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읽는 프랑스 현대철학_자크 데리다
20170901_철학아카데미
처음읽는 프랑스 현대철학_김선하 교수
자크 데리다_해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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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프랑스 현대철학 마지막으로 데리다의 철학을 들여다 볼 것이다.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그라마톨로지로 돌아온다. 데리다의 철학은 포스트모던니즘 초기에 등장하는 해체철학의 기본 특징을 가지고 있다.기존에 강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모더니즘의 확고함을 깨는 해체철학에서 데리다는 의식의 의미를 먼저 건드린다.
후설 현상학, 기본 이념
우리 인식의 대상이 심리적 요인에 좌우되지 않고 여러 주관들에 의해서도 동일한 인식이 나올 수 있는 인식의 관념적 동일성을 보장해 졸 수 있는 선험성을 탐구하는 이념으로 현상학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후설이 주장했다. 진리를 객관화 시키고 또 타인들에게 엄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요청되는 통찰력의 언어화에 필요한 의식의 구성적 활동을 현상학이 회복시켜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후설, 선험성
모든 대상의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근원인 동시에 또한 나의 의식 내부에서도 나의 의식의 투명한 명증성이다. 즉 객관성에 대한 내적 의식의 확실성을 담보해주는 원리인 것이다. 선험철학은 모든 전제에서부터 독립되어야 하고 동시에 대상이 의식에 주어지는 것을 명중하게 인식해야 한다.
의식, 지향성
대상에로 향하는 의식의 부단한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모든 대상의 경험은 의식 현상의 일로 기술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상학의 본질은 의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 동일성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의 지향성의 행위인 노에시스noesis에서 성립한다. 관념적대상으로 노에마noema는 언제나 여기, 지금 의식에 현존하고 있다. 관념적 객관성을 근원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에로의 재귀에 의하여 도달될 수 있다.
후설 현상학, 역설
기하학의 진리를 최초로 발견한 자의 의식이 향유하고 있었던 관념적 객관성의 존재는 언어 문자에 담겨 전달되어야 한다.그러나 그 존재가 언어문자와 본질적으로 다다르는데 있다. 문자에 대한 의존은 진리의 관념의 보편타당한 반복에 필수적이지만 의미구성의 그 현재적 순간이 거기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대를 이어 내려옴으로써 애초의 근원적 진리구성의 생생한 현장은 희미해져 가고 단지 문자에 의한 연상법칙이 지배하게 된다. 후설은 언어문자에 대한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진리구성의 근원성에 대한 애정 때문에 진리를 구성하는 의식활동의 현재성이라는 기원을 더 생각하게 된다. 즉 현상학적 진리는 의식활동과 거리가 먼 문자기호에 의지하기보다는 대상(노에마)의 직관적 주어짐과 의식(노에시스)의 관념적 의미 부여가 완전 합치하는 그 순간을 귀하게 여겼다. 의미의 논리적이고 표현적인 순수성이나 대상의 객관성과 현재의 현존을 기술한다는 것은 다 동일한 의식 내부의 작용이다. 의미의 순수성은 표현의 순수성과 직결된다. 말의 표현을 떠나서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의미, 본질
의미란 언제나 변치 않는 본la forme이요,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런 본질이 곧 객관적 관념성인데, 그 관념성은 어떤 가변적인 감각적 존재나 경험적 표지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후설의 현상학은 플라톤 철학의 현재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는 하나의 불변적 관념성과 본으로서 언제나 의식의 현재성에 현존해 있어야 한다. 의식에 현존하지 않는 의미는 살아 있는 의미일 수가 없다. 후설 현상학의 이념은 선험적 관념성, 객관적 관념성, 본질과 본'현상', 의미의 순수성, 시간적 현재성, 의식의 현존성 등등이 결국 등가적인 가치를 갖고 현상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현상학적 진리는 의식의 진리고 의식은 존재론적 경험의 바탕이고, 또 동시에 그 의식은 현존의 의미를 현재적 시점에서 표현한다.
