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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11. 2018

교리와 삶

단번에.드림_20181111향린교회설교에서

20181110_향린교회

예배 말씀_한번에 드림



들어가기


최근 동대문에서 화재사건이 있었다.고시원에서 불이 났는데 가장 작은 방에서 자던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난때문에 인간의 조건이 박탈되는 시대를 살아야할까요?


우리가 역사를 대면할 때 ‘인간에 대해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단상을 ‘전태일열사’의 죽음으로 대면합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답해 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초월적이지만 논리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논리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의 대상은 신의 목적을 오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 희생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인가? 아니면 교회의 건물인가? 교인들의 사회적 지휘인가?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이고, 그의 인간적인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위로를 얻고, 그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이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그러한 희생이 지금 여기 실현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삶을 통해서이다. 실재의 구성은 인간의 희생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에 의해서 신의 현실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실제로 행함으로 나타나는 희생에서 나온다.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생명을, 시간을 희생으로 사람들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진정한 길을 보여주지 못하고 밖에 버리운 싱거운 소금이 될 것이다.



룻, 나오미


나오미가 경험하는 인생의 고통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삶의 파국을 맞은 나오미의 인생에서 남은 것은 룻밖에 없었다. 며느리인 룻의 존재는 시어머니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의 표적이었다.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방민족과 혼열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서 민족성을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모세오경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와 함께 혼혈인에 대한 사마리아인들급의 대우를 예상하게 만든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나오미는 이방인인 룻을 며느리로 맞이한다. 그리고 그 며느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도록 안내한다. 성경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배타성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실재로 함께 만들어져 가는 것을 본다. 우리는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이고 다윗의 할아버지인 것을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그 계보를 이어서 태어난다. 그리스도는 여러 민족과 족보들이 혼합된 계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요청하는 민족성의 근간, 민족의 구분 그리고 쉽게는 누군가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고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것들 과연 옳은 것일까?



교리, 삶


우리는 어느정도까지 교리를 따르고, 언제 교리를 위반하거나 변혁시키는가? 우리안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교리적인 부분이 크다.그런데 교리의 원천은 어디인가? 해석을 통해서인데, 성경의 이야기와 바울의 이야기들을 해석하는데서 교리가 나온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혹은 루터나 칼빈의 해석을 가지고서 기독교의 교리가 만들어진다. 그 교리는 물론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경신학적으로 성경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성경신학을 넘어서 교회신학의 관점에서 역사적 변천관점과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실천신학의 관점에서 실재로 이 교리가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성육신 되었을 때는 여러가지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회적 구성과 말씀의 실재적 구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리의 생명력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삶 자체가 없는 교리는 죽은 교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정말 그렇게 교리자체를 지키는 것을 바라겠는가?



전태일, 민중신학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우리에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시대적 정신이 타락하고 제도는 사람들의 목을 졸라가는 시점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죽음의 희생이 새로운 시대를 탄생하게 만들었다.


한번에 자신을 바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를 구원하는 길, 즉 희생과 죽음을 통한 새로운 시대의 부활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 곧 예수다. 예수가 곧 민중이다. 그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이 곧 그의 죽음이다.



신수, 혜능


남종선과 북종선의 기원을 만든 신수와 혜능의 방법론은 다르다. 신수는 한번에 조금씩 발전하다고 생각했고, 혜능은 한번에 도약한다고 생각했다. 율법을 조금씩 실현함으로써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가? 아니면 한번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가?


히브리서에서는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대제사장의 행위가 아니라 한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영 단번에 구원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어떤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내 안에 말씀이 살아 있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마음을 쓰고 이렇게 행동을 하고 있을까? 나는 돌이켜야 한다. 나는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라면 다투고 나누겠지만, 하나님이라면 다투고 나누겠는가?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기다림과 도우심의 문제이다.


나는 다시 돌이켜야 한다. 마음밭을 다시 갈아 업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고 실제로 행해야 한다. 진정한 삶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실천하는데 있어서 나는 ‘능력’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의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신수와 혜능의 관점에서 나는 어디에 더 가까운 것일까? 나는 어떻게 변화를 추구해야할까?





