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_철학사상연구회
20181129_철학사상연구회
들뢰즈와 가타리 천개의 고원_류종열
철학의 위상과 활용론
들어가기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에 모순에 대한 반역이다’라는 것이 한국철학연구회의 모토이다.
이성에 있어서 normal, abnormal만 있는 것이 아니라 abnomalie도 있다. 그것은 별종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성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독일철학과 앵글로섹슨족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만 구성되지 않는다. 세상은 아예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라는 디지털의 방법론은 사실 영미철학을 발전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정말 그런가? 우리의 몸이 정말 그런가? 우리는 끊어질 수 없는 세상에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것들이 있는 세상이 실재이다. 들뢰즈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이지, 생각과 상상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물결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런 것들과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이런 고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rche를 고민할 때 앵글로섹슨의 전통에서는 이것을 ‘원천’이라고 보고 공시태로 본다. 그러나 아르케를 통시태로 볼 경우에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무엇이 시작일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누가 시작했을까? 이런 고민들이 바로 우리 강의의 시작인 것이다.
들뢰즈, 탈영토화
말리노프스키나 레오콘의 수장인 레오스트로스 같은 인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민속학 이야기에도 들뢰즈는 반대한다. 현실주의자들은 현상자체에 집중하여 문제를 해석하기 때문에 ‘공시태’의 문제만을 다룬다. 이것 역시 들뢰즈의 입장에서는 기원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고 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탈영통화’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 자체가 1차 혁명이후에 수렵과 채집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기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은 루소가 말하는 인간불평등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 역시 앵글로 섹슨의 전통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인간이 호모파베르의 입장에서 자신이 손을 사용해서 물건을 집는 순간 이미 자신 몸에서 탈영토화해서 새로운 재영토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에서 시작해서 몸과 연결되는 것, 배치가 일어나는 방식에 따라서 재영토화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더 기초적인, 작은 범위에서부터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생산양식, 문화양식
철학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두 극이 있으며, 그 두 극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기호들, 표상들이 있다. 그것들을 가지고 행하는 무수히 많은 논의들은 각각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극에는 플라톤주의자오 플로티누스주의자 사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극의 어느 쪽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철학하는 방법, 사물에 대한 인식, 삶의 태도나 도덕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compositio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인지론에 호감을 표현하는 경우에 인성론에 감동을 하는 경우가 다른데, 전자의 경우에 인문주의자le humaiste라고 하고 후자의 경우를 인도주의자e humaitaire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 철학에서 그렇게도 중요하게 내재하고 있는 문제로서 자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간 조차 대상 또는 상품으로 여길 수 있는 상품주의자liberal ou liberaliste가 있으며, 인격 스스로가 자기의 냊재성의 힘을 발현하는 스스로 자주 자립을 추구하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가 있다고 본다.
자본, 대항하는 전쟁기계
책의 중요한 부분은 욕망(인간의 자연성), 리좀(인민), 다양체(선들, 계열들), 기관없는 신체(cso), 유목주의(노마디즘), 전쟁기계, 배치 및 국가, 화행론(기호학), 자본 명령어(유령주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 결론에서 여섯가지(지층, 배치물, 리좀, 고른판, 탈영토화, 추상기계들)을 제시했다.
이 책의 해제를 슨 베르슈트레텐은 다양체로부터 이중분절, 배치, 활용론과 분열분석을 강조하였다. 크리스티앙 데캉은 기호학의 배치들로부터 활용론a pragmatique을 내세운다. 마이클하트는 이중분절, 이중화, 얼굴성(정체성), 생성(되기), 국가, 자본으로 줄기를 삼았다.
사실 한권에 책 안에 담긴 이야기들인 담론들이 많아서 무어라고 꼭 집어낼 수는 없지만, 깊이에서 흐르는, 그럼에도 표현으로 끌어올려지지 않는 무엇인가가가 있다면, 우리로서는 그것이 인간본성인 영혼의 자기에 의한 자기 정립과정(정체성)과 자유일 것이다.
