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대중사회는 어떻게 폭민을 양산하는가?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외로움이다. 이러한 외로움의 시작은 잉여인간 잉여생산물 때문이다.
결국 전체주의의 텃밭은 제국주의 이전에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 우선한다’라는 책을 쓴 셰리버만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자본주의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근본적인 터전까지 빼앗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전체주의가 발전하게 되는 요소들 중에 폭민과 대중사회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자. 이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도 어떤 전체주의적 요소가 있는지를 알아보자.
대중, 폭민
대중이 전체주의를 지탱한다. “전체주의 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고, 전체 주의 지도자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대중을 통솔하고 끝까지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히틀러는 어떻게 했는가?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것은 다수결의 원칙에서 보면 합법적이다. 만약 그나 스탈린이 대중의 신뢰를 얻지 못햏ㅆ다면 그들은 다수의 주민들에 대한 리더십을 유지할 수 없었고 안팎의 수 많은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으며 냉혹한 당내 투쟁의 수많은 위험과 용감하게 맞설 수 없었을 것이다.
대중의 맹목성은 어떻게 나오는가? 전체주의 운동이 지속되는 한 운동의 조직적 틀 안에서 열성 단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경험과 논증이 아니다. 전체주의 운동의 추종자는 운동과 일체가 되어 그 법칙에 완전히 순응하기 때문에 경험이 고민이나 죽음의 공포처럼 극단적이라 할지라도 경험의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전체주의, 특징
전체주의는 수에 의존한다. 전체주의 운동은 순전히 수의 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교적 인구가 적은 국가에서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리한 상황에서도 전체주의 정권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수의 기반을 만드는는가?
국민국가가 몰락하고 대중사회가 생겨나는 가운데 경험했던 Superflousness(쓸모없는 존재)의 난무에서 생겨난 대중이야 말로 전체주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급의 붕괴와 대중의 탄생은 연결되어 있다. 계급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는 각 계급이 정치정당을 통해 자신을 대변하던 국민국가가 20세기에 들어서며, 무차별적 평등이 강조되는 동안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되는 가운데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잃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대중들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계급붕괴와 대중의 탄생을 알아보자. 계급체제가 붕괴되고 또 국민을 국가에 묶어 두었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끈들이 모두 끊어졌을 때 비로소 국민국가의 주민들의 비정치성이 드러났다. 계급이라는 보호장벽의 붕괴는 정당을 지지하던 다수(성난 개인들로 구성되었지만 조직되지도 않고 분화되지도 않은)를 하나의 거대한 대중으로 변형시켰다.
대중운동, 대중사회
대중운동은 전통적인 정당의 사회적이고 비개인적인 구성원들을 매료시킨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쉽게 조직회되지 않은 사람들, 즉 개인주의적 이유에서 항상 사회적 유대나 의무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전형적인 방관자들을 끌어 당겼다.
폭민은 자신의 정체성을 건강하게 실현시켜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대중운동에 빨려 들어가는 조직화되지 않는 폭력적 군중이 바로 폭민이다. 이 폭민이 대중의 중심을 차지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잉여자본, 잉여인간을 만들어 냈는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가 각각 바로 잉여자본과 잉여인간의 표현이다.
인간성을 무용지물로 만들고자 하는 전체주의의 시도는 과잉인구로 시달리는 지구에서 자신들이 별 쓸모 없음을 알게된 현대 대중의 경험을 반영한다.
폭민의 특징은 이것이다. 폭민의 구성원들은 어디에 속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계급이나 조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이들로, 대중 사회의 원자화에서 탄생한 집단이다. 이들은 흩어져 있는 자신들을 조직하여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한 자신들을 채워줄 지도자를 기다린다.
전체주의운동은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은 공동 관심이 아니다. 단순히 수가 많거나 공공업무에 과한 무관심 때문에, 아니면 이 둘 다의 이유로 인해 정당이나 자치정보, 전문조직 도는 노동 조합처럼 공동 관심에 기초한 조직으로 통합될 수 없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만 대중이라는 용어는 적용된다.
연좌제, 전체주의
전체주의 운동은 대중사회의 비체계성보다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특별한 조건에 더 의존한다. 소비에트 사회는 실제적인 집단 제거에 반드시 선행되는 거듭된 숙청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대중의 원자화를 이루었다. 모든 사회유대와 가족 유대를 파괴하기 위하여 숙청은 피고와 그의 모든 일상적 관계에 똑같은 운명이 닥칠 것이라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연좌제라는 간단하고 교묘한 장치의 필연적 결과는 어떤 사람이 고발되자 마자 곧 그의 예전 친구들이 적들로 변한다는 점이다.
자기 목숨을 위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그에게 불리한 터무니 없는 증거를 가지고 고발하기 위해 몰려든다. 이것이 분명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공적은 가까운 동지들에 대한 고발횟수로 측정된다. 이런 점에서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디ㅗ고 고립된 개인들의 대중조직이다.
전체주의 운동의 가장 뚜렷한 외적 특징은 개인 성원에게 총체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는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충성심은 완전히 고립된 인간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다.