참고 1.



宗 신수와 혜능의 비교       * 혜능과 신수의 홍인 문하 이야기 * 신수(神秀)대사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바탕일세. 때때로 털고 부지런히 닦아서 때가 끼지 않게 하세육조 혜능 대사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非坮 (명경역비대)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보리(菩提)에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끼일 티끌이 있겠는가. 신수대사가 5조 홍인에게 자신이 깨달은 경계를 읊어 보인 이 示法詩(시법시)는 훌륭한 오도송이다. 그러나 《육조법보단경》에서는 신수대사의 이 게송을 무상게(無相偈)라고 칭하고 있는데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번뇌가 끼지 않게 하세"라는 내용이 점수선(漸修禪)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우리의 본래마음(본래심, 자성, 불성)이 부처의 덕상과 지혜를 모두 구족하고, 청정한데 무엇을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근기가 낮은 신수 북종선에서 수행의 단계와 계단을 밟아서 점차적으로 닦아가는 점수선이라고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혜능의 남종선은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수승한 돈오선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육조법보단경》은 신회(神會)가 자신이 7대조사가 되기 위해 이미 황제(국가)로7조는 그의 제자 보적선사의 사상과 수행법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고 비판하여 혜능대사를 6대조사로 현창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라는 주장이 있다.돈황본 《육조법보단경》에는 신회가 7조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후에 편찬된 《육조단경》에는 신회가 6조의 서자가 되고, 남악 회양이 7조가 되어 있다. 이것은 날조이다. 1900년 중국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방대한 양의 고문서가 출토되었는데 거기에 중국초기 선종사와 선어록이 포함되었다. 이 고문헌에 의해 쓰여지게 되었고,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의 연구에 의해 신수와 신회가 중국 초기선종사의 선구자로서 초기 선 사상의 기초를 만든 위대한 인물로 새롭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는 아직도 《육조단경》에 나타난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신수가 완전히 깨닫지 못한 덜 떨어진 선사로 인식되어 있다. 신수대사가 30년도 더 아래인 손자뻘 되는 혜능대사와의 법통싸움으로 혜능의 승리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신수대사(606-706)는 50세에 5조 홍인대사를 만났고, 90세가 되어 측천무후의 초청을 받아 입궁하여 황제가 먼저 예를 올리는 여불(如佛) 대접을 받았다. 삼제(三帝)국사요 양경(兩京)법주로서 전무후무한 예경을 받아서 제도(帝都)불교를 교화하였다. 초기 선종이 형성되고, 선사상이 정립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중국에 선이 남북조시대 달마대사(?-528) 이전에도 전해져서 수많은 선사들이 참선 수행을 했다는 기록이 양(梁)나라 혜교(慧皎, 495-554)가 찬술한 《고승전》과 당(唐)나라 도선(道宣, 596-667)이 찬술한 속고승전》습선편(習禪篇)에 나타나 있다. 당(唐) 나라의 정사인 구당서(舊唐書)를 비롯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와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의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하면 5조 홍인대사의 동산법문을 이어받은 사람은 神秀대사이며, 그는 수(隨) 나라 대업(大業) 2년(서기606) 하남성(河南省)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였고, 신장이 크고 인물도 빼어나서 귀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상류층 가계의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13세에 출가하여 20세에 낙양 천궁사(天宮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46세에 이르러 동산의 홍인대사를 참문(參問)하였는데, 홍인이 한 눈에 큰 법기(法器)임을 꿰뚫어 알고 마음을 열어 지도하였더니 수년만에 그의 깨달음은 진실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신수는 훗날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두 나라의 법주(法主)가 되어 세분 황제의 국사(國師)로 지냈던 큰 인물이었다. 