향해 투사된다. 내부와 외부는 확연히 구별된다. 언어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주체는 타자와 분리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원시인들이 내부 지각들을 외부로 투사하면서 상을 발전시켰다. 원시인들이 투사를 통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싸우며 대립하고 있는 여러 경향들을 자율성을 지닌 개별적인 형태로 개인에게 외재화시키는 인격화와 유사하다.


나르시시즘은 자아의 존재는 고려하지만 외부 대상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총체와 상반되고 아직은 형성되지 않은 관계 사이의 이상야릇한 상호 관계를 앞에 두고 있다.



구조, 결론


다음과 같은 대상의 외부의 비구조가 자아의 동일성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 자아는 자기의 대상인 타자와 구별되지 않고서는 명확하게 자리잡을 수 없는 자아이다.


나르시시즘적인 지형학이 정신-신체 의학 속에서 어머니-아이라는 이분법에 의해서도, 어떤 타자에 의해서도 지태오딜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힘이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초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금지의 비참, 조르주 바타유


사회질서를 구성하는 필연성으로서의 금지의 나약성과 아브젝트의 생산성을 연결시킨 유일한 사람이다. 아브젝시옹을 배제의 강제적 행위를 충분히 담당할 수 없음과 연결짓는다. 아브젝시옹의 단계가 주체, 대상 관계에 있다는 것과 이 오래 된 개념이 사디즘보다는 차라리 항문 에로티시즘에 뿌리 박고 있다는 사실을 개념화한 최초의 이눔ㄹ이다.


어머니와 관계로 풀이되는 대상관계를 규정했다. 아브젝트에 대한 약호화는 모종의 사회 속에서 여성(모계나 인척 관계를 잇는 혈통, 동족혼, 종족 보존을 위한 생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과 동등할 정도의 상당한 중요성을 지적한다.


집합적 존재를 형성하는 상징적인 ‘배제 행위의 강제성’은, 아브젝트한 여성의 악마적인 능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듯 싶다. 정확히 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악마적인 권능은 타자와 같이 스스로 변별되기에 이르기보다 순서가 매겨지고 배제로 이루어진 모든 조직의 기초를 이루는 고유성을 위협한다. 금지의 나약성으로 인해, 또는 그것들이 서로 공유됨으로써 윤관을 드러내는 모계 질서를 밝혀 보기 전에, 아브젝트가 존잭케 하는 배제의 논리에 대한 인류학적 초안이다.


바타이유 강연보기



경계, 가장자리


더러움은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한계와 관련된 것이라거나, 가장 자리인 이 한계의 전략한 대상이라고 본다. 오염의 능력은 실수에 속한 것이 아니라 금지의 능력에 비례한다. 일종의 위험이라고 볼 수 있다.


오염이 가져오는 위험은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념들의 구조에 내재하는 힘이라고 본다. 주체가 겪는 목적론적 재난이다. 더러운 것에 대한 위험은 주체에게 있어 영원히 상징체계 자체, 그것이 구별들과 차이들의 세계인 한은 언제까지나 짊어져야 하는 위험을 표상한다.


말하는 존재가 경계의 내부 혹은 외부를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는 공시들로부터 위협은 오는 것이다. 그 경계들은 또한 음성적인 차이들을 결정짓고, 언어의 통사 구조를 분절하는 의미론적 차이를 결정짓는다.


구현된 은유로서의 상징 질서의 객관적인 취약함을 재현하는 것이 월경수나 분비물, 그와 비슷한 것들, 손톱에서부터 부패된 삶에 이르기까지 육체적 폐기물들인 이유이다. 그 해답은 오염이 최상의 위험이나 절대적인 재앙으 ㄹ품고 있는 사회 유형 속에서 찾아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


