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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1. 2019

타자와 의지

폴리쾨르 타자로서 자기자신_인격, 지시-의미론적 접근

20190111_철학아카데미

폴리쾨르_타자로서의 자기자신

인격, 지시-의미론적 접근



들어가기


타자로서 자기자신을 들어가면서 우리는 오늘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할 것이다. 인격에 대한 이야기와 계속해서 3인칭으로 화자가 자기성과 동일성을 발견해내는 과정에서 주체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서 구조를 바꾸는 힘을 가진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논의, 배경


언어분석철학에서 linguistic turn이 일어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1919)에서 이러한 언어분석철학을확립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명제 1은 ‘세계는 사실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다.’세계는 사물들과 사물들의 조합인 사태들로 구성되어 있다. 명제에 결합된 사태가 존재한다면 그 진술은 참이다.


경험적 사태에 연관된 자연과학적 진술들이다. 자아, 신, 세계의 의미 등등 신비스러운 것은 이 경계 밖에 놓여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들이 언어분석철학의 핵심적인 테제들이다.



칸트, 초월적 비판철학


초월적 자아는 보통 초월적 통각을 통일시킨 주체를 말한다. 이렇나 초월적 자아는 감성의 직관과 지성의 종합을 수행하는 주체이다.


모든 경험의 필연적 조건은 통각의 종합적 통일(객관적 구성적 종합의 주관)과 분석적 통일(자기반성의 주관)이 합쳐져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칸트 비판, 스트로슨


경험의 통일된 항목들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듣고 하는 등등의 일상적으로 이루어진 경험들이다. 대상 개념의 법칙들 아래에서 이러한 경험들의 통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하는 것들에 대한 일상적인 기술의 일반적인 통일과 일관성 속에서 예시된 것이다.



스트로슨, 인격 개념


신체와 정신의 속성을 나타는 술어들이 모두 귀속되는 ‘인격’개념은 ‘순수 자아의식’이나 ‘의식자체’에 비해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공간-시간 체계는 유일한 것이며 통일되어 있다. 경험이나 사건의 실재성의 조건이 되는 공간과 시간의 연결된 체계는  개체의 동일화를 가능케 한다.



인격, 의미론적 접근


동일화하는 지식 관계reference는 인격personne의 동일화이다. 자기자신을 동일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통일화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화의 차이, 개본적인 개별자로서 인격, 신체와 인격, 인격의 원시적 개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개인, 개인화


인격이란 동일화하는 지시를 통해서 우리가 구분하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은 반복될 수 없고, 분할될 수 없는 표본이다. 개별화는 분류에 반대되는 과정으로 한정된 묘사들, 교유명사들, 표지들이 있다.


한정된 묘사들이란 달 위를 걸어갔던 최초의 인간처럼 구체적인 대상 상황 속에서 말해질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씌여지고 읽히기만 할 수 있는 인공적인 언이이다. 한 부류의 구성원을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 대립시키는 목표이며 최소한의 타자성을 요구한다. 단 하나만이 다른 모든 것들과 대립된다. 이것을 직시적ostensive라고 한다.


고유명사들이란 반복될 수 없고 분할될 수 없는 어떤 실체를 두드러지게 하는 데 그치고, 그것을 특징짓지 않으며, 술어적 창원에서 의미화하지 않고,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동일한 개인은 동일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타자성은 지칭에 통합된다. 동일성과 자기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다. 관련된 부류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외한 하나의 개인을 매번 지칭하고 있다.


