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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18. 2018

자연과 지성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_3장 생명의 의미

20181116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_류종열

제 3장 생명의 의미_자연의 질서와 지성의 형식


창조적 진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들어가기


자아, 세계, 신의 관점은 심리학, 우주 발생론cosmogonie, 형이상학이란 용어로 바뀌어 있다. 세 가지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의 세 가지 판단 오류와 같다. 심리학, 우주론, 형이상학의 공통주제는 본질적인 것에서 지성이 부여됨으로서 시작한다.


지성과 본성은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취한다.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본성을 약하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지성을 완전하고 강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것의 한계를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하고 말한다. 그것은 지성을 생각하는 지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지성이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연은 나름의 질서가 있고 동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창조적 진화를 이루어 간다


베르그송 철학, 방법


인간의 행위의 중요한 선이 물질 세계 속에서 우리가 분간한 것과 같은 일반 방향을 구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방향을 제시하는 순간부터, 지성을 부여한다.


우주론에 있어서 스펜서Spencer의 우주 발생론cosmogonie에서도 물질을 단번에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지작은 사물자체라기보다 사물에 관한 우리의 가능한 행동의 도식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우리가 보기에 물질을 관통하여 그려진 선들은 우리가 순환한다고 말했던 선들과 동일한 것이다.


본능이 지시를 따르는 것은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성질을 구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대로 지성은 가장 천박한 형식이라도 물질에 물질을 작용하게 한다. 정신은 지성으로 규정되고 다시 말하면 구별된 개념으로 규정되는 운동이 마찬가지로 물질을 서로 서로 외재화하는 대상들을 쪼개는 방식으로 이끈다. 의식이 지성화하면 할수록 물질은 점점 더 공간화한다. 의식이 지성화하면 할수록 물질은 점점 더 공간화한다.


형이상학도 마찬가지로 작업한다. 사람들은 지성을 압박하여 지성의 정수(원리)에로 데리고 갔다가, 빈 것으로 있을 정도로 매우 단순한 원리 속에서 다시 지성을 끌어 낸다. 그래서 지성의 기원을 탐구하지 못한다.


피히테는 사유를 집중화의 상태로 간주하고, 그리고 그 사유를 실재에서 확장한다. 스펜서의 외적 실재로부터 출발하여 그 실재를 지성에서 만나게 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는 직접적 시각에 의해 그 자체적으로 파악하거나 거울 속에서처럼 자연 속에서 반사에 의해 깨닫게 된다.


자연의 제일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는 어떤 철학자는 무기물에서 출발하여 유기물로 어떤 철학자는 생명을 먼저 제시하고 무기물로 하향방식을 설명한다. 첫째 가설은 복잡성의 정도의 차이가 기계론이며, 두번째 가설에서는 강도의 정도 차이가 소박한 목적론인데, 말하자면 자연 속에서의 정도의 차이만 있다.


철학이 행해야 하는 것은 전체에 대한 하나의 통일적 시각을 취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에 있다. 우리가 요구하는 철학은 좀 더 겸손하고 또한 스스로 개선하고 보완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이다. 우리는 베르그송이며 개선 보완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의 발전 생성에 대한 철학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지성은 플라톤이 동귤의 비유에서 제시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활동하는 것,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 실재와 접촉에 들어가는 것, 심지어 실재를 살아가는 것, 이것들을 완성할 작업에 관심을 갖는 다는 점에서 인간 지성의 기능이 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생명의 대양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것을 열망한다.


지성은 부분으로 위치를 정하고 고착되고 응고되는데 비하여 철학은 전체 속에 새로이 녹아들기 위한 노력이다. 지성은 자신의 원리를 다시 흡수되면서, 자신의 고유한 발생을 거슬러서 다시 산다. 이런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의 방향으로 시도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점진적일 것이다.


로고스의 측면만이 아니라 인간은 감정과 윤리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다.


선결문제, 오류


순환논증의 두 가지 오류 중에서 첫 번째 지성에 의한 지성의 파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방법은 정신의 가장 뿌리깊은 습관들을 자신의 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악순환의 관념을 암시한다. 악 순환을 일반인은 악순환인 줄 모른다.


우리를 주어진 것의 순환 속에 가두어 놓는 일이야말로 추론의 본성에 속한다. 그러나 행동이 이 순환을 깨뜨린다. 추론의 본성은 한계내의 함수이기에 순환이다. 이미 디오게네스가 거북이를 데려오라고 한 것은 행동이 지성의 한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서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본증이자 직관이다. 우리는 지성이 더 광대한 실재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실재와 지성은 사실 단절이 없다. 단절된 적도 없다. 또한 지성과 본능은 서로 보충관계이지 서로 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순환논증의 오류는 피상적이다. 지성을 지성 밖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는 것은 지성의 순환이다. 밀고 나가면 다른 인식인 본능과 직관과 합류해야 할 것이다.


