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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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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02. 2018

발선과 발악

20181202_향린교회 예배에서

 누가복음 21:25-36

25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0. 들어가기

우리사회에서 악이 계속 증가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인지 사람들의 심성이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살면서 더 많은 악을 경험하고 좌절을 경험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많은 이들은 악의 근원을 밝혀내고 비판하고 없애려고 제한을 가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대안을 내어야 한다. 적어도 신앙공동체에서는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는 구조악이나 발악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1. 발선

악에 대한 대항은 악으로 악을 갚는게 아니라 선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가능하다. 발악에 대해서 발선으로 맞서는 것이다. 거대한 싸움이다. 발악과 발선이 서로 대립하는 시간에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손에 땀이 나고 박진감 넘치는 목숨을 내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발악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선을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 선을 만들어내는 행동은 결국 '사랑'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사랑의 행동이 어떻게 선을 만들어내는지 우리는 경험해보고, 동행해보고, 기대해야 한다. 


2. 발악의 신학

분단시대에 왜 교회는 적폐가 되었는가? 분단을 고착화한 권력의 흐름에서 교회는 그 동안 어떤 과도기를 거쳤는가? 일재잔재 청산에서 미지근했고, 독재에 대한 반대에도 오히려 타협했던 한국 기독교는 대부분 발악에 참여하여 악을 증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선을 만들라는 말씀은 개인들의 의무로만 넘겨졌고, 수 많은 성도들 중에 '정의'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진 몇몇만이 남아서 간신히 자신을 지키는 정도가 되었다. 독재는 개발독재로 변신하면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잉태했으며, 국가부도의 날이 이르자 완전히 자신의 형체를 갖추고 스스로 움직이고 운동하기 시작했다.


3. 인간의 절망

인간은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인간이 절망하는 시대는 미래에 대한 불투명이 자신의 의지를 무력화시킬 때 일어난다. 누군가가 정의를 행하고, 선을 발하여 세상을 변호시킬려고 할 때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무력해진다. 미래는 대부분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 구조의 차원에 머문다. 시간이 바뀌지 않고 동일하게 흘러가고 우리의 공간은 더이상 변화할 것 같지 않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전혀 자신의 욕심을 거두지 않으며, 우리의 권력자들은 항상 정치꾼으로서의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희망이 사라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에게는 '정의'가 무의미하고, '사랑'이 맹목적이 된다.  


4. 예레미야의 희망

예레미야는 포로시절의 절망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일어난다. 예레미야와 같은 문서예언자들의 경우 자신의 시대에 예언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장문의 문서를 남겨서 후세대가 보게 만들었다. 그러니깐 예례미야 자신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포로에서 해방되거나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시는 종말의 날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5. 대림절에 예수님

메시야가 오면 정말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지금과 같이 발악하는 시대에서 하나님나라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그 의미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고, 그 분이 생생한 현실을 살아가셨다. 그리고 하나하나 하나님 나라의 방법으로 선을 만들어가셨고, 지금까지 그 선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6. 하나님나라

크리스토퍼블름하르트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어떤 것인가? 구조와 발악에 갇힌 교회 공동체는 그 자체로 이미 희망을 잃어 버렸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꿈이 없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형식과 예식에 갇혀버린 기성종교, 종교권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님도 들어갈 곳이 없다. 예수님이 오히려 밖으로 쫓겨나고 울고 계실 것이다. 교회공동체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그린 공동체의 이상은 무엇인가? 교회공동체에서 발악에 대한 비판을 개인으로 몰아버리고 자신은 발악에 참여하면서, 개인들은 발선하라고 말하는 이상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이땅에 살고 있는 것이 천국을 가기 위한 목적이라면 우리는 결국 발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악이 더 만연하는 것이 선으로만 구성된 천국을 더욱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7.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와 세상의 신앙은 다르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은 신비이다. 여기에서 꽃이 핀다. 광야에서 꽃이 피고, 메마른 우물에서 샘물이 솟아난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가 임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기대하고 살아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매순간 느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걷는 내내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를 경험하고 이웃들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바로 선한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0. 나오기