표지의 범주들은 인칭대명사(나, 너), 지시사들(이것, 저것), 장소 부사들(여기, 저기, 저 아래), 시간 부사들(지금, 어제, 내일)등을 통합하는 지시소들을 포함한다. 자기 중심적인 특수한 것들로 특징짓는 것과는 반대로 그것을 이것’에 따라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것은 버트란트러셀의 관점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개별화는 술어기능과 구분되는 특수한 지칭 방식들이 있다. 그것은 동일한 부류의 다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하나의 사례이자 단 하나의 사례를 목표로 하는 방식들에 의겨한다. 이 방식들은 이러한 목표 이외에 아무런 통일성도 없다. 동일화의 조작자들 가운데 오직 표지들만이 ‘나’와 ‘너’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른 지시소들에 비해 아무런 특권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직은 세계의 사건으로 이해되는 언술 행위를 지표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기본적인 개별자, 인격


P.F Strawson은 ‘기본적인 개별자들’을 인격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물리적인 신체의 술어들과 인격의 술어들이 귀속되는 주체이다. 이것은 칸트와 반대적인 입장이다. 말하는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사물들 가운데 하나도 될 수 있다. 동일화하는 지시관계는 말하는 대사으로 삼는 것이므로 ‘사물’이 된다.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들에 대해 말하면서 인격들에 대해 말한다.


‘개인들’은 자기 문제가 그 자체 동일성 즉 자체성으로 규정된다.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말해지는 대상으로 삼는 개별자들이 무엇인가가 강조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개별자로서의 인격에 대한 분석은 위치 탐지의 공적 차원에 위치한다.


인격은 시간과 공간적 구조와 관련이 있다. 재동일화에 있어서 다양하게 반복되는 현상들 속에서 그것을 같은 사물로 동일화 하고 있다. 자체성에 있어서는 시간과 공간적 틀 자체의 자체성을 말한다. ‘같다’라고 할 때 유일하고 반복적인 것을 다룬다. 소유대명사들 및 형용사들과 연결된 트겅들로 이해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화용론의 범주가 된다.



신체, 인격


‘개인들’이란 기본적으로 개별자들은 신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인격들은 신체들(공적인 실체들)을 말하고 기본적인 개별자들은 신체들이거나 신체들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적 사건들 또는 사적인 실체들은 표상들이나 사유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인격은 순수인식이 아니다.


정신적 사건들과 의식은 인격에 부여되는 특수한 술어들 가운데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정신적 술어들과 의식은 삼인칭일 수 있는 누구가에게도 부여된다. “내가 나의 신체라고 명명하는 것은 최소한 하나의 신체이고 물질적 사물이다’라는 난점이 발생한다.


신체는 자기soi의 논리적 힘이 인정되는 것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것이다. 기본적 개별자(논리적 주체)의 설정에서 정신적 사건들과 의식을 낙오시키는 대가는 자기의 문제가 더욱 은폐된다는 것이다. 정신적 사건들은 소유의 자기성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삼인칭 인격이 자신을 일인칭으로 누군가로 지칭될 수 있는가? 삼인칭 인격이 정신적 상태들을 느낀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고도 이 제삼자에게 그것들을 부여할 수 있는가? 정신적 사건들의 개념은 어떤 종류의 실체들에 부여되는 술어들이자, 동시에 우리가 언술 행위와 결속된 자기 지칭 때문에 우선적으로 일인칭으로 이해하는 자기 지칭의 운반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격, 원시적 개념


인격이 지닌 원시적 개념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우리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귀속시키는 행동은 아무나, 각자, 사람들이 아무에게나, 각자에게, 사람들에게 수행하는 것이다.


인격은 두 종류의 술어들이 부여되는 동일한 사물이며 the very same thing의 자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귀속시킴의 자기가 생략되어 있고, 신체의 귀속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신적 사건들의 술어들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부여된다. 동일화하는 지시 관계에서 지위는 정신적, 신체적 술어들의 특성을 통해 명시된다. Oneself와 another는 어느 누군가someone와 그 밖의 아무나anyone else로 대체한다. 정신적 상태들은 언제나 어느 누군가들의 것들이다. 이 누군가는 나, 너, 그 혹은 불특정의 어떤 사람일 수 있다.