자기정립은 영혼과 신체의 연관에 대한 논의가 걸어온 것만큼이나, 이중화의 길을 걷는다. 19세기에는 도구의 탈영토화의 막바지에서 주체화라는 이름으로 국가(전제군주)와 그 보위자(인식론)에 대항하는 인민(프로레탈리아)의 이중분절이 있다고 해보자. 철기의 도구를 넘어서 규소의 시대에가 도래한 20세기에는 국가를 대신한 자본이, 인민을 대신해야할 전쟁 기계가 분자그램적으로 미분화하면서 핵전쟁이라는 절대 공포에 갇혀서(두번의 대전을 치룬후)기관없는 신체가 지각할 수 없는 것이 되고자 하는 듯하다.
1953년에는 dna의 발견과 반도체의 발명이라는 이중분절이 있었다. 아마도 이제쯤에서 두 저자가 말한다면 ‘지각할 수 없는 것-되기’로 가로지르는 중이라 할 것 같다. 한편으로 인공지능 되기 또는 칩의 삽입으로 신체의 무기물화 되기로 향하여 수레위에 올라탄 듯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탄수화물되기는 식물되기이며 또한 단백질되기는 나누, 줄기세포의 길로 감화되고있다. 푸코가 말한 다음 세기가 들뢰지의 세기란, 규소의 시대에서 단백질의 시대로 지각할 수 없는 것되기’가 탈영토화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인간은 주체성과 자유의 열릴까?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지질학을 토대로 한 깊이에서 토지, 표면 위에서 야만의 전제군주(국가), 높이에 기호인 자본, 이 세가지가 중첩적인 세기로 이어질 것이다. 인류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선택하는 겸손하고 소박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자연을 따른 숙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헤겔, 들뢰즈
헤겔의 역사관에서 자유의 역사를 전복시켰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생산양식으로 보는 통시태의 관점을 들뢰즈는 삶의 양식modus vinendi으로 ‘방향의 논리’logique du sens를 전개하지나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선 방향의 논리하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미의 논리’라고 하지만, 그 상스le sens라는 의미는 프랑스어에서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감관을 가리키며, 방향을 의미하기도 하고, 확장적으로 의미라는 뜻을 지니기도 한다. 다음으로 철학사에서 영국에서 상식sens commun이라는 철학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일상의 사실들을 모아서 지식의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보며, 데카르트가 양식bon sens이라고 할 때는 의식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규칙이 먼저 있다고 여겼다.
나아가 칸트가 12개 범주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로 인간 의식의 선험적 틀로서 봉상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인격들의 의식을 베르그송은 상위양식이라고 한다. 이 상위 양식이 신비주의와 연관있다고 해서 철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상층의 상징과 기표를 인정하지 않으면, 살아 온 또는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표들로 삼아 새로운 측정recoupenment하면서 살아가는 양식이 상위양식이다. 들뢰즈식으로 보면 긴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의 의식은 점점 확장하기도 하고 또는 점점 깊이 있게 들어가기도 한다. 한 시대의 의식적 인식이 다음 시대에는 그보다 폭 넓은 또는 깊이 있는 사유에 의해 탈영토화 해 나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위 양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그럼에도 19세기 후반에야 그 모습을 드러낸 인식이며 활동이며,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철학, 소재
철학이 어떤 소재나 자료를 바탕으로 공리를 삼느냐, 경험, 탐험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일반적으로 소쉬르 이래로 언어학은 두 경우에 겹쳐져 있어서, 공시태와 통시태를 말한다. 전자의 공시태의 입장으로는 천문학, 수학, 물리학을 바탕으로 삼는 시대가 헤겔에서 마감한다.
이에 비해 고고학, 지질학, 생물학, 심리학의 탐험은 통시태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럼에도 언어는 1859년 파이언어학회가 생기면서 언어의 기원에 대해 논제로 삼지 않겠다고 해서 공시태의 우선을 여는 듯했다. 그런데 1859년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발견이래로 사유의 기원arche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발명의 계기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높이의 관념과 깊이의 자료가 다르다. 또한 철학사 발달에서 보면 높이의 철학은 기준 또는 공리를 먼저 정하는 무한 소급으로 올라가지 않기 위해서 방법서설의 학문이라면, 깊이의 철학은 아직도 경계를 확실히 할 수 없을 정도로 탐색의 확장과 깊이로서 방법후설의 학문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전자를 관념론과 합리론으로 후자를 실재론과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들뢰즈, 탈영토화
이제 글뢰즈와 가타리가 다르는 소재와 자료를 보자. 높이의 철학은 기이하게도 이항대립을 우선으로 하는데 비해, 깊이의 철학은 탐험과 탐색에서는 이중화 현상(이중구속)을 만난다. 왜 이중화일까? 학문의 원인성에 관한한 하나(I’Un)와 단위(l’Unite)는 다른에도 높이론은 하나가 있다는 전제를 둔다.