자아학, 해체
후설 현상학의 이념이 비록 의식에 자각된 진리지만 심리적 성향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 객관성을 지닌 그런 관념적 선험적 진리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조준된 진리는 의식의 동화작용, 의식의 동일성 속에 보편적 진리를 구하려고 하는 자아학l'egologie와 다를 바가 없다. 자아학은 그 낱말의 모든 의미에서 타자를 언제나 중성화시켰왔기 때문이다. 같은 것의 높이 속에 있는 한패거리'끼리 주고 받는 동일성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성의 이념이면서 현종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설의 현존의 현재가 모든 자아학적 의미의 근원이다. 나의 살아있는 현재가 곧 자기 속에 있는 타자의 시간을 구성하는 원리이며, 그런 현재가 또한 자아와 다른 기원들(타아)의 경험을 이해하는 근원이 된다.
현존, 시간
눈깜짝임의 현재적 순간이 현전, 하나의 근원적 직관의 시간이다. 후설은 표현의 내면성 속에 어떤 지식적, 표지적 기호의 도입을 사양하게 된다. 왜냐하면 표지와 같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지시기능에 의식이 의존하게 되면, 그것은 시간적 현재의 불가분해적인 통일이나 의식의 명증저 ㄱ자기 현존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의 표현이 직접 목소리를 통하여 의식에 공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외재적 매개가 없이 내면의 의미가 표현 된다. 목소리는 그런 의미의 직접적 표현과 같다. 눈깜짝하는 현재적 순간에 관념의 의미와 그것의 목소리에 의한 표현이 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따는 것을 중시한다. 현상학적 목소리의 내면성은 곧 의미의 표현성이다. 눈깜짝할 순간은 모든 발생론적 의식이 의지해야 할 시간이고, 동시에 그 현재는 의식의 줴적 지각일 뿐 아니라, 선험적 관념의 객관성이 합법적인 보편성을 누구에게나 현존시키게 하는 시점이다.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현재의 의식이 동시에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객관성의 현존과 만날 수 있다. 시간적 현재가 곧 진리의 보편적 구조가 된다.
구조, 발생의 부조화
현상학의 객관적 진리는 구조적으로 언제나 모든 이의 의식에 현재로서 존재하는 진리인 현존이어야 한다. 발생론적으로 그 진리는 나의의식의 내면적 의미로서 현재적 목소리의 표현으로 언어화되어 있어야 한다. 진리는 현존적 존재와 구조적으로 존리적으로 맞닿아야 한다.진리는 시간적 현재의 역사와 발생론적으로 맞닿아야 한다.논리적으로 존재론적 진리만이 현존적이요, 시간적(경험적)으로 현재적 진리만이 현존적이다.
-----여기까지가 후설의 현상학, 의식의 지향성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부터는 데리다가 후설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후설 현상학, 근거의 부실성 진단
지금이라는 어떤 순간도 순수한 현재적 시점으로서 분리될 수 없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가 중심이 되어서 그 현재가 형성해 놓은 그림자나 파생의 언저리에 불과하다. 진리의 보편성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보편성은 여기와 저기에 따라 그리고 장소의 우연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성과 세계성, 상황성을 지녀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 보편성은 관념적 객관성일 수 밖에 없다.
목소리, 현상성
목소리는 말하는 주체가 그의 의식의 가장 가까운 근접성에서 자기 자신을 듣는 현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의 기의가 듣는 이의 관념에서 구성된다. 목소리라는 기표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감각적 물체와 그 외면성의 소멸은 의식에 대하여 기의의 직접적 현존의 형식 자체이다. 자기애정적 내면성의 독백이라고 할 수 있다. "생생한 현재는 자기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에서부터, 잡아 당기는 흔적의 가능성에서부터 솟는다. 흔적은 자기 내면적인 삶이나 생명만이 있는 현재의 단순성으로서는 생각될 수도 없다. 생생한 현재의 자기란 근원적으로 하나의 흔적이다."
