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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17. 2019

새로운 시작이 인간의 능력이다

한나아렌트_전체주의의 기원_13장

20190617_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전체주의의 기원_한나아렌트_김만권
13장_테러와 이데올로기


들어가기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행위의 지도원칙과 기준은 왕정에선 명예였고, 공화정에선 미덕이었으며 압제정치에서는 공포였다. 전체주의 정부 형태가 새롭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체주의 지베에서 정치적으로 표현되는 근본경험이 있다면,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과거에 국가의 기초로 이용된 적이 없는 어떤 기억일 것이다.

우리는 전체주의를 현대 형태의 참주정치,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는 무법정부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정권은 법의 지도 없이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자의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실정법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자연법칙이나 역사법칙을 엄격하고 확고하게 따른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정법의 합법성을 무시하고 지상에 정의의 왕국을 직접 건설한 것처럼 가장하는 전체주의 적법성은 역사법칙이나 자연법칙을 집행하면서 그것을 개인의 행동을 위한 옮고 그름의 기준으로 바뀌지 않는다. 합법정부란 불변의 자연법칙이나 영원한 신의 계명을 옮고 그름의 기준으로 바꾸어 실현하기 위해 실정법이 필요한 정치체제를 말한다. 이런 기준 속에서만 또 모든 국가의 실정법 조직체 안에서만 자연법이나 신의 계명의 정치적 실체가 될 수 있다.


전체주의, 테러

전체주의 정부의 체제에서는 총체적인 테러가 실정법의 자리를 대신한다. 총체적 테러가 실정법의 자리를 대신한다. 총체적 테러는 역사나 자연의 운동법칙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전체주의 정부에서 테러는 반대파의 진압을 위해 이용 되기는 해도 단순하게 반대파의 진압수단이 아니다. 테러가 모든 반대와 무관하게 될 때 전체주의적이 된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때 테러는 가장 위에 군림하며 통치하게 된다. 합법성이 비독재 정부의 본질이고, 무법이 독재의 본질이라면, 테러는 전체주의 지배의 본질이다.

전체주의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은 역사발전이란 높은 힘을 성가시게 훼방하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운동 도는 역사 운동의 순종적인 하인 역할을 수행하는 테러는 그 과정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의 자유뿐만 아니라 자유의 근원, 즉 인간이 탄생한다는 사실과 함께 주어져 있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속에 존재하는 자유의 근원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데올로기, 테러

역사(계급투쟁)이나 자연(우수한 인종의 지배) 법칙의 실현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국가가 전체주의 국가이다. 지배자는 정의를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역사법칙이나 자연법칙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운동의 법칙에 따라 운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말 그대로 이념의 논리로서 역사과정 전체의 신비를 모두 알고 있듯이 가장한다. 이 이념은 언제나 어떤 사상 안에 고유한 운동, 움직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데 인종주의는 인종사상에 고유한 움직임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움직이는 것, 다시 말해 역사에만 관심을 보이며 과거에 대한 완전한 설명, 현재에 대한 완벽한 지식, 미래에 대한 믿을만한 예측을 제공한다. 이데올로기적 사유는 경험과 무관하게 일어나며 지각 가능한 것 뒤에 감추어진 무엇인가를 꺼내보라고 강조한다.

이데올로기는 복잡한 사실을 단순화하여 논리적 절차에 귀속시킨다.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사실이 아닌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적 과정이다. 이데올로기의 접미어로 로기logy는 동물학zoology에서처럼 로고이logoi, 그것에 관한 과학적 진술만을 의미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데올로기는 사이비 과학인 동시에 사이비 철학일 것이며 과학의 한계를 위반하는 동시에 철학의 한계도 위반한다.


이데올로기,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전체주의 요소를 찾아보자. 첫째, 총체적 설명을 주장하면서 이에돌로기는 언제나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 즉 통상적 의미에서 역사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총체적 설명은 모든 역사적 사건을 설명할 것을 약속하고 과거에 대한 완전한 설명, 현재에 대한 완벽한 지식, 미래에 대한 믿을만한 예측을 제공한다.

