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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14. 2018

기호와 혐오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_철학아카데미

20181206_철학아카데미

크리스테바 공포와 권력_김선하 교수님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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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는 구약과 신약에서 희생제사와 율법을 비교하면서 아브젝시옹을 설명하고 있다. 희생제사의 방식으니 살해와 의식, 위치와 장소를 대변한다면, 억압에 대해서는 터브와 금기에서 혐오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바깥으로 몰아내는 아브젝시옹은 부정한 것이되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들이 우리를 살게 만들고(피, 생수의 강, 관계)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은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부정함과 정결함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더러움, 성서


성서에서는 부정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한다.


부정이란 신의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서의 부정을 운명적인 의지에 복종하는 유대 유일 신앙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첫번째 해석이다. 이것은 로버트슨 스미스의 ‘셈족 종교에 관한 강의’에 드러난다. 부정은 신성함과는 이질적인 악마적인 함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관점에서 터부에 대한 일종의 중화작용이다. 이것은 더러움에 대한 의식의 고유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해석은 부정은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의 지표를 뜻한다고 한다. 이것은 바루크 레빈이 주장했다.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악의 정신의 자율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성은 항상 상징 질서를 위반하는 것에 대한 논리작용이었다. 성서에서의 재현은 그것이 악마적인 악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정결과 부정성은 성전 예배 의식과의 관계항 속에 자리잡게 된다. 율법을 통해 분배의 논리, 법칙, 이성 같은 상징적 공동체가 정/부정에 따른 논리를 이용하는 동시에 재현하기 때문이다. 부정이란 상징질서를 어기는 것으로(메리더글러스) ‘성전’ 예배 의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노이어스)



동일성, 전략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해서는 성서의 대홍수 이후에 야훼에게 바친 노아의 희생제의에서 나타난다. 성서에 나타나는 정결과 부정의 대립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순수하고 공고한 동일성이 구축되기도 하고, 구축된 동일성을 분리하면서 성서의 텍스트의 근본적인 근간 위에 기록된다.


신화적인 자료의 구성에 있어 문제가 는 것은 인간과 신 사이의 차이이다. 삶과 죽음, 식물과 동물, 육체와 피, 건강과 질병, 이타성과 근친상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와 같은 것들은 혐오스러운 범주를 말한다. 음식물에 대한 터부, 육체의 이타성과 그것의 절정인 죽음, 여성의 육체와 근친상간, 지형학적 논리학에 따르면 용인 가능성은 장소, 즉 성전이라는 성스러운 장소에 부합하는 항이며, 그것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이항이다. 단순히 논리적인 관점에서는 율법과의 관계항이 된다. 율법은 정결함이나 성스러움으로, 레위기 11장에서 26장까지 요약되어 있다.



물질적, 우의적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은 종교적 예배와 관련이 있다. 성스러운 장소와 즉각적인 연관을 갖지 않는 물질들(음식물, 월경수, 나병, 임질)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정결과 부정의 구별이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근본적이 된 것은 제2의 성정, 즉 바빌론 포로기 이후시대 ‘에스겔’ 이후 특히 이사야 55장에서 66장 이후부터이다.


우의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종교의식의 중심에는 우상 숭배, 성욕, 비도덕 같은 부정이 자리잡기보다는 정결함에 더욱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성전의 기능은 ‘은유적인’ 방업으로 지속하면서 모종의 대립을 이룬다.


물질적인 혐오의 장소는 논리상의 참고기준이다. 성전이라는 성스러운 장소와 성스러운 율법 사이에서 대립항은 없다. 이 둘은 하나의 다른 우 면일 뿐이다. 유일신에 대한 동일성의 전략은 의미론적이거나 논리적인 양상을 드러낸다. 구순성, 죽음, 근친상간과 같은 분리 작용을 장식하는 의미소들은 유일신의 장소와 법을 보증하는 논리적 재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이면들이다.


유일신의 장소와 법은 일련의 구순적인 성질(육체적인 일반적으로는 물질적인, 종국에 가서는 어머니와의 융합)의 비교체에 다름 아닌 일련의 분리 작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정결과 부정의 배치는 유대교가 스스로를 정립하기 위해 이교도와 그들의 모성 숭배적인 제사의식에 대항하여 치러야 했던 치열한 싸움의 증언이다.


