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선교 신학 형성의 모색과 방향_김영동 교수(장신대, 선교학)
오늘날 신학의 진보와 보수 성향을 넘어서 공통적인 선교 이해는 ‘하나님의 선교’라고 할 것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이어받은 칼 하르텐슈타인은 ‘하나님의 활동’(actio Dei)이란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였고, 그의 이런 신학사상은 1952년 빌링겐 선교대회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 발전하였다. 좀 압축해서 말하자면, 과거 선교는 ‘교회중심선교’였다면 하나님의 선교 신학의 등장 이후는 ‘선교중심 교회’로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선교중심 교회’란 교회의 본질을 선교로 이해하는 교회를 말한다.
데이비드 보쉬는 교회와 선교의 관계성을 타원의 두 중심으로 보고, 한 중심은 예배와 기도라면 다른 중심이 선교라고 한다. 양자는 상호 배타적인 실체로 보거나 아니면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백성’로서의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던 제2바티칸공의회가 발표한 선교 칙령인 Ad Gentes도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적이라고 함으로써 개신교의 빌링겐 선교대회의 사상에 영향을 입었다. 이와 같이 교회와 선교는 하나님의 활동과 하나님의 선교라는 분명한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바른 교회가 되고 참된 선교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여전히 교회중심적 선교 신학과 실천에 머물러있고,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선교이해도 개인의 회심과 영혼구원 및 교회개척과 확장으로 편협하게 보는 입장이 많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결과 서구 사회에서 나타난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에 의해 종교와 국가, 혹은 교회와 사회(혹은 세상)를 엄격히 구별한 데서 유래한다. 국가권력이나 사회로부터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보존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분리는 어느 정도 기독교에 긍정적 의미를 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 두 영역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고착되어 상호 무간섭과 분리를 낳아 교회의 입지가 사회 속에서 좁아지고, 교회는 세상의 수많은 제도와 기관 중의 하나로 축소되고 말았다.
서구에서 분업화, 다원화, 세속화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화 현상으로 인해 기독교는 사사화(私事化, pirvatization)되었다. 교회는 사적인(private) 영역의 일이요 공적(public) 영역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차단되고 말았다. 공적영역의 형성과 변혁에는 소외되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피선교지 교회는 결코 서구식의 교회와 국가(혹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었다. 많은 피 선교지 교회는 고대 교회 시기처럼 ‘불법종교’(religio illicita)로서 간주되고, 회심과 세례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신앙생활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었고, 여전히 그러한 처지에 있는 교회가 많다. 러시아의 예를 들면, 정교회는 러시아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하는 공식종교라면, 개신교는, 특히 한국인 선교사가 세운 러시아 교회는 법적으로는 공식종교일지는 몰라도 사회통념상으로는 공식종교로서 승인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만 아니라 이전의 사회주의권, 가톨릭권, 이슬람권, 불교권 등 전 세계의 많은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공적’이 아니라 ‘사적’인 활동으로 간주되고, 유형무형의 압박과 장애와 핍박이 많다.
이러한 선교의 한계성 내지는 어려운 점은 선교지의 사회문화적 상황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교회의 좁은 선교이해 내지는 편협한 선교신학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교를 전도로만 축소한다든가, 기껏해야 회심과 교회개척과 확장으로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선교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개교회중심선교와 개인중심선교가 일견 역동적인 선교와 단시일 내에 가시적인 업적을 보여주는 선교로 보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선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서양선교사의 입국으로 시작된 선교초기부터 역사적 위기의 상황에서 교회중심 신앙이 뿌리를 내렸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내세적 타계적 신앙이 더 심화하였으며, 삼자원리에 의해 교회성장을 도모한 반면에 개교회중심주의가 교회의 체질로 굳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선교현지에서 노출되는 한국 선교사 간의 갈등과 비협력, 현지교회를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태도, 현지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는 우월의식으로 한국적 신앙양식의 이식하는 등 여러 가지 한국선교의 약점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주로 개교회중심선교, 개인중심선교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필자는 공적신학에 기초한 공적선교신학의 윤곽을 그리고자 한다. 한국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공적선교를 함께 토론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선교, 통전적 선교, 선교적 교회론과 공적선교의 상관성을 통해 공적선교의 윤곽을 시도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공적선교 신학을 정립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위기와 한국선교의 한계성을 돌파하고 더 열정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공적신학의 배경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공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공적신학과 공적선교를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교회 역사를 회고하면, 비록 로마제국으로부터는 ‘비합법 종교’로 낙인찍혔으며, 핍박과 순교의 희생도 감당해야했지만 기독교는 ‘제3의 인종’으로 알려졌고, 이웃과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공인을 받기까지 기독교는 사회적 책임, 즉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개인적 차원의 성품 변화만 아니라 공적 광장에서의 공동체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노예와 주인,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가 식탁을 중심으로 서로 교제하고 참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외부인에게 흘러 넘쳤고, 전염병을 비롯한 재난이 닥칠 때면 그리스도인은 지역 공동체를 섬김으로써 별과 같이 빛났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탁월한 확신과 열정, 그리고 결과가 어떠하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살겠다는 단호한 결단을 가졌고 실천하였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적 영역만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백성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그리스도인을 창출해내었다.