둘째, 이데올로기 사유는 이런 능력을 가지면서 모든 경험에서 독립한다. 방금 일어난 일에 관한 물음이라 할지라도, 이데올로기 사유가 경험에서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바꿀 힘이 없기 때문에 논증의 방법으로 경험에서 사유를 해방시킨다. 이데올로기 사유는 절대적으로 논리적인 절차 안에 사실을 귀속시킨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 사유는 현실 영역에서는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의 일관성을 가지고 나간다.


합법, 테러

합법성이 비독재 정부의 본질이고, 무법이 독재의 본질이라면 테러는 전체주의 지배의 본질이다. 테러 자체는 자연의 힘이나 역사의 힘이 분출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다. 인류의 적을 골라내고 이적을 향해 분출되는 것이다.

개인들 간의 경계와 의사소통 채널을 없애버리고 사람들끼리 서로 압박하게 하여 그들 사이의 공간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자연이나 역사의 힘에 운동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 전체주의 국가는 테러가 협박 수단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이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이 나타나서 세상에 목소리를 높이지 않게 하려면 테러가 필요하듯이, 어느 누구도 사유를 시작하지 않도록 논리성의 자기 강요적 과정이 동원되어야 한다. 사유는 인간의 모든 활동 가운데 가장 자유롭고 가장 순수한 활동이며 연역의 강제적인 과정의 정반대이다.


고립, 질문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테러를 본질로 하고 이데올로기 사유의 논리성을 행위 원칙으로 삼는 정부 형태에는 인간 공동생활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경험이 스며들이 있는가? 분명 그런 식의 결합은 과거에 존재했던 여러 정치적 지배형태에서는 사용 되지 않았다.

모든 정체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이 형태도 인간이 고안 했고 어느정도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의존하는 근본 경험도 틀립 없이 인간의 경험이고 인간에게 알려진 경험이다.


고립, 정의

고립isolation은 인간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추구하면서 함께 행동하는 삶의 정치 영역이 파괴 되었을 때, 그들이 내몰린 막다른 골목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고립은 정치 영역에 관련된 개념이다.

다시 말해 고립은 누군가가 공공사에 무엇 인가를 더할 수 있는 기회 혹은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나타난다. 고립은 한마디로 자유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간섭의 부재가,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자유란 오로지 정치영역에만 있으며, 동료들과 함께 협력해 무엇 인가를 새롭게 출발시키는 행위가 자유라고 말한다. 결국 고립되었다는 말은 하나의 사람이 자유를 상실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고립되어, 이 공유된 세계에 자신의 것을 더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될 때 고립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결국 고립은 세상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경험에 기반을 둔다. 이 경험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절망적인 경험이다.

테러가 절대적인 지배를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은 서로 고립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 뿐이기에, 고립은 테러로 시작한다. 고립은 테러의 가장 비옥한 토양인데, 고립된 인간들은 무기력하기에 근본적으로 동료들과 행동할 수 없는 느력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독, 전체주의

고독solitude은 혼자가 되길 요구하는 활동으로 나와 나자신이 서로 마주보면 대화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유가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유thinking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유는 나와 내 자신me and myself이 나누는 대화two-in-one이다.

다시말해 고독은 사유를 통해 이르게 되는 자기성찰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왜 사유일까? 아렌트는 ‘정치의 약속’의 ‘소크라테스’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에 대한 이론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다른이와 함께 산다는 일이 나와 함께 산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바로 단지 자기자신과 사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이들과 사는 데에도 적합함을 의미한다. 사유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델피의 신전에서 얻은 지혜인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데 아렌트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리를 내가 갖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고독한 자가 앎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이다.

사유하는 자는 동료에게 묻는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다른 동료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들에게 직접 물을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여기에 문답법의 가치가 있다.


고독, 아렌트

아렌트는 진실을 말하는 이의 가장 우선적인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모순되지 않는 것이며, 모순되는 것들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문답법에 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과의 모순, 사물이나 질서와의 모순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문답법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자아는 자신과 타자의 관계를 모순되게 말하지 않으면서 타자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아는 자신과 똑같은 자리에 타자를 놓음으로써 ‘다른자아’를 친구처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고독은 타자와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

이 고독 속에 있는 사람은 타자와의 접촉이 요구되는 데, 타자를 통해 모호하게 남아 있는 내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정체성 확인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이 정체성이 한 개인으로 하여금 교환할 수 없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고독은 나 자신의 자아에게 버림받을 경우 외로움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타자와의 교류를 없으면 고독은 언제나 외로움에 빠질 위험이 있다.


