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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05. 2019

배치와 연결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핵심

천개의 고원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어려워서 문을 열기도 전에 닫아버려야하는 과제와도 같다. 그러나 하나씩 하나씩 부분적으로 짤라서 이해하고 붙였다고 해보면 또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리좀적 다양성이 나오는 방식으로 이들의 생각을 리좀적으로 이해해 보자. 오늘은 핵심만 간추렸다.





천개의 고원, 6가지 개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의 결론의 장에서 여가지 개념들을 요약해서 설명한다.

S_지층, 성층작용Strates, stratification

자연 또는 질료를 다루는 면에서 이중분절이 먼저라는 점을 제시한다. 질료와 형식, 내용과 표현이라는 이중성은 한 몸체에서 두 갈래인지 두개의 다른 법칙인지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전자들의 경우는 경험의 총체에서 파악하는 것인데 비해 후자들의 사고는 분할과 절단된 이원성이라는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연역하는 것이다.

지구라는 단위의 총체는 사물들의 다수의 형태들을 만들어 왔고 또한 총체 속에서 움직임을 계속하는 다양한 변용태들을 표현해왔다. 그 지구는 지층들을 형성하듯이 추억처럼 사물의 층위와 정도를 구별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또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면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력(권능)을 지층과 더불어 표현해 왔다.

왜 고고학이 아니라 지질학인가에 대해서, 고고학은 추억의 층들을 파고 들어가 지층이 만든 내용을 주목하면서, 층위가 다르거나 다른 솟아난 지층에 등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아울러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두 저자는 층위의 문제가 아니라 배치물의 문제로 바꾸어 보았다. 지층에는 단층 현상도 있고, 마그마가 솟아올라 정상이 아닌anomalie 층으로서 새로운 층위를 형성하기도 하듯이, 삶의 영역에서 상식적 관습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단절(봉기, 저항, 항쟁)도 있어서 상식을 넘어서 양식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표현의 솟아남(전복, 혁명)이 있으며 베르그송의 표현 방식으로 고등양식도 있다.

A_배치물Agencements

지구라는 측면과 달리 삶의 총체성에서 여러 배치물들을 지층과 달리 영토를 지니고 있다. 배치물은 영토를 즉 지구 환경을 탈코드화한다. 즉 생태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배치물들은 유기체, 환경, 개체의 행태를 넘어서는 내용과 표현을 생산해낸다. 손이 이동의 수단을 넘어서 도구를 다루듯이, 혀가 먹는데 사용에서 발성의 포현으로 전환하듯이, 표현에는 기호체계가 나오고, 내용에는 실행의 확장이 있다는 것이다. 변용태의 실행이 있다는 뜻과 같다.

표현에는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나듯이(언어, 기표), 내용에는 활동성의 확장(도구, 컴퓨터)이 일어난다. 배치물들이 탈영토와 확장으로 도주선을 만들며, 또는 전쟁기계로서 탈영토화의 여러 선들을 만든다. 여기서 생명체의 배치물에서는 새로운 생성으로 리트로넬로 이상으로 여성되기, 동물되기, 광물되기에도 이른다.

우선 겉보기에 지층(추억)도 배치물(실체, 신체)도 탈주선의 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 선(계열)들의 경향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추억들이 관습과 습관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가는 측면이 있는데 반해서, 새로운 길을 뚫고 다른 길을 마련하고자 하는 흐름(연속성)은 여전히 내재해 있다.

전자는 가는 길과 방향이 정해져 있어서 예측과 실행에서 반복이 용이한 편리에 따른다는 점에서 홈패인 공간을 간다.(톨의 방식) 이에 비해 후자는 물결이 퍼지듯이 여러방향으로 도는 예측불가능하고 범위를 정할 수 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매끈한 공간으로 퍼져간다.(결의 파동)

전자가 건전한 도덕과 질서라는 측면에서 중요시한다고 보면, 후자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통일된 단위의 진행처럼 여긴다. 이에 비해 후자는 특이성을 지닌 자의 별종의 행동으로 여긴다.

R_리좀Rhizome

이 특이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체이며, 리좀이다. 또한 1227년에서 제시하듯이 노마드이며, 1914년에서 해명하듯이 위계를 이룬 계급이 아니라 무리, 즉 인민이다. 이들은 전자처럼 대열의 뒷꼭지만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판이라는 진동을 달리 바꾸려 하면서, 촟체적 흐름의 진행을 강도와 속도를 지니고 진행한다는 점에서 정념과 파동이다.

이런 운동방식에는 항상 자연의 내재성과 끈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의 실행에 닮았다. 게다가 패인 공간에서 선의 운동이 편집증의 징후를 남기는 것과 달리, 파동의 확장에서는 방향이 전혀 다를 수도있고 비슷한 방향이라도 가지치기(각도)와도 전혀 달리 이어지고(접속) 솟아난다(창발)는 점에서 분열현상이라 할 수 있다.