또한 나이 95세 때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고 주석하고 있던 옥천사(玉泉寺)를 떠나 천궁사(天宮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황실에서 보낸 종려나무 잎으로 지붕을 덮은 천자의 가마를 타고 입궐하면 무후는 엎드려 맞이하였고, 그가 입적하자 대통선사로 추증하고 당나라 제일의 문장가로서 현종 때 재상을 지낸 장설(張設)이 그의 탑비인 형주 옥천사대통선사비(荊州玉泉寺大通禪師碑)의 비문을 썼다고 한다.이와 같은 신수의 선사상에 대해서 종전까지는 남종 계통에서 만든 단편적인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근래에 와서 돈황에서 출토된 자료에서 신수의 저술로 밝혀진 관심론(觀心論)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수행법이 가장 요점이 되는가'라는 문제를 스스로 설정하여 '관심일법(觀心一法)이 모든 불법수행의 성요(省要)이며,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또한 신수는 불성(佛性)은 각성(覺性)이라 하고 불성을 자각(自覺)하고 타인에게도 깨닫게 하여 지혜의명료함을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하면서 관심일법에 의해서 본래의 청정불성(淸淨佛性)을 자각하면 본래 갖추어져있던 지혜에 의해서 오염된 마음(染心)의 두꺼운 구름을 걷어낼 수 있다는 해탈에의 실천적 구조를 '정염이심(淨染二心)'의 논리를 응용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신수의 북종선은 달마로부터 비롯된 심불기(心不起)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동산법문에서 주장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 좌선의 실천과 수심설(守心說)을 한층 더 강화하고 발전시켜서 허공과 같은 청정한 정심체(淨心體)를 보라는 청정선(淸淨禪)을 확립함으로서 좌선종(坐禪宗)으로서 중국불교 초기 선종의 이미지를 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두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까지 올랐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서기 705년에 사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신수(神秀)도 입적하였으나 그의 제자 보적(普寂, 서기 651~739년)과 의복(義福, 서기658~736년)이 뒤를 이어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한 때는 3천 혹은 1만이라고 할 정도로 문중의 번영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신수를 지원하던 비호세력이 사라지면서 황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하였다.바로 이러한 시기에 남쪽에서 달마의 법통임을 주장하면서 육조현창운동(六祖顯彰運動)을 주도하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바로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0년(서기 732)에 활대(滑臺)의 대운사(大雲寺)에서개설한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남종의 하택신회(荷澤神會)가 수많은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북종의 신수는 방계(傍系)이며, 남종의 혜능이 보리달마의 정법(正法)을 이은 조사'라는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이 사건을 '활대의 종론(宗論)'이라고 하는데, 신회(神會)가 공격한 것은 첫째, 달마는 양무제와 만났을 때 무제가 절을 짓고 부처님을 조성하는 등 많은 불사를 했다는 것을 자랑하였을 때 '무공덕(無功德)'이바라고 측천무후를 도왔으며, 둘째는 달마가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할 때 함께 전한 그 가사를 홍인이 혜능에게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마(達磨)와 양무제(梁武帝)의 만남이나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할 때 가사를 함께 전했다는 전의부법설(傳衣付法說)은 조작이라는 이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북종은 서서히 쇠퇴하고 남종은 점차 활기를 띠어 당나라 대력(大力) 13년(서기 778) 국가에서 '조계혜능(曹溪慧能)을 중국 선종의 6조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하택신회는 제7조로 추앙  받게 되었다.북종의 신수를 방계라고 공격한 신회(神會, 서기 684~758년)는 한때 신수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한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뒷날 그의 스승이 된 혜능과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전날의 스승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신회도 뒷날 중국 선불교를 완성시킨 마조(馬祖)와 같은 걸출한 제자를 길러낸 남악회양(南嶽懷讓)에게 7조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참고 2.


