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아카데미_조르주바타이유
20160121_철학아카데미
김인곤(정암학당)_향연과 에로티즘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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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에로스를 무엇으로 정의했는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바타유는 에로스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는 언제 가장 행복한가? 사랑에 빠졌을 때가 아닌가? 오늘은 철학적인 에로스'에 대해서 고민하고 아름다움과 성적인 욕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소크라테스, 에로스론
에로스란 에로스 자체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좋은 것)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에로스는 추하지도 않다.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중개자라고 하는 다이몬이다. 에로스는 포로스(풍요)와 페니아(곤궁)의 아들이다. 에로스는 애지자philosophos이다. 아름다운 것을 욕망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뜻이고, 자신이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 안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는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를 무지의 신이라고 부른다.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 사이에 있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의 하나이고,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을 욕망하므로 다이몬으로서의 에로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 밖에 없다.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을 욕망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함이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하니깐 말이다. 좋은 것과 행복에의 욕망이 가장 크고 모두를 현혹하는 에로스이다.
에로스, 기능
아름답다, 좋다'라는 말의 의미는 에로스가 인간에게서 하는 일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을 늘 소유하기 위해 하는 일은 '몸에 있어서 그리고 영혼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 안에서 출산하는 것이다' 출산에 의해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구인 에로스는 가장 강력한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에 동물들이 교합과 새끼 양육에 목숨을 거는 것을 보라. 모든 생명체의 생식과 성장 활동 일반이 출산활동(아름다운 것과 만나 아름다운 것을 낳는)이다. 에로스는 모든 동물을 매순간 살아있게 해주는 능동적인 힘이다.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지속시켜주는 것이다. 생명 자체, 생명의 빛이고 원리이며 지성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지혜가 된다.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신적인 것, 가사자인 생물 안에 불사자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화로운 것 안에서 다름다운 것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하여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격렬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그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큰 산고에서 풀어 줄 수 있기 때문이죠'_소크라테스에로스는 불사를 향한 욕망이 되기도 한다. 임신과 출산은 사멸하는 존재가 삶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방식이다.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영혼의 임신과 출산은 사리분결하는 지혜와 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경우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까지 걸며 명성을 추구하는 이유는 자신의 명성을 길이 남기려는 불사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임신한 상태에서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교합하고 출산하여 양육한다. 이들은 육신의 아이들보다 더 중요한 것을 공유하고 더 확고한 우애를 얻는다. 더 아름답고 더 불사적인 아디들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불사의 명성을 가져다주는 영혼의 자식들은 용기(아킬레스, 알키스테스), 불후의 명작(호메로스, 헤시오도스의 작품들), 입법(솔론, 뤼쿠르고스) , 교육에 의한 덕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 에로스
에로스는 불멸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향한 영혼의 상승을 추구한다. 정신적 출산을 도모하는 자들의 지적 성숙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적인 몸에서 몸 일반으로 넘어가고 행위에서는 기술적인 행위보다는 도덕적인 행위가 우위가 된다. 그리고 나서 법과제도로 발전하게 되고 개별적인 학문으로 발전하여 마지막에는 아름다움 자체인 철학으로 승화된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가 지혜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세상 전체를 질서 지운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에로스라고 한다면, 에로스를 통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이루고 다가가게 된다. 에로스를 통해서 인간은 불멸로 가게 되고, 질서로 가게 되고, 조화로 가게 되고 마침내 완성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특정한 외모의 옷차림과 색깔은 형태와 모양, 색깔의 조화가 되고 결국은 덕이 된다. 이러한 덕은 기능적인 덕보다는 품성적인 덕이 되고 사회적인 덕인 정의가 된다. 지식은 디아노이아보다는 누스의 개념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마지막에 지혜인 아름다운 자체에 대한 앎으로 발전하게 된다. 진은 존재 자체로서 진리를 말한다. 선은 좋음으로서 유용성을 말하고, 미는 아름다움으로서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아름다움의 지속성은 증가하며, 좋음의 포괄성은 커진다. 하급의 아름다움은 상급의 아름다움에 지배를 받는다.