리좀의 흐름은 다양하다. 패인공간의 선을 달리기도 하며, 절단이 있고(갈라치기), 층위라는 점에서 파편화의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 다양체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안은 내재적 욕망과 정념을 지니고 있기에 표면의 길과 배치되는 경우가 달리 가로지르는 위험도 있다. 게다가 리좀에는 본성적(자연적) 권능의 힘이 항상 현재에 닿아 있어서 권력에 대항하여 흐름을 만드는 탈주선의 길도 있지만, 파시즘에서처럼 단순 파괴로 돌아서서 죽음의 선으로 갈 위험도 있다.

리좀은 하나의 단위처럼 보이지만 다양체로서 총체이며, 다양한 변용태들과 다양한 변이들을 생성하고 환경과 영토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영역(추상기계)을 만들어 갈수 있다는 점에서, 권능의 발현 지역(지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의 연관 속에서 창발을 실행한다. 지방과 온지구 사이의 내재적 연관, 즉 생태적 연관을 공감, 공명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 겉보기에는 불연속적인 다양한 변용태와 변이가 내재적으로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C_고른판, 기관없는 몸체_Plan de consitance, Corps sana oranes

리좀이 펼친 다양체의 결들이 표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이제 표면은 톨들의 집합이 아니라 결들의 진도와 파동이며, 그 파동 위에서 흘러가는 변용태들과 변이들이 있다. 이들은 물결위에 나뭇잎이 흘러가듯이 물결의 파동은제자기 운동을 한다. 이런 결을 고른planomene평면이라 부르자. 고른 평면 위를 가로지르는 현실태로서 개체 또는 개인이 내재성과 연관없이 활동하는 측면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심층과 연결이 끊어진 것으로 물위를 떠 있는 낙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고른 평면 안에 있으면서 그 위를 속도를 지나고 변용태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변용태의 원형적인 것을 기관없는 신체라고 부른다. 이 변용태는 추억의 집합이 아니라 기억총체로서의 현실태이다.

고른면과 기관없는 신체는 양면성이다. 안과 겉이다. 양태적 측면에서 기관없는 신체가 능동적이고 고른면이 수동적이다. 고른 판위에서 능동성으로서 기관없는 신체는 연결접속을 증대시키고 창조성으로 나아간다. 이를 저지하는 수동적 측면이 있고, 또는 이를 방해하는 암적 존재가 있다. 타성이 있고, 권력에 포섭된 전쟁기구들이 있다. 전쟁기계는 연합의 공감을 통해서 확장해 나간다. 예술, 발명, 과학(생명, 생태), 철학(역동)에서 이루어진다.   

D_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

이제 이 능동성이 생산하는, 실행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탈영토화이다. 표면에서 탈영토화의 효과는 다양하다. 우선 재영토화에 흡수되는 수동적일 수 있으며 기표작용적 체계에 흡수된다. 또는 재영토화를 가로질러 스스로 내재성을 포함하고 의식적 차원에 머물면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주체적 기호체계의 경우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상대적을 넘어 절대적일 수 있는데, 탈영토화의 길이 열려 있다.

이런 절대적 탈영토화는 우선 리좀의 흐름에서 배치물들 사이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탈주선을 행하면서 다양체들을 표현하는 것인데 실행의 장도 열려 있다. 또한 그리고 심층의 내재성과 연결되어서 강도 있는 솟아오름도 있는데, 이 분출은 운동에너지로만 충만한 것과 같아서 내용들(배치와 선들)과 연관없이 탈영토 자체가 새로운 대지 또는 새로운 우주를 만든다. 고원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운동은 선으로도 우너으로도 아니며, 회오리 즉 나선운동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근원운동을 이렇게 보았고, 우리가 추측하기에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욕망운동도 회오리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로 상대적 힘과 제한적 절대적 권능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M_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Machines abstraites(diagramme et phylum)

그러면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인가? 이 위에서 실행되는 사건들은 어떤 초월적이고 완전한 이데아가 있어서 실해오디는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욕망들이 분출되어 실행되는 것이며, 즉 추상적 기계들이 있다.

상대적과 절대적 배치들에서도 추상적 기계들이 있다. 추상적 기계들은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점들이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형식적이지 않은 기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질료-기능들의 다져진 집합(위상과 문) 즉 추상적 상위이다.



천개의 고원, 핵심

사회와 현실에서 고른판을 바탕으로 배치들의 내용과 표현이 드러난다. 이 판은 진동으로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불연속적 배치물의 분자적 똔느 분자그램적 활동에서 열려진 활동의 몸체가 추상기계이다. 이 기계가 고른 판에 첨점을 만들 때 '고원'이다. 따라서 이전과 전혀 다른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열어간다. 내재적이고 특이성을 지닌 추상기계는 추상적 절대성을 배제하고 권능과 창조성으로 변용, 생상하는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사회성에서 만든 두 가지 형태가 전쟁기계와 국가 장치이다. 전쟁기계가 전쟁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닌데, 국가 장치가 인민을 수동으로 또는 포획하여 영토 속에 속박시키는데 대해 전쟁기계는 탈주선을 만든다. 전쟁기계는 열려서 접속을 한다.