신수와 혜능의 게송-5조 홍인 혜능에 법 전수

 

혜능은 영남 신주 사람인데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홀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갔다.장터에 나가 땔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처지였다.글도 모르고 자랐다.


하루는 한 손님이 나무를 사서 객점에 배달시키므로 나무을 날라주고 돈을 받아 문을 나서다가 한 객이 경 외우는 것을 들었다.혜능이 마땅히 머므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응무소주 이생기심)라는 구절을 한 번 듣고는 곧 마음을 깨달아 다가가서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갖고 계십니까.나는 기주 황매현 동선사에서 왔습니다.


그 절에는 5조 홍인대사가 계시면서 중생들을 교화하시는데 그 문하인이 1000명이 넘습니다.


나도 거기가서 예배하고 이 경을 설하심을 듣고 받아 왔습니다.


대사께서는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항상 권하시기를 다만 금강경만 수지하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혜능은 이 말을 듣고나니 어머니을 하직한 뒤 30여일이 채 못되어 황매에 이르러 5조 홍인께 예배드리니 오조께서 물으셨다.


너는 어디 사람이며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옇남 신주 사람인데 멀리 와서 스님께 예배드리옴은 오직 부처를 구할 뿐이지 다른 것은 없나이다.


네가 영남 사람이면 오랑캐인데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비록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없는 것이니 오랑캐의 몸은 화상과 같지 않사오나 불성에야 어찌 차별이있으오리까.


저 오랑캐의 근성이 제법 날카롭구나.나아가서 대중을 따라 일이나 하라고 하시기에 화상께서는 어떤 일을 하라시는 것입니까.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해라.


혜능이 물러나와 후원에서 어느 행자가 시키는데로 장작 패고 방아 찧기 8달이 조금 지났는데 어느 날 오조께서 문득 찾아와 말씀하셨다.네 소견이 쓸만하다고 생각 했는데 네가 그 뜻을 알았느냐.


오조께서 어느 날 문인들을 다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자기의 성품에 미혹하다면 어찌 복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스스로의 지혜를 모아 자기 본 마음의 반야 성품을 취하여 게송을 하나 씩 지어서 나에게 가져오라.


만일 큰 뜻을 깨달았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전하여 여섯 번째의 조사로 삼으리니 어서 속히 돌아가서 지체하지 말라.대중들이 분부를 받고 물러나서 쑤군거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구태여 마음을 밝히고 뜻을 내어 게송을 지을 필요도 없다.화상께 지어 바친다해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신수 상좌가 교수사이시니 반드시 그 분이 법을 올릴 것이다.


신수는 생각했다.내가 마땅히 게송을 지어서 화상께 바쳐야 하겠다.게송을 바치지 않는다면 화상인들 어떻게 내 마음속 견해의 깊고 얕음을 아시겠는가.게송을 바치지 않는다면 끝내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렵고 어려운 일이도다.신수가 게송을 지어 이것을 바치려고 여러 번 조사당 앞에까지 갔으나 그냥 돌아서기를 나흘동안13 번이나 되풀이 하였을 뿐 바치지 못 하였다.이윽고 그 날밤 삼경에 아무도 모르게 등불을 밝혀 들고 남쪽 복도 벽 사이에 게송을 써 놓아 마음의 소견을 나타내었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마음은 밝은 거울 바탕일세.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때때로 털고 부지런히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먼지 끼거나 때묻지 않도록 하세.


오조께서는 이미 신수가 아직 자성을 깨치지 못하여 道門(도문)에 들어오지 못했음을 이미 아셨다.


오조께서는 신수의 게송을 남겨서 사람들과 함께 수지하라고 하셨다.이 게송에 의지해서 닦으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큰 이익이 있으리라.그리고 문인들에게 향을 피워 예경케 하고 이 게송을 열심히 외우면 곧 견성하게 되리라 하셨다.문인들이 그 게송을 외우면서 훌륭하다고 찬탄하셨다.


그날 삼경에 오조께서 신수를 조사당으로 불러 물으셨다.게송은 네가 지은 것이냐.


네가 지은 이 게송은 본성을 본 것이 아니며 다만 문 밖에 이르렀고 문안에는 들지 못한 것이다.


이와같은 견해로는 위 없는 깨달음을 아무리 찾는다해도 끝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나아가서 하루 이틀 더 생각하여 다시 게송을 지어 나에게 보이라.신수가 절하고 물러나와 며칠이 지났지만 게송을 짓지 못하고 불안하여 편치 못하였다.


다시 이틀이 지났을 때 한 동자가 방앗간 앞을 지나면서 외우는 게송을 혜능이 한 번 듣고는 이게송이 아직 본성을 보지 못한 것임을 바로 알았다.혜능이 비록 가르침을 받지 않았지만 일찍이 그 대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동자에게 물었다.외우는 게송이 무엇인가.