현존, 흔적
현존la presence이 흔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현존을 가능하게 해 준다. 흔적이라는 것은 비현재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에 삼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의 내면성이라는 것이 이미 바깥세계의 것과 직물짜기를 하고 있다. 안이 바깥과 하나의 놀이터가 되고 있는 그런 텍스트의 짜깁기를 가능케 해주는 원리이다. 흔적의 논리는 현존의 논리를 대신한다. 현존이라는 것은 하나의 허구요, 서양 형이상학이 주입시킨 존재 신학적onto-theologique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짝을 지은 세계관이다.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은 허구요, 신화요, 존재신학의 부산물일 뿐이다. 차이가 먼저 성립하였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식과 자연과의 차이를 먼저 전제하지 않고, 자아의 동일성을 논의할 수도 없고 또 그런 동일성도 어제의 자아와 오늘의 자아의 차이에서 생기는 흔적의 잡아당김에서 비로소 가능할 뿐이다. 보충대리의 논리는 현재과 부재, 의식과 비의식, 말과 문자, 생명과 죽음을 나눈다.
플라톤, 기억
여기서 플라톤의 진리의 개념을 보자. 플라톤에게 진리는 aletheia이다. anamesis는 상기라는 뜻으로 플라톤에 따르면 기억하기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사실 말을 기억하는 것이고, 말을 기억한다는 것은 목소리를 기억한다는 것이다.그 목소리는 현장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서 상기가 아닌 기억의 기억'을 하는 회상'phypomnesis의 방법론을 쓰는 사람들을 소피스트라고 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은 말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문자에 의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의자가 있는데, 의자를 기억하는 것은 상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의자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다른 방식의 문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은 예술을 매우 싫어했다.
민네이션, 생각
왜 데리다는 현상학, 특히 후설에서부터 시작했을까?해체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시점이 자아학이라고 부르는 현상학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라는 시간에 존재하는 현장성을 해체주의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다시 해석할까? 후설과 하이데거가 가지고 있는 타자와 동일자의 논리의 핵심은 구분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것을 다르게 생각했다. 이분법이 아니라 상보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타자와 동일자는 보충대리의 존재이다. 한 쪽이 없으면, 다른 쪽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예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로고스, 파르마콘
현상학과 구조주의을 볼 수 있다. 사유의 원형l'arche-type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이며 로고스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과 로고스를 살펴보자.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와 같은 자가애정l'auto-affection의 말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철학은 사실 서구지성사의 이분법을 그대로 인류학에 적용시킨 논리적 인식론자로서의 한면과 또 이분법을 근원에서 설명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로고스를 찾으려는 현존적 형이상학자이다. 말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 소리중심주의는 로고스logos와 소리phone 사이에는 본질적인 일체성이 형성되고 이것이 로고스는 곧 말이라는 뜻이다. "현상학적 목소리는 세계의 부재 속에서도 말하며 자기에 현존하고 스스로 듣기를 계속하는 저인적 삶이다."의식과 목소리와 말은 서로 교환가능한 개념들이고 동시에 그 개념들은 현존la presence와도 구별될 수 없다. 의식으로서 현존의 특권은 더할 나위 없이 목소리에 의해서만 설정될 수 있다. 말중심주의는 고대 희랍의 로고스철학과 기독교의 로고스신학이 합쳐져서 형성되었다. 서구의 표음문자와 그것을 사용한 백인의 종족중심주의가 가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목소리와 영혼 사이에 하나의 투명성이 존재한다. 목소리와 의미와도 직결, 의식과 의미와 영혼은 현존의 형이상학에서는 동의어이다. 입으로 의식과 생각과 의미를 말하고 귀는 그 의미를 영혼과 의식이 표현하는 관념성으로 받아 모신다.