에로스, 쾌락
모양, 색깔, 맛 등 감각적인 것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감각에 쾌락을 불러 일으킨다. 행위의 차원에서 쾌락을 불러 일으키는 행위들은 어떤 일을 아주 멋지게 이루어내는 행위들, 이른바 기술적인 행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기능적인 덕(아레테, 목공술, 요리술)이라고 할 수 있다. 품성의 덕은 도덕적인 덕인데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운 멋진 겨로가르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장하고 옷 잘 입고, 치장해서 외모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보다 몸 자체가 건강한 상태가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몸 전체가 건강해야 외모의 아름다움도 오래가고 유지가 된다. 몸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건강과 떨어져 있지 않다. 아름다운 몸을 만들려면 절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절제는 지성의 컨트롤에 몸과 마음이 길들여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걸 그리스어로 아레테라고 한다. 절제의 덕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분 아니라 타자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품성의 아레테의 바탕이 된다.
좋음, 에로스
좋음의 포괄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에로스에서 이타적인 에로스로 확장됨을 뜻한다. 나한테만 좋은 것에서 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으로, 나아가서 공동체와 인류, 자연 전체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선의 이데아에 이르렀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국가에서 철긴왕은 그런 앎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플라톤이 이해하는 에로스의 능동적 힘인 지성적인 요소를 통해서 생물학적인, 사회적인 현상에서 부터 사회와 공동체를 이루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자연과 우주의 이치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있다.몸의 건강은 정신의 건강과 뗄 수 없고, 개인의 정신 건강은 사회의 건강인 윤리, 도덕, 정의와 떼어서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아름다움의 상승은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 이게 플라톤이 이야기한 인간과 사회, 자연과 존재의 원리다. 우리 속에 에로스의 능동적 힘은 언제나 하늘을 향해 비상하고자 한다. 자신의 고향이 그곳이니깐 말이다.
향연, 에로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은 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몸과 마음을 어떻게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도와 같다. 동성애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에로스가 성적인 에로스를 포함하면서도 단순히 생물학적 생산관계(자식의 생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다 고차원적인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생산으로 나아갈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온전히 몸에서 나온다.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삶을 사는 몸도 플라톤 개념에서는 에로스라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생각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이다. 더욱이 그 사랑하는 사람과 육체적인 결합이 일어날 때 평안과 기쁨과 흥분을 느낀다.그리고 그 하나된 몸에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난다. 고대에서 에로스는 지혜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선미가 포함된 개념이었다. 진선미를 통해서 존재는 참된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방향성이 바로 에로스인 것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왜 라캉과 프로이트 그리고 킨제이의 속성까지 뒤엎으면서 에로티즘을 새롭게 정의했을까? 타나토노트라는 죽음과 에로스라는 성욕은 사실은 같다라고 말하는데, 과연 맞는 말일까? 다시 정리해보면, 에로스라는 것은 육체로 부터 나온다.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무엇인가에 대해서 능동적이 될 때 사람은 아름다워진다. 건강함이란 조화와 절제, 그리고 지혜가 있는 몸을 만들어 낸다. 어찌보면 플라톤은 에로스가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면서, 에로스자체가 원인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창조와 생산을 캐치한 것이 아닐까?그렇다면, 메를로 몽티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몸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 말이다. 몸 자체가 가기고 있는 시간의 통로라는 개념 말이다. 플로토닉 러브는 지혜'를 바탕으로 한 에로스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는 현실에 없기 때문에 현실을 살아가는 몸에서는 완벽한 조화, 하나, 연합이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데아를 깨달은 정신 혹은 지식의 하나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나오는 에로스는 신기하게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갑과 을의 관계가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탁월함과 지혜를 통해서 아름다운 것이 타자에게로 흘러간다. 한병철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에로스의 이야기는 온전히 공간적인 입장에서 유토피아가 아니라 절대 만날 수 없는 공간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타자는 절대로 인지될 수 없는 상태이고,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서 1_바타유의 철학
성 연구가로서 일반인들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아마 프로이트와 킨제이 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인간을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성본능과 죽음 본능이라는 두 개의 본능을 쫒아 사는 동물로 간주하여 그의 정신분석학을 정립했고 킨제이는 빈도수, 행위방식, 나이, 직업, 계급 등의 관찰로써 성의 통계학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저주의 작가 조르주 바타이유(Felix-Henry Bataille, 1897~1962)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뒤흔들고 킨제이의 통계학을 뒤엎었다. 바타이유는 정신분석학이 구체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이론으로 귀결된다고 비판하며,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는 피관찰자의 이야기에 의존하는 킨제이의 노력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바타이유는 민족학자 마르셀 모스, 정신분석학자 쟈크 라캉, 철학자 코제프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코제프 교수에게서 헤겔에 관한 강의를 듣는가 하면, 보리스 수바린느의 영향으로 트로츠키 그룹에 가담해 <사회비평> 의 주간을 맡아보기도 한 그는 다방면에 관심이 있었다. <종교의 이론> (1948), <선사시대 그림연구> (1955), <문학과 악> (1957), <에로티즘> (1957), <에로스의 눈물>(1961), <불가능> (1962) 등. 그의 저작을 훑어보면, 경제학, 종교사, 생물학, 민족학, 문학, 미술 등등의 다양한 분야가 그에게서는 끄트머리만 겨우 맞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를 이룸을 알 수 있다.
