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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10. 2019

전제주의는 자발성을 살해한다

전체주의의 기원_한나아렌트_김만권

20190619_참여연대
한나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_김만권
전체주의의 기원 12장
권력을 장악한 전체주의


들어가기

전체주의의 핵심은 무엇인가? 자발성을 제거하는 것,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것에 있다. 그것을 위해서 행위를 행위자들로부터 분리시키고, 분리된 행위에서 분리된 정체성이 등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전체주의 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외적으로 실시했던 운동과 정책들, 전략들을 알아보자.





전체주의, 정권

전체주의 정권은 더 크고, 지속적이며 일관적인 허구의 세계를 개인의 일상생활에 투영시키는 만큼 기존 운동이 했던 선전이나 조직으로는 불추문했다. 정체주의 정권은 지속적 불안정과 인간 본성의 말살을 통한 완전한 전체주의 지배달성을 위해 무정형적 국가조직, 비밀경찰, 강제 수용소를 활용했다.

전체주의 통치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정상화를 막아야 하는데, 정상화야말로 운동이 멈추는 지점이 되기 때문이다. 정상화를 막기 위해 이들은 궁극적으로 운동을 지속적으로 확대팽창하고 이로 인해 궁극적 목표로 세계통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교묘하게도 ‘히틀러와 스탈리은 영구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감추기 위해 아정을 약속한다.’

전체주의 정권은 무정형한 국가행정을 자신의 원대한 목표인 세계 정복을 위해, 또 운동지부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이용한다. 전체주의 정권은 현실을 부단히 허구로 전환시키는 국내 실험에서 집행자이자 후견인으로 비밀경찰을 구축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지배를 직접 실험해보는 특수한 실험실로서 강제 수용소를 세운다.

전체주의 운동이 권력을 장악할 때 직면한 위험은 첫째,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정권으로 경직될 수 있다는 것과 둘째, 운동이 국경으로 인해 제한될 것이 라는 점이다.


영구혁명, 전체주의

스탈린과 나치는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자 트로츠키의 슬로건인 ‘영구혁명permanent revolution’이라는 용어 그 자체에 주목한다. 이 이론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이 혁명이 다른 나라로 전이될 것이라는 사회주의적 예언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권과 운동, 전체주의와 영토로인한 제한된 힘, 다른 나라들의 주권을 존중함과 동시에 세계지배를 주장하는 것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 공식은 매우 좋은 해결책이었다. 요즘은 히틀러와 스탈린은 영구적으로 불안정한 국가a state of permanent instalbility를 만들기 위한 의도를 감추기 위해서 안정성stability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정권은 허구세계를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현실로 들여와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 이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안정성을 갖는 것을 막아야 했다. 현실과 계속적인 대결을 해야 하는 전체주의는 선전과 조직만으로 불충분하며, 다른 곳에서 유입되는 모든 사실드링 전체주의를 위협했다. 총체적 지배를 위한 투쟁과 모든 비전체주의적 사실에 대한 제건느 전체주의 정권 그 자체에 내제되어 있는 특성이다.

궁극적으로 개인들에 대한 총체적 지배는 세계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졌다. 전체주의 정권은 지속적으로 현실을 허구로 전환시키기 위해 국가조직을 무정형화하고, 비밀경찰을 구축하고, 절대적 지배를 직접 실험해 보는 특수한 실험실로 강제 수용소를 세웠다.


전체주의, 국가기관

영구적인 무법상태른 이론적으로 ‘전체주의의 국가는 법과 도덕 사이에 어떤 차이도 알지 못했다.’는 히틀러의 격언과 일치했다. 왜냐하면 유효한 법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도덕과 동일하고 그들의 양심에서 나온다면 실제로 공적인 법령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당과 국가의 이중권위가 공존하는데, 권위의 두 근원이 둘의 관계는 허울만의 권위와 진정한 권위의 관계라 할 수 있고, 정부기구는 보통 당의 진정한 권력을 감추고 보호하는 무력한 외관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나치돌격대의 전통적인 지역단위는 히틀러가 만든 행정구역인 가우와 공간적으로 일치하지 않았고 또 프로빈츠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치 돌격대의 지역단위는 나치 친위대의 지역 단위와도 달랐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히틀러 청년단의 구획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의도, 무정형성

