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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3. 2019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발명해야 한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_정치해봄






서문 사랑의 재발명_알랭 바디우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위한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을 향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현 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성적인 사랑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일종의 현상학과 오늘날 사랑을 위협하는 실제적 힘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결합한다.

한병철의 주목할 만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투쟁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의 수호, 랭보가 말한 사랑의 재 발명을 위한 투쟁이다. -알랭 바디우

1장 멜랑콜리아

 

오늘날 자아의 ‘나르시스트화’가 강화되면서 타자가 침식되고 사라지는 현상이 에로스적 경험을 소멸시키고 그것이 개개인의 우울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사랑의 위기는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쳐서가 아니다. 오늘날 모든 과정에서 타자의 침식과정이 진행되어가고 있다다는 점.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스트화’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 소크라테스는 아토포스(무소적인)-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것은 저자가 ‘우울’에서 상실된 에로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나르시즘적 질병으로, 병적으로 과장된 자기관계,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라고 진단한다. 우울한 자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 던진다.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에 추락하게 한다. 오늘날 나르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에고를 상실한 거울에 불과하다. 이런 인정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더 깊이 에고 속에 파묻어 성공우울증을 발생시킨다. 자기 속에서 익사한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에로스의 회복이다. 사랑의 대상은 나에게 나르시즘에서의 탈출을 선물한다.- 에로스는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한다. 자기부정, 자기비움이 시작되고, 특별한 약화의 과정에 붙들리지만 이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이는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https://youtu.be/pYtL6SeD0gs


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할 수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전부인 사회는 상처와ㆍ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합리화되어 사랑의 열병을 않지 않는 성과사회의 긍정성으로 오염된 사랑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 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사랑은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한다. 기분이고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사랑에)빠지는 것조차 부정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부정성이야 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사랑은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상처를 입힌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는 바타유적인 위반의 에로티즘을 특징짓는 부정성, 위반, 일탈이 전혀 없다. … 이용 가능한 현재는 동일자의 시간이다. 우리가 미래와 맺는 관계는 아토포스적 타자, 즉 포섭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다. 하지만, 오늘날의 미래는 타자의 부정성이 차단된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속에 놓이게 된다. 클릭의 시간, 결정과 결단을 알지 못한다. 

에로틱한  갈망은 타자의 특수한 부재에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무로서의 부재가 아니라 미래지평 속에서의 부재다. 미래는 타자의 시간이다. 동일자의 시간인 현재의 전면적 지배는 부재의 소멸을 초래한다. 부재하기에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는 타자도 이와 함께 사라진다. 

레비나스는 애무와 쾌락을 애로틱한 갈망의 형상으로 해석한다. 부재(부정성)는 애무와 쾌락에 있어서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애무는 “달아나는 것과의 놀이”이다. 

오늘날의 사랑은 그런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과사회의 원인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도처에서 이질성을 제거한다.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단 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에 나타나지 않는다.


피너스브뤼헐_눈속의 사냥꾼


3장 벌거벗은 삶 


사랑하는 자들의 눈 사이에서 일종의 수혈이 이루어진다.  파이드로스는 자신의 눈에서 나온 광선이 뤼시아에게 생명의 기운을 보냈고 둘의 광채가 쉽게 하나가되고 파이드로스의 심장에서 생긴  생기의 연무는 즉시 뤼시아스의 심장을 향해 을러가서는 심장속의 단단한 실체를 토해 응축되어 다시 피로 변한다. 그러니까 본래 상태, 파이드로스의 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파이드로스의 피가 뤼시아스의 심장속에 있다니!  고대의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안락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주에소 최악의 전염병이다. “변신”이다.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아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에바일루스는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오늘날의 사랑은 여성화 되었다고 확언한다. 조용하고, 편안하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즉흥섹스, 긴장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묘사한다.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 독립을 갈망하는 그는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추웛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노예가된다. 벌거벗은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죽음의 능력’이다. 노예는 자기자신을 데리고 죽음으로 가는 대신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죽음을 무릅쓰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일을 한다. 

오늘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나타난다. …과잉의 위반으로서의 에로스는 노동도, 벌거벗은 삶도 부정한다. 따라서 벌거벗은 삶에 매달려 노동하는 자는 에로틱한 경험을 하지도 못하고 에로틱한 갈망을 품을 줄도 모른다. 오늘날 성과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비슷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하다. 헤겔도 생각지 못한 치명적 통일성이다. 

헤겔의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데리다, 들뢰즈, 바타유와 다르다 . 그들의 독해에 따르면 절대자는 폭력적이지만 헤겔의 절대자는 무엇보다 ‘사랑’이다. 