저주의 작가, 조르주 바타이유. 문학사가들은 그를 그렇게 분류한다. 바타이유는 인간사회의 두 가지 무질서의 인자를 든다. 죽음과 에로티즘이다.
그러나 둘은 하나이다. 바타이유에게는 에로티즘의 순간 그 자체도 죽음의 축소판, 그래서 작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절정의 순간 암컷과 수컷은 무한한 범람과 극도의 착란 속에서 몸부림치며, 황홀하게 의식을 잃고, 마침내 심연으로 빠져들지 않던가. 에로티즘과 죽음이 두 가지 중요한 금기와 위반의 주제가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바타이유는, 특히 <에로티즘 역사>에서, 문화와 문학에 스며있는 위반의 역사적 뿌리를 캐내는 일에 몰두한다. 결론은, 인간의 역사는 금기와 위반의 역사이며, 금기와 위반은 인간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금기를 폴리네시아에서는 타부(tabou)라고 부른다. 뒤르켐은 타부를 “초자연적인 원리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하나의 사물이나 그런 사물들의 한 범주와, 이러한 특성을 갖지 않거나 설령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정도가 아닌 다른 사물들 사이의 모든 접촉을 막음으로써 마술적인 전염이 초래되는 위험한 결과들을 예방하고자 하는 일련의 의식적 금지조항”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타부는 하나의 단언적 명령으로 제시된다. 그 어떤 도덕적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그것은 단지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타부 즉 금기가 된 순간 그것을 어긴 행위는 징벌의 공포와 더불어 이전에 볼 수 없던 신성한 종교적 후광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싸드를 인용하여 바타이유가 말하고 있듯이 “방종자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그 욕망을 다양하게 하려면 그것을 제한하는 방법 밖에 없다”. 금기의 대상이 신성한 공포와 더불어 지극한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신성하다. 바타이유에게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바타이유는 미적 기준에 관한 한 개인차는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비록 단순한 미적 기준에 불과하지만 바타이유는 신체를 “동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으로 꼽는다. 그리고 그 신체적 조건은 “원칙적으로 젊음을 전제한다”.
바타이유에 의하면 우리가 혐오하는 부분은 인간의 동물적인 부분이다. 신체기관들은 형태적으로 볼 때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지만 여자의 아름다움은 물질적 속성과 기능으로부터 멀게 느껴질 때, 즉 자연의 하중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돋보인다. 요컨대 “여자는 동물처럼 보이지 않을수록, 신체적, 생리적인 모습이 덜 드러날수록, 즉 현실에서 멀수록 더한 욕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정반대의 사실도 부인하기 힘들다. 만약 어떤 여자가 “동물성을 암시하거나 예고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더 이상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할”것이다. 동물성이 깃들인 부정적인 아름다움은 우리의 욕망을 일깨우며, 욕망이 극에 달하면 우리는 동물적인 부분을 열광적으로 탐닉하기에 이른다.
인류가 정한 금기의 대상은 대개 인간에 내재한 동물성으로서 성과 관련된다. 이를테면 알몸을 보이지 않기, 시체와의 접촉 금지 등은 모두 동물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환언하면 금기의 위반은 결국 동물성으로의 회귀인데, 하지만 이 동물성은 원래의 본능적 동물성이 아니라 이미 신성화한 동물성이다. 그러므로 바타이유에게 있어서 금기의 위반은 곧 신성에의 돌입이 되는 것이다.