히틀러 제 3제국의 주민은 공무원, 당, 나치 돌격대 그리고 나치 친위대 같이 서로 경쟁하는 권력들의 동시적인 또는 상충하는 권위 밑에서 살고 있었다. 어떤 기관의 권위를 가장 상위에 두어야 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분명한 말을 들을 적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순간에 누구에게 복정하고 누구를 무시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육감을 개발해야만 했다.

전문적으로 말한다면, 전체주의 지배 장치 안에서 운동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부가 끊임없이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을 다른 조직으로 이동시키면서도 권력을 박탈당한 집단을 해체시키지 않고 공개적으로 탄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치정권 초기, 나치 돌격대는 권력의 진정한 심장부였고 당은 표면상의 권력이었다. 그러다가 권력은 나치 돌격대에서 나치 친위대로 넘어갔고 결국 나치 친위대에서 공안부로 넘어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권력기관도 자신이 지도자의 의지를 구현하고 있는 척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치독일에서도 볼 수 있는 당 및 국가의 중복현상에 상응하는 것은 비밀경찰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비밀경찰은 내부에서 서로를 감독하고 감찰하게 되어 있다. 이들의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수뇌부의 의지를 위해 선발된 것뿐이다. 이러한 계획된 무정형 속에서 서로에 대한 경쟁은 반대파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애초에 제거한다.

또한 그들이 패배한 것조차 모르고 어던 자신의 지위 이동이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 종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게 된다. 끊임없는 권력 및 권한의 이동은 파벌형성을 막았고 공직자들 간의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달리말해 누구에게 복종해야 할지 알게 되고 또 위계질서가 비교적 영구적으로 정착된다면 전체주의 통치에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안정적 요소가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나치는 실권기관이 공개되면 언제나 그것을 부인했고 새로운 통치기관을 신설했다. 이 신설기관에 비해 예전 기관은 그림자 통치기관이었다. 이런 게임은 분명 무한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통치기술로서 전체주의 장치는 단순하고 효과적이다. 모든 명령이 반드시 실행되낟는 절대적인 확실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권력과 명령체계의 가변성 때문에 독재자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으며 이는 신속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나라의 정치체제는 이러한 무정형 때문에 어떤 충격에도 끄떡없게 된다. 끊임없는 이동, 좌천과 승진은 확실한 팀워크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사람들의 경험이 발전develop되는 것을 막는다.


비밀경찰, 전체주의

국가의 위에, 표면적인 권력의 간판 뒤에, 여러 겹으로 중복된 관청들의 미로 한 가운데, 모든 권력 이동의 배후에, 그리고 비능률의 혼돈 가운데에 국가의 권력 핵심, 능률적이며 유능한 비밀경찰의 부서들이 자리잡고 있다.

권력의 핵심은 그럼 어떠했는가? 유일한 가시적 권력기관으로서 경찰의 역할이 강조되고 이에 상으하여 군대는 겉보기에는 더 큰 권력을 가진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시되는 경향이 전체주의 정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인 적’ 개념은 전체주의 통치자들이 되풀이하여 말했던 사실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정권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부가 아니라 운동이며, 운동의 앞길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시스템 안에 어떤 법적인 사유가 있다고 말한다면 ‘객관적인 적’이 중심이념이다.

전체주의 정권의 권력 장치 안에서 ‘조직력과 능률에서 가장 뛰어난’ 정부부서였던 비밀경찰은 정부의 진정한 집행부서로서 이 부서를 통해 모든 명령이 전달되었다. 비밀요원들 간의 조직망을 통해 전체주의 통치자들은 그 자신을 위해 직접 집행명령을 전달할 수 있는 연계망을 만들었다.

