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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03. 2019

타자와 의지

타자로서의 자기자신

20190103_철학아카데미

폴 리쾨르_타자로서의 자기 자신_김선하 교수님



들어가기


분석철학에는 주체가 없고 ‘분석된 사실’만 있다. 그것들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지 않는다. 파생은 되는데 파생된 것들이 주체로 연결도지 않기 때문에 생명력을 잃는다.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리쾨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문제를 가지고 주체문제를 다룬다. 물질성, 신체성, 시간성, 공간성을 고려해 본다면 관념의 질서가 아니라 존재의 질서가 맞는 것이 아닐까?


관념이 만들어 놓은 주체가 빠진 코기토적 질서가 아니라 주체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삶의 양태와 의미, 힘의 의지를 바탕으로 철학을 구성하기 위해서 니체의 비판을 가지고 오는 리쾨르의 아이디어를 살펴보자.


‘데카르트 이후 유럽 지성계의 주된 주제인 인간의 행동에 대한모든 견해를 포괄’하려는 리쾨릐의 마스터피스로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은 자신이 펼쳐낸 모든 철학의 종합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책은 80년대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와 다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문제를 다루고 있다. 구조주의에서는 주체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으나, 주체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던 리쾨르는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자신이 주장한 주체철학을 인정받게 된다.


데카르트 이후 주체철학, 의식철학은 니체를 통해서 19세기에 이미 붕괴의 징조를 보이며 세계대전으로 들통단 헤겔철학의 허상은 붕괴를 확실하게 만들었다.




김선하교수님의 인사이트! 변광배교수님도 오셨다.


리쾨르, 이해


코기토를 구해내기 위한 작업은 ‘의지의 철학 1_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리쾨르는 탈육체화된, 탈공간화된, 유령화된 코기토에 대한 비판을 한다. 따라서 리쾨르는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신체성을 회복한 완결된 코기토’를 정립한다.


‘상징-담화-텍스트’를 통해서 언어화된 코기토를 찾아가는 리쾨르의 여정을 볼 수 있다.



자기성의 문제


‘자기’라는 것은 무엇인가? 관념론적 질서에서 ‘자기성’이라는 것은 사유하고사유하고 사유해서 만들어내고 종합적인 무엇이다, 그런데 정말 맞을까? 이 지점에서 오히려 철학은 삶과 괴리되고 그러므로 주체가 현실과 유리되는 것은 아닌가?


Soi’라는 3인칭 화법을 통해서 분석철학의 토대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자기자신을 보게 된다. 자신을 타자화시키고 객관성을 유지한 다음에 리쾨르가 한 일은 ‘이야기’를 통해서 주체의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이야기’에서 리쾨르는 주체가 이야기속에서 발견되고 시간에서 확실해지는 지점을 찾아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리쾨르는 자기동일성’을 계속 찾차내면서 ‘주체’를 점점 확정해 간다.


‘자기성’과 ‘타자성’은 함께 맞물려서 돌아간다. 변증법적으로 리쾨르는 ‘누가’라는 질문은 던진다. 분석철학자들은 하나의 문장으로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켜 버린다. 그러나 ‘누가’의 문제에서 타자성은 사라지고 ‘주체성’도 사라진다. 분석철학으로는 오직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누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지 못한다.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에서 리쾨르는 이러한 문제를 1,2장에서 화용론과 의미론으로 설명한다.


3장에서는 ‘행동’에 대한 ‘누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찾겠다고 한다. ‘행동하면서 이야기하는 주체’인 리쾨르의 해석학적 주체는 사실 분석적 해석적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주체성은 ‘행동하면서 괴로워하는 인간’이다.


그 다음에 의무론적 주체와 결과적인 주체를 다루면서 ‘윤리적인 주체’로서 이웃에 책임을 지는 주체이자 타자로 주체를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리쾨르는 자기 해석학을 정리하고 있다.


Je라는 자기를 말하면 정립이 되고 Se를 말하면 탈정립이 된다. 그런데 리쾨르는 Je를 Se화 시켜서 ‘이야기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리쾨르, 방법론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은 ‘묘사하다’와 ‘명령하다’라는 분석철학과 행위철학의 두 항을 ‘이야기하다’로 연결하여 ‘해석학적인 해소’를 시도한다.


