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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25. 2019

선불교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병철_선불교의 철학

한병철의 이론들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의 향기에서 시간의 가속화의 결과가 피로사회로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피로사회의 특징은 우울사회와 투명사회가 된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에로스의 종말을 고하며 새로운 사랑의 역설을 대안으로 낸다. 그 대안은 비타컨템플라티바(관조적, 심심한 삶)를 통한 새로운 개념의 창조이다. 이 모든 것을 만든 것은 결국 권력작용이라도 하면서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권력의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오늘은 이러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한병철의 의식 기조에 깔린 사상에 대해서 본문만 보게 될 것이다. 선불교는 기본적으로 득도의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진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기 때문에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미식 합리주의는 경험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리가 외부에 있다는 의미이다. 독일관념론은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신으로부터 현상에 리르는 과정을 설명한다. 프랑스의 생철학은 진리는 정해지지 않고 구성된다는 논리에 따라서 생물학적인 시작이 영혼과 정신을 구성하고 이것은 체계적이라기보다는 리좀적 다양성이라고 한다.


한병철은 과연 독일관념주의자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의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조금씩 들어가보자.





누구의 얼굴도 아닌 얼굴을 찾아 떠나는 여행
- 한병철, 『선불교의 철학』
 
 
선(禪)불교는 외부에 있는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꼭이 선불교만의 특징이 아니라, 불교가 그렇지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있지도 않은 부처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합니다. 허상이고 환상이니까요.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마음을 비우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은이는 “의지 혹은 주체성의 부재야말로 평화로운 불교의 토대”(19쪽)라고 주장합니다. 실체 혹은 주체를 상정하면 권력이 나옵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나누는 권력. 권력은 언제나 남성이 지배하지요. 여성과 아이는 남성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권력은 배타적 주체성을 내세웁니다.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권력=주체성은 안심을 합니다. 폭력이 왜 권력과 늘 붙어 다니겠습니까? 배타적 주체성으로서 권력은 타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으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가 있어야 ‘존재하는 나’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의심에 의심을 반복해서 데카르는 의심을 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진리의 최종 자리에 신을 놓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한 사람이 왜 ‘신’을 의심하지는 않았을까요? ‘생각하는 나’에게 확실성을 부여하려면 신이 필요했습니다. ‘나’를 확실하게 정립하기 위해 그는 신을 불러낸 셈입니다. 도겐 선사가 이런 데카르트를 보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도겐은 데카르트의 의심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깊어진 의심 속에서 그는 ‘나’도 ‘신’의 관념도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뻗어 나간 겁니다. “이렇게 큰 의심에 도달할 때 데카르트는 어쩌면 기쁨에 겨워 다음과 같이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네크베 코기토 네크베 숨(Neque cogito neque sum(나는 생각하지도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생각하는 나가 없는 장소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그렇게 있는 영역에서는 ‘(인식하는) 나’도 ‘(나와) 다른 것(곳)도 없기 때문입니다.”(24~25쪽)



 
선불교는 외부에 진리를 놓지 않습니다. 진리를 품은 마음도, 진리를 품은 주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은이 말마따나 “깨달음(Satori<사토리さとり>)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할 자신의 ‘무아경’, 즉 기이한(비범한) ‘망아’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42쪽)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평범함 속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우리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자아’라는 장막에 갇혀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기에 있던 깊은 내재성에 눈을 뜨지 못합니다. 자아라는 장막을 걷으면 우리는 깊은 내재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선불교에는 우리는 사는 이곳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깃들어 있습니다. 도(道)를 묻는 제자들에게 선사들은 큰소리를 지르거나, 제자를 때리는 기행으로 답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기도 했고, 차나 한 잔 하라며 확답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서 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선사들은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을 들여다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보는 사물이 어떻게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선불교에서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깨달음을 위한 방편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걸으면 무엇보다 진리에 매인 자신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 깨달음은 실체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닙니다. 지은이의 말을 들어볼까요. “불교의 중심 개념 순야타sunyata(‘비어 있음<공空>’)는 실체와 여러 면에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실체는 가득 찬 것 같습니다. 실체는 자기로,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순야타는 고유한 것을 제거하는 운동을 의미합니다. 순야타는 불변하는 존재자 혹은 자기를 고집하거나 자기를 자기 안에 가두는 존재자를 비워 제거합니다. 순야타는 그런 존재자를 개방성, 즉 드넓게 개방된 곳으로 가라앉힙니다.”(59쪽) 비어 있음은 실체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권력이 들어 있지 않고, 여기와 저기를 나누는 존재론적 단절도 없습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공은 색이고, 색은 공입니다. 구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비움은 채움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움과 채움을 구분하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분별심이 싹트게 됩니다. 분별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시비(是非)로 나누려고 하지요.
 
하이데거와 같은 서양 학자들도 ‘비어 있음’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서양학자들이 말하는 비어 있음에는 언제나 ‘자기’가 들어 있습니다. 비어 있음을 말하면서도 그들은 ‘자기’라는 관념에 매여 있는 겁니다. 지은이는 선불교의 비어 있음에는 이러한 중심으로서 자기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라는 중심을 세우지 않은 선불교는 그래서 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일상을 벗어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는 산속에 있다는 것도 집착일 뿐입니다. 산속에 있는 진리가 왜 일상에는 없는 걸까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에 나타나듯,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음은 ‘자기’에 얽매여 있지요. 천 명의 사람이 사물을 보면 천 개의 사물이 있게 됩니다. 천 명의 사람들이 사물에 의미를 붙이는 것이지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어떨까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자기를 내려놓은(비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운 사람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할 리가 없지요.
 
하이쿠에서는 세계 혹은 만물이 인간의 접근 방식 너머에서 빛나는 대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정령 같은 그것(비인칭)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정령 같거나 으스스하기보다는 오히려 친절합니다. 그것(비인칭)에 관한 시와 정반대로 하이쿠는 본래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즉 처분할 수 없는 실체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정령 같은 그것이 자아와 세계로 흘러넘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관찰해보면 그것에 관한 시는 자아를 하나 드러냅니다. 그 자아는 의미와 목적을 완전히 상실한 세계, 즉 이름 없는 비인칭의 허허벌판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있는(그것<비인칭>이 주는) 사물로부터 말하려 나서는 자아는 소외된, 속이 빈, 세계 없이 배회하는, 찾아나서는, 기도하는 자아입니다. 사물들도 서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개개의 사물은 그것(비인칭)의 이름 없는 빈 되울림이 됩니다. 그것에 관한 시를 보면 완전한 관계의 상실이 떠오릅니다. 반면에 하이쿠는 관련성을, 즉 친절한 관계와 같은 것을 표현합니다. (110쪽)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그것’은 “처분할 수 없는 실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칸트의 ‘물자체’를 생각하면 됩니다. 물자체는 이성의 의미로는 환원될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성 밖에 분명한 실체로 존재하지만 의미로 ‘처분할 수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선불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안과 밖이 따로’누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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