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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3. 2016

현상과 해석

가다머_박성철 박사

모든 현상은 해석의 영역이다

그래서 현상이 먼저 있고 해석이 그 다음이다


현상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조합하면

현상학이 되고


현상학에서 전해지는 의미를 조합하면

해석학이 된다


문제는 어느부분까지 해석의 영역으로

둘 것인가에 따라 해석학자들이 갈린다


해석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현상안에 진리가 있다기 보다는


해석을 통해 인간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가다머의 해석학은 시작한다

지평이 넓어지고 융합하는 작업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의식과 감정은 항상 몸에서 일어난다


인간의 몸에서

해석학과 현상학 모두


르네상스의 후손들이라서 말이다

나는 특별히 메를로 퐁티를 좋아한다


가다머




들어가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을 통해서 인간은 삶의 지향성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지향성이 과거로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까지 뻗혀나가는 과정 가운데 해석학의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다머의 해석학은 바로 지향성을 바탕을 둔 현상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존재와 해석이 일치가 될 때 진리가 밝혀진다면, 현존재인 내가 이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재 인식에 들어간다.가다머는 현존재 개념을 하이데거에게서 가지고 오고, 자아의 인식을 넘어서 타자의 인식을 해석학의 방법론으로 정의내리는 데 있어서는 하이데거보다 앞서간다.


개요, 가다머


가다머에게 해석학은 인간의 이해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이며 철학적인 과업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이해하고 해석해서 자신을 정의내렸다면, 가다머는 이러한 방법론의 끝에서 타자의 이해, 인간의 이해의 방법을 해석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한다. 가다머는 슐라이마허의 해석학을 받아들이지만, 부정적으로 파악한다. 훗설에 대해서도 초기작으로서 인정하지만, 깊게 다루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훗설은 자기 인식에서 시작해도 충분히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정신과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다. 텍스트와 해석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인식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는데, 여기서 텍스트가 속한 지평의 특수성과 현재의 해석자가 지닌 특수성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긴장이 발생한다. 각자가 지닌 지평의 특수성이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언어라는 공동의 기반을 통해 두 지평 사이의 융합이 가능하다. 지평융합은 텍스트와 해석자가 대화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대화를 여는 것은 기계화될 수도 없고 방법적인 것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해석자가 텍스트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결국 해석자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접근하는 해석자의 관심과 이해는 영향사'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해석학의 목적은 해석자의 관심과 영향사 사이의 대화를 통해 의미의 소통을 이루어 내는데 있다. 가다머의 영향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전통과 권위에서 유래하는 선입견 혹은 편견 혹은 선이해 혹은 전이해가 부정적ㅇ니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텍스트 이해의 과정은 언제나 해석자의 선입견/선이해와 텍스트의 의미에 참여하고자 하는 해석자의 관심에 의해서 시작되며 지평융합을 통해 해석자의 선입견/선이해가 수정될 수 있다. 이처럼 해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직업이며, 텍스트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무한대로 열려 있다. 해석학의 과제는 텍스트 속 고정된 진술들을 대화로 변형하고 지나간 정태적인 과거를 다시 역사의 과정 속에 데려오는 것이다.



진리와 방법, Wahrheit und Methode

- 서론


텍스트의 이해와 주해는 학문의 염원일 뿐 아니라 분명 총체적으로 인간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에 속한다. 해석학적인 현상은 근원적으로 결코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가다머에 따르면 해석학 연구는 예술과 역사적 전통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제 1부, 1장

예술의 경험에 있어 진리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제 1부 1장 미학적 측면의 초월 : 데카르트처럼 개인의 의식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참여자가 됨으로써, 즉 현실의 형성적 현전을 경험함으로써 접근한다. 정신과학과 인문학, 문학과 사회학에 있어 방법'의 역할이 무엇인가? 이전의 인식론 속에서 그것은 과학을 위한 것이었지만 인문학과 정신과학은 교양bildung 즉 사람을 형성하는 문화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교양은 문화 이상의 것을 촉발한다. 교양은 인간의 형성에 개입되기 때문에 윤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양은 교육과 관계되며 타자적인 것에 대해 자신을 개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칸트, 가다