각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주체가 스스로 분리하는 투쟁을 종결한다. 말하는 주체나 법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따라 내내 벌여야 하는 투쟁을 종결짓도록 하는 것이다. 정결과 부정의 대립이라는 ‘물질적인’ 의미소는 원초적인 물질적인 관습을 다시 취하는 신성한 금지의 은유뿐만 아니라, 동일서이라는 상징적 법칙의 탄생에 대한 주체의 경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이다.


희생 제의와 부합하는 정결과 부정의 대립은 터부와 희생 제의 사이의 한계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까지 이른다. 신은 터부로 규정해 놓은 규칙의 위반에 대홍수로 벌을 내린다. 노아가 울린 희생 제물은 터부의 손상으로 인해 단절된 질서를 재구축해야만 한다. 그에 덧붙여 두 개의 움직임이 있다.



레위기


공간적인 지시사항이 성경의 레위기에서 나온다. 성결의 판단 기준을 위해서 나타난다. 성경은 더 이상 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제부터 하나의 말에 따른다. 부정 또한 더 이상 단지 매혹적인 요소인 살해와 생ㅁ여 그리고 피의 함의만이 아닌, 모든 논리적인 합일성에 대한 위반이 될 것이다.


성서에서 말의 논리는 어떠한가? 인간으로 하여금 살생치 못하도록 금하는 것과 공외연적인 인간과 신의 차이에 관한 논리에 근거한다. 신명기 14장에서는 인간이 육식 동물을 먹지 않도록 하는 논리의 장을 구축하는 것과 관련된다. 육식 생활은 하지만 육식 동물이나 맹금류와 동화되지 않고, 살생행위도 예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판별 기준만 남게 된다. 새김질하는 초식 동물만을 먹는 것이다. 정결한 것은 수립해 놓은 분류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다. 부정이란 그 분류 질서를 교란시키고 섞어 놓으며 뒤바꿔 놓는 것이다.


살생하지 말지니라’는 최초 계약의 결과로서, 인간과 신이라는 근본적인 대립(식물/동물, 살/피)으로 처음부터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논리적 대립이라는 체계 전체가 된다. 번제와 구분되는 이 혐오의 체계는 이 계약을 전제하고 그 효력을 보장한다. 의미론적으로 삶/죽음 이분법으로 지배되던 체계는 차이의 약호로 바뀐다.



쓰레기로서의 육체, 시체로서의 육체


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고유한 육체의 무한함을 나타내고 아브젝시옹을 야기시킨다. 대변은 육체를 가로지르는 오물이나 부패물, 혼합물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자율적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신진대사로써 영원한 상실의 상태로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가 정결하고 고유한 상태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상실을 치른 후에만 가능하다. 성서에 나타나는 가증스러운 것들은 구순적이거나 음식물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했던 이사야서 6장 5절을 보라.


성서의 가증함은 자주 인간이나 도물과 관련된 오물, 찌꺼기에 이른다. 배설물과 관련된 아브젝시옹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고, 예언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스가랴 3장 1절에서는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등장시킨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께서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그 더러운 옷을 벗으라 한다. 더럽다는 것은 배설물과 관련된 것이다.



희생, 도덕


시체의 가증스러움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소멸시킨다. 도덕으로서의 분류체계를 알아보자.


금지들은 희생제의의 요구와 함께한다. 성서에는 번제 동안 희생 제의와 혐오스러운 것 사이를 벌려 놓기도 하고, 서로 결합시키기도 하는 두 기류가 존재한다. 시체가 숭배의 대상에서 가증스러운 대상으로 전복되는 순간, 그들의 진정한 상화 의존성은 밝혀지는 것이다.


터부는 희생제의에 대한 균형추로 나타난다. 금지의 체계들(음식물이나 그 밖의 것)을 강화함으로써 점점 더 신과의 진정한 상징적 계약을 구축하기 위한 영적인 장, 즉 희생 제의의 장은 침식당한다. 죽이기 보다 희생의 장은 침식당한다.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금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서가 혐오스러운 것을 자꾸 증식시키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터부와 희생제의는 상징 질서를 수립하면서 공생하는 동시에 분리하는 논리에 참여한다. 희생 제의와 가증스러움의 차이점은 희생제물로서 살해 대상이 나를 신과 연결시킨다면, 그 살해 행위 자체가 욕망을 불러일르키고 매혹적인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살해당한 것은 나를 성스러움으로 사로잡고 예속시킨다.