이 오랑캐야,그것도 모르는가.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신수 상좌가 남쪽 복도 벽 위에 무상게를 써 놓으셨는데 큰 스님께서 이 게송을 모두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에 의지해서 닦으면 앋도에 떨어짐을 면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이 게송을 잘 외어서 내생의 인연을 맺어 함께 부처님 땅에 태어나고자 한다.


내가 방아를 찧은지 여덟 달이 지났지만 아직 조사당 앞에 가본 적도 없으니 바라건데 나를 인도하여 그 게송 앞에 예배드리게 해달라.동자가 게송앞에 인도하여 예배토록하니 혜능이 말하기를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니 읽어 주시오.그 때 강주 별가를 지낸 장일용이란 사람이 소리 높여 읽어 주었다.혜능이 다 듣고나서 말 하였다.


나도 게송을 하나 지어 볼테니 별가는 써 주십시오.오랑캐야,네가 다 게송을 짓겠다니 희유한 일이구나.혜능이 별가에게 말하기를 위 없는 깨달음을 배우는데 처음 들어온 사람을 가볍게 대하지 마십시오.아무리 둔하고 낮은 사람일지라도 밝고 높은 지혜가 있을 수 있고 높은 사람이라도 어리석을 수가 있는 법인데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한량없고 끝없는 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게송을 외우라.내가 그대를 위해 써 주리라.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깨달음에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本來無一物(본래 무일 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먼지 끼고 때가일까.


게송을 다 써 놓으니 온 대중이 모두 놀라 탄식하고 의아해 하며 말하기를 기이한 일이다.


겉 모습으로 사람을 알 수가 없구나.오랫동안 육신보살을 부렸던가 하였다.


오조께서 대중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누가 해칠까 염려하여 드디어 그 게송을 문질러 없애고 이것 역시 성품을 보지 못한 글이다.하니 대중들이 모두 의심을 쉬게 되었다.


다음 날 오조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와서 혜능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 찧는 것을 보셨다.


도를 구하는 사람이 법을 위해 몸을 져버리는것(爲法忘軀위법망구)이 마땅히 이와같아야 하느니라.쌀이 익었느냐.쌀이 익은지 이미 오래이오나 아직 키질을 못했습니다.


오조께서는 주장자로 방아를 세 번 내리치시고 돌아가셨다.혜능은 곧 조사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날밤 삼경에 방장실로 들어가니 가사로 둘레를 막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금강경을 설하여 주셨는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라는 구절에 이르러 혜능이 크게 깨닫고 모든 만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드디어 오조께 말씀드렸다.


자성이 어찌 본래 스스로 깨끗함을 알았는가.


자성이 어찌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알았는가.


자성이 어찌 본래 스스로 갖추어짐을 알았는가.


자성이 본래 어찌 흔들림이 없음을 알았는가.


자성이 어찌 능히 만법을 내는 줄 알았는가.


오조께서는 혜능이 성품을 깨달았음을 아시고 곧 인천의 스승 부처님이라고 하셨다.


삼경에 법을 받으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돈교와 가사와 발우를 전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네가 6조가 되었으니 잘 보호하고 지켜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앞으로 끊어짐이 없도록 하라.


내 게송을 들어라.


有情(유정)이 와서 씨를 뿌리니,


땅을 인해 열매가 도리어 나네.


無情(무정)은 이미 씨앗이 없으니,


성품도 없고 태어남도 없노라.


옛날 달마대사가 처음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이 가사를 전하여 믿음의 바탕으로 삼으시메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법이란 마음에 마음으로 전하여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이다.옛부터 부처와 부처가 오직 본체를 전하셨고 조사와 조사가 은밀히본심을 전하셨다.


이제 이 가사는 서로 다투는 조건이 되기 쉬우니 너에게서 그치고 전하지 말라.


너는 속히 떠나도록 하라.남이 너를 해칠까 두렵구나.


저는 이 글을 읽고 신수의 게송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몇 번이고.


혜능의 게송을 보고는 놀랐다.너무너무 감동을 받았다.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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