데카르트처럼 칸트도 개인주의자로서 공동체와 전통, 역사를 무시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칸트는 공동체적인 것을 취향의 문제로 격하시키지만 취향은 지식이나 진리가 아니라 미학의 차원에서 전개해야 할 문제이다. 칸트가 남긴 중요한 유산은 미학을 주관화한 것이다. 주관화된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순전히 보는 살마의 관점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미학 자체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개념화한 것이다. 헤겔은 미학과 예술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역사적 체험에 연결시킨다. 기본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남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체험은 인식론적인 것이 된다. 예술 언어와의 모든 만남은 완결되지 않은 사건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 자체도 사건의 일부가 된다.


-1부, 2장

예술 작품의 존재론과 해석학적인 의미를 이야기한다. 놀이하는 사람이 자신을 놀이 속에서 상실할 때에만 놀이는 그 자체가 가진 목적을 성취한다. 놀이의 주체는 놀이하는 자들이 아니라 놀이가 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놀이하는 자의 의식보다 놀이 자체가 우위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인정된다. 놀이의 규칙은 놀이하는 자들이 행하는 방식과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규정한다. 모든 놀이에는 어떤 과제를 가진 상태로 놀이를 이행하는 사람이 드러난다. 놀이는 놀이의 영역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인다. 예술의 존재는 미학적 의식의 대상으로서 정의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나의 논지다. 예술의 존내느 표현 혹은 현전화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 사건의 일부며 본질적으로 놀이로서 놀이에 속해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놀이나 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객관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각각의 표현이 발생할 때마다 이전의 것과 달라지지만 놀이 또는 예술 작품의 현재적 실재성은 그 표현과 분리될 수 없다.



슐라이마허, 가다머


슐라이마허조차도 자신의 해석학을 기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가다머에 따르면 슐라이마허는 낭만주의에 압도되어 있는 동시에 계몽 주의에도 충분히 개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는 합의에 가깝다는 슐라이어마허의 의견에는 동의한다. 물론 이해와 합으의 구체적인 내용적 차이를 간과했다는 점은 비판한다. 슐라이어마허적 의미에서 역사적 해석은 너무 주관주의적이다. 질문과 답변에는 최소한의 주의만 기울이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슐라이어마허는 18세기의 희생양으로 떨어지고 만다. 가다머에 따르면 논평적 측면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재기발랄하지만 내용적 측면에서 지나치게 교리적이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역사적 해석은 랑케에게서도 드로이젠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최초의 역사적 해석은 낭만주의적 해석을 의식적으로 채택하여 그것을 역사적 방법으로 확대한 딜타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제 2부, 1장


제 2부는 정신과학 속 이해에 대한 진리에 대한 질문의 확장을 다룬다. 제 2부 1장은 역사적 준비를 다룬다. 후설의 주요한 기여는 해석학에서 중대한 요소인 지평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후설의 지평 개념은 고정적이지 않고 우리가 전진할수록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후설은 지평 개념보다는 생활세계 개념을 발전시킨다. 선입견은 계몽주의의 근본적인 선입견은 선입견 자체에 반대하는 선입견이다. 이는 전통에서 그것의 힘을 부정한다. 통계는 일련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목적과 표상화되는 방식에 의존한다.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선입견이다. 통계에 의해 정립된 것은 사실의 언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어떤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지, 또한 다른 질문들이 제기될 때 어떤 사실이 말하기 시작하는지 하는지 하는 것은 해석학적 질문들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해석학적이다.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이해될 수 없는 단언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딜타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반성과 전기라는 주요한 요소가 아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에 속해 있다. 개인의 선입견은 그의 판단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게 그 조재의 역사적 실재를 구성한다.