비밀경찰 요원들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유일하게 공공연한 니배계급이며 그들의 가치 기준과 척도가 전체주의 사회의 전체 구조 안에서 침투될 수 있었다. 전체주의 경찰은 지도자의 의사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그 혼자만이 누가 그 다음 적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고, 스탈린이 그랬듯이 비밀 경찰의 간부들도 골라 제거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밀경찰들은 지도자의 의도에 종속되어 있다.

전체주의 경찰의 과제는 범죄의 적발이 아니라 정부가 특정한 범주의 주민들을 체포하기로 결정할 때를 위해 항상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실험

전체주의 지도자들은 권력투쟁 동안 정해놓았던 허구와 허구세계의 규칙을 항상 지켜야 한다고 확신했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어던 함의를 내포하는지를 단지 서서히 발견했다. 그들은 인간의 무기력을 믿었고 모든 것이 조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이런 믿음과 확신 때문에 인간이 상상할 수는 있지만 결코 행동에 옮기지 못했던 그런 실험을 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비밀, 즉 총테적 지배를 실험하는 실험실인 강제수용소는 전체주의 정권에 의해 바깥 세계나 본국 국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괴상하고 기괴한 일에 직면할 때 자신들의 눈과 귀를 믿기를 거부한다.

전체주의 정권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허구 세계를 실현할 정도로 멀리 갈 수 있는 까닭은, 전체주의 국가의 주민들 다수를 포함한느 외부의 비전체주의 세계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습관에 빠져 광기의 현실을 눈 앞에 두고도 회피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수용소

전체주의 정권의 강제 수용소나 집단학살 수용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의 기본신앙이 실증될 수 있는 실험실 기능을 한다. 수용소는 사람들을 말살하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학적으로 통제된 조건에서 인간 행동의 표현인 자발성 자체를 제거하고 인격을 단순한 사물, 동물조차 아닌 그런 사물로 만드는 무서운 실험실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발성은 그것이 인간의 자유뿐만 아니라 삶 자체, 즉 단순히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삶 자체와 연결되어 있는 한 완벽하게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실험이 간으한 곳은 유일하게 강제수용소이고, 그래서 그곳은 ‘다시 실현된 가장 전체주의적인 사회’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 총체적 지배의 지침이 되는 사회적 이상이다.


법적인격, 살해

총체적 지배를 향한 최초의 중요한 행보는 살마에게서 법적 인격을 죽이는 것이다. 일차적인 방법은 일정한 범주의 사람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고 동시에 국적 박탈이라는 수단을 통해 비전체주의 국가들에 게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위법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자의적인 체계의 목표는 전 주민의 시민권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궁극적으로 무국적자들처럼 자기 나라에서 법률상의 보호를 박탈당하게 된다. 인권의 파괴, 그의 법적 인격의 살해는 그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이는 범죄자, 정치적 반대파, 유대인, 동성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국가 모든 주민에게 적용된다.

전체주의 공포적치는 도덕적인 인간에게 양심의 결정을 의심스럽고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들면서 가장 무서운 승리를 쟁취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책임져야 할 아내나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거나 아니면 친구를 속여 살해해야 하는 것 가운데 양자택일해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면, 자살마저도 자기 가족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그는 어떤 경정르 내려야 할까?

양자택일은 선과 악사이에서가 아니라 살인과 살인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세 자신가운데 어느 아이를 죽일지 나치로부터 선택을 강요당한 그리스인 엄마의 도덕적 딜레마를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 양심이 부적절해지는 조건, 선을 행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만듦으로써 전체주의 정권의 범죄에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조직적인 가담을 하게 되고, 이 공모 관계는 희생자에게까지 확대되며 그렇게 하여 전체주의적이 된다. 나치는 친구를 죽이거나, 아니면 낯선 사람들의 살해에 협조를 해야 하는 절망적인 딜레마에 이들을 빠뜨렸다.