선의 결핍에 대해서 나는 더 많은 선을 만들어내는 자리에 있고 있다. 세상의 악이 더욱 발악할 때, 나는 오늘도 자그마한 사랑을 실천하고, 희생을 통해서 공동체 안에서 작은 누룩이 되고 싶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 내 안에서 부터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주인되시는 신앙의 불씨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참고 1. 크리스토프 블름하르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1842~1919)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는 대단히 유명한 목회자였으며 치유자였다.아버지 블룸하르트가 1844년 카타리나라는 여자 교인의 병을 고치고 난 후, 참회운동이 온 마을을 휩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여 죄를 고백하고, 알콜중독자들이 술을 끊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으며, 병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도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열려져 있는 서재 창문을 통해서 병이 낫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1852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괴핑겐 근처로 이사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도움받길 원했다.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부족한 면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양친과 그들을 늘 가득 채우고 있던 영적 온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늘 소외감을 느꼈고 그러한 생활은 나와는 거리가 먼 뭔가 거룩한 것이었고 내 영혼을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의 내적 확신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유명한 신앙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1872년 고트리빈 디투스(카타리나의 언니)의 영면을 지켜보면서 당시 30세이던 블룸하르트는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 사도들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이해할 정도로 “이상스러운 탄생”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후 블룸하르트에겐 모든 의심과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에게 오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맡아 썼고, 목회일도 대리했다. 1880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회의감

더 많은 사람들이 블룸하르트를 찾아오는데, 정작 블룸하르트는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블룸하르트는 병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더럽혀 놓은 온갖 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 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취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거기엔 허위가 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늘 이기적 성향이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향한 구걸을 그만두고 어떻게 죄를 인식할 것인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노력하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용납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으시오.”

개개인의 고난을 중요시하지 말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기적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에 봉사하는 것을 원했다. 블룸하르트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라고 했다.


보다 넓어진 시각과 공개적인 ‘편들기’ 

이후 블룸하르트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사회운동을 벌였다. “예수는 많은 대중, 프롤레타리아 등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자의 편이었다. 기쁜 소식이란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얻어야 할 내용이다.”

블룸하르트는,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과 함께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교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블룸하르트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거룩한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운동을 반교회적인 태도,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몰아붙였다. 밧볼에서 조용히 지내던 블룸하르트가 공개적으로 사회 문제를 거론하게 된 계기는 이른바 ‘교도소 법률안’이었다. 이는 ‘기업의 노동관계 보호를 위한 법’의 초안인데 1899년부터 작성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파업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했다. 문제가 있으면 기업주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선 사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룸하르트는 자본이 갖는 악마적 속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법안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노동자들 편에 서기로 했다.


그는 1899년 9월 19일, 괴핑겐에서 열린 항거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나는 지금 알려진 법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정된 후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서 거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천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의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그의 등장은 위축되어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블룸하르트는 1899년 10월 2일 두 번째 집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오늘날 노동계급의 편에 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히 적은 자들에게 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의 친구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이 되고 내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한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 1900년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어야 합니까?”


민주주의적 신문인 「호펜스타우펜」은 그의 연설을 “사회민주주의의 신봉자 블룸하르트”란 제목으로 뽑아 호외로 발간했다. 이때까지 블룸하르트는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그가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사람들은 블룸하르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블룸하르트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특별한 해명없이 공식적으로 입당했다. 그러자 교계와 정치계의 신문들이 본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블룸하르트는 천대받는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멸시받는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그때까지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렇게 됐다.

비템베르그주교회는 그에게 목사직과 그 외 다른 직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해왔고 그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라고 했으나 블룸하르트는 교회와 싸우지 않았다. 이후 블룸하르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종교적, 정치적 강연들을 했다. 비템베르그 지방의회에 사회민주당 후보로 추천되고 당선되기도 했다.


여전히 깊은 영성을 지녔던 블룸하르트

블룸하르트는 1906년 지방의회 의원 임기를 마치자 재출마 권유를 물리치고 팔레스틴(이스라엘)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1888년까지 대전도운동을 전개하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그후 약 10년 동안 명상과 피정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하느님 나라’를 강조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블룸하르트의 여정이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작 블룸하르트의 생각은 초지일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림’이었다. 그에게 기다림의 공동체는 곧 이 세상에서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교두보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예수가 승리한다!’는 확신 가운데 살았다. 여동생 안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름살 투성이의 손을 가슴에 얹고 조용히 누워 있거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하고 속삭였다.” 1919년 8월 2일 영면한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은 
영원히 남으리라. 
온 세계는 그의 것이 되리라.


※ 이 글은 『혁명적 신앙인들』(1987년, 손규태 편저, 한국신학연구소 펴냄)을 주교재로 블룸하르트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참고 2. 크리스토퍼 블룸하르트의 복음에 대한 5가지 도전


 번째;  친애하는 여러분예수님이 승천하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만약 구세주께서 여전히 육신이 지구상에 머무셨다면 난리법석이 났겠지요우리 모두  분이 여기 계시다 저기 계시다하는 대단한 신사분들이 진행하는 속보에  기울일 겁니다심지어는 신문에도 대문짝 만하게 기사가 나왔을 겁니다그러나 얼마나 다행입니까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 그는 지금 우리와 함께 현존하십니다우리 사이에 걱정에 휩싸여 고개 숙이고배고픔으로  굽혀진 이가 있다면 용기를 내십시오안팎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십시오간절히 부탁합니다예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이것을 확고히 잡고끝까지 인내하십시오그의 약속에 따르면  분은 끝내 승리하실 것이며 그의 자녀들을 모든 악으로부터 구하실 것입니다.  아멘.