영향사, Wirkungsbeschichte


계몽주의가 무너진 시대에 가다머는 권위와 전통의 복원을 탐구하였다. 권위는 맹목적 복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권위는 인정에 근거한다. 즉 권위는 자신의 한계를 지각하면서 타인이 가진 더 나은 통찰력을 신뢰하는 이성의 행위에 의존한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이러한 측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전통과 역사적 연구 사이에 반정립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간적 간극과 영향사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지평들의 융합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지평은 절대 완전하게 결합되지 못하며 따라서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간극은 존중되어야 한다. 역사적 텍스트 또는 상황에 대해 마땅히 질문해야 할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야 한다.


지평, Horizont


어떤 특수한 시점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평의 개념은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지평은 우리가 그 안으로 움직여가는 어떤 것,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지평은 언제나 움직임 중에 있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작업은 역사적 의식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을 타자의 자리에 놓아봄으로써 타자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적용, Anwendung


타자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질문과 대답의 논리를 이야기한다. 이해는 언제나 텍스트가 이해되도록 그것을 해석자의 현재 상황에 적용시키는 작업과 연관된다. 이런 관점은 낭만주의적 해석학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경건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적용은 준리된 제 3의 것이 아니라 이해에 통합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이 해석학의 핵심 문제이다. 타자에 대한 개방성은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도덕적 지혜와 기술적 이성을 구별한다. 이해는 도덕적 지혜와 관계가 있다. 텍스트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과학적이거나 학술적인 탐구일 수 없다. 여기서 가다머는 역사적으로 유발된 의식을 검토한다. 역사는 이해를 추구함에 있어 누군가는 이미 무언가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대를 형성하거나 아니며 기대를 좌절시키며 고통을 통해서 배운다. 즉 자기 자신의 역사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성이다. 이런 상황이나 경험 속에는 그것이 전통이건 한 인격이건 우리가 타자에 개입할 때 창조적인 무엇이가가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타자에게 열려 있다면 타자는 실제로 우리에게 말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개방성은 나에게 반대하는 것까지 받아들일 것을 포함한다. 비록 아무도 내게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질문과 대답의 논리에서 타자에 대한 개방성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주장하는 바대로 변증법을 의식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 개방성은 모든 지식과 담론에 있어 질문의 우위성에 대해서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는 콜링우드의 질문과 대답의 논리로 인도한다. 콜링우드의 주장에 따르면 텍스트가 답변하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그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


민네이션, 생각


지평융합이라는 관점은 해석자와 텍스트가 하나의 지평면에 놓일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해석학은 결국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럼 어디까지 해석의 문제로 볼 것인가가 나온다. 해석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해석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건이 발생할 때 그 순간부터 해석의 깊이를 자아, 타자, 그리고 제 3자 라는 행위의 문제에서부터 시간의 문제까지 복잡한 함수가 만들어진다. 그 사이에서 슐라이마허, 하이데거, 칸트, 가다머의 해석학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자아에서 타자로 넘어갈 때도 역시 감정과 지성과 의지의 문제도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 많은 갈래들이 발생한다. 구조주의와 평생 싸웠떤 리쾨르처럼,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낸다'라는 명제와 평생 싸워야하는 '변혁'자로 서 있어야 한다. 현존재라는 존재론을 하이데거가 정립하고 나자 그 지평 위에서 가다머는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서 해석학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를 기반으로 시작하는 연구에 힘입어서 하버마스는 해석자들의 관계를 규정하기 시작했고, 결국 의사소통행위론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 그 시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나 시대정신은 그 다음세대가 이어 받아서 발전시키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의미와 의의를 고민해야 한다. 의미는 의의와 다르다. 의미는 그 당시의 정해진 텍스트적인 것이고, 의의는 현재로 부터 미래로 뻗어나가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지평융합의 개념에서 대화'라는 개념을 빼 버리면 융합되지 않는 편견과 선입견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다. 해석학은 초기에 텍스트 자체를 해석하는 것에 국한되었으나, 텍스트 자체의 범주가 확대되면서 사회현상과 해석자, 말과 언어와 의사소통에 까지 확대가 된다. 텍스트 자체를 해석하는 것이 전통적 해석학이라면, 텍스트를 넘어서는 것들을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지평융합)은 해석자를 텍스트의 범주로 가지고 온 가다머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 1_가다머