깔뱅은 인간을 한 개체로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인간 사회 전체를 고려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이해하다. 그러므로 깔뱅은 인간 존재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과 동시에 그 구원을 통해서 개인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깔뱅의 관심은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회복함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깔뱅의 도시선교라 할 수 있는 제네바 성시화운동을 이해할 수 있다. 깔뱅의 성시화운동으로 인해 제네바는 20여 년간 성경이 시민생활의 전 영역에 영향력을 미쳤으며,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었고, 200명으로 구성된 시의회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따라 정치를 하도록 자문했고, 아울러 시민생활 훈육본까지 만들었다.
18세기의 영국 사회는 계몽주의의 영향과 청교도 엄격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민들의 도덕성이 극도로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도시화가 급격하게 추진되고, 도시 빈민 문제와 환경 문제도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본연의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고, 사람들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요한 웨슬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경건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도시에 영향을 미치는 성시화운동을 시작했다. 경건주의에 영향을 입은 요한 웨슬리의 성시화운동은 자기 자신의 삶을 배제한 타인의 변화를 추구하는 배타적, 일방적 전도운동이 아니라 먼저 회심 이후의 자신의 삶의 변화와 경건생활의 끈질긴 추구에 따른 사회참여와 봉사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결 운동은 단순하게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인적이며 사회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매우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요한 웨슬리는 당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를 향해서 회개의 말씀과 함께 성결한 삶을 선포할 뿐 아니라 몸으로 살아냄으로써 영국에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큰 역사를 이루었다.
서구에서 공적신학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화과정에서 진행된 사회의 구조적 분화로 인한 종교의 사사화 현상, 둘째,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수많은 종교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정치와 종교와 분리, 셋째, 근대화화 세계화로 인한 서구식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인한 종교적 실천의 개인주의화, 넷째, 1960년 이후에 나타난 해방신학의 영향, 다섯째, 세계화와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의 상황과 공공의 선을 추구함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기대 등이다.
이와 같이 공적신학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기독교의 본질에 돌아가자는 노력이요, 사사화된 기독교와 교회가 다시 공적 삶의 영역에서 공공의 선을 이루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의 내향화와 대 사회적 신뢰도의 약화와 더불어 나타난 교회의 쇠퇴 현상과 다원주의와 인본주의에 위기를 느낀 교회는 새로운 신학적 반성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기독교 문화를 자랑하던 서구와 북미에서 교회는 다종교사회에서 소수자로 전락하고 교회의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신학자들은 공적신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역사상 기독교는 교회 크게 두 가지 물줄기가 유유히 흐른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온전한 복음 운동의 전인적, 포괄적 구원을 이루는 선교운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구원의 ‘개인주의화’와 ‘교회화’로 공적 광장에서의 복음이 약화된 교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복음운동은 개인과 사회를 치유하는 총체적 복음 운동(Wholistic Evangelical Movement for the World)”이요, “세상의 모든 교회(whole church)가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을 전 세상(whole world)의 모든 사람(whole people)에게 전하는 것”으로서의 통전적 선교이다. 따라서 선교는 단순한 전도운동이 아니라 전인적 지역사회 변화운동이요, 역사와 문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말씀에 따라 창조적으로 변혁하는 운동이요, 말과 행동과 삶으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이다.
공적신학의 정의
20세기 후반부에 와서 공적신학은 교회의 약화와 기독교 선교의 교회중심적 축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사회과학과의 학문적 대화와 상호작용 속에서, 그리고 타종교, 타문화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가운데 등장하고 논의되고 있다. 공적 사회에서의 다문화적이고 다종교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공적신학이란 시민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개념을 핵심 고리로 하여 사회 정치적, 문화 언어적 상상력과 분석을 가지고 신학적 작업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과 같이 정치권력과 자본과 정보가 세계화하여 지구촌이 하나의 세계 시장화하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장애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 속에서의 삶이 글로벌 자본(global capital)에 의해 개인의 사회적, 문화적 삶이 영향을 입고 있으며, 심지어 개인의 영성과 종교적 삶의 양식도 영향을 입고 있다. 세계 내에서의 삶의 구조가 변화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서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라고도 일컫는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삶이 글로벌 자본에 의해 체계적으로 식민지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개인은 위기, 혼돈, 삶의 의미의 상실, 저항할 힘의 상실, 더 나은 삶의 이상에 대한 포기 등의 아노미 현상을 경험한다. 이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예언자적인 사명을 회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공적인 동반자”(public companions)로서 성찰하고 행동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 공적신학이다. 크리스토프 라이트는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공적 광장에서 살아가는 백성’으로 규정하면서, “공적 광장에서 진정하고, 성경적이고, 아브라함적이고, 바울적이고, 통합적인 선교”를 권장한다.
