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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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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21. 2018

37과 4

37살의 4번째 일기


#1

37살의 나의 마지막 일기기 될 것 같다. 나는 지금 하늘을 날아서 필리핀으로 향하고 있다. 구호단체에서 일하면서 벌써 25회째 출장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싶었는데 지금은 비행기를 타는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해외 여행이라는 것을 해볼려고 해도 비행기 타는 것 때문에 싫을 정도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 무엇인가 바라는 것들은 항상 먼저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가 생기고 그것을 원하는 욕구로 발전한다. 그러면 그것이 소원이 되기도 하고 미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꿈이나 욕구의 대부분, 소원이 성취되어서 이루어지는 시간이 도래하면 이상하게도 허무한 지점에 앉아있게 된다. 내가 이럴려고 그것들을 그렇게 바랬던 것인가? 이런 생각들 말이다. 계속해서 이상은 이상을 낳고 꿈은 꿈을 낳는다. 그러면 이런 질문도 가능해진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누군가의 욕망이나,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 말고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니 도대체 그것들은 왜 하고 싶어졌던 걸까? 흔들리는 비행기 속에서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는 사이에 또 내 앞에 이 만큼의 질문들이 내려 앉아서 나에게 고개를 든다. 




#2

어머니의 치아가 대부분 상하셨다. 임플란트를 한개가 아니라 여려개를 해야 한다. 이럴 때 쫌 힘든 것도 같다. 거의 10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 것 같은데, 어머니는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계속 수술과 진료를 미루고 계신다. 돈이 필요한 시기가 현실로 도래하면 그 순간은 인간의 인생은 슬프고 무력하고 어두워진다. 치아가 고르고 새하얗고 아픈 충치를 바로 치료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얼른 가서 치과 치료해~라고 하지만 100만원이라도 목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말에 오히려 화가 치밀이 오른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다른 일에 써야 할 돈이 그렇게 나가는데, 그럼 다른 것을 줄이고 정말 필요한 곳에 못 쓰는데 말이야. 그러면 그냥 아픈 곳을 참고 병을 더 키우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러니깐 미련한짓 말아라 하지만, 동정따위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인생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생의 어느부분도 떼어서 주지 않더락고. 정말 도와주는 이들은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도와주더라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ngo단체 간사가 월급이 적어서 이렇게 어머니도 아픈치아도 제대로 치료를 못해드린다라는 슬픈영화를 찍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동정이 아니라 공감을 요청하는 것이다. 아픈 이들, 빠르게 치료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떤 답을 줄것인가? 어떤 응답을 할 것인가?라는 것 말이다. 


#3

물론 어머니 치아는 공제회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해볼려고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말이다. 그런데 옆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독거노인이신데 어떻게하나? 옆동에 사는 아저씨는 소득이 하나도 없이 하루하루 겨우 끼니를 이어가시는데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들이 든다. 물론 한사람 한사람 내가 찾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할 수 있는 한 도울 수 있겠지. 테레사 수녀님처럼 ‘한번에 한번만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정치를 공부하고, 비교정치로 다른 나라들의 제도와 문화를 비교해 보면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이건 개인의 문제인가? 모든 것들이 인생에서 혼자서 고독하게 해처나가야 하는 문제인가? 그럼 좋은 집에 태어난 사람은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횡재이고, 어려운 환경에 태어나서 기회도 못 얻고 어떤 새로운 경험도 못 얻고 더군다나 몸이 아플 때는 이걸 운명으로 받아 들어야 하는가? 이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이는 ‘그러니깐 나라도 잘 살아야지’ 혹은 ‘이런 환경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라고 하기도 한다. 막 머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바뀔 것도 아니고 나만 변명 아닌 루져의 변명처럼 짖어대는 것처럼 들리겠지 한다. 그대신에 나는 다시 정치로 돌아온다. 


#4

‘정치’란 유명한 모겐소의 정의에 의하먼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이라고 한다. 어떤 학자는 더 나아가서 이것을 정당차원으로 승격시키나 아무튼.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국가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정치의 제 1의 질문일 것이다. 그 다음은 권위란 어디서 나오는가? 권위를 누가 부여하고 그 권위의 대상은 누구인가? 권위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권위를 사용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이 정치의 제 2질문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누가 배분하는가? 어떻게 배분하는가? 누구에게 배분하는가? 무엇을 배분하는가?라는 것이 정치의 제 3의 질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 가운데 나는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정치 밖에 없다’라고 하시면서 심지어 소설까지 쓰신 스승님을 기억한다. 나도 동의한다. ‘약자에게 가치를 두고 그들에게 공공의 목적으로 모여진 정부가 권위를 가지고 복지를 제공하고, 혜택을 배분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방향성일 것이다. 물론 이건 시혜적 관점이지만, 좀 더 세련된 북유스럽 스타일로 보면 ‘우리 중에 누구라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불안감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국민의 집’이 국가이기도 하다. 국가를 다시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그리고 내가 비로소 언제가는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머니의 치아는 나에게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서.