생애

마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브로츠와프 대학의 화학자로, 1918년 진로를 정하지 않고 브레슬라우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동년 독일 혁명이 일어나 독일은 항복. 1919년 철학을 배우기 위해 마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해,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지도를 받아 신칸트파의 파울 나토르프의 지도 하에 《플라톤의 대화편에서의 쾌락의 본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이른바 '나트르프 보고'를 읽고 충격을 받아 그 직후 (1923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와 만나 신칸트파로부터 멀어져 프라이부르크로부터 마르부르크에 부임한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는다. 1928년에, 하이데거의 강한 영향을 받은 교수 자격 논문 '플라톤 문답술적 윤리학'을 제출 (1931년 간행). 같은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강사로서 가르치기 시작 (1947년 원외 교수), 1939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초빙 되어 정교수가 된다. 1947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옮겨, 1949년부터 카를 야스퍼스의 후임으로서 퇴관까지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를 맡았다. 2000년의 생일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본인 출석 후, 탄생 100년 형전을 했다. 2002년 서거.


사상


제삼 제국 시대로 잠시 하이데거로부터 떨어져 있던 가다머이지만, 1940년대말에, 다시 하이데거의 강한 영향권에 비집고 들어갔다. 하이데거 철학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빌헬름 딜타이 등의 낭만주의·역사주의적인 해석학이 껴안는 문제에 대해서 결정적인 의의를 가진다는 인식을 가다머는 그 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초두, 그는 일서를 쓸 결의를 해, 9년을 걸치고, 자신의 지금까지의 연구나 강의를 집약하는 형태로, 1960년에 '진리와 방법'으로서 간행되는 원고를 가다듬어 갔다.


'진리와 방법'의 제2부에서, 가다머는 지금까지의 해석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철학적 해석학'을 세웠다. 낭만주의·역사주의적인 해석학은 텍스트 없이 역사적 사건을 그 시대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역사적 의식의 요구에 따라서, 형식적인 해석학적 순환을 텍스트나 역사에 적용해, 이해하는 사람의 역사성을 부정해 버렸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해 (요해)는 유한한 인간 존재의 존재 양식으로서 그것 자신 역사적이다. 인문과학으로의 이해, 과거부터 전승된 텍스트의 이해는 낭만주의·역사주의적 해석학이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현재와 현재에 유래하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시대를 뛰어넘고, 성립시의 텍스트나 그 저자의 심정을 재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과거가 현재에 매개 (중개)되는 사건, 과거부터 전해진 텍스트의 의미에의 참여이다. 이해가 매개·참여인 이상, 텍스트의 내용을 현재에 활용하는 적용은 이해에서 언제나 벌써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텍스트 그 자체의 의미를 파악한 후에, 그것을 나중에 스스로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이해를 가다머는 또, 플라톤의 문답방법에 따라서, 물음과 대답의 변증법이라고도 기술했다. 우선, 과거부터 전승된 텍스트가 해석자에게 말을 걸어 물어 본다. 텍스트의 내용의 진실성에 작동되어 해석자에게 자명하고 무의식적인 것 (선입견)이 자명성을 잃는다. 이에 따라서는 비로소, 해석자는 스스로의 선입견을 음미해, 텍스트에 물음을 세우게 된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위르겐 하버마스의 비판 (1967년)과 거기에 계속 되는 그와의 논쟁은 가다머의 이름을 일약 세계에 알리게 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퇴관 (1968년) 후도, 가다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이나 유럽의 제대학에서 불려 다수의 강연이나 강의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과학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도 말해야 할 하버마스의 비판에 의해서, 가다머는 그 해석학의 인문주의적인 좁음을 변명해 극복하도록 강요당해 그 결과, 그의 해석학은 인문과학론으로부터, 언어에 매개된 세계 경험에 대한 이론으로 중심을 변화 시켰다.