공적신학에 대한 논의가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공적교회”(public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마틴 마티는 다음과 같이 공적신학과 공적교회의 정의를 내린다.
[공적신학이란] 사람들의 삶을 초월적인 준거의 조명 하에 해석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들이란 단순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다원적 경향을 지닌 여러 사람들을 뜻하는데 교회의 언어는 더욱 더 확장된 방식으로 이들과의 대화에 참여한다. 그렇다면 공적교회라고 하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정치(polity)와 증언(witness)을 뜻한다.
‘공적’이란 용어의 의미를 공적 삶을 위한 사회구조적 변형, 공공의 선을 위한 가치관 형성,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기독교 신학과 다른 학문 또는 전통 사이의 간학문적 대화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신근은 공적신학과 공적실천신학(그 중에서도 기독교교육)을 모색한다. 장신근은 공적신학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공적신학이란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사사화 현상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공적신앙 양육과, 공적 공동체로서의 공교회 형성을 통하여 여러 차원의 공적 삶을 변형시켜나가는 것을 목표로, 이들이 확고한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여러 차원의 공적 삶에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윤리적 가치관을 다른 전통이나 학문과의 대화를 통하여 제시하고, 이를 변형시켜나가는 데 기여하는 신학이다.
이와 같이 장신근은 공적신학과 공적실천신학을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 형성과 양육과 공적 삶에서의 영향력 형성에 기여하는 신학으로 정리한다. 교회가 세상의 의제에 참여하며 세상의 변화에 기여하는 선교적 성격을 지닌다.
공적신학의 목적은 이중적으로 표현된다. 하나는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교회 자체의 삶에 고리를 동이고,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형식적 신앙이 공적 상관성(public relevance) 혹은 귀결(혹은 영향력, consequence)을 인정하는 시각으로 해석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기능에 대해 미쉘 히메스와 케네스 히메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들은 공적신학이 “기독교 전통이 담고 있는 지혜가 사회의 웰빙에 기여하기 위해 공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상징과 전통이라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들을 발견하고 소통해 나가는” 것이 공적신학의 열망이라고 한다. 클라이브 피어스는 무엇보다 중요한 공적신학의 목적은 공공선, 공익, 혹은 시민사회로 묘사되어 온 것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공적신학의 궁극적 목적은 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요(롬 14:17-18), 모든 피조물을 풍요롭게 하는 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공적신학이란 기독교 신학의 본질과 특성을 공적 영영에서의 열린 대화, 다중적 담론(plural discourse), 간주체적 수렴, 광범위한 윤리적 지향(discursive orientation), 그리고 다양한 공동체 등의 구성요소를 가진다.
공적신학의 쟁점
지금까지 논의된 공적신학의 쟁점 혹은 방향성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공적 영역에서의 제도적 교회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안셀름의 fides quaerence intellectum과 클리포드 기어처의 “두터운 묘사”(thick description)를 이론적 기초로 하여 개념을 규정하는 이러한 ‘문화적, 인류학적 개념’의 공적신학은 “아주 극단적으로 사소한 일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확장된 인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넓은 해석과 추상적인 분석”으로 이어간다. 이러한 유형의 공적신학은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컨텍스트에서 자세하고 두터운 이해를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토대를 둔 신앙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기독교 신앙의 내적 논리와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 교회 공동체, 그리고 교회 전통에서 기독교 신앙의 특수성과 독특성을 정당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공적신학이다.
둘째, 공적신학의 방향은 사회과학과의 대화라는 간학문적인 신학적 담론의 특성을 지닌다. 이런 방향의 대표적 공적신학자는 맥스 스택하우스와 데이비드 트레이시를 들 수 있는데, 신학적 방향은 서로 상이하다. 맥스 스택하우스는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은 사회과학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공적신학의 안내자로 삼는다. 오늘과 같은 에큐메니칼, 글로벌, 다종교, 다문화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공적신학이라는 것이다.
한편 데이비스 트레이시는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는데, 그에 의하면 공적신학이란 폴 틸리의의 상관방법을 수정한 상관 방법(the revised correlational method)의 관점에서 근본적, 해석학적, 체계적, 실천적 신학으로 규정한다.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세 가지 공적 영역을 제시하는데, 사회와 학계와 교회가 바로 공적신학에 상관성이 있다는 영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적신학이란 세 가지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 하나는 논증의 구조와 논리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가능한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신학적 주장이 교회의 신앙 내적인 논리에 기초하지 않고 일반적인 철학적 논증의 형식에 토대를 두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철학적 논증이야말로 인간 실존에 관여하는 것이고 모든 주장에 대한 주요한 보증과 지지가 된다고 한다.
