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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25. 2019

세상에 열려진 피로사회는 환영한다

정치해봄_북스터디_한병철 피로사회

20190524_정치포레스트(정치해봄)
한병철_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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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상황인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사회는 어떤 질병이 있는가? 문장의 첫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21세기 현재는 지난 시기의 성과사회로 인한 피로사회가 도래한다. 냉전시대에는 이질성은 바이러스와 같이 제거의 대상이었다. 다른 것은 없어져야 하고, 사라지게 만들어야 했던 규율사회에서 이제는 다름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의 대상이지만 차이로 넘겨두는 방식으로 바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타자에 의해 착취되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 자기착취를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는 자기 착취가 시작되었을까? 사실 우리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신경성 폭력

21세기는 신경성 질환들이 있다. 예컨대 우울증과 주의력결핍과잉 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 병리학적 상황이 지배적이다. 전염성 질병이 경색성 질병으로 발전하고,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긍정성의 과잉으로 바뀌었다.

지난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이였기 때문에 친구와 적 그리고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다.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이 주가 된다. 예를 들면 냉전체제가 그러한 예이다.

21세기는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으로 바뀌었다.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인 상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자기착취로부터 시작된 소진증후군과 우울증 그리고 주의력의 결핍 등 수 많은 것들이 문제가 생긴다.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판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것, 동일자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서 죽는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등 신경성의 폭력현상이 나타난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21세기는 이미 푸코의 규율사회를 넘어서 성과사회로 변모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규율을 따르는 복종적 주체는에서 성과를 만들어서 즈명해야 하는 성과주체가 된다.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서 서브젝트는 말 그대로 프로젝트의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 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은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퇴화이다. 야생에서 생존을위한 동물의 습성에서 멀티테스킹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서 살고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특징인데 성과사회에서는 동물들과 같이 멀티태스킹을 하면서 자신의 안위와 상황을 계속 살펴야 한다. 스스로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존재하지 못한다.

좋은 삶보다 생존하는 삶에 몰두하는 인간들의 행태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좋은 삶을 살아갔지만, 지금은 좋은 삶을 추구하지 않는 성과사회가 되었다. 무엇이 좋은지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되는 것이다.

발테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말한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주어지지 않는다.


활동적 삶

한나아렌트에게서 사색의 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행동하는 인간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성과 사회 안에서는 활동하는 삶은 사색적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다르게 ‘죽음’이라는 사멸성이 아니라 ‘탄생성’이라는 시작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것으로 날마다 새로운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머라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가지 과업에 대해서 말한다. 인간은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은 고상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분노와 짜증의 구별은 분노와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분노와 짜증의 차이는 공포와 불안의 구별과 유사하다.


바틀비의 경우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는 어떠한가? 바틀비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함이란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진과 탈진으로 새로운 것을 할 수 없는 상태, 그러나 새로운 것을 하지만 매번 새로운 것을 하는게 아니라 매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소소한 저항’은 우리가 성과주체로 나아가는데 우리를 멈추게 만드는 부정성을 만들어낸다.



피로사회

쓸보없는 것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무엇인가 실용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쓸모 없는 시간들이 오히려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놀이의 시간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호모루덴스는 타자가 존재할때만 가능한 놀이이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은 타자와 함께 노는 시간이다.


인사이트

과거에는 ‘문제’라는 부정성을 해결하면 더 나아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긍정사회이기 때문에 끝도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는 상태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발전하거나 성장한다는 느낌보다는 스스로에게 폭력적인 다급함에 몰려서 자아의 내면에 갖혀 버린다.

발터벤야민이 이야기한 ‘경험을 품은 꿈의 새’는 자신의 경험들이 자시만의 아우라는 만들어내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동일자로 가지 않고 서로 타자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원천인 것이다.

아렌트에 대한 비판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주체는 반드시 정치적으로 행위할 수 밖에 없는데, 아렌트가 이야히나는 활동적인 삶은 오히려 성과사회에서는 시간을 가혹화시키고 ‘깊은 심심함’을 통해서 생각할 수 없는 과잉활동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매번 탄생성을 강조하는 활동적인 삶은 새롭게 시작하면서 더 시간을 빠르게 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흐름, 리듬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토론주제

1. 일상에서 경험한 자기착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 중단하는 것의 힘과 분노하는 것에 대해 사례중심으로 공유해보자.
3. 사색적 삶과 활동적 삶의 논쟁에 대한 생각은 어떤한가?


토론, 내용

소크라테스는 군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참을 서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동상처럼 서 있던 때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바로 깊은 심심한이나 비타 콘템플라티바가 나오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계속해서 개인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구조는 항상 생존을 위협하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 권력은 마음대로 제도와 법을 통해서 개인을 옥죄고 무너뜨린다.


공유, 느낌

한병철씨의 글은 어떻게 보면 독일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시스템을 보고, 그 시스템의 변화를 보고, 관념이 어떻게 시스템을 만들어내는지를 보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의 문제, 특히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가 경영한다는 ‘자기경영’이라는 것은 비판받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피로사회에서 경영자로 살아가는 ‘자기착취’의 삶이 가지겨오는 시간의 가속화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시대는 자아실현이 매우 긍정적인 것처럼 느낀다. 자아실현을 하는데 구조가 우리는 억누린다고 생각을 했는데 오히려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과도한 긍정성이 사람들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든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그러지 않는가?

‘피로사회’라는 제목을 왜 썼는가? 오히려 성과사회에서 피로사회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계를 배우지 않는 교육’ 때문에 우리는 지친다. 우리가 한계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성장시키고, 우리를 우리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이의 시간이 필요하고, 깊은 심심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놀이도 성과로 묶여 버리는 현실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넌 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것들은 한계가 없이 우리가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갑짜기 무기력이 찾아온다.


민네이션, 생각

비타 컴템플라티바는 멈추는 힘이다. 시간을 멈추는 일이고 시간이 가속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때문에 내가 서서 나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활동적인 삶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너무 활동적인 삶은

버트란트 러셀은 말한다. ‘부자들은 행복하지 않은데 우리는 왜 부자들을 부러워 하는 거지?”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이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부로 인해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피로사회라는 것은 두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분열적인 피로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향해서 열려진 피로’이다. 구들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신경써야하는 피로이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신경쓰는 피로는 우리를 곧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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