반대로 혐오 때문에 나로부터 분리되고 버려진 대상이 그 자체로 순수하고 신성한 율법을 내게 확신시킨다면, 그것은 나를 우회케하고 스스로부터 제거시켜 추방한다. 아브젝트는 나를 분화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뽑아내어 하나의 체계에 예속시킨다. 혐오의 대상이란 결국 성스러움에 대한 맞장구, 성스러움의 고갈, 즉 종말이다.



구약, 신약


구약에서는 희생제물과 금지를 서로 대립해서 아브젝시옹으로 하는 구도로 놓았다면, 신약에서는 그 관계가 달라진다. 예수닝믜 분석에 따르면 신약시대에는 부정은 내면화되어서 인간의 내면에서 바깥으로 나온다. 복음서에서 나오는 아브젝시옹은 이제 내면에서 계속 발생하는데 억압되어 있어서 ‘선한 사람은 그 선에서 선을 내고, 악인은 그 악에서 악을 낸다’라고 하는 것이나 ‘씨 뿌리는 비유’와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은 더럽게 한다’라는 방식으로 아브젝시옹의 내면화를 이야기한다.


내면화된 아브젝시옹은 사람의 내면 안을 두가지 흐름으로 나누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율법에, 터부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집착흠으로써 마음에 아브젝시옹 된 것들이 쌓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먹음으로써 이제 정결케 된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금기를 지킴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죄의식이 승화되고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근원하는 ‘죄의식’으로 부터 해방된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연결된, 모성과 연결된 욕구와 대상에 대한 오이디프스컴플렉스, 살해욕구에 대한 아브젝시옹이 다른이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민네이션, 생각


대상관계 이론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관계’이다. 자신의 주변의 주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처음에 우리가 어떻게 어머니와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정체성과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게 된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대상과 관계맺기가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Abject의 관점에서 보면 내 면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항상 생명을 잃어 버린 것, 없어져야 하는 것, 부정한 것, 불결한 것, 악의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몸은 항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깥으로 자신에게서 없어져야 하는 것, 있으면 안되는 것들에 대해서 아브젝시옹하게 된다.


크리스테바는 ‘기호학’의 측면에서 아직 상징질서를 만들어내기 전에, 의미가 제자리를 잡기 전에 이름없는 이미지들과 연결성 없는 존재들을 다시 관계지운다. 그러나 이것들을 연결하는 관계는 아브젝시옹의 관점에서 항상 비슷하게 드러난다.


크리스테바에게서 왜 ‘장소’의 개념이 중요한가. 스케일의 측면에서 가장 작은 단위에서 원자나 세포는 사실 자신의 정체성이 장소 안에 갖혀있다. 셀을 기본으로 보면 세포는 세포막 안에서 여러가지를 만들어내고 공유하고 필요없는 것들은 바깥으로 내 보낸다. 장소는 어떻게 보면 잉태와 죽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동일한 공간이다. 장소에서 생명도 나가고, 죽음도 나간다. 세포에서 죽은 노폐물들이 분비되는가 하면, 세포에서 dna를 복사한 rna가 기본적인 생명 정보를 가지고 세포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세포를 만든다. 아브젝시옹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긍정성과 부정성, 정결함과 부정함이 동시에 나오는 것이다. 장소 안에서 어떤 관계가 맺어지는가에 따라서 정결과 부정이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은 어떻게 아브젝시옹을 하는가? 말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말을 하면서 말 자체는 나와 아브젝시옹이 되지만, 그것이 공기를 타고 날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짜증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사랑의 말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부정과 긍정이 모두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네이션, 까달음


결국 인사이드아웃이다.우리 내면에서부터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시작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은 항상 내면에서부터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일 경우 그리스도에게서 아브젝시옹되어서 인간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젝시옹은 터부가 아니라 희생제물로서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젝시옹은 또다시 연결되는데, 금기를 받았으면 금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희생을 받았으면 희생을 통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아브젝시옹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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