학계에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이던 에로티즘은 1927년 폰 엔글리쉬 박사가 <에로티즘 문학사>를 저술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진지한 옷을 입는다. 후고 하인의 <독일의 흥미로운 에로틱 도서>(1929), 프랑스 작가 자크 고르빌의 <유럽의 에로티즘사>(1933)등 에로티즘 문학에 관한 사전과 참고서적들이 꾸준히 출간됐지만, 비교적 20세기 초 성담론을 자유롭게 한 이들은 클로소우스키, 장 쥬네 그리고 바타이유이다.
바타이유의 문학적 동기는 한 마디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즉 성금기의 위반으로서의 에로티즘이다. 많은 문제 중에서, 에로티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엉뚱한 것이다. <눈의 역사> 와 같은 추문의 역사서들, <파란 하늘>과 같은 소설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의 에로티즘은 그의 책들을,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에로틱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다른 책들과 구분시킨다. 반은 인간적이고, 반은 신적이고, 반은 지상적이고, 반은 천상적인 그의 에로티즘은, 따라서, 가장 은밀한, 또는 과감한 욕망이 현실적으로 드러날 때의 착란적 상상도 아니며, 그런가 하면 그의 에로티즘은 싸드의 방탕이야기도 아니다.
바타이유에게 있어서 에로티즘은 인간 정신의 정상을 차지하는 에로티즘이다. 그의 에로티즘은 고독, 침묵, 극단과의 대면, 즉 죽음과의 대면이다. 그래서 에로티즘은 폭발과 소진의 현주소이다. 분리된 개체가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는 소진.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의 제거, 용해, 폭발적 용해이다.
참고자료 2_진중권 미학오딧세이
머리가 잘린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는 ‘아세팔’을 연상시킨다. ‘아세팔’은 ‘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아케팔로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르주 바타유가 결성한 비밀결사의 이름이자, 이 단체에서 발행한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앙드레 마송이 만든 잡지의 표지에는 머리가 잘린 사내가 그려져 있다. 사내는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심장을 든 채 서 있다. 사내의 배는 해부된 시체처럼 내장을 드러내 보인다.
아세팔,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충동
마송의 그림은 다소 섬뜩한 방식으로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을 반복하고 있다.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은 완전한 도형(원과 정사각형) 안에 담긴 완벽한 인체비례로 르네상스의 인간적 이상을 표현한다. 방향은 뒤집혔지만 ‘아세팔’ 역시 바타유 그룹의 욕망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 신적 완성을 향해 상승하는 에로스의 충동을 대표한다면, ‘아세팔’은 죽어서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충동을 암시한다.
바타유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한 뒤에 앙드레 브르통과 갈등을 빚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의 ‘쾌락원리’와 연결시켰다. ‘문명에 억압된 성욕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라는 것이 브르통을 따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하지만 바타유에게 에로티즘의 정수는 초기 프로이트의 ‘쾌락원리’가 아니라 후기 프로이트의 ‘죽음의 충동’(Todestrieb)에 있었다.
물론 브르통 자신도 초현실주의적 취향- 가령 ‘섬뜩한 것’(uncanny)에 대한 선호- 의 바탕에 죽음의 충동이 깔려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정치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문명에 억압된 삶을 회복하는 데 있었기에, 그 운동이 고작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결론을 그로서는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브르통이 흠칫 놀라 멈춰 선 지점에서 바타유는 용감하게 ‘죽음의 충동’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필사적 차원의 에로티즘
<에로스의 눈물>에서 바타유는 “작은 죽음과 결정적 죽음의 동일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은 죽음’(petit mort), 즉 성적 결합의 정점에 숨이 멎는 듯한 그 경련을 바타유는 “궁극적 죽음의 맛보기”라 부른다. 오르가슴이란 결국 작은 죽음의 형태로 궁극적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 에로티즘은 이렇게 죽음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기에 바타유는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동물에게는 성적 활동은 있어도 에로티즘은 없다고 단언한다.
“동물, 심지어 관능이 극도로 고조되는 원숭이조차 에로티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에로티즘을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죽음의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극단적 차원의 에로티즘, 필사적 차원의 에로티즘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죽음의 암울한 전망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타유가 말하는 “극단적 차원의 에로티즘, 필사적 차원의 에로티즘”은 아마 사도-마조히즘을 가리킬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죽음의 충동과 연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이 죽음본능의 일부는 그것이 외부를 향해 이동할 때 사디즘에 이르게 된다. 이 이동을 따르지 않는 다른 일부는 유기체 내에 머무는데, 이 유기체 내에서 그 다른 일부는 리비도적으로 연결된다. (…) 우리는 여기서 본래적 의미의 마조히즘, 즉 성애적 마조히즘을 본다.”