깊이론은 하나가 아니라 다발정이라는 점이다. 높이론이 위해서 아래로 명령 또는 지배의 방식이라면, 깊이론은 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가는 extendre, ex-tension, ex-pression, ex-plication가는 데,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이다. 즉 다양체라는 것이다.
이 다양체는 리만의 비유클리트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일자를 등질적으로 보느냐 이질적으로 보느냐는 전제에서 고대에서도 문제거리였다는 것이다. 이항대립으로 한 방향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연관들의 전개의 길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개의 과정을 알려주는 것은 탈영토화이다. 탈영토화는 신체와 도구의 관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랑그에도 있다. 그 혀는 언어만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과 애정관심에도 탈영토화의 길을 간다.
탈영토화는 흥미롭게도 높이에서 깊이로 가는 과정에서도 드러난ㄴ다. 사실은 깊이에서 높이로 가는 과정에서 표출되는 것이다. 표면에서 모방의 이중성은 이런 측면의 하나의 이중화이다. 이런 과정을 이중화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언어학 또는 기호학에서 특별하게 드러난다. 분열분석학이라고 볼 수 있는 정신병리학에도 유비적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앵글로섹슨철학에서 언어와 수학이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공리론이라고 한다면, 탈영토화에서 언어의 생성과 변전의 과정에서 이중화로 드러난다. 그 이중화의 내면은 지질학의 북극과 남극에 연관시키면 멀게 보이고, 철학에서 영혼과 신체의 연관을 생각하면 오랜 철학사에서 당연히 암묵적으로 내제하고 있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 6가지 개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의 결론의 장에서 여석가지 개념들을 요약해서 설명한다.
S_지층, 성층작용Strates, stratification
자연 또는 질료를 다루는 면에서 이중분절이 먼저라는 점을 제시한다. 질료와 형식, 내용과 표현이라는 이중성은 한 몸체에서 두 갈래인지 두개의 다른 법칙인지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전자들의 경우는 경험의 총체에서 파악하는 것인데 비해 후자들의 사고는 분할과 절단된 이원성이라는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연역하는 것이다.
지구라는 단위의 총체는 사물들의 다수의 형태들을 만들어 왔고 또한 총체 속에서 움직임을 계속하는 다양한 변용태들을 표현해왔다. 그 지구는 지층들을 형성하듯이 추억처럼 사물의 층위와 정도를 구별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또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면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력(권능)을 지층과 더불어 표현해 왔다.
왜 고고학이 아니라 지질학인가에 대해서, 고고학은 추억의 층들을 파고 들어가 지층이 만든 내용을 주목하면서, 층위가 다르거나 다른 솟아난 지층에 등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아울러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두 저자는 층위의 문제가 아니라 배치물의 문제로 바꾸어 보았다. 지층에는 단층 현상도 있고, 마그마가 솟아올라 정상이 아닌anomalie 층으로서 새로운 층위를 형성하기도 하듯이, 삶의 영역에서 상식적 관습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단절(봉기, 저항, 항쟁)도 있어서 상식을 넘어서 양식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표현의 솟아남(전복, 혁명)이 있으며 베르그송의 표현 방식으로 고등양식도 있다.
A_배치물Agencements
지구라는 측면과 달리 삶의 총체성에서 여러 배치물들을 지층과 달리 영토를 지니고 있다. 배치물은 영토를 즉 지구 환경을 탈코드화한다. 즉 생태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배치물들은 유기체, 환경, 개체의 행태를 넘어서는 내용과 표현을 생산해낸다. 손이 이동의 수단을 넘어서 도구를 다루듯이, 혀가 먹는데 사용에서 발성의 포현으로 전환하듯이, 표현에는 기호체계가 나오고, 내용에는 실행의 확장이 있다는 것이다. 변용태의 실행이 있다는 뜻과 같다.