외로운, 전체주의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인 테러의 공통된 토대이며 전체주의 집행인과 희생자를 준비하는 이데올로기나 논리적 타당성의 공통된 토대이다. 외로움은 대중의 뿌리 없음과 쓸모 없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외로움은 타자와 함께 있을 때 드런다는 점에서 고립과도, 고독과도 다르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자아상실이다. 이 자아는 고독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정체성은 나와 동등한, 믿을 수 있고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동료들에 의해서만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상실은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상실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외로움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자아상실이다. 이 자아는 고독 속에서 실감할 수 있지만, 그 정체성은 나와 동등한 사람과 신뢰할 수 있는 교제를 나눌 때에만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자아도, 타자도, 세상도 필요없는 인간 정신의 유일한 능력은 논리적으로 추론이다. 논리적 추론은 사유와도, 경험과도 무관하게 바뀌지 않는 공리로 움직이는 것으로, 절대적 외로움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진리이다. 이데올로기와 작동하는 방식이 동일하다.


외로움, 자명성

외로운 상황에서 자명성은 더 이상 지성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적이 되어 그 자체의 사상의 노선을 발전시키게 되는 것이다. 전체주의에서 외로움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의 경험이다.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화된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한데, 이 조직적인 외로움이 우리가 알 고 잇는 세상을 유린하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외로움을 통해 만들어진 대중이란 새로운 경험이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정부, 전체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외로움과 이 외로움의 결과, 즉 논리적-이데올로기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추론하는 태도는 반사회적인 상황을 대변하며, 모든 인간적 공공생활을 파괴하는 원칙을 품고 있다. 단 한 사람의 전제적, 자의적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적인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하다.

이 조직된 외로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곳곳에서 이제 끝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유린하며, 더욱이나 그 끝에서 다시 나타날 새로운 시작이 스스로를 드러낼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유린하기 때문이다.


위협, 전체주의

우리시대의 위기와 그 주요 경험이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낳았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정부는 이제부터 우리에게 하나의 잠재적인, 항존하는 위험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새로운 탄생이 이 시작을 보장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기형도, 대학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향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민네이션, 생각

아렌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어떤 사람이나 인종이 사실을 추론해서 단순화시킨 논리적인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물을 깊게 탐구한 철학도 아니고, 사물의 원리를 깊게 분석한 과학도 아닌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포퍼는 전체주의와 역사주의를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 안에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허구이다. 이데올로기끼리 서로 우위를 정한다는 생각자체가 이미 사이비가 된다. 사회는 점진적으로 증명된 것만 옳은 것으로 인정받으면서 발전해가는 complex의 복잡계이다. 이러한 복잡계에서 한가지로 단순하게 원인이나 원리를 추론하는 사람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고, 전체주의나 역사주의로 환원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아렌트는 고립과 고독을 나누어서 설명한다. 정치적 행위를 공공의 영역에서 할 수 없을 때 고립이라고 말하고, 사유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가 바로 ‘고독’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이러한 고독이 있어야만 타자와 함께 시작할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연결해서 외로움이란 공공에 있지만 자기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쓸모없는 잉여인간’일 때 일어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 외로움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답은 하나다.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친구들이 생기는 것이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잉여인간으로 전락하기전에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친구가 되는 것이다. 공공영역에서 정치적인 것을 가장자리로 몰려나가지 않도록 ‘정치적인 몫’을 가질 수 있는 자리를 두어야 한다. 어쩌면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더 다가가고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 한발짝이라도 걸을 수 있는 공간,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민네이션, 고민

엘리트주의를 어떻게 해결할까? 엘리트주의가 오히려 현대의 전체주의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엘리트주의 안에 녹여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몰아내고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생의 고립에서 고독으로 나아가는 길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계층제, 절대빈곤, 청년빈곤, 빈부격차, 노인부양과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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