하지만, 이는 '진리와 방법'으로는 미전개인 제3부의 언어론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와 방법' 후의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으로 간 슈라이에르맛하나 디르타이의 해석에 대해서, 그 전문의 연구자로부터 비판을 받으면, 자기의 해석을 변명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언어론을 발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퇴관 전후로부터 트란 등의 현대시를 해석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해석학을 구체적 사례에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세련된 것으로 해, 또, '진리와 방법'으로의 적용론을 1980년대에 실천 철학론으로서 전개했다.


논쟁


하버마스


위르겐 하버마스는 '사회과학의 논리' (1967년)에서, 가다머의 주요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의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라고의 정립을 노동과 지배라는 사회의 실재 연관을 다 파악할 수 있지 않은 언어의 관념론이며, 언어는 제도화된 폭력을 정당화 하는 도구로도 될 수 있다고 비판하며, 같은 해, 가다머는 '수사 학자·해석학·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사회적 현실적 강제도 또 언어적으로 분절화해야 한다고 반론해, 논쟁에 이르렀다. 그 후, 하바마스는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 (1970년)에서, '심층 해석학', '보편적어용론'이라는 시점을 기본으로, 가다머가 주장하는 전통에 의한 언어에 의해 발견되는 진리는 체계적으로 삐뚤어진 커뮤니케이션일지도 모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다고 재차 비판해, 가다머도 재반론했다[1].



데리다


가다머가 1981년에 프랑스 파리의 독일 문화 센터에서 '텍스트와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실시하면, 다음날, 자크 데리다가 코멘트 '힘에의 선한 의지' 등을 발표해, 그 후 가다머가 데리다에 반론을 실시해 논쟁에 이르렀다[2]. 가다머는, 해석에서는, 독자와 쓰는 사람에게는 서로 이해하려는 '좋은 의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비해, 데리다는, 가다머가 말하는 '선한 의지'는, 이마누엘 칸트의 선의 뜻과 같이, 의지를 절대적·최종적인 심급으로 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은 아닌가 비판해, '미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데리다는 '서명을 해석한다 (니체/하이데거)'에서, 가다머가 이해에서 전제하는 '완전성의 선행 파악'의 개념을 비판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하이데거가 니체를 해석한 것처럼, 선한 의지·완전성의 선행 파악에 의해, 텍스트의 의미를 통일해 버린다면, 그것은 서양의 로고스 중심주의에 의해서 다양하게 있는 의미를 잘라 버리는 것이다.


저작

Wahrheit und Methode: Grundzu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 (1960)

'진리와 방법1: 철학적 해석학의 요강' 구쓰와다 오사무 옮김, 호세 대학 출판국, 1986년. ISBN 4588001752

'진리와 방법2: 철학적 해석학의 요강' 구쓰와다 오사무 · 마키타 에쓰로 옮김, 호세 대학 출판국, 2008년. ISBN 4588001760


Kleine Schriften (1967)'철학·예술·언어: 진리와 방법을 위한 소론집' 미라이샤, 1977년.Hegels Dialektik(1971)'헤겔의 변증법: 6편의 해석학적 연구' 미라이샤, 1990년. ISBN 4624020294Philosophische Lehrjahre: Eine Ruckschau (1977)'가다머 자전: 철학 수업 시대' 미라이샤, 1996년. ISBN 4624932315Gedicht und Gespraech (1990)'시와 대화' 마키타 에쓰로 옮김, 호세 대학 출판국, 2001년. ISBN 4588007122'예술의 진리: 문학과 철학의 대화' 미우라 구니야스 옮김, 호세 대학 출판국, 2006년. ISBN 4588008536