도덕적 인격이 살해되었을 때 인간이 산송장이 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개인의 차이, 즉 그의 뮤일무히한 정체성이다. 인간의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담는 방식은 수없이 많고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개인성individuality의 살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성, 살해방법

개인성의 살해방식은 먼저 괴상한 수송조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수백명의 사람들을 벌거벗긴 채로, 말 그대로 서로 완전히 달라붙은 상태로 실은 채 가축수송용 열차가 시골길을 따라 며칠 밤낮을 달린다. 수용소에 도착하고 처음 몇시간 미리 계획된 충격이 가해진다. 즉 삭발을 시키고 이상한 죄수복을 입힌다. 그리고 정확하게 계산하여 죽지 않을 정도로 어쨌든 빨리 죽지 않은 정도로 육체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문들로 이 방식은 종결된다.

전체주의 지배를 동경하는 사람들은 모든 자발성, 즉 개성이 존재할 때 항상 나타나는 자발성을 없애야 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모범적인 ‘시민’은 파블로프의 개이고 가장 기초적인 반작용으로 축소된인간표본이며 언제나 폐지되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반응의 묶음,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반응의 묶음이다. 이런 시민은 수용소 밖에서는 단지 불완전한 형태로 생산될 수 있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목표는 외부세계의 변형이나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본성 자체를 박꾸는 것이었다. 강제수용소는 인간본성 변화를 위한 실험실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 항상 넘쳐흘렀던 고통도 쟁점이 아니고 희생자의 수도 쟁점이 아니다. 인간 본성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다.


악, 위험

악이 위험한 이유는 이 세계가 이성적으로, 선하다는 전제를 뒤집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보편성을위협하는 것은 결국 잔인함이다.

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악은 근본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까?

근대 이후 이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근대성의 토대에서는 ‘악’은 인간의 이성자체를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문제는 우리가 다루어야 하지만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때 그것은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 악이 된다. 절대악은 이기심, 탐욕, 시기, 적개심, 권력욕이나 비겁함과 같은 사악한 동기로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로도 복수할 수 없고 사랑으로도 참을 수 없으며 우정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급진적 악의 실체는 처벌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복수할 수도 없고, 사랑으로도 참아낼 수 없으며, 우정으로도 용서되지 않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영구혁명, 불안정한 혁명의 본질은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미리 알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나 혁명의 본질은 무엇인가? 혁명자체를 움직이고 있는 운동을 소유하는 것, 더 나아가 그 운동이 성공할 때마다 결과로 나타나는 ‘권력’을 얻기 위한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운동은 끝나지 않은 불안정한 혁명이 되고, 그 혁명의 과정에서 전체주의정부는 이렇나 불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밀경찰이라던지 여러가지 방식으로 지속적인 혁명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조금 더 나아가면 반대세력인 희생양들을 데리고 와서 혁명이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지체되고 있다면서 일시적인 전체주의 정권의 영구적인 성격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정체를 가지지 않는, 의도적으로 한 권력에 집중된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전체주의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내부적으로도 권력이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도 운동이 정점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영구혁명이 가능해졌다.

전체주의정권은 어쩌면 알았을 것이다. 바로 ‘의지’야 말로 자발성, 자유, 평등을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였다는 것을 말이다. 기독교에서도 자유의지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병철이 이야기한 ‘친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는 친구들이여야만 의지가 자유롭게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건반사’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유태인들’을 운명론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용소를 관리하는 사람들역시 하나의 조건반사로서 가스살포를 ‘특별조치 1호’와 같은 상징으로 덮아서 바꾸어 버렸다.

‘객관적인 적’이 중심개념이 되는 이유는 다시 말하면, 희생양이론이다. 희생양이 있어야만 운동은 운동이 될 수 있으며 내부나 외부나 멈추지 않게 된다.


민네이션, 질문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권력이 리듬을 만들고, 어떠한 결정권을 가진다고 말한다. 또한 아모르파티의 입장에서 그 순간에 유동적인 힘이 모여서 하나의 탑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금방 흩어지고 또 새로운 형식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히틀러의 사상, 나치의 사상은 니체의 사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존재자’에서 볼 때 히틀러와 전체주의자들은 큰 의미의 역사에 자신의 정체성을 내 걸고, 그 정체성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정체성의 집접도를 높였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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