셋째, 위의 두 입장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신학적 담론의 주제로 광범위한 공적 영역을 포함시킨다. 그 주제란 국가와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복지 증진과 종교 영역과 세속 영역의 경계선을 초월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유형의 공적신학은 종종 공적 의제(agenda)를 신학의 의제로 채택한다. 이 유형의 공적신학이 추구하는 과제는 민주적이고 사려 깊은 시민 사회의 건설, 악의 억제, 폭력의 방지, 국가 건설, 공적 영역에서의 화해,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치유 등이다. 사회정의의 추구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정의 실현과 시민 사회에서의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경계선(인종, 문화, 성, 계급, 종교, 학연, 지연 등)을 넘어서는 투쟁의 동맹을 장려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공적신학은 세 가지 유형 모두 다 세상 속에서의 교회의 본질과 역할이라는 선교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적신학은 자연적으로 공적선교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공적선교 신학 개요
교회의 어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이다. 이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가정으로부터 공적인 장소로 부름 받아 모인 시민의 회집을 말한다. 본래 이 말은 헬라어 정치 사회적인 용어로서 세속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왜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그들의 모임을 유대교의 종교적인 용어에서 차용하지 않고 헬라 문화의 세속적인 용어인 에클레시아로 지칭하였을까? 여기에 깊은 선교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에클레시아란 헬라인들이 익숙하게 잘 알고 있던 세속적인 용어이다. 지금은 에클레시아의 본래 의미는 역사의 기록에만 묻혀있고 기독교적인 새로운 의미만 남아있다. 에클레시아란 헬라의 직접민주제도인 폴리스(police)에서 서기(clerk)가 마을 공동체의 공적(公的, public)인 의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불러서 모인 모임을 일컫는다. 물론 의장의 재가를 받은 서기가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하여 모인 무리를 말하며, 그 회집은 사사로운 사적인 의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공적인 모임이다.
이 말의 신학적인 의미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로,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통해 그들의 모임인 기독교 공동체를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서 모인 공동체로 이해했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인 무리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신적 기원을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값 주고 산 구원의 방주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속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가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는 아니나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성만찬과 예배가 집행되는 공동체다. 따라서 교회는 구약적인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새롭게 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토대로 한 참 이스라엘이요, 참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에클레시아의 자기 이해를 묘사한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개념이다.” 둘째로 교회는 교회 내적인 의제 혹은 사사로운 의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이다. 이 때 공적이란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종교적인 성격과 공적인 교회의 신앙을 함양하고 양육하며 교제하는 것과 함께 교회가 속한 세상을 위한 성사적 의미를 지닌다. 교회는 세상의 빵과 포도주와 같이 세상을 섬기고 봉사하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고 파송 받은 사도적 공동체이다. 셋째로 교회는 마을이나 도시나 어디에서나 동일한 본질을 가진 모인 무리로서 하나의 지역 공동체임과 아울러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임을 드러낸다.
결국 에클레시아란 말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자기 이해와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표지로서 교회는 교회 내적인 일만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교회, 세상과 더불어 함께 생명을 살리는 공적인 성격을 가지는 공동체임을 천명하였다. 교회가 공교회로서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가지는 정체성은 ecclesia(공적 운동)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이런 놀라운 선교적인 성격의 교회라는 명칭은 당시 헬라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사적인 밀교 혹은 사이비 종교인 티아소스(thiasos)나 헤라노스(heranos)로 오해받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곧 교회는 그 출발부터 보냄 받은 자(being sent, 요 20:21)로서 선교적 교회임을 말한다. 선교적 교회란 단순히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 선교라는(missionary by its very nature) 말이다. 고대 교부들도 사도행전에 기초한 소유공동체의 이상을 가졌으며 그에 따라 구제와 청지기 사상을 신앙과 삶에 구현하였다. 그들은 구제와 섬김을 단순히 교회가 가진 여러 사역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이상과 정체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교회가 계승·발전시켜야 할 중요한 교회론이다. 일찍이 본회퍼는 기독교왕국(Christentum)으로서의, 혹은 국가교회로서의 제도화하고 기구화된 교회로부터 “타인을 위한 교회”(Kirche für Andere)로의 획기적인 신학적 지평을 넓혔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 선교학적 교회관으로부터 20세기 교회론의 변화가 출발하였다고 본다. 실로 오랫동안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난 것이다. 교회와 세상은 동일하지 않으나 분리될 수 없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의제에 동참하며 세상을 섬기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본회퍼의 “타인을 위한 교회” 이해가 서구의 부르조아적인 것으로 편협한 것이라고 비판한 테오 순더마이어와 같은 선교신학자는 그 대안으로 타인을 위하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주객관계가 아니라,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상호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타인과 더불어 함께 하는 교회”(Kirche in, von, und mit Anderen)로 그 지평을 넓혀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선교적 본질을 잘 드러낸 말이다.