표현에는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나듯이(언어, 기표), 내용에는 활동성의 확장(도구, 컴퓨터)이 일어난다. 배치물들이 탈영토와 확장으로 도주선을 만들며, 또는 전쟁기계로서 탈영토화의 여러 선들을 만든다. 여기서 생명체의 배치물에서는 새로운 생성으로 리트로넬로 이상으로 여성되기, 동물되기, 광물되기에도 이른다.
우선 겉보기에 지층(추억)도 배치물(실체, 신체)도 탈주선의 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 선(계열)들의 경향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추억들이 관습과 습관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가는 측면이 있는데 반해서, 새로운 길을 뚫고 다른 길을 마련하고자 하는 흐름(연속성)은 여전히 내재해 있다.
전자는 가는 길과 방향이 정해져 있어서 예측과 실행에서 반복이 용이한 편리에 따른다는 점에서 홈패인 공간을 간다.(톨의 방식) 이에 비해 후자는 물결이 퍼지듯이 여러방향으로 도는 예측불가능하고 범위를 정할 수 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매끈한 공간으로 퍼져간다.(결의 파동)
전자가 건전한 도덕과 질서라는 측면에서 중요시한다고 보면, 후자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통일된 단위의 진행처럼 여긴다. 이에 비해 후자는 특이성을 지닌 자의 별종의 행동으로 여긴다.
R_리좀Rhizome
이 특이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체이며, 리좀이다. 또한 1227년에서 제시하듯이 노마드이며, 1914년에서 해명하듯이 위계를 이룬 계급이 아니라 무리, 즉 인민이다. 이들은 전자처럼 대열의 뒷꼭지만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판이라는 진동을 달리 바꾸려 하면서, 촟체적 흐름의 진행을 강도와 속도를 지니고 진행한다는 점에서 정념과 파동이다.
이런 운동방식에는 항상 자연의 내재성과 끈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의 실행에 닮았다. 게다가 패인 공간에서 선의 운동이 편집증의 징후를 남기는 것과 달리, 파동의 확장에서는 방향이 전혀 다를 수도있고 비슷한 방향이라도 가지치기(각도)와도 전혀 달리 이어지고(접속) 솟아난다(창발)는 점에서 분열현상이라 할 수 있다.
리좀의 흐름은 다양하다. 패인공간의 선을 달리기도 하며, 절단이 있고(갈라치기), 층위라는 점에서 파편화의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 다양체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안은 내재적 욕망과 정념을 지니고 있기에 표면의 길과 배치되는 경우가 달리 가로지르는 위험도 있다. 게다가 리좀에는 본성적(자연적) 권능의 힘이 항상 현재에 닿아 있어서 권력에 대항하여 흐름을 만드는 탈주선의 길도 있지만, 파시즘에서처럼 단순 파괴로 돌아서서 죽음의 선으로 갈 위험도 있다.
리좀은 하나의 단위처럼 보이지만 다양체로서 총체이며, 다양한 변용태들과 다양한 변이들을 생성하고 환경과 영토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영역(추상기계)을 만들어 갈수 있다는 점에서, 권능의 발현 지역(지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의 연관 속에서 창발을 실행한다. 지방과 온지구 사이의 내재적 연관, 즉 생태적 연관을 공감, 공명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 겉보기에는 불연속적인 다양한 변용태와 변이가 내재적으로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C_고른판, 기관없는 몸체_Plan de consitance, Corps sana oranes
리좀이 펼친 다양체의 결들이 표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이제 표면은 톨들의 집합이 아니라 결들의 진도와 파동이며, 그 파동 위에서 흘러가는 변용태들과 변이들이 있다. 이들은 물결위에 나뭇잎이 흘러가듯이 물결의 파동은제자기 운동을 한다. 이런 결을 고른planomene평면이라 부르자. 고른 평면 위를 가로지르는 현실태로서 개체 또는 개인이 내재성과 연관없이 활동하는 측면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심층과 연결이 끊어진 것으로 물위를 떠 있는 낙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고른 평면 안에 있으면서 그 위를 속도를 지나고 변용태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변용태의 원형적인 것을 기관없는 신체라고 부른다. 이 변용태는 추억의 집합이 아니라 기억총체로서의 현실태이다.