금요일저녁 항상 같은 시간 배르그송을 만난다


과학, 철학


선결문제의 오류의 실재를 알아보자. 학문의 제일성 속에서 선천적 능력인 지성의 가능성을 살펴보자. 물리학과 화학은 무기물질을 다루며, 생물학과 심리학은 생명의 표출을 다룬다. 그 때 철학자의 임무는 분명히 제한된다. 자연과 인간에서 일어나는 일들 사이의 표면상의 유비에 속지 않도록 하자.


원리들은 문제들을 철학에 맡기는 것으로 시작한 사람들은 철학과 과학을 위에 놓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점점 철학으로 하여금 취소할 수 없는 선고를 기껏해야 더 정확한 용어로 작성하는 서기국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지성의 판결은 이미 만들어진 판결에 문장으로 다듬는 역할이다. 분석철학이 교통정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과학이 이미 교통정리를 했다. 도로의 넓이를 규정하자고?


선천적으로 단위인 학문의 제일성을 제시함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실재적 순환논증의 오류이다. 먼저 선천적 통일성을 먼저 놓고 시작하면, 모든 경험을 과학에, 모든 실재적인 것을 순수오성에 맡김으로서,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통일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과학이 무기물질에 대해 가진 것과 같은 영향력을 생명체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우발일 뿐, 사람들이 말하듯이 운수 똔느 협약일 뿐이다. 형이상학입문에서 외부로부터 실재 즉 절대의 도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문제, 지성


지성의 가장 큰 문제는 지성을 지성으로 다룰 수 있다는 오류이고, 모든 것들이 하나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이 바로 선전제 오류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지성이 만들어지는 상태와 방법을 지성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지성이란 이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순환논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지성이 모든 것을 담지 못하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시작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메타인지’는 사실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을 파악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이 마치 전체인 것처럼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선전제 미해결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결국은 지성은 독단과 상층부의 전체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서 항상 전체적인 메타인지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민네이션, 생각


자연과 생명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구성을 고민해보자. 자연에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면 자연의 어떤 부분을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가? 이렇게 볼 때 물질이 점점 기억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이 되어 간다고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은 계속해서 활동함으로써 경험을 만들고 그것들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인간사회에서는 옆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함으로 그리고 자신스스로 느끼는 것보다 옆 사람이 생명임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의식함으로써 연결된다.


베르그송은 인간의 내면이 상상계보다 훨씬 많은 의미와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상상이 더 풍부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베르그송은 우리 내면의 수 많은 세상이 물질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한 순간 실재계에서 상징계로 붙잡힌다고 말한다.


베르그송은 지식의 발달을 연구하는 게 아니라 지성의 발달단계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지성만이 아니라 직관을 만들어내는 지성이 있는 것이다. 논리적인 지성으로는 생물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크프르트 학파가 이야기하는 도구적 이성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성과 겹치는 부분도 있으나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부정의 변증법은 사실 길을 잘못타고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처음으로 내려와서 옳은 방법으로 상승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렇게 상승하는 것이 전체를 다 담을 수 없고 일반적으로 상승하게 되면 다른 것들까지 다 포섭하는 듯한 느낌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류가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이야기하는 것은 생명은 항상 창조적으로 진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이성과 지성의 작용으로는 풍부한 생명의 감각과 창조성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 물질이 기억으로 나아가는 작업들을 밟아보자고 말하고 있다.


해인사’란 뜻에서 해가 도장을 찍을 위에서 아래로 찍는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찍는 다는 느낌이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핵심이다.


베르그송에게서 에땅뒤는 의식과 본성이 퍼져나가는 현상학적 장이고, 엑스땅뒤는 공간 안에서 논리적이고 규정하고 측정할 수 있는 물질성이다. 엑스땅뒤는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결합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지성, 물질성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의 삶에서 우리가 느끼는 가장 내면적인 점을 탐구해보자. 우리는 순수 지속에 있게 된다. 감정이 깊고 또한 그 일치가 완전하면 할수록 우리가 다시 위치한 생명은 지성성을 넘어서면서 지성성을 다시 흡수한다.


