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사케르 그리고 조르조아감벰
그러니깐
지금.고민은
생명정치라는 것
조에zoe가
동물적 자연적 삶을 표현하는 단어라면
비오스bios는
정치적인 vita activa 활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조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폴리스 안으로 끌여들어서
정치의.도구로 전락시키는 기획이
생명정치라고한다면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게
바로 근대성의 시작이라는 거지
그렇담
생명정치
즉
조에의 폴리스적인 삶이 말야
계약이라는 법의 의해서
자연인이 법인이되고
법인격이 부여되는 형태로
생명정치의.일원이 된다고 한다면
결국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조에의 삶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넣어 놓고
정치의 형태로
통치한다는 거지
그럼 이 형태가 바로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
근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리지
그런 세계사의 구조에서
대한 민국의 근대화가
시작되는 그 지점
바로 외생적 근대화가
왜생적으로 우리에게
작동하던 그 시절이
비로 일제 침략기
제국이.
전방위적으로
우리를 법의 그물망에
포섭시키고
조에의 삶
동물적인 삶으로 끌어내렸던
그시절부터
다시 고민을 시작해야지
우리는
생명 정치를
경험적으로
체화시킨건데
이러한 생명정치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바로
언어와
법
기술
일단 위의 세가지가
기득권을 형성하고
우리를
기득권에 포함된 사람들과
배제된 계층으로 나누어서
포함된계층
체제에
순응적이되고
배제된 계층은
반항적이되겠지
누가 옳으냐의 논의 보단
이미 이렇게 나누어져버린
상태로 역사가 흘러가지
이게 바로
조에의 삶
생명정치 안에
있게 된 결과라는거지
그렇담
지금도
우리는 생명 정치안에
있는건가
별반다르지 않다고 봐
우리는.
여전히
생명정치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입법자들
대한민국을
만둘어가는
국가주의자들
그리고
그 강압과 강제가
국가 안에서
공권력이
되어버리는
지금의 상황
다시 좀어려워졌는데
법이란 테두리에 서
제정권력자들이
정치로
움직이는 지금
국민의 정치
민주주의 꽃이나
대의 민주주의라는
그들이 외치는 슬로건은
결국은 생명 정치의 연장이지
결국 발터벤야민과
한나아렌트가
푸코의.
논리안에서
만나야하는거지
이러한 프레임을
깨는 방식으로 말이야
판을 다시 짜는 방식으로
생명정치를 탈피하자
그래서
답은
공동체라는 거지
주인이 없는상태
주인과 종이라는
헤겔의 도식이
조에와 비오스가 구별되지
비식별역으로 들어오는 로드맵이
필요해
가타리와 둘뢰즈의 논의처럼
기존의 프레임을
탈지층화와 탈 영토화해서
다시 재지층화를
이루어야 해
판을 다시 짜야지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위기이면서 기회지
근대성의 현대성이란
고착화를 탈피하는 사건이니 까
...
몇가지 생각
첫번째로
이런 생명 정치의
기제들인
언어 법 기술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해
두번째로
그런 기제들이
우리의 근대화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용되었고
구조화 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지 살펴보아야 해
아마도 일제 식민지까지
올라가야겠지
그리고 세번째
그렇디면
이 생명정치의 구조를
어떻게 깰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언어
법
기술
역으로 답을 제공해줄꺼야
잊지말자
생명정치가
큰 차원에서는 국가지만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조직과
단체에서도
학습된 인습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
그러니깐
정신차려!
곧 우리가 행하는 순간
그게 우리 안에서
자연스레
코드화를 이루고
시스템을 만들어버려서
결국
우리 스스로에 갖히게 만드니깐
매트릭스를 기억해
스미스요원이 복제하는 방식말야
고민이야
이건 정말 커다란 싸움이야
제국과.맞서는
제다이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
개혁주의적 점진주의자들이
필요한 시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