고른면과 기관없는 신체는 양면성이다. 안과 겉이다. 양태적 측면에서 기관없는 신체가 능동적이고 고른면이 수동적이다. 고른 판위에서 능동성으로서 기관없는 신체는 연결접속을 증대시키고 창조성으로 나아간다. 이를 저지하는 수동적 측면이 있고, 또는 이를 방해하는 암적 존재가 있다. 타성이 있고, 권력에 포섭된 전쟁기구들이 있다. 전쟁기계는 연합의 공감을 통해서 확장해 나간다. 예술, 발명, 과학(생명, 생태), 철학(역동)에서 이루어진다.
D_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
이제 이 능동성이 생산하는, 실행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탈영토화이다. 표면에서 탈영토화의 효과는 다양하다. 우선 재영토화에 흡수되는 수동적일 수 있으며 기표작용적 체계에 흡수된다. 또는 재영토화를 가로질러 스스로 내재성을 포함하고 의식적 차원에 머물면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주체적 기호체계의 경우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상대적을 넘어 절대적일 수 있는데, 탈영토화의 길이 열려 있다.
이런 절대적 탈영토화는 우선 리좀의 흐름에서 배치물들 사이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탈주선을 행하면서 다양체들을 표현하는 것인데 실행의 장도 열려 있다. 또한 그리고 심층의 내재성과 연결되어서 강도 있는 솟아오름도 있는데, 이 분출은 운동에너지로만 충만한 것과 같아서 내용들(배치와 선들)과 연관없이 탈영토 자체가 새로운 대지 또는 새로운 우주를 만든다. 고원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운동은 선으로도 우너으로도 아니며, 회오리 즉 나선운동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근원운동을 이렇게 보았고, 우리가 추측하기에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욕망운동도 회오리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로 상대적 힘과 제한적 절대적 권능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M_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Machines abstraites(diagramme et phylum)
그러면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인가? 이 위에서 실행되는 사건들은 어떤 초월적이고 완전한 이데아가 있어서 실해오디는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욕망들이 분출되어 실행되는 것이며, 즉 추상적 기계들이 있다.
상대적과 절대적 배치들에서도 추상적 기계들이 있다. 추상적 기계들은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점들이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형식적이지 않은 기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질료-기능들의 다져진 집합(위상과 문) 즉 추상적 상위이다.
천개의 고원, 핵심
사회와 현실에서 고른판을 바탕으로 배치들의 내용과 표현이 드러난다. 이 판은 진동으로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불연속적 배치물의 분자적 똔느 분자그램적 활동에서 열려진 활동의 몸체가 추상기계이다. 이 기계가 고른 판에 첨점을 만들 때 '고원'이다. 따라서 이전과 전혀 다른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열어간다. 내재적이고 특이성을 지닌 추상기계는 추상적 절대성을 배제하고 권능과 창조성으로 변용, 생상하는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사회성에서 만든 두 가지 형태가 전쟁기계와 국가 장치이다. 전쟁기계가 전쟁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닌데, 국가 장치가 인민을 수동으로 또는 포획하여 영토 속에 속박시키는데 대해 전쟁기계는 탈주선을 만든다. 전쟁기계는 열려서 접속을 한다.