#5

메타인지라는 것을 알게 된지도 벌써 6년 정도가 지났다. 메타인지는 말만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나가 아니라 숲을 보는 능력’이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정도로 말하면 어느정도 감이 잡힌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떤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아는 것’ 정도가 더 쉬운 단어일 것이다. 이것이 보통 기술적으로는 퍼셉트론이라고 부르고 1단위에서 1가지의 경우의 수를 찾아내고 퍼셉트론이 맞아질수록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다중 퍼셉트론이라고 해서 그물망과 같이 사물을 다양하게 인지히게 된다. 이세돌 구단이 20개의 퍼셉트론이 있었던 반면, 알파고는 48개의 퍼셉트론으로 16만번의 바둑판의 전술을 익혔다고 한다. 이것이 딥러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지성이, 이성의 능력이, 인지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메타인지를 기르기 위해서 공부는 어떻게 하고, 생각은 어떠헥 하고, 이력서는 어떻게 쓰고. 이런 식으로 방법론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다 문득 인간이 과연 인지적인 것만 있는가라고 고개를 드는 순간, 언어로 잡히지 않는 성적인 충동과 어떤 감동 같은 것들을 만난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의지적인 요소들도 느껴진다. 한 스텝을 넘어간 것일까? 나는 이제 메타인지를 넘어서 인간을 이루고 움직이고 있는 그 무엇을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다니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아는바대로 감정과 감각, 이미지와 의지와 같은 것들이겠다. 


#6

새롭게 메타인지와 관련해서 최근에 알게된 사실이 있다. 시민사회가 문재인 정부를 맞아서 더더욱 광화문 1번가와 같이 플랫폼을 많이 만들고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광장 개념이 온라인으로 발전하면서 플랫폼들도 여럿 생겨났다.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을 제안하는 것도 이러한 광장의 개념에서 무엇인가 집단지성과 같은 느낌으로 의견을 모으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의견을 모우고 무엇인가를 조직하고 해커톤을 하고 제안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지속가능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판에 그 나물’이 되거나, 누군가 이 판을 먹어 머림으로서 독재자가 생기는 것이다. 소위 언더라고 하는 조직 말이다. 메타인지의 한계는 바로 이것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안다고 하는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그들의 의견이 더 많은 가치의 비중을 얻게 되는 것 말이다. 인지는 인간의 일부분일 뿐이다. 인지능력으로는 실재를 사회적으로 구성하지 못한다. 이성만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이들이 정치권이나 시민사회의 담론을 만들어 가기에 지속가능성은 떨어지고 권력의 독점화는 심해지는 것이다. 


#7

그렇게 내가 메타인지를 부르짖었는데, 그 한계를 알고 나니 나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더 많이 안다고 더 책을 많이 읽었다고 능사가 아니다. 다른 이들을 신비로 놓고 듣고 경청하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 더 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부터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메타인지다. 그러므로 새로운 경험,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건을 나아가보면 우리가 세상을 받아드리는 방법이 달라질 것이다. 나부터 시작해야 겠다. 사실은 인간의 위대함을 유명한 철학자나 존경하는 교수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찾는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민중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민중이 곧 예수다, 예수가 곧 민중이다’


#8

어느정도의 과도기, 전환기를 걷고 있다. 단체에서도 부서가 바뀔 것 같고, 만나는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고, 참여하는 행사들도 많이 달라졌다. 한 층의 겹을 벗기면 또 새로운 겹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생이다. 일희일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다운 것 같다. 나는 또 실망하고, 미워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겠지. 그런게 살아 있는 거니깐. 나는 그냥 내가 안되는 것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대신 그 지점 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안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되기 때문에 그럼 어떠헥 할 것인가?라는 ‘자극에 대한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반을 선태하는 길’을 걷고 싶다. 


#9

한살을 더 먹을려고 하니깐 말이 더 길어지는 것 같다. 듣는 것을 더 많이 하고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써 놓아야 겠다. 조금 더 서성이고, 망설이고, 이것을 말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계속 해야겠다. 우유부단하면 어떻고 패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겠지. 말을 더 많이 듣고 글은 더 많이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에 비행기는 필리핀 상공에 도착했다. 이렇게 인생이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슬픈맘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쁜맘으로 내일을 받아들이고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을 새롭게 해석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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