선험적 기의, 주체적 의미
주체는 입으로 말하여진 의미와 귀로 받아 모시는 관념성 사이에서 자기 충당, 자기 발전으로 하고, 그런 자가 충당과 자가발전을 서양철학사는 존재의 현존이나 의미의 관념성이나 주체성이라고 불러왔다. 근원적이며 순수하고 원천적인 것은 기의의 의미와 그 의미의 표현이다. 그 기의는 영혼의 표현이고 의식의 관념성이기에 선험적이다. 선험적 기의는 시간성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말=소리=의식=영혼'이 시간성의 차원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시간의 동질적 연속과 연쇄 과정에서 신의 말씀이든, 아니면 인간의 선험적인 의미부여의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관념성이든, 그것들이 언제나 영혼과 의식의 내면세계에 현존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말의 현존에 가장 일치되는 시간은 현재이다. 현재의 순간에 나의 의식이 느끼는 의미의 현존이 바로 진리의 명증성 자체이다. "직접성은 의식의 신화이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의식, 자기 현존으로서의 의식은 차연의 억압으로서 체험되는 자가애정의 한 현상이다.""말 중심주의는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의 관념론이다. 말중심주의는 관념론의 자궁이다. 관념론은 말중심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표상이고, 가장 지배적인 힘이다."
말중심주의, 소리중심주의
말중심주의가 하나의 존재신학의 철학적 이념이라면, 소리중심주의는 그런 철학적 이념의 언어학적 변용이다. 민족학적으로 치환되면 종족중심주의가 된다. 말중심주의의 이념은 정신의학적으로는 남근중심주의la phallocentrisme, 사회학적으로는 남자중심주의levirilisme와 아버지중심주의le paternalisme를 필연적으로 낳는다 "말 중심주의la logophonocentrisme와 남근중심주의 사이에 게재해 있는 음모가 있다. 진리의 목소리는 언제나 법과 신과 아버지의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로고스의 본질적인 남성다움이 거기에 있다. 현존을 파열한 형식으로서의 문자는 여성처럼 언제나 비하되어 왔고 마지막 서열에서 삼켜졌다." 자기 현존, 의식, 내면성, 따라서 안팎의 구별과 바깥에 대한 안의 우위를 내포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역사는 '스스로 듣기 원함의 절대성le vouloir sentendre-parier absolu이 된다.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는 원함'을 절대화하는 자기 중심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통일은 언제나 자아중심적, 주체정향적 통일일 수 밖에 없고 모든 지식과 인식도 자기 기준에 따른 유용성의 평가일 수 밖에 없다. 사랑도 자가애정의 탈을 쓴 타자의 자기화 요구와 다를 바가 없다. 고백된 사랑은 고백되지 않는 자기 사랑으로 변한다. 사랑은 공격성과 같이 나르시스적이다. 자기애정l'auto-affection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 말중심주의의 문화는 은연 중에 나르시스적 태도를 권장한다. 그런 나르시스적 태도는 문자의 세계인 상호의존과 상실과 죽음의 세계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언제나 자가결정, 자기충당의 환상에 살면서 마침내 '자아의 신격화'에 이르게 된다. 말중심주의=소리중심주의=종족중심주의=남근중심주의=남성중심주의=아버지중심주의'는 나르시즘적 병리현상과 만나게 된다. 자가애정의 폐쇄성과 배타성, 자기확신에 찬 모더니즘이다.
경제적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가 자기 것에 대한 애정 위에 축을 박은 제도라면 사회주의는 자기 것에 대한 저주와 우리 것에 대한 축복 위에 선 제도(비-자기 것의 강조, 자기 것의 부정은 자가애정의 전도된 형식)이다. "자기 것으로 삼기l'appropriete와 재산la propriete 그리고 소유la possession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 나는 나에게 속하는 것이다. 개성은 개인의 근원적 고유성 즉 소유권la propriete이다. 교유성 즉 소유권은 인간이 그의 개인에서나 재산에서 갖고 있는 그런 것을 다 뜻한다"사유재산의 심리적 근거는 각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개인에 있어서 하나의 고유성la propriete, 즉 소유권을 갖고 있다. 개성의 고유성이 소유주로 존재함은 한 개인으로 존재함이고, 한 개인으로 존재함은 소유주로 존재하는 것을 이해케 해 준다. 말중심주의는 자기 확신과 함께 개성의 고유성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하고 드디어 그 고유성이 소유권의 소유주로서의 법적 취득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소유권과 소유주가 아닌 개인은 고유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자본주의의 존재까지 이어진다.