하나님의 선교와 공적선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전의 선교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구원론적 관점에서 개인들을 영원한 정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둘째, 문화적으로는 동방과 남방 사람들을 서방 기독교의 축복과 특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셋째, 교회론적인 관점에서는 교회 혹은 교단의 확장이다. 넷째, 구속사적 측면에서는 세상이 점진적 혹은 격변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선교 이해를 혁명적으로 전환시킨 계기는 1952년 IMC 빌링겐 대회에서 나타났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 처음으로 분명히 나타났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1932년 브란덴부르크 선교대회에서 칼 바르트가 선교를 하나님의 활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빠뜨릴 수는 없다. 칼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이어받은 칼 하르텐슈타인이 missio Dei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선교는 무엇보다 선교를 하나님의 본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한 점이 획기적인 신학적 전환이다. 선교를 교회론이나 구원론이 아닌 삼위일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한 것이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그리스도를 보내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심이 선교의 근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의 원천(source)이라는 것이다. 선교의 주도권도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교회는 약화 내지는 경시되는 신학으로 경도되어 1960년대에 이르러 WCC 계열의 신학은 선교의 목표를 샬롬이나 인간화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지난날의 서구 교회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연루되어 반선교(anti-mission)의 과오를 범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존재와 선교적 본질을 배제한 것은 신학적 오류이다. 물론 교회는 선교의 주체가 아니며 선교를 위한 도구로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에 참여하는 데 의의가 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예배하고 선교하는 것이다. 예배와 마찬가지로 선교는 교회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과제다. 선교교 활동의 주된 목적은 교회 건설이나 영혼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을 지시하고, 세상에 성자 하나님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에 봉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의 범위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전 세계에 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창조, 돌봄, 구속, 완성과 관련해서 세상을 위해 사역하심이다. 하나님은 교회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보통 인류 역사 속에서도 사역하신다. 하나님의 활동은 교회와 세상을 포함하며 교회는 그 활동에 참여할 특권을 받았다.
하나님의 선교가 과도하게 교회를 배제하고 세상의 의제와 동일시되는 것도 문제지만 거꾸로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 내적인 의제로 편협하게 제한되어 공적영역에서 이탈하는 것도 바르지 않다. 전자는 후켄다이크 신학의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많이 교정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후자의 문제는 여전히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숙제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미네아폴리스에서 신학작업을 하고 있는 재미 한인신학자 폴 정은 공적영역(public sphere)에서의 하나님의 선교가 어떤 신학적 구도를 가지며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한다. 폴 정의 핵심 논지는 세계 기독교(World-Christianity) 시대에 진입한 오늘의 세상에서 공적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논의하는 것은 타당한데, 이 때 하나님의 선교란 공적영역과 세계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건”(Word-Event) 혹은 하나님의 이야기(Narrative)라는 것이다. 세계 기독교 시대의 다문화 혹은 상호문화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 사건”을 형성하는 것이 공적선교 신학의 구성이다. “하나님의 말씀 사건”은 교회 내에서의 소리와 소통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와 공적영역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소리로 공적영역의 제자화를 위해서 준비되고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았다고 한다. “말씀 사건”의 영향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교는 공적선교요, 이 공적선교는 공적영역과 세계 기독교 안에서 바른 선교신학으로 자리매김한다. 폴 정에 의하면, 공적선교 신학이란 “예언자적-디아코니아적 선교학”(prophetic-diaconal missiology)이다.
폴 정이 펼치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의 선교학의 구성, 즉 공적선교학의 형성 논리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체계적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선포와 기독교 신앙에 봉사하는 학문 분야이다. 교회의 실천과 관련하여 신학은 예배, 성찬, 세례, 교제 등의 교회의 영역에 해당하는 요소는 물론이고, 디아코니아와 같은 공적 영역에 해당하는 복음의 메시지 선포와 관련성을 가진다. 따라서 신학의 교회적 차원과 공적 차원은 구별되기는 하나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배, 세례, 성찬과 교제 및 디아코니아는 시민 공동체라는 공적 영역 안에 위치하는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지시한다. 성령은 신앙을 부여하고 섬기는 교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인도한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교적 성격을 생각할 수 있다.