*

 번째잊지 맙시다. ‘회심 더욱 기도를  하고성경을  읽고 마음이  영혼들이 함께 모여 성찬에  열심히 참여하도록 자극하는  이상입니다 모든 것이 옳고좋은 것들이지만 이것자체가 회심 아닙니다제가 너무 말이 많다고요그렇다면 이런 말은 제발 삼가 하시길 바랍니다. “ 자나  자나 아직 회심의 단계까지 닿으려면 한참 멀었구먼.” 이런 소리를 하려거든 차라리스스로를 점검하는 것이 낫습니다당신이 그래도 겸손하고 정직한 구석이 남아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 나는 아직 회심하지 못했구나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회심했는데…” 이것이 우리자신을 여기는 마음이어야 합니다이런 태도가 진정한 변화를 이룰  있습니다우리가 마치 회심한 것처럼 여길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  없습니다.

*

 번째만약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요청하십니다마치 사탄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욥을 끝까지 믿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당신의몸과 영혼이 지쳐 쓰려질 때에라도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더디냐고 어둠의 힘은점점 줄어들기 보다는 강해지냐고 물고 늘어진다면어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 너는  자신에게는  너그러운거지나는 감히 네게 조금이라도 짐을 지워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너는  소진되었다느니 어쩌니 하며 한사코 불평만 늘어 놓는구나이러니 내가 어떻게 세상  함께  바꿔 보자고 네게 말이나 건네겠냔 말이다 포기한지 오래되었다…”  언제나자신의 육체나 영혼이  멸종의 위기에 처한 것처럼 바들 떨기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짐을 나눌  있는 기운차고 확신에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나게 될까요이들이야말로 다니엘 7 18절에 나오는왕국을 받게 ’ 성도들입니다  전능하고 자애로우신 하나님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당신의 자녀들이  사명을 이루게 하소서아멘

*

 번째친애하는 여러분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마음을 여셔야만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있습니다우리의 으로 주님의 일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우리는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고우리가 그의 말씀을 전할  마음 문들이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러나 사실 우리가 가르치는복음의 화술법이나 인간적인 방식교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 자체가일하실  있음을 망각하고 말입니다얼마나 인간적인 발상입니까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삶이나  속에 역사하시길 거부합니다그리고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에 말씀이 기적을맺지 못합니다우리 모두얼마나 많은 세대를 거치며 하나님을 위해 지치지 않고 일해 왔습니까심지어는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말입니다결국 우리는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이렇게 전력투구했건만 건진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까우리는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던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물을 확실히 던지긴 하지만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하지 않은  아닙니까?  베드로는당신의 말씀에 따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은 그리스도의 잔잔한 능력 하나만을 신뢰하겠다는것입니다그의 현존하심을 믿겠다는 것이고 분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확신하는것입니다우리 모두 반드시 우리의 자만함을 부인해야만 합니다우리 모두의 지혜 모아서 우리마음에서 깊이 역사하기를 찾고 계시는 성령만을 믿어야 합니다.

*

다섯 번째한번은 여관에 묶은 적이 있습니다당시에는 바젤에 있는 선교회의  부목사로서 선교사들을 가르치러 가는 길이었지요여관 주인의 부인이 나와 함께 앉아서 무얼 가르칠 거냐고 묻더군요그렇게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갑자기  부인이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목사님 말씀이사실이라면 주님께서  오실 것이 틀림없네요아이구빨리 준비해야겠습니다!” 제가 어떤 생각이들었겠습니까? ‘여기야말로 정말 들을 귀가 있는 여인이 있구나 !’ 무식한 여인이었으나  부인은바로 알아 챘습니다복음이  세계에 퍼질 주님은  오신다는  말입니다 세계에 복음이구석구석 전해질 날이 실제로 임박했습니다말세의 증후가 이렇게 많이 나타나는 데도 사람들 사이에 긴박함이 보입니까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의 재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그러다 언젠가우리가 느슨하게 방심하던 중에 갑자기 주님께서 오신다라는 소리를 놓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주님께서 자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면  위에 모든 족속이 통곡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 7)라는 말씀이 실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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