참고 2_해석학


해석학(解釋學, Hermeneutics)은 해석이론에 대한 연구이다. 성경 해석학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해석학은 기록된 텍스트 특별히 문학, 종교 그리고 법의 분야에 있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현대 해석학은 기록된 텍스트와 관련된 문제만을 포함하지 않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의사소통의 언어적 혹은 비언적 형식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전제, 전이해, 언어와 의미를 다루는 철학, 그리고 기호학과 같은 의사소통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관점도 포함한다. 철학적 해석학은 첫째로 진리와 방법에서 발전된 게오르그 가다머의 지식이론 그리고 때때로 폴 리꾀르와 관련된다. 하나의 해석학(단수적)은 해석의 한 특별한 방법이나 요소(strand)을 언급한다.전통적인 해석학


전통적인 해석학은 쓰여진 텍스트의 의미에 관심을 갖는 해석이론을 포함한다. 그런 이론들은 저자와 독자 그리고 텍스트 사이에 발견된 관계들에 초점을 둔다. 히쉬(E.D. Hirsch)는 주장하기를 한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를 넘어서, 독자의 지평과 저자의 지평이 만나는 지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폴 리꾀르(Paul Ricœur)는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와 원래의 독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성경 해석학


성경 해석학은 일반적인 해석학과 특수한 해석학으로 2 분류로 나뉜다. 일반적인 해석학은 문법적, 역사적-문화적, 문맥적, 언어구문적, 신학적 관점을 포함하여 모든 성경 본문을 해석을 통제하는 규칙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특수한 해석학은 비유, 알레고리, 모형, 그리고 예언과 같은 특별한 장르에 적용하는 규칙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은 가끔 하나의 과학과 하나의 예술로 정의된다. 미리 정해진 규칙들과 관련해서 과학으로, 의미가 기계적이며 엄격한 규칙들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면에서 하나의 예술로 인정된다.


신학적 해석학


성경 해석학과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좀 더 신학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신학적 해석학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며, 성령의 조명을 인정하며, 기존의 해석자들의 해석들을 참고하여 성경 본문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칼빈의 해석학은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으로 연구될 수 있다. 신학적 해석학은 역사적 문접적 해석학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현대 철학적 해석까지 사용하여 성경의 본문을 연구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이나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현대 해석학


현대 해석학은 슐라이에르마허를 시작으로 태동되었다.


참고 3_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이야기란 인간의 경험을 언어로 진술하는 방식이다. 경험이란 정신과 육체가 바깥의 사물과 만나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사람은 앎을 얻고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 물론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칸트가 말한 선험적 감성이나 선험적 논리, 선험적 직관 등이 그렇다. 하지만 선험적인 것 또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틀이라는 점에서 경험의 필요 조건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경험이다.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겪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경험이 된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인간의 행동이 경험을 만들고, 이때 경험은 실제로 일어날 수도, 상상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상 현실의 경험은 사물에 파묻혀 그대로 잊혀져 흘러가버리고 만다. 혼돈이고 무의미인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뜻, 존재의 뜻을 찾는다. 여기서 주체가 개입한다. 그것은 반성을 통해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다.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고 언어가 그렇다. 다시 말하면 경험은 할말이 있고, 말해지기를 기다린다. 물론 모든 경험을 말로 다할 수는 없지만 말해지지 않은 경험은 무의미에 빠지고 만다. 그러한 경험이 말로 될 때,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 이야기가 된다. 경험은 이야기되기를 기다리고, 이야기는 서술적인 방식으로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을 엮어 줄거리로 만듦으로써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이야기다.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야기, 존재 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경험을 통해 존재를 체험하고 존재의 뜻을 찾아 삶의 뜻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그 여백에 무한한 뜻이 들어간다. 뜻이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의 영역이 된다. 이야기의 뜻을 풀어 삶을 다시 그려보고 삶의 뜻을 찾는다.