리쾨르는 attestion이라는 사실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증언’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해석학적 주체’를 말한다. 말하는 주체, 도덕적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장소가 없는 주체를 존재의 자리에도 연결시키면, 아토포스적인 주체를 존재의 자리에다 바로 앉히게 되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피상성만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의도와 믿음, 맥락 안에서 해석과 의미에서 주체를 가지고 오면 거기서는 동일성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주체가 있다. 전체성의 문제는 맥락이라는 컨텍스트의 외연을 확장할 수록 더욱 드러난다. 내가 지금 확정하고 있는 맥락은 계속해서 힘과 연결되고 타자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약속을 통해서 ‘진실성’이 드러나고 ‘의도’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 이 안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자리를 찾게 되고, 이야기 속에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레비나스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나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지고 증명할 수 있는 주체는 자신이 실제 했던 일과 한 이야기를 증거로 가지고와야 한다. 이것은 아토포스적 주체가 아니라 ‘내러티브 주체’이다.



민네이션, 생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나’를 누구라고 ‘누가’말해주는가?라고 했을 때,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주관성이 지배하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언어습관은 사실 나를 말해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들이 나를 머라고 한다’라는 것도 맥락과 관점, 시차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리쾨르는 ‘자기를 타자로 바꾸어서 생각하는 타자성’ 안에서 계속해서 동일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나를 객관화 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이야기’안에서 주체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의미는 해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인생은 ‘현상학’적으로 살고 기억은 ‘해석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 우리는 과거를 생각할 때 해석학을 가지고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때 ‘현재를 해석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니체의 철학에서는 무엇이 문제일까? 힘에 의지는 ‘힘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 물리적인 신체’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빠져버린 인간성에서 ‘주체’는 힘을 잃고 잠자고 있다. ‘누구’에 따라서 사실 힘을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코기토를 ‘의지’를 가진 행동 이전의 신체적인 인간으로 정의하고 싶다. 결국 ‘의지적 코기토’는 결국 계속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기 동일성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이 ‘의식’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자유의지의 문제가 여기서 거론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 리쾨르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자유’가 결여된 ‘의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라캉도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욕망과 의지는 또한 변증법적인긴 한데, 원인으로서 욕망과 결과로서의 의지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그것은 학습된 것이 아닐까?


이야기 안에서 주체는 발견되고, 시간도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타자도 항상 나라는 주체가 바라보는 바로 앞에서 나와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이야기를 하면서 정립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를 하면서 사건과 타자와 시간과 존재들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는 이러한 현실적, 신체적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입장’에서 증언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발화되는 시점에서 이야기 속에서 맥락이 정해지고 그 맥락안에서 존재들의 위치가 토포스적으로 정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네이션, 고민


아토포스적 주체가 아니라면 타자도 아토포스적 주체가 아닐 수 있다. 그럼 다시 쉬운말로 하면 서사에 의한 이야기 속에서 토포스가 있는 주체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자신도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고, 타자도 이야기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타자를 신비로 놓고 ‘아토포스적 주체’로 놓은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은 타자를 고민하다가 말았던 것은 아닌가? 아니면 다른 층위에서 주체를 다르고 있는 것인가? ‘에로스의 종말’은 여전히 주체를 존재의 질서에 위치시키고, 타자도 존재의 질서위에 위치시켜서 만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주체를 말하기도 한다. 잘잘못의 평가를 떠나서 이렇게 해도 주체는 만들어지신 한데 그런데 오늘 이야기로 하면 ‘이야기’가 없는 주체이다. 그것이 오히려 주체를 아토포스적 존재의 질서의 중앙에 놓는 것이 아닐까?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리쾨르의 주체는 문학적으로 볼 때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리쾨르 자체도 취약하다고 말한다.


리쾨르도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의식에 무매개적으로 다가오는 것’과 반대편인 ‘상징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오히려 ‘이야기’하는 주체가 말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이야기’도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강의가 끝난 후 남겨진 텍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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