폴 정이 말하는 공적선교는 다문화적, 상호문화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며, 아시아의 해석학인 지행합일(왕양명)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내러티브를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사건에는 참여적 행동이 나타나야 하고, 사람들의 세속적 일과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이 입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진리는 차이 속에서의 유사성(similarity-in-difference)이란 관점에서의 진리임을 인정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진술은 하나의 특수적,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인간 언어의 표현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론과 해석학은 합리적 이성과 신앙의 분리, 혹은 지행불일치를 지향하는 서구 계몽주의적 틀을 극복할 것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다문화적, 토착적, 그리고 카리스마적 지평을 가진 세계 기독교 시대와 공적영역에서의 말씀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러티브의 선교학이 하나님의 선교요 공적선교이다. 공적선교는 예언자적-디아코니아적 활동 가운데 구현된다. 아울러 포스트모더니즘과 세계화 상황에서 복음전도와 사회경제적 정의 추구와 지속가능한 생태계 보전과 상호문화적 소통과 교환 등의 활동에서 “하나님의 말씀 사건”, 즉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와 증거를 새롭게 하는 가능성이 부상하는 것이 공적선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 사건을 통해 교회의 다양한 활동에 공적 차원을 발전시킴으로써 공적선교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공적선교의 대표적인 예는 아브라함에게 임한 “말씀 사건”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을 “열방의 복이라”고 한 말씀은 다른 종교나 아브라함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부르심이요 파송이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말씀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모범이 된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보자기 같은 환상을 보고 부정한 것을 먹으라는 명령을 체험한 후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고, 고넬료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것도 “말씀 사건”의 또 다른 예가 될 것이다. 폴 정은 아브라함의 소명은 요한복음의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된다고 한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있는 말씀사건이란 관점에서 이해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칭의와 화해의 은혜이다. 말씀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의 선교 혹은 공적선교는 교회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펼쳐져있는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는 하나님의 내러티브를 섬기는 예언자적-디아코니아적 제자도의 실천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천은 서로 다른 때와 장소라 할지라도 사랑과 자유와 화해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공적선교는 가난한 자를 돕고 자유케 하는 것, 치유와 화해와 해방의 추구, 피조세계의 생명망의 보존과 생태계 위기 극복에의 헌신, 특히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 등으로 실현되어야 하되, 하나님의 살아 움직이는 말씀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공공의 선과 공익을 진작하는 예언자적-디아코니아적 공적선교는 세계 기독교 상황에서 전도, 제자화, 사랑의 실천은 물론이고 인류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 불공평한 사회 구조의 변혁, 생태계 위기의 극복 등 시민 사회와 공공선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문화적인 감각과 이해가 요청되며, 그 외에도 학제간 연구, 이중언어 사용, 글로칼적(gloval-local) 차원에 대한 민감한 고려가 요청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의 믿음은 공적영역과 긴밀히 상관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와 공적선교
1998년도 북미에서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한 선교적 교회론은 이제 한국에서도 꽤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선교적 교회론의 신학적 가치는 선교적 교회의 목적과 질을 밝히고 그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기여하는 데 있다.
선교적 교회론의 원리 내지는 핵심 사상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선교적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인데, 삼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예배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다.
둘째, 선교적 교회는 끌어모으기식(attractional) 교회가 아니라 성육신적(incarnational) 교회이다. 교회가 처한 지역이나 부름 받은 상황에 관계를 설정한다. 자기의 교회 문화와 양식보다 부름 받은 곳의 문화와 양식에 상관성(relevance)이 있게 관계를 맺는다. 아울러 성육신적이란 말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문화와 현지의 공동체에 참여하여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의 활동에 반응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부족 중에 복음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마사이 족(Masai people in Tanzania) 선교에 새로운 원리를 시도한 빈센트 도노반(Vincent Donovan)을 들 수 있다. 도노반은 이전의 서양 선교가 모두 실패한 것에 문제를 느꼈다. 교육과 의료 봉사를 수없이 했지만 마사이 족을 선교사가 세운 선교기관으로 오게 하지 못했다. 도노반은 선교의 ‘오라 구조’(come structure, 즉 제자도 없는 참석자, 공동체 없는 멤버, 전도와 사회적 책임보다 교회 내부적 일에 몰두하는 교회의 비선교적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성육신적 선교로 전환했다. 현지인들을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지 않고 도노반 자신이 현지인 속으로 들어가는 ‘가는 구조’(go structure)로 변화시켰다. 선교사 자신이 현지인들에게 나아감으로(삶의 자리, 문화로)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다. 복음과 성경에 신실하면서도 현지인의 삶과 문화에 부합하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교회의 구조나 리더십, 예배형태나 교육 방법 등도 현지인이 이해하는 복음의 가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문화적 특성에 맞게 형성해야 한다.