이런 연결접속은 변이들과 변용태들의 열린 활동과 이어지는 면에서 고른 면을 그리고 그 토대 위에 매끈한 공간을 형성한다. 이 추상적 기계가 형상하는 공간의 위상에서 총체성을, 그리고 기존의 공리화 되었던 것을 포함하는 총체성을 이름하여 기계권une mechanosphere는 인민이라는 자유로운 신들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민네이션, 생각
노마디즘은 전쟁기계이다. 다시 말하면 정해진 것이 없이, 어떤 상징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불쑥 드러나는 것이다. 전쟁기계는 이미 굳어진 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대는 항상 전쟁기계 때문에 발전하고, 세상은 유목민들의 움직임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다. 전쟁기계는 리좀적 다양성에서 탄생한 어떤 무리이지만, 그것이 기획되거나 전략화되지 않고 자생적으로 스스로 등장하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서로 공간과 공명을 사용하면서 물리학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 이야기는 상상과 생각 혹은 이념에서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연결과 배치를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베르그송 그리고 스피노자는 물질에서 발전해서 정신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고, 헤겔과 플라톤은 관념이 물질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원자 안에 구조가 밝혀지면서 허공의 공간에 분자가 존재한다고 하는 증거가 나오면서 관념론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들뢰즈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서 ai로 발전하게 되면 마빈 민스키의 논리가 나온다. 인공지능의 기초를 만들었던 민스키크는 들뢰즈의 철학에서처럼 배치와 연결을 통해서 작은 단위의 데이터가 하나의 에이전트를 이루고 이러한 에이전트들이 모여서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패킷 혹은 바이트, 메가, 기가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사는 이렇게 현실을 만들어내는 2가지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는 지층에서 배치물들까지 가야 이해가 된다. 즉 기관없는 신체의 핵심은 신체가 있고 그 다음에 기관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내부의 구성은 그 구성방식에 따라서 달라지고, 내부의 모든 것들은 방식자체로는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차이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리좀적 다양성의 핵심이다.
만약 기관없는 신체의 입장에서 안에 다른 것들이 담기면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까? 다른 물질들이 담기면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될까? 예전에 많이 영화화되었던 다른 사람의 뇌나 신장을 이식받았을 경우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된다고 보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변일 것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중분절'이다. 이런것을 진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항상 있는 것은 없는 것에 대한 이중분절의 한 편이다. 작용과 반작용인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에너지 보존법칙에서처럼 있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그에 따른 형태가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리좀적 다양성이 나오는 토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발을 딛는 공간이다. 그것은 문화양식을 대변한다.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 나오는 농산물과 공기, 기후에 따라서 리좀적 다양성을 가진 기관없는 신체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기억총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욕망을 근거로 해서 라캉이나 프로이트와 다르게 들뢰즈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라캉이나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정신 안에서 무의식이라고 본 관념론자였던 반면, 들뢰즈는 무의식을 물질 전체로 확대한다. 그리고 파토스의 개념을 들뢰즈는 인정하지 않는다.
민네이션, 이해
들뢰즈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베르그송, 푸코의 철학을 종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4원인설을 가지고 왔다. 목적인, 형상인, 동력인, 질료인을 들뢰즈의 이론으로 보면 목적인은 코나투스, 형상인은 '천개의 고원, 기관없는 신체', 동력인은 '욕망', 질료인은 '덩어리'라고 할 수있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코나투스'개념을 가지고서 '존재하려는 욕망'을 덩어리modus에서 부터 추상적 정신까지 끌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질 자체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끌어나오는, 형성해가고 생성해나가는 것을 물질의 욕망이라고 보았고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욕망 자체가 파토스에 점철된 욕망이라기 보다는 존재하기 위한 욕망이여서 이것은 본증인데, 물질적인 욕망이다. 또한 스피노자가 말하는 속성이 이 과정에서 양태로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기관없는 신체이고, 여러가지 양태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리좀적 다양성이다. 이러한 양태가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존재화되는 것이 바로 고원이다. 이것은 천개의 고원이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서는 물질과 기억'을 통해서 물질이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기억을 계속 총체화시켜서 자신이 되어간다는 개념을 가지고 온다. 또한 물질이 토지에서 계속해서 발전해서 고른판으로 나오면서, 다양한 기관없는 신체로 나아가다가 고원이 되고 그것이 추상적인 기계까지 간다는 것은 창조적 진화의 개념을 가지고 온 것이다.
푸코의 철학에서 여러가지를 가지고 왔지만 일단은 고고학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물질의 고고학을 진행했다고 본다면, 에피스테메 혹은 패러다임시프트를 통해서 새로운 판이 만들어진다는 '탈영토화'개념을 가지고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고, 동시대의 과학을 적용하여 설명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들뢰즈의 대한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