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Mar 30. 2019

독서와 밤

1박 2일 독서모임 진행하기

0. 들어가기 


오랫동안 친한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했는데, 오늘은 1박 2일로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할 이야기가 엄청 많지만 그 중에서도 깊은 이야기들을 밤새워가면서 하려고 파주 지지향 게스트하우스에서 독서모임을 시작했다.새로운 방식이긴 한데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다.



오늘의 일정


- 1일차 점심 : 파주 북촌손두부

- 커피타임 : 헤이리 마을 커피샵

- 저녁식사 : 헤이리 가나안덕

- 저녁토론 : 헤이리 지지향 게스트하우스

- 2일차 점심 : TGIF



오늘의 도서


1.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 김만권

2. 좁은문, 앙드레지드

3.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4.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5.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1.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 김만권



자유주의는 왜 이렇게 오해를 사고 있을까? 자유주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주의적인 시선으로 자유주의를 보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국가와 개인을 분리하고 자신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개인의 삶을 산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런가? 자유주의는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변화하고, 우리는 어떤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가? 이런 고민부터 해볼까?

자유주의가 복지를 지향해야 하는가? 왜 그런가? 사회계약에 의해서 발생한 근대국가는 국민들 전체의 부와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기본적인 부분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후에 국가의 기능은 시장으로 넘어가고 개인주의가 확대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겪고 있는 피로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나 자신을 위해서 열정페이를 하는 개인만이 가득하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는 다양성과 통일성이 같이 있어야 한다. 자유는 이 두가지의 항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까?

1. 자유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와 분리되는 것이다.
2. 자유주의는 복지를 반대한다.
3. 자유주의 시장에는 도덕이 없다.

효용과 부의 증대가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나의 개인적인 부의 증대와 효용의 증대만으로 인간이 제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이다. 문제는 '인간다운게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서

'소비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모든 것이 소비를 통해서 정체성을 획득하고 관계를 만들어 간다. 소비에 종속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토론

한나아렌트가 말한 '정치적 행위'와 '공론장'은 어떻게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유'를 증진시키는가?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보면 가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어떤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는가가 중요하다. 공론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내려 놓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들어보고 함께 추구하는 가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유지되고 그 안에서 자유가 탄생한다. 이러한 자유를 가지고 사람들은 국가를 다시 조정하고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의 공화국을 만든다.




2. 좁은문, 앙드레지드



작품해설

사실 진정한 성스러움이란 현실적 삶을 경멸하지 않으며, 인간적인 사랑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신비주의자란 세상의 모든 것이 신성한 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리사는 천상에 대한 동경보다는, 지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지드가 비판하는 알리사의 또 다른 오류는 고통과 비애에 대한 갈망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욕망을 스스로 박탈하는 기이한 염원을 지니고 있는데. 이 염원은 그녀에게 있어서 정신적 삶의 원칙이며 종착점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알리사의 실패한 삶을 통해, 신성함이란 결코 값비싸게 치러야 할 의무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찾아야 할 기쁨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결국 알리사가 헛되이 찾으려 했던 신성함이란 인간적 사랑을 통해 육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나치게 의지적이고 금욕적이어서 진정한 성스러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가 숭배하는 신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그녀의 신앙에는 언제나 슬픔이 배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서 환희를 외치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고 있지만, 스스로 그 환희를 체험하지 못한 채 죽어간다.

이렇듯 지드는 알리사의 청교도주의에 대해 준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은 결코 조롱이나 조소가 아니다. 그는 이 작품을 써나가는 동안 젊은 시절의 종교적 열정과 이상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스스로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알리사를 아름답게 그렸다. 그런 까닭에 작가 자신이 일기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독자인 우리도 이 작품을 대할 때마다 번번이 비장한 아름다움에 전율하는 것이다.


작품스케치

“내가 오빠를 바로 이해한 거라면, 오빠는 알리사의 추억에 충실하려는 것 같은데.”

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그보다는, 알리사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충실하려는 거겠지…… 아니,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장한 일이나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 내가 딴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난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아!” 그녀는 별 관심이 없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고는 내게서 얼굴을 돌리고서, 무슨 잃어버린 것이라도 찾으려는 듯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랑을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쥘리에트.”

“그리고 삶의 거센 바람이 나날이 불어 닥쳐도, 그 사랑의 불은 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저녁 어스름이 잿빛 밀물처럼 밀려와 사물 하나하나를 어둠에 잠기게 했고, 그 어둠 속에서 사물들은 되살아나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는 알리사의 방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쥘리에트가 그 방의 가구들을 모두 이곳에 모아두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그녀의 얼굴 윤곽을 뚜렷이 볼 수 없었기에, 그녀가 눈을 감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몹시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자!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해……”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일어나 한 걸음 내딛더니, 힘을 잃은 듯 옆 의자에 다시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램프를 들고 하녀가 내려왔다.


토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앙드레지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은 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싶었을까? 이런 고민들이 시작된다. 우리가 지키고 싶은 신념은 무엇인가? 그 신념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목적들을 제거해야 할까?