도노반은 하나님 내러티브를 마사이 사람에게 전하고, 그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식으로 복음을 알렸으며, 자기 자신은 선생이 아니라 학생(배우는 자)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교회’라는 명칭도 현지인이 결정하도록 함으로써 선교사는 감독이 아니라 자문 역할로 축소하였다. 그들의 교회 이름을 ‘하나님의 형제’(brotherhood of God)로 정하고 그들 역사에 최초로 남녀가 함께 모여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마사이 문화는 남녀가 함께 식사하지 않아서 교회에 성찬식 거행이 문제가 되었다. 거듭난 마사이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새로운 종족으로 만드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남녀를 동등하게 창조하신 것도 깨닫고 자기들의 문화를 변화시켰다. 그들이 스스로 결정한 하였더니 그들의 전통 문화도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모든 새로운 삶의 양식과 문화와 제도와 법은 두 가지 원리, 즉 성경과 문화의 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창조적이며 사도적으로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상수는 이 모든 일에 성령의 개입이 임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음을, 또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헌신된 사람임을 나는 믿는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님을,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거나 잊은 것도 아님을 말했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우고 동시에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공적선교로서의 선교적 교회는 이전의 자기 자리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교지 문화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라 제3의 지대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셋째, 선교적 교회는 변혁적이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선교는 섬기는 지역사회와 마을을 변화시킨다. 선교는 자기섬김, 자기추구,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한다. 교회는 지역사회(이웃이나 네트워크)에서 하나님 나라의 종이요 표지다.
넷째, 선교적 교회는 제자 양성을 한다.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부르고, 변함없는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을 개발한다. 복음의 가치와 세계관에 의해 세상 문화에 예언자적 기능을 하게 한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재능과 은사와 소명을 장려하고 격려하고, 지도자 양성에 투자하며,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변화를 장려한다.
다섯째, 선교적 교회는 관계적 특성을 지닌다. 환영과 환대를 실천한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에토스와 스타일이 열려 있어 변화에 민감하다. 동료 그리스도인과 독립적 관계 형성을 장려하나 타 그리스도인과 타 공동체와의 상호 의존적 관계없이는 불완전함을 인식한다.
이상의 다섯 가지 원리 내지는 가치를 지닌 선교적 교회는 공적선교의 내용과 상당히 많이 중첩됨을 알 수 있다. 선교의 주체(원천), 동기, 목적, 방법 등에서 전통적인 교회중심적 선교를 극복한 면에서 공적선교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선교적 교회는 본래 유럽과 북미의 교회 약화라는 상황에서의 선교신학과 교역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공적선교는 서구 교회의 약화현상을 포함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세계화 상황을 좀 더 고려하면서 예언자적-디아코니아적 활동을 장려한다.
통전적 선교와 공적선교
회심과 영혼구원과 교회개척과 성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갇힌 자, 억눌린 자를 위한 구제와 봉사와 복지와 인권신장과 자유와 해방을 도모하는 선교를 통전적 선교라고 한다. 지난 30여 년 전부터 변화된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온 교회’(the whole church)가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온 세상’(the whole world)의 ‘모든 사람’(the whole people)에게 전하는 통전적 선교이다. 이에 따르면 첫째로 전도와 사회, 정치적 책임은 양자 모두가 기독교인의 의무이다. 이 양자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나 양자택일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둘째로 전도와 사회, 정치적 책임은 양자 모두가 기독교인의 의무이며, 선교지의 상황에 부합하는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셋째로 사회, 정치적 참여의 한 형태로서 가난과 부의 문제 해결이 중요하며,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기도하며 해결책을 찾는 비전을 품고 그에 따라 행동을 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난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헌신과 참여는 항상 고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통전적 선교 이해의 범주 내에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우선순위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복음주의 진영은 우선순위(priority, primacy)보다 궁극성(ultimacy)으로 이 문제를 풀어낸다. 이것은 선교현장의 적절한 대응을 위한 선교적 반응과 활동은 현지의 필요에 따라 시작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교는 항상 전도로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고,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요청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 선교는 그 과제를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총체적인 선교가 아니라, 결함이 있는 선교다.”
한편, 에큐메니칼 진영의 대변하는 통전적 선교는 선교의 목표를 포괄적인 구원(comprehensive salvation)을 통한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본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은 인간과 사회 및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 자연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울러 이 샬롬의 건설은 성령의 파송을 통한 화해와 새 창조의 실현으로 완결된다. “에큐메니칼 확언 - 선교와 전도”는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교회는 자신의 소명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소망, 새 하늘과 새 땅 등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다. 동시에 교회는 지배자와 권력자 그리고 죄와 불의에 대항할 뿐 아니라, 낙심한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과부와 고아를 위로하면서 죽음의 힘 한복판에서조차도 생명을 경축하도록 부름받았다.