코라, 제 3의 장르
플라톤은 '제 3의 장르'인 그곳을 '어머니'에 비유했다. 아버지는 이데아로서 아들의 말을 진리이게 하는 모범이 되지만, 이 빈 공간은 어떤 가르침도 지시도 모범도 없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중요하게 여기는 코라khora이다. 이것을 데리다는 chora라고 한다. 데리다는 '코라'는 로고스를 아들로 둔 '이데아'나 눈부시도록 빛나는 '정신의 태양'처럼 장엄하게 '자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것'이 없기때문에 '코라'는 선험적인 관념성에 닮은 그런 소리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코라'는 의미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다. '어머니'요 '빈공간'으로서 코라는 그 안에좋다 나쁘다의 구분이 무의미하고 어떤 대립도 거기에서 무효화된다. '코라'는 '파르마콘'의 양가성을 포괄하고 있지만, 그 양가성을 초탈하고 있다.
은유, '어머니'
인간 사고의 대립인 '선험적/경험적', '관념적/물질적', '실재적/상상적', '이성적/감성적'의 이분법을 무효화시키는 하나의 '없는 기저'에 속하면서 그런 이분법이 대립이 아니고 차연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저가 없는 기저le fonds sans fonds'는 이데아의 아버지와 던혀 다른 코라의 어머니요 로고스의 말씀과 다른 파르마콘의 문자이다.
파르마콘, 데리다 철학
파르마콘은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 데리다는 변별화 일반을 자기 안에서 생기게 하고, 본질과 타자와의 대립을 자기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이전의 중요le milieu anterieur이다. 이전의 중용은 칸트의 선험적 상상력l'imagination transcendentale는 '감성적/지성적', '수동적/능동적'인 두 요소들을 다 갖고 있고 그러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두 면을 '제 3의 장르'에서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르마콘'은 하나의 이전의 중요응로서 선/악, 감성/이성, 영혼/육체, 가시성/비가시성 등의 모든 차이들의 변별보다 더 나이가 먹었다. 파르마콘 안에 예의 상반된 두 가지가 날실과 씨실처럼 텍스트의 직물짜기를 형성하면서 서로 얽혀가기에 하나의 '상호얽힘'이다. 파르마콘은 그 자체가 이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파르마콘의 존리는 양가성ambivalence을 다 인정한다. 양자공존 즉 동거의 논리la logique de la cohabitation이다. 로고스가 택일이나 선택의 논리라면, 파르마콘은 동거의 논리이며 이중부정의 논리이다. '코라'는 어머니로서 모든 선악과 사망과 약독을 초탈하는 초탈의 논리이다.
민네이션, 생각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철학의 말중심주의는 결국 진리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민네이션, 나르시시의 꿈
김상복 교수의 '나르시시의 꿈'에서는 서양철학의 자기주체성을 호메로스의 시에서 부터 찾고 있다. 서양은 호메로스 이후부터 계속 자의식의 과잉의 측면에서 자아의 얼굴을 보면서 학문을 하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상대방이 없어도 자신은 존재할 수 있지만,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서 상대가 착취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기주체성 혹은 자기의존성은 서양철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아주체성을 침범당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자아주체성을 만족시키는 제도와 법, 국가를 만들었고 그러한 도전은 지금도 성공하고 있다. 김상봉 교수가 이야기는 하는 동양적인 차원에서의 공동체성은 '상호주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주체성이 만들어내는 동일성의 회귀는 서양철학과 서양문명의 핵심이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에는 이러한 핵심을 다른 모든 나라에 전달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