<에로스의 눈물>은 중국의 백각형(百刻刑)에 관한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렝체’(凌遲)라 불리는 이 형벌은 마치 회를 뜨듯이 범죄자의 신체를 오랜 시간에 걸쳐 잘라내는 것으로, 주로 반역죄나 존속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대상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 형벌의 핵심은 ‘산을 천천히 오르다’라는 말뜻에 어울리게끔 처형의 시간을 되도록 길게 연장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과도한 고통으로 범죄자가 실신하지 않도록 종종 마약을 투여했다고 한다.
바타유가 소개하는 사진 속의 범죄자는 가슴살을 도려내 갈비뼈가 드러난 상태에서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마약의 효과일까? 그는 극단적 고통을 최고의 열락으로 체험하는 듯하다. ‘맛보기’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궁극적 죽음에 수반되는 오르가슴은 대체 어떤 것일까? “돌연 내 눈에 비치고 나를 고뇌 속에 가두었던 것, 하지만 동시에 고뇌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던 것은 극단적 공포와 신성한 황홀이라는 이 완전한 대립항들의 동일성이었다.”
잔혹한 처형은 혐오스럽다(repulsive). 하지만 구경꾼들은 그 잔혹함에 강박적으로 끌린다(compulsive). 이 은밀한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매력은 아마도 우리의 삶을 구조화하는 금령들을 위반하는 데서 나올 것이다. 한때 우리는 죽음, 즉 무기물이었다. 하지만 문명 속에서 그 사실은 망각되고 억압된다. 일상에서 잔혹한 짓을 하는 것이나 보는 것은 금지된다. 하지만 공개처형은 성스러운 국가의 이름으로 그 금지된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죽음 속에서 성(聖)과 성(性)이 하나로
바타유는 ‘성스럽다’(sacrè)는 말과 ‘공희’(sacrifice)라는 말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신성한! 애당초 이 낱말의 구성음절들은 고뇌로 가득 차 있고, 이 음절들에 짐지워진 무게는 공희에 있어 죽음의 무게 바로 그것이다.” 원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인간아이를 찢어 죽이거나, 혹은 새끼 염소를 물어뜯어 죽이는 잔혹극이 벌어지곤 했다. 인신공희나 그것을 대체한 희생양 제의의 끔찍한 폭력과 무서운 죽음 속에서 성(聖)과 성(性)은 하나가 된다.
이렇게 종교와 에로티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맞붙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현대문명의 개인화된 에로티즘은, 바로 그 개인적 특성 때문에 종교에 연결되는 요소를 더이상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혹시 미시마 유키오에게 결핍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 에로티즘의 성스러운 차원이 아니었을까? 그에게서 종교를 대신한 것은 국가. 순국(殉國)의 한갓된 형식 속에서 그는 “극단적 공포와 신성한 황홀”의 동일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바타유의 비밀결사 ‘아세팔’의 성원들은 기꺼이 제의적 희생양이 되는 데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희생양이 될지언정 그 누구도 집행자가 되려 하지는 않았다. 보상금까지 내걸었지만, 끝내 그들의 목숨을 끊어줄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고.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아세팔’은 사디스트가 빠진 마조히스트 집단, 아니면 이론과 실천의 차이,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명확히 의식하는 현실주의자 집단이었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방패회’(楯の) 는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 할복을 할 준비만이 아니라 기꺼이 동료의 머리를 자를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다. 성(죽음충동)과 폭력(할복과 참수)과 세속종교(국가주의 이념). 미시마의 작품은 그러잖아도 이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맴돈다. 삶에서도 그는 스스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부활을 위한 희생양(sacrifice)이 됨으로써 극단적 공포와 결합된 성스런(sacrè) 황홀을 맛보려 했다.
에로티즘의 성스러움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미시마야말로 바타유보다 더 바타유적인지도 모른다. 바타유의 아세팔은 마송의 그림이지만, 미시마의 아세팔은 그의 신체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