자신의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 타자에게 등 돌리는 것은 제한된 정신이다. 절대적 정신은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한다. 정신적인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먹고 스스로를 보존하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다.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 가는 삶이다.  정신이 생동하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정신은 극단적인데 까지 극도의 부정성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게 들어가 이를 자기 안에 끌어안기 때문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서 완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긍정성이 과잉으로 치닫는 세계에서는 정신은 설 자리를 잃는다. 

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삶 자체가 결론이다. 결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된 것이라면, 그러니까 성급한 결론이라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폭력적 배제 즉 폭력이다. 절대적 결론은 타자 속에 한동안 머문 뒤에야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찾아온다.. 변증법 자체가 끝맺고 열고 다시 끝맺는 운동이다.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면 정신은 타자의 부정성에 상처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버릴 것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고,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헤겔의 노예는 의식이 제한되어 절대적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기 의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한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후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 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울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에 죽는 법도 잊어버린 성과 주체가 완결을 알지 못하고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 다. 당신이 나를 살아있게 하므로”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소유”한다고 말한다. 

모두가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 반대된다. 에로스는 사라진다. …죽음의 부정성을 몰아낸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노예의 삶. 생존에 대한 염려는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생존하는 자는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있는 산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선원이 모두 산 송장이었다고 전해지는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의 배는 오늘의 피로사회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다. 목적지도, 휴식도, 평화도 없이 화살처럼 날아가는 네덜란드인은 소진되고 우울한 오늘의 성과 주체와 닮은꼴이다.성과주체가 누리는 자유는 자기 자신을 영원히 착취해야 하는 저주스러운 운명임이 드러난다.



4장 포르노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순례가 장소에 묶여 있다면, 관광은 "비-장소"를 양산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가 인간의 거주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본 장 소에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 역사, 기억, 정체성이 장소의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지나쳐버릴 뿐 머무르지는 않 는 관광의 "비-장소"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5장 환상 


근대적 자아는 자신의 소망과 감정을 점점 더 상상적인 방식으로, 즉 상품과 매체 이미지를 통해서 지각한다. 그의 상상력은 무엇보 다도 소비재 시장과 대중문화에 의해 규정된다. 

정보로 충만한 고선명high definition 영상은 아무것도 불확정적인 상태로 놓아두지 않는다. 하지만 환상은 불확정적 공간 속에 거 주한다. 

정보는 그 자체가 타자의 부정성을 해체하는 긍정성이다. 

오늘의 사회에 환멸이 커지고 있다면, 이는 환상의 고조가 아니라 기대의 상승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도하게 가시적인 이미지들의 어마어마한 더미가 눈 감가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미지들의 빠른 교체도 눈 감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을 감는 것은 일종의 부정성으로서 오늘날처럼 긍정성과 과도한 가시성이 지배하는 가속화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다.

과잉가시성은 문턱과 경계의 해체 과정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투명사회사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 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세워지는 국경의 철조망이나 장벽은 더 이상 환상을 자극하지 못한다. 철조망과 장벽은 타자를 발생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경제적 법칙만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지옥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리된다. 이 새로운 경계를 낳는 것은 자본이 다. 하지만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 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나 다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6장 에로스의 정치 


에로스에는 “보편적인 것의 씨앗”이 담겨있다. 아름다운 몸을 바라볼 때 나는 이미 아름다움 자체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 생성하도록 영혼에 자극과 동력을 가한다. 영혼은 보편적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행위를 산출한다. -플라톤

저자는 신 자유주의가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 그라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 정치화를 초래했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뜨겁게 연대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뜨거운 에너지가 실은 에로스의 본질에서 나온다고 해석한다. 즉 우리를 정치 무대로 불러 들이는 힘도 에로스의 에너지라는 주장이다. 오늘날의 정치가 오히려 음험한 이기심을 드러내므로 쉽게 공감하기 어렵지만,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뜨겁게 토론하여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민주정치의 본질이라는 면에서 옳은 말이다. 정치는 사랑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된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물론 사랑의 정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는 늘 적대적 성격. 그러나 정치적 운동을 배경으로 생겨나는 사랑 이야기들은 에로스와 성치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을 드러낸다. …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연결은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삼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이 있다고 본다. …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사랑의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타자의 관점에서 ,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사건”은 “진리”의 계기로서, 기존 상황속에 완전히 새로운 존재방식을 도입한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킨다.  사건의 본질은 단절의 부정성에 있다. 사랑의 사건적 성격이 정치 또는 예술과 결합된다. 이들은 모두 “사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초월적 충실성은 에로스의 보편적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성적 주체는 늘 동일하다. 어떤 사건도 없다.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애는 동일자를 재생산하는 습관적인 질서에 속해 있다. 포르노그라피는 이질성을 제거함으로써 습관화를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7장 이론의 종말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자, 즉 지혜의 친구라고 부른다. 철학자는 친구이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연인이다. 하지만 이 연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개인도 아니고 어떤 경험적 사태도 아니다. 