3.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가 1950년에 펴낸 소설 <생의 한가운데>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허무주의에 빠져 있던 유럽과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주인공 니나 부슈만의 삶을 통해 사랑과 인생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에서 루이제 린저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란 어렵고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니나는 생의 한가운데 서서 방황을 거듭하면서도 삶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지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신념 속에 살아가는 여성이다. 안락한 삶이나 쉬운 사랑보다도 신념과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긴 니나는 자신의 위선과 가식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방황과 절망 속에서도 참된 삶을 추구하며 인생을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린다.

18년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한 니나의, 방종에 가까운 방황에도 인내하고, 온갖 어려움을 해결해준 슈타인 박사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니나와 슈타인 박사의 삶을 대하는 대조적인 방식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생의 한가운데>는 치열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권태로운 대학생활에 빠진 내게 경고장처럼 다가왔다. 왜 사는가에 대한 고민은 고사하고 삶의 감각조차 무뎌졌던 시기에 만난 <생의 한가운데>는 한겨울 얼어붙어 있던 강이 쩍 하고 갈라지는 듯한 깨달음을 준 책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읽다가 “누구든 의욕 하기를 그치면 늙어가는 거야”라는 구절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발견하고 남은 인생을 참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기억까지 되살아났다.

인생이 힘들고 절실할수록 삶이 던지는 질문에 더 깊이 빠져들라고 온몸으로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니나가 외치는 “나는 살고 싶어요. 나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라는 메시지가 삶에 지친 모든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으면 한다.


토론


슈타인박사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삶의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가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니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졌다. 발터벤야민의 '아우라'개념이 여기서도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생의 감각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에게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없다. 이야기를 하는 순간 자신은 자기자신을 타자화시켜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면 이야기하는 자신은 무의식의 자아가 되고, 그것을 해석하는 자아는 의식이 되는 것이다.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_생의 감각





4. 연금술사, 파울료 코엘로




책 속에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청년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제 자아의 신화를 위해서, 그리고 파티마를 위해서 죽게 되리라. 낯선 기쁨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표지들이 보여준 것은 끝내 사실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을 든 적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물의 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면 그 정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 pp.181-183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토론


우리가 꿈꾸고 있는 것들, 그리고 꾸고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시련들, 사람들이 포기하는 믿음의 종류들. 우리는 계속 꿈을 꾸고 싶어하지만 어느순간 그 꿈을 포기하고 다른 이의 꿈도 비웃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멘토와 같은 연금술사, 사랑을 알게 해준 집시여인을 인생에서 만난다.


연금술에는 3가지가 있다

1. 알지도 못하면서 흉내만 내는 사람

2. 이해는 하지만 연금술은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연금술을 포기하는 이

3. 연금술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연금술을 삶 속에서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사람




5.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환상이 사라진 세계, 경제적인 법칙만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지옥에서 에로스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에로스의 종말』은 “최근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역사의 오랜 전통 속에서 사랑에 강렬한 의미가 부여되어왔다면, 오늘날에는 바로 그러한 의미의 사랑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적은 과연 누구일까? 한병철은 에로스란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인데, 환상이 사라지고 경제적인 법칙만이 지배하는 세계,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 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아의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들」,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을 예로 하여,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사랑,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에 의해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문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이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 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성적인 사랑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일종의 현상학과 오늘날 사랑을 위협하는 실제적 힘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결합한다. [……] 한병철의 주목할 만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고도의 지적 경험이며, 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에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의 수호, 혹은 랭보가 말하듯이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5~13쪽, )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멜랑콜리아」, 18쪽)

사랑과 우울증의 긴장 관계는 「멜랑콜리아」의 영화 담론을 처음부터 규정한다. 영화의 음악적 틀을 제공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사랑의 힘을 강하게 환기한다.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는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는다. 아토포스적 타자인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동일자의 지옥 속으로 돌입할 때 비로소 저스틴에게 에로틱한 갈망이 불붙는다. 강가 절벽 위의 누드 장면에서 관객은 사랑하는 한 여인의 몸, 쾌락으로 충만한 몸을 본다. 저스틴은 죽음을 가져오는 행성의 푸른빛 속에서 기대에 찬 표정으로 팔다리를 활짝 벌린다. 이 장면은 마치 저스틴이 아토포스적 천체와의 치명적인 충돌을 더없이 갈망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멜랑콜리아」, 22쪽)

부재의 부정성은 애무와 쾌락에 있어서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애무는 “달아나는 것과의 놀이,”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행위다. 애무의 갈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난다. 쾌락의 강렬함 역시 감각의 공유 속에서도 타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오늘날 사랑은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검색 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모든 갈망을 폐기한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47~48쪽)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벌거벗은 삶」, 50~51쪽)

오늘날 세워지는 국경의 철조망이나 장벽은 더 이상 환상을 자극하지 못한다. 철조망과 장벽은 타자를 발생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경제적 법칙만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지옥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리된다. 이 새로운 경계를 낳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환상」, 80~81쪽)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다. [……]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에로스는 언어와 현실의 시적 혁명을 위한 매체다. 에로스는 갱신의 에너지원으로 숭배되며, 정치적 행위도 그러한 에로스에서 양분을 얻어야 한다.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 (「에로스의 정치」, 87쪽)


토론


나를 부인할 때 타자가 부활한다. 나르시시즘의 강물에는 나와 연계된 모든 사람들이 나와 동일자로 연결된다. 그러나 신비한 타자를 부활하는 자기부인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에로스를 부활시키고 세상은 새로운 장으로 열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과 품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