이런 연결접속은 변이들과 변용태들의 열린 활동과 이어지는 면에서 고른 면을 그리고 그 토대 위에 매끈한 공간을 형성한다. 이 추상적 기계가 형상하는 공간의 위상에서 총체성을, 그리고 기존의 공리화 되었던 것을 포함하는 총체성을 이름하여 기계권une mechanosphere는 인민이라는 자유로운 신들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민네이션, 생각

노마디즘은 전쟁기계이다. 다시 말하면 정해진 것이 없이, 어떤 상징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불쑥 드러나는 것이다. 전쟁기계는 이미 굳어진 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대는 항상 전쟁기계 때문에 발전하고, 세상은 유목민들의 움직임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다. 전쟁기계는 리좀적 다양성에서 탄생한 어떤 무리이지만, 그것이 기획되거나 전략화되지 않고 자생적으로 스스로 등장하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서로 공간과 공명을 사용하면서 물리학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 이야기는 상상과 생각 혹은 이념에서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연결과 배치를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베르그송 그리고 스피노자는 물질에서 발전해서 정신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고, 헤겔과 플라톤은 관념이 물질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원자 안에 구조가 밝혀지면서 허공의 공간에 분자가 존재한다고 하는 증거가 나오면서 관념론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들뢰즈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서 ai로 발전하게 되면 마빈 민스키의 논리가 나온다. 인공지능의 기초를 만들었던 민스키크는 들뢰즈의 철학에서처럼 배치와 연결을 통해서 작은 단위의 데이터가 하나의 에이전트를 이루고 이러한 에이전트들이 모여서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패킷 혹은 바이트, 메가, 기가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사는 이렇게 현실을 만들어내는 2가지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는 지층에서 배치물들까지 가야 이해가 된다. 즉 기관없는 신체의 핵심은 신체가 있고 그 다음에 기관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내부의 구성은 그 구성방식에 따라서 달라지고, 내부의 모든 것들은 방식자체로는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차이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리좀적 다양성의 핵심이다.

만약 기관없는 신체의 입장에서 안에 다른 것들이 담기면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까? 다른 물질들이 담기면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될까? 예전에 많이 영화화되었던 다른 사람의 뇌나 신장을 이식받았을 경우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된다고 보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변일 것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중분절'이다. 이런것을 진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항상 있는 것은 없는 것에 대한 이중분절의 한 편이다. 작용과 반작용인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에너지 보존법칙에서처럼 있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그에 따른 형태가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리좀적 다양성이 나오는 토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발을 딛는 공간이다. 그것은 문화양식을 대변한다.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 나오는 농산물과 공기, 기후에 따라서 리좀적 다양성을 가진 기관없는 신체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기억총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욕망을 근거로 해서 라캉이나 프로이트와 다르게 들뢰즈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라캉이나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정신 안에서 무의식이라고 본 관념론자였던 반면, 들뢰즈는 무의식을 물질 전체로 확대한다. 그리고 파토스의 개념을 들뢰즈는 인정하지 않는다.


민네이션, 이해

들뢰즈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베르그송, 푸코의 철학을 종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4원인설을 가지고 왔다. 목적인, 형상인, 동력인, 질료인을 들뢰즈의 이론으로 보면 목적인은 코나투스, 형상인은 '천개의 고원, 기관없는 신체', 동력인은 '욕망', 질료인은 '덩어리'라고 할 수있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코나투스'개념을 가지고서 '존재하려는 욕망'을 덩어리modus에서 부터 추상적 정신까지 끌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질 자체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끌어나오는, 형성해가고 생성해나가는 것을 물질의 욕망이라고 보았고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욕망 자체가 파토스에 점철된 욕망이라기 보다는 존재하기 위한 욕망이여서 이것은 본증인데, 물질적인 욕망이다. 또한 스피노자가 말하는 속성이 이 과정에서 양태로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기관없는 신체이고, 여러가지 양태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리좀적 다양성이다. 이러한 양태가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존재화되는 것이 바로 고원이다. 이것은 천개의 고원이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서는 물질과 기억'을 통해서 물질이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기억을 계속 총체화시켜서 자신이 되어간다는 개념을 가지고 온다. 또한 물질이 토지에서 계속해서 발전해서 고른판으로 나오면서, 다양한 기관없는 신체로 나아가다가 고원이 되고 그것이 추상적인 기계까지 간다는 것은 창조적 진화의 개념을 가지고 온 것이다.

푸코의 철학에서 여러가지를 가지고 왔지만 일단은 고고학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물질의 고고학을 진행했다고 본다면, 에피스테메 혹은 패러다임시프트를 통해서 새로운 판이 만들어진다는 '탈영토화'개념을 가지고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고, 동시대의 과학을 적용하여 설명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들뢰즈의 대한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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