그것은 사유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 초월적인 경험이다. 강한 의미에서 사유는 에로스가 아니라면 시작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에로스는 없는 사유는 모든 생명력과 불안정성을 상실한 채, 반복적이고 반작용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에로스는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향한 욕망을 불어 넣음으로써 사유에 활기를 준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에로스를 사유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인 조건으로 끌어 올린다. 친구가 사유를 실행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이때 친구란 무엇을 의마하는가? 또는 연인이란? 차라리 연인이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친구 자신이 그동안 순수한 사유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여겨져온 타자와의 생동하는 관계를 사유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이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 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성적인 사랑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일종의 현상학과 오늘날 사랑을 위협하는 실제적 힘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결합한다. [……] 한병철의 주목할 만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고도의 지적 경험이며, 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에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의 수호, 혹은 랭보가 말하듯이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5~13쪽, )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멜랑콜리아」, 18쪽)
 
사랑과 우울증의 긴장 관계는 「멜랑콜리아」의 영화 담론을 처음부터 규정한다. 영화의 음악적 틀을 제공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사랑의 힘을 강하게 환기한다.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는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는다. 아토포스적 타자인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동일자의 지옥 속으로 돌입할 때 비로소 저스틴에게 에로틱한 갈망이 불붙는다. 강가 절벽 위의 누드 장면에서 관객은 사랑하는 한 여인의 몸, 쾌락으로 충만한 몸을 본다. 저스틴은 죽음을 가져오는 행성의 푸른빛 속에서 기대에 찬 표정으로 팔다리를 활짝 벌린다. 이 장면은 마치 저스틴이 아토포스적 천체와의 치명적인 충돌을 더없이 갈망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멜랑콜리아」, 22쪽)
 
부재의 부정성은 애무와 쾌락에 있어서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애무는 “달아나는 것과의 놀이,”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행위다. 애무의 갈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난다. 쾌락의 강렬함 역시 감각의 공유 속에서도 타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오늘날 사랑은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검색 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모든 갈망을 폐기한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47~48쪽)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벌거벗은 삶」, 50~51쪽)
 
오늘날 세워지는 국경의 철조망이나 장벽은 더 이상 환상을 자극하지 못한다. 철조망과 장벽은 타자를 발생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경제적 법칙만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지옥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리된다. 이 새로운 경계를 낳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환상」, 80~81쪽)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다. [……]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에로스는 언어와 현실의 시적 혁명을 위한 매체다. 에로스는 갱신의 에너지원으로 숭배되며, 정치적 행위도 그러한 에로스에서 양분을 얻어야 한다.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 (「에로스의 정치」, 87쪽)





다른 학자들의 사랑개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개념 :  최고의 사랑은 카리타스인데, 카리타스란 최고선이신 신을 지향하는 영혼의 욕구와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의 에로스와 문명 : 에로스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조르쥬바타이유의 에로티즘 : 에로티즘은 생명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베르그송의 정신작용으로서 사랑 : 사랑은 최고의 정신적 작용이다. 

레비나스의 윤리와 무한에서의 애무개념 : 타자의 얼굴은 무한 그 자체로, 신비한 타자를 경험하는 방법은 애무이다. 오직 부모와 자녀, 연인과 연인 사이에서만 타자는 타자로서 한몸으로 존재한다.  

크리스테바의 사랑개념 : 인간은 전이된 사랑에 의해서 타자를 사랑할 수 있다. 가장 큰 사랑은 모성이다. 

성서의 사랑 개념 :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이 오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해진다.

에바일루즈 : 오늘의 사랑은 자본주의의 의해서 선택하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사랑은 선택이다.





토의내용


1. 사랑하면 떠오르는 단어 3개는 무엇인가? 그 단어들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경험인가? 관계인가? 지식인가? 미래에 대한 갈망인가? 영원에 대한 탐구인가? 


2. 에로스가 근본적으로 atopos에 있다면 정치에서 타자를 장소가 없는 신비한 외부로 볼때 우리는 어떤 제도를 만들수있는가? (아래 내용 참조) 비례대표제, 


저자는 신 자유주의가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 그라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 정치화를 초래했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뜨겁게 연대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뜨거운 에너지가 실은 에로스의 본질에서 나온다고 해석한다.


3. 거대한 후퇴에서 보는 것처럼, 오히려 에로스가 포퓰리즘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는가? 에로스에만 집중하는 사랑개념의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지 않는가? 


4. 할 수 있음의 없음으로 볼때 우리가 할 수 있지만 안 하기로 한 것들이 있는가?마키아벨리와 비교해서 이야기해보자.


5. 동일자의 지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신비로운 타자'인데, 신비로운 타자들 간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타자들 간의 문제가 생길 때, 다시 말하면 다름들 사이의 경합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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