누군가에서 무시를 당했을 때, 내 속에 남아 있는 어떤 감정의 상태들이 있다. 이 상태들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표출되지 않고 내면의 자아를 갉아 먹기도 하고, 질서들의 무덤을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 나의 상태를 인정해주지 않거나, 나에게 했던 말들이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정신분석은 이렇게 말이나 기표, 상징으로 표현된 것들이 내 마음속에서 어떻게 무의식의 영역으로 자리잡는지를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의 도구는 ‘말’이다. 말을 통해서 우리는 꿈과 내면의 상태를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라캉이나 프로이트가 사용하는 상징계의 언어만이 아니라 베르그송이 이야기하는 언어 이전에 매개로 작용하는 이미지나 동영상들은 우리 안에 말로 상징화되지 않고 실재계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떤 형상을 만들고 언어의 집이 되거나 혹은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내 마음 속에 있는 어떤 문제나 상처 혹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떤 형상이나 지점에서 말보다는 다른 형태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순간 투사되어서 현상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대상에게도 그것을 표출해 버릴 수도 있다.



민네이션, 깨달음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아브젝시옹은 분리와 관련되어 있고 초기에 대상과 관계에 따라서 공포의 대상을 정한다. 공포의 문제는 사실 결핍으로부터 나온다.


욕구불만이나 결핍은 대부분 기호로 나타난다. 압축되어 있거나 무엇인가에 의해서 전치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부적응자들이나 비정상의 경우를 사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방법론으로서 ‘고고학’이나 ‘계보학’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르시시즘에서의 지형학은 자기 자신을 어떤 위치에 놓고 생각을 전개하고 연결하는가에 따라서 대상관계가 달라진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자신에 대한 성적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패했을 때 아브젝트를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과 떨어진 것들, 더러움이나 관계나 대상들과의 거리를 통해서 자신을 정체성을 확정한다.


우리가 크리스테바나 프로이트의 이론이나 상징들을 이해하는 때는 이미 성인이고, 대부분은 대상과의 관계가 고착된 후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히려 배출되는 것들이 이제는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서 정액을 배출하여 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거나 아이를 잉태하여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아브젝시옹하게 되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근친상간에 대한 반대와 금지는 개인에게서도 사회적으로도 공통점이 있다. 크리스테바는 메리더클러스나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아브젝시옹의 핵심은 근친상간 금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지점도 어머니와의 아브젝시옹을 통해서 다른 대상인 아버지를 만남으로서 적절한 대상들과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사회는 어떻게 사회적인 상징을 만들어내는가? 그것은 사회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아브젝트’의 과정을 걷히는 것일텐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가? 예를 들면, 혐오, 독재, 전체주의 같은 것들이 어떻게 상징화되는가?



민네이션, 고민


기독교에서 동성애는 왜 타부시되는가? 오늘의 논의에서 보면 ‘동성애’는 더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 더러운 것들을 아브젝트함으로써 성스러워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성스러움의 핵심은 무엇인가? 동성애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만들어지는 성스러움은 사실은 그것이 원래 하나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무엇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경계에 있고, 그 경계에서 넘어가는 것들 더러움으로 그 경계 안에 있는 것은 어느정도의 성스러움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스러움을 상징화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금지할 것들을 많이 사용한다. 어느정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들을 드러내지주는 못한다. 항상 ‘~하지 못함’에서 오는 정체성은 ‘~로부터의 금지함으로써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성스러움에서 나와서 더러움으로’로 나가는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거룩이라는 것이 사실은 종교의 핵심인다. 그 거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경험하거나 고민하거나 실천하지 못하게 될 때 오히려 반대로 ‘더러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더러움을 피하는 정체성으로 종교적인 상징과 행동의 근거를 만든다.


나는 그러나 인간의 원래 신체구조에서 ‘아브젝트’가 일어나는 곳에서 오히려 삽입의 기능이 강조되는 것에서 쾌락을 얻거나 하나됨을 얻게 되는 것에서 과연 그것이 진정한 정체성의 문제인가가 드러난다.


상징체계가 약화되면서 나오는 것이 더러움이고, 사회적으로 더러운 것들은 그것들이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체계가 허약한 사람들은 혐오나 비판이 심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도 라캉을 넘어 멜라니클라인과 프로이트, 바타유까지 다녀가는 길이다. 항상 풍부한 텍스트로 선물해주시는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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