실재적 지속의 의식에서 볼 때 상태는 말하자면 지성성의 잠세태로en puissance 포함된다. 그러나 그 상태는 지성성을 넘쳐나며 불가분적이고 새롭기 때문에 그것과 공통분모로 측정할 수 없다.incommensurable. 만일 이완이 완전하다면 더 이상 기억도 의지도 없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워 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절대적 수동성으로 떨어지는ㅇ리도 결과 없을 것이다.


이완의 한계에서 더 이상의 실재적 지속은 없고, 무한정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성만 있다. 거기에 물질이 현존하는가? 아마도 전혀 그렇지 않다. 미친 생성, 플라노네네 아이티아가 물질은 아니다. 진동만 있다고 해야하나? 그것이 어떤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물질 도는 물체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신성의 근원에,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성과 함께 하는 물질성의 근원에는 상반된 두 방향의 과정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 인격성은 한 점에서 끊임없이 미래를 잠식하면서 미래 속에 개입하는 한첨단에서 집중화된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생명과 자유로운 행동이 있다.


정시은 정신이 돌아다니는 공간의 함축적 표상을 자기 정신의 일어날 수도 있는 이완, 즉 가능한 확장과 동일한 감정 속에서 가지고 있었다. 정신은 공간을 사물 속에서 재발견하지만, 만일 상상력이 풍부하여 정신의 자연적 운동을 역 방향으로 극한까지 밀고가보면, 사물이 엇ㅂ이도 공간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칸트, 한계


칸트가 생각지 못한 점은 우선은 그가 정신이 지성을 넘어선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근본적으로 같은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가 선험적으로 시간을 공간과 동일한 방향 위에 놓으면서 지속에 절대적 존재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 사상에서 지속은 존재의 근원이자 절대 존재이다.


이 해결책은 지성이 정신의 특수한 한 가지 기능으로 본질적으로 무기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성과 물질은 서로 점진적으로 적응함으로서 하난의 공동 형식에 도달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적응은 아주 자연스럽게 실행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지성성과 사물의 물질성을 동시에 창조하는 것은 동일하 ㄴ운동의 동일한 반전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다른 특수한 한 가지 기능은 생명의 직관적 인식이다. 결국 물질의 하강과 지성의 물질 적용은 같은 길이다. 의식의 상승은 본능과 공감의 인식으로 생명의 길이며, 영혼의 상승은 핵으로 집중이 아니라 확장이기 때문이다.




민네이션, 깨달음


지성의 지성의 지성까지 가면 근본적으로는 지성은 순환논증에 빠진다. 의사소통합리성의 기초해서 ‘담론의 공론장’만으로는 순환논법에 빠질 수가 있다. 의견만 모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길을 가야 한다.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미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트주의의 확장판은 결국 의사소통합리성이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무엇이라고 물어보는 것은 어떤 것인가? 물론 당연히 지성에서 물어보는 것이지만, 그 상징을 이용해서 기억이 떠오르고 결국 그 기억은 물질들의 연결성의 합이다. 팝업으로 떠오르는 이미와 감정의 기억이 인간이 무엇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새로운 경험들을 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야 한다. 선전제 오류를 인정한다면 누군가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들을 깨부수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운 의식과 관계가 생겨난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경험들을 해야 한다.


다중지능이라는 것을 보면 ‘지성’이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성적인 방법으로만 인생과 미래를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성장하는 역사적 경로에서 만들어진 지성만능주의의 결과가 아닐까? 그럼 완전히 다른 것들을 보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했을 것이다.


상승작용으로 이데아를 가장 큰 목적으로 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헤겔의 관점이다.여기서는 결국 해탈이라는 과정에서 죽음까지 메타인지를 뻗혀 나간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창조에서 시작해서 우발적으로 현실로 진화하기 때문에 미래 개념이 다르다. 현실에 흩뿌려져서 물질이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에로스가 주는 경험, 접촉과 경험이 주는 것들은 아예 다른 방식으로 논리와 지성의 작용이 있다. 세계관이 바뀌는 것은 ‘경험과 롤모델’이라면 이것은 어떻게 보면 프랑스 생철학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민네이션, 정치


생각이 만들어내는 생각은 위험하다. 정치는 사실 현실의 문제와 만나서 새로운 관점과 문제의 대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타락하면 현실의 문제를 도구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지성의 작용만 발휘하여서 정책이나, 법 혹은 계산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정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은 현상학적 장이면서 두가지가 모두 섞여 있는 장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이 두가지를 모두 볼 수 있어야 하고, 지성적으로만 잡혀지는 ‘데이터’에만 의존하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투표에 목메달면 안된다.


실재가 이루어지는 장에서는 생각과 사상 그리고 욕망과 경험과 이미지가 함께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어떻게 보면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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