리쾨르의 주된 관심 영역은 다양한 ‘해석들의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주체, 시간, 구조와 역사, 텍스트와 삶, 정체성 등이 그렇다. 그러나 갈등을 푸는 리쾨르의 방식은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들을 대조함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대립되는 해석을 대치시키고 겹쳐놓음으로써, 해석들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한다. 각각의 해석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메마른 논쟁’이 아니라 ‘사랑이 가득 찬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리쾨르가 택한 방법론을 우리는 상징해석학을 발전시킨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 그러나 폐쇄된 기호 체계로서의 텍스트가 아닌 밖을 향해 열린 텍스트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호, 상징 그리고 텍스트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자기 이해는 없다. 자기 이해는 궁극적으로 이 매개항들에 적용된 해석과 일치한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면서, 해석학은 점차적으로 후설이 현상학과 동일시하고자 했던 관념론으로부터 벗어난다.” 기호·상징·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 이해라는 측면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코기토 중심의 반성철학의 한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리쾨르가 말하는 텍스트는 문화에 의해 전승된 상징이다. 그러나 기호나 상징과는 달리 글로 씌어진 텍스트는 담론(누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해 무엇을 말한다)으로서, 어떤 세계, 리쾨르가 ‘텍스트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텍스트 밖으로 투사한다. 그렇게 이해된 텍스트는 글 쓴 사람의 뜻(의도)으로부터, 글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부터, 글을 쓸 당시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의미론적 자율성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후설의 지향성으로부터, 해석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난다.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텍스트 앞에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며, 책을 읽는 나와는 다른 자기의 조건을 텍스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딜타이류의 낭만주의 해석학에서 벗어나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적 이해로서의 해석학과 만난다. 그러나 텍스트를 통한 자기 이해라는 먼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르다. 반성철학·현상학 그리고 기호·상징·텍스트의 매개를 통한 해석학은 직관에 의한 투명한 자기 인식의 꿈을 포기하고 길고도 먼 우회로를 통해 자기 이해-세계 이해에 이르고자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 해석학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텍스트 내에서 작품의 구조화를 지배하는 내적 역동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 텍스트가 담고 있는 ‘것chose’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품의 힘을 찾아내어 독자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해석학은 구조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상징을 탈신화화하고, 텍스트가 보여주는 존재 이해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이처럼 해석학을 “어떤 해석, 다시 말해서 단일한 텍스트나 하나의 텍스트로 여겨질 수 있는 일군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대한 이론”으로 정의한다면, 그의 해석학은 언어학·정신분석·신학·사회학·정치학 등 다양한 해석 방식(해석학)과의 만남(갈등)을 통해 말의 뜻이 속한 여러 가지 층위를 골고루 더듬어 삶의 뜻과 연결시키는 종합적 해석학, 또는 해석의 일반 규칙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의 뜻을 푸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말뜻을 통해 삶의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 리쾨르 해석학의 특징이다.


리쾨르의 철학이 문학과 만나는 지점은 말과 삶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다. 리쾨르는 기호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를 논하면서, 말의 뜻과 삶의 뜻을 잇고자 하며, 『시간과 이야기』에서 시간이라는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를 자신의 상징해석학의 틀 안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론은 시간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리쾨르는 역사 이야기와 허구 이야기를 가르는 이분법을 넘어서서 수많은 이야기 장르 사이에는 ‘기능적’ 통일성이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인간 경험에 공통된 특성─그것은 모든 형태의 이야기하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고, 결합되고 명료해진다─은 그 ‘시간적 특성’이다.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시간이 걸리고, 시간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모든 것은 이야기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시간적 과정은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될 수 있다는 한에서만 시간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경험은 세계 경험이며, 이야기는 세계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관은 또한 세계관이라 말할 수 있다. 리쾨르의 관점은 사변적 차원에서는 풀 수 없는 시간의 아포리아들을 이야기라는 상징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시간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드러나게 하는 밑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바로 이러한 시간성과 서술성의 상호 관계를 바탕으로 시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여, 경험이 갖는 시간적 성격을 역사와 허구에 공통된 지시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역사 이야기와 허구 이야기, 그리고 시간을 문제로 설정한다. 『시간과 이야기』에서 논의되는 이야기와 시간의 관계는 그렇게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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