나는 나의 사유들을 나 아닌 어떤 타자에게 잠재적으로 동시에 귀속시킬 수 없다면 그것들에 대해 의미있게 말할 수 없다. 나의 경험이라는 표현이 누군가의 경험이라는 표현과 등가인가? 인격 개념에 대한 지시 관계적 분석은 언술 행위의 반성적 분석에 속하는 나-너의 언급을 끝까지 피할 수 없다. 하나의 상황은 자기 자신에게 부여되는 어떤 의식 상태가 느껴지는 것이다. 타자에게 부여되는 그것은 관찰되는 것이다.


어떤 의식 상태가 느껴진다고 말하느 ㄴ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귀속, 부여될 수 있다self-ascribable고 말하는 것이다. 스트로슨은 타자 역시 자기 귀속자라고 한다면, 타자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이라는 표현을 설명하려는 데 타자의 타자성을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느껴지는 것과 관촬되는 것이 등가라는 점은 해명을 요구한다.


나라는 누군가와 너라는 타자 사이의 상호성, 해석해야 하는 그 상호성도 설명되어야 한다. 나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기에게a soi와 너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타인에게 a autrui사이의 상관관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반성성의 관념과 타자성의 관념을 동시에 획득해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


리쾨르의 해석학은 어렵다. 큰 그림을 그린 것 같은데 더 큰 그림이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만물을 변증법으로만 이해하는 이에게는 두가지의 경향이 나타는데 하나는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과 대상과 인격을 놓고 실제로 정신과 사물이 종합을 이루는 변증법이다.


리쾨르는 내가 보기에는 이 두가지 변증법을 다 사용한다.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은 ‘주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자기성’과 동일성’을 통한 주체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을 둔다면, 실제적으로 인격이 주체를 형성할 때는 지시관계와 화용론의 변증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때 타자가 탄생하게 된다.


 관념철학과 분석철학의 변증법의 종합은 해석학이 될 것이고, 이러한 해석학이 더 큰 변증법이 되어서 자기를 이루고 타자와 변증법을 통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이것이 다시 공동체와 나의 변증법을 통해서 서로를 종합해 가는 방식을 만든다.


‘해석하고 있는 나’를 이야기 하고 있는 나’가 리쾨르의 주체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직관이 아니라 직관을 반성하면서 해석한 ‘자기성’의 개념을 말하면서 ‘동일성’ 안에서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해석하고 있는 나는 이미 있던 나와 그것을 보고 있는 혹은 인식하고 있는 나의 종합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나는 ‘나’와 ‘타자’가 포함된 전체적인 맥락에서 화용하고 있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한번의 반성을 통해서 자기성과 동일성을 인정받은 해석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이미 타자의 타자성(타자에게는 자기성)과 자아의 자기성을 ‘동일성’의 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격적인 측면에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타자를 ‘인격적 대상’으로 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연결되지 않는다. 객관화시켰을 때도   


‘올드보이’에서 나오는 최민식과 유지태의 관계를 보자. 유지태는 어릴적 자신의 누나를 범한 최민식을 비인격적인 주체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 복수를 하는데, 그 복수의 방법은 그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비인격적이라고 느껴지는 만두만 먹는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최민식은 미쳐간다. 그러나 유지태에게는 그 미쳐가는 것이 바로 ‘인격’이 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기덕의 ‘피에타’는 주인공이 타자의 아픔을 느끼는 타자성을 갖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치우고서는 스스로가 책임지는 행위를 하는 인격이 된다.



민네이션, 고민


‘주체’가 우선인가? ‘구조’가 우선인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고민은 항상 ‘구조’에 앞도당하는 개인이다. 그러나 개인이 주체가 되어서 ‘해석하면서 말하는’ 상황은 조금씩 구조의 틀을 바꿔나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성’을 포기하지 말고 의지에 의해서든, 욕망에 의해서든, 반성에 의해서든 계속해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하는 주체’는 사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긍정적인 이야기나 선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야기의 결과는 주체를 바꾸고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게 아닐까? 그런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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