충성심, 전체주의
그런 살마은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는 사회적 유대 관계도 없고 심지어 단순히 아는 사람도 없이 단순히 운동에 속해 있다는 사실과 당원 자격으로부터 사회적 존재의 의식, 즉 이 세상에 자리 자리가 있다는 의식을 이끌어 낸다.
그들의 지배이상은 어떤 국가나 폭력장치도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단지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일 뿐이다. 다시 말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개개인의 지속적인 지배였다. 전체주의 운동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운동으로 끌어들여 조직하고 그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운동을 멈추게 할 정치목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민, 엘리트 동맹
찬란한 명예를 중시하는 폭민과 익명성에 진지했던 엘리트들의 동맹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전체주의 운동의 맹목적인 충성과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보다 우리마음을 더 어지럽히는 것은 분명 운동이 사회 내의 폭민들뿐만 아니라 엘리트들을 매료시켰다는 점이다. 전체주의가 지지자, 동조자, 그리고 등록당원으로 간주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명부를 보고 예술적인 변덕이나 학자적 순진함 때문이라고 무시한다면 이는 정말 성금한 일이다.
새로운 대중지도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점잔 빼는 거짓 체면은 점점 사라지고 무정부적 절망이 확산되던 이 붕괴의 시기가 폭민은 물론 엘리트들에게도 절호의 기회처럼 보였다. 새로운 대중 지도자들도 이런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했는데 이들의 경력은 초기 폭민 지도자들의 특성을 재현한다. 즉 직업과 사회 생화에서의 실패, 사생활에서 타락과 불행이 그것이다.
정치적 경력을 쌓기 이전에 그들이 삶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대중이 그들에게 느끼는 가장 매력이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 시대 대중의 운명을 구현한다는 점이 마치 입증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운동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희생하겠다는 그들의 소망, 재앙으로 타격 받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확신, 평범한 삶의 안정성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에 결코 빠지지 않겠다는 그들의 결심, 그리고 존경 받는 사회적 체면에 대한 그들의 경멸이 매우 진실되며 단순히 일시적으로 야망에 의해 고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
허쉬만, 로열티
사람들은 voice, royalty, exit에서 정치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목소리가 제도에 반영될 때 제도에 충성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제도에 자신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을 때 exit를 추구하게 된다. 그럼 이민을 가거나 국가를 떠나거나 자신들끼리 모여 살게 된다.
생각해보자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이 경험하고 지켜야 하는 제도에 들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제도를 지키든지 더 좋게 바꾸던지 어쟀든 활동하게 된다.
정치는 사회적 갈등의 제도화를 완성했을 때 안정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정치가 이러한 루프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사회적 갈등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럼시는 옥중수고에서 마키아벨리와 다르게 군주가 아니라 정당이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제도적 해결책을 내기 위해서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기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인 역할들을 해주면서 대중들이 탄생하는 것을 막아주고, 시민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중, 전체주의
대중들이 어떻게 폭민이 되는가?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준다면 그 지지자에게 자신의 미래와 열정을 바치게 된다. 특히 기존의 부르조아의 세계에서 쫓겨난 중산층의 대중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간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대변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정체성의 측면에서 전체주의를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중이 폭민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구조와 균열, 질서의 부재 안에서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이러한 균열을 교묘하게 운영해서 대중들의 힘을 입어서 안으로는 전체주의를 바깥으로는 제국주의를 매우 쉽게 실행한다.
특히 유럽의 분위기는 중산층 이상의 엘리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입지를 잃어 버리고 전체주의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세상에서 나온 ‘보수혁명’이라는 책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사회, 공동체
공동체는 ‘하나의 가치 아래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사회는 ‘하나의 가치로는 모일 수 없는 사람들, 이익추구를 위해서는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나오는 정의이다. 공통의 관심사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대중사회란 바로 이러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대중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이다.
대중들이 근대 이후에 추구하는 이익은 오락이나 편안함이다. 따라서 대중사회는 모두가 편안하게 살고 싶고, 오락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민네이션, 생각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의 마지막에 인간이 대중이 되고, 대중이 폭민이되며, 폭민이 전체주의로 변하는 것들을 이야기할 때 ‘외로움’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외로움 자체는 일반적인 스트레스 보다 훨씬 더 심하고,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속감을 가지기 위한 상황으로 들어가고 싶다.
외로움과 자신의 공간이 없다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는 폭민이나 전체주의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야 할까? 우리가 경험하는 시대정신, 시대분석, 시대분열의 시대에서 세대갈등과 세대통합을 어떤 방식으로 이룰 것인가? 그럼 결국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세대소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생각하고 현재의 요소들을 바꿀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공적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공적인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것을 해결하면 결국은 대중사회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병철의 비타컴텔플라티바(관조적인 삶)와 비타악티바(활동적인 삶)의 비교에서 한병철은 아렌트의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가?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탄생성과 행동하는 힘, 활동적인 삶의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에 휩쓸릴 염려가 많다는 것이다. 한편은 한병철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계속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 고요한 심심함을 만들어내려면 정치적인 행동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