복음이 요구하는 회개(메타노이아)는 이러한 포괄적 구원관과 통전적 선교관의 관점에서 이해 될 때 바른 실천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한 죄 사함과 거듭남, 선교적 본질을 구현하는 교회 설립과 성숙, 사회 구조에 대한 도전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기관들을 변화시키는 데 대한 소명, 죄와 부정에 대한 고발, 과부와 고아를 위로하고 돕는 것, 예언, 인류를 위협하는 과학과 기술의 영역 내에서의 길잡이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의 전 지구적 상황에서의 선교란 연대와 협력과 나눔과 섬김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에큐메니칼 확언 - 선교와 전도”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의 가난한 자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한 약속을 강조하지 않는 선포는 복음의 풍자화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지향하지 않는 정의를 위한 투쟁 또한 기독교적 정의 이해의 풍자화에 불과하다.(34)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에서 열릴 WCC 제 10차 총회에서 공식 선포될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의 핵심 내용은 missio Dei 활동 분별, missio Spiritus 이해에 기초한 선교 방향, 성령의 변혁적 선교 영성, 온 피조물의 에큐메니칼 선교 참여, “세계 기독교” 시대의 선교 의제와 실천, 주변부로터의 선교, 경제와 생태 위기와 불의 속에서 선교 행동, 이기적이고 세속적이며 물질만능의 세계에서 사랑과 정의의 선교, 다종교 다문화에서 생명 선교, 교회 개혁과 선교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WCC 새로운 선교문서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선교와 통전적 선교를 아우르면서도 세계 기독교 시대의 변화하는 지형에 부응하는 공적선교를 지향한다고 본다.
공적 선교의 방향을 로잔3차 대회가 공포한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 Town Commitment=CTC)과 WCC가 새로 발표할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케이프타운 서약’ 제2부의 7번 항목은 “진리와 공적영역”이란 제목으로 공적영역에서의 선교의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국가의 가치관과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부, 기업, 학계가 관련 있는 영역들에 대한 책무를 지는 선교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A)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사회적 가치를 형성하고 공적 논의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 서비스나 개인사업 분야에서 해당 영역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학문적 탁월성과 성경적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학교와 대학교를 지원할 것을 촉구한다.
B) 성경은 부패를 정죄한다. 부패는 경제발전을 침식하고 공정한 결정을 왜곡하며 사회적 응집력을 파괴한다. 부패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는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최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창조적으로 구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터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젊은 기독교 기업가들을 초청한다.
C) 우리는 젊은 기독교 학자들이 성경적 세계관으로 (i) 가르치고 (ii) 훈련시키는 법을 개발해 그들의 주요 전문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세속 대학에서 장기적으로 활동하기를 권장한다. 우리는 학술연구를 무시하지 않는다.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의 내용 가운데 “선교의 성령: 생명의 숨결”이란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은 성령의 선교를 언급한다. 이 영역에서 창조세계보전과 생명,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전통적인 인간 구원 중심의 선교관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의 번성을 선교에 포함한다. 인간 이외의 피조물이 멸망하는 생태 위기의 시대에 인간 구원이 생태 정의와 상호관련성이 있으며, 참된 인간 구원은 “땅위의 모든 생명의 필요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성”(23항) 형성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한다.
영적인 은사도 공적선교적 차원에서 이해된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온 피조물의 화해”를 위해 주셨으며, 영분별이란 억압된 사람들의 해방,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피조물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고, 모든 차원에서 생명의 충만함이 고양되는 곳에 성령이 임재한다.(24항) 동시에 죽음의 세력과 생명 파괴는 악령의 일이다. 이와같이 교회 밖에서 성령의 임재와 악령의 현존을 분별하는 영분별이 있어야 한다. 변혁적 영성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자체 변혁과 선교적 존재로의 변혁을 일으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힘의 오용과 부당한 권력남용”의 회개를 요청하기에(33항) 개인 구원이나 성화의 차원만 아니라 정의 평화 화해 치유의 차원을 가짐을 말한다.
선교는 투쟁과 저항과 해방으로서의 선교로서 “착취하고 노예로 만드는 악령을 분별하고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며, 이것은 “가부장적 이념을 해체하고, 원주민들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인종차별과 카스트제도의 사회적 정착에 도전하는 것을 수반한다.”(44항). 선교하는 교회는 ‘대항문화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로서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가 실현”되도록 헌신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치유와 온전성을 추구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50항).
선교는 생명의 잔치요 생명의 춤이요 생명의 노래이며 생명의 살림이다. 이 잔치는 “풍요로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창조와 풍작에 대한 축제”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선교로 실현된다고 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수를 위한 소수”(pars pro toto)로서 대리적 존재이다. 이러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토대로 필자는 공적신학의 차원에서 공적선교신학의 윤곽을 구성해보려고 시도하였다.
공적신학의 배경, 정의, 쟁점을 토대로 공적선교신학의 이해를 하나님의 선교, 통전적 선교, 선교적 교회론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공적선교의 방향을 제3차 로잔대회의 ‘케이프타운 서약’과 WCC의 ‘새로운 선교와 전도 문서’에 나타난 선교의 방향 가운데 다원화와 세속화 및 지극히 개인주의화되고 생태계 위기의 변화된 세상에서 공적선교의 실천방향을 제시하였다. 선교는 예언자적, 제사장적, 디아코니아적 사명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교회가 사사화를 극복하고 세상의 공적 삶의 영역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을 다하기를 기대하며, 특히 기독교 선교를 박해하거나 제한하는 타문화권 선교현장에서의 공적선교의 실천을 모색과 연구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