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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12. 2019

기생충과 개새끼

영화 기생충에서 본 아우라



1. 산동네


초등학교 때 나는 산동네에 살았다. 연희동 산동네는 연희동고개를 넘어가는 기점에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었는데 올라가는 길은 부잣집들의 천국이었고 넘어가는 기점에서 정확히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나누어지는 곳이었다. 올라가는 언덕에 볕이 좋아던 탓인지 노태우, 전두환이 살고 있었고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3층정도의 담장을 가진 앞마당에서 개들을 풀어 놓고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6개월동안 중앙일보를 배달했다. 연희동 산동네로 올라가는 부자동네에서 신문배달을 했는데 고작 30부 밖에 안되는 분량을 1시간이나 걸려서 하루하루 일거리를 쳐내야 했다. 그래서 받은 돈은 단돈 3만원이었다. 그 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받고도 열심히 신문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은 다리가 그 이후부터 두꺼워져서 잘 빠지지 않는다. 산동네의 풍경은 정겨움보다는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서로가 싸우는 풍경들이 많았다. 푸세식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 비가 세는 작은방에서는 쥐들과 함께 잠들 때가 많았다. 1평도 안되는 부엌에 샤워도 하고 세수도 해야 했다. 우리집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모든 집들이, 그러니깐 함께 산동네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기 때문에 나의 작은 세계에서는 모두가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힘들지 않았다. 원래 삶이 이런것이라 생각했기에 말이다. 그러나 한가지 안스러운 것이 있었다.


2. 다리밑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왕따를 당하는 여자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멀쩡하게 생겼지만 약간은 지저분한 감이 있었고, 머리도 매일 감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역시도 매일 감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1주일에 1번은 목욕탕은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홍연초등학교를 가려면 연희동 산동네에서 내려와서 한참을 지나서, 홍연시장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나면 개천을 지나야 하는데, 그 개천 옆에 쓰러져 가는 판자집이 있었다. 그리고 개천물이 어나면 없어졌다가 물이 빠지고 나면 다시 생겨나는 요술같은 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넘어갈 때 즈음에서야 나는 그 여자인 친구가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다리밑에 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다리밑에 산다는 것은 인간이하의 삶을 사는 것의 전형이었다. 그러니 인간이하로 생각한 아이들은 아무런 꺼리낌 없이 그 친구를 놀려댔고 그럴때마다 그 친구는 눈물을 머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수업이 시작할 때쯤 자리에 앉았다. 가끔씩 짖꿏은 남자아이들은 그 친구를 아무런 이유없이 때렸다. 위대한 개츠비의 닉처럼 나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서 그 친구를 바라보았다. 말리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위로하지도 못하는, 그러면서도 내면에서는 ‘아이고 불쌍하다’라는 말들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자연스럽게 나는 '나는 그래도 말이야~우리 집이 산위에 있어서 집이 물에 잠기지는 않지, 그리고 비가 좀 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집이 있다는 게 어디야! 다리밑이라니 얼마나 냄새나고 힘들까?’라며 그 친구와 비교한 나의 처지에, 감사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녹녹치많은 않은 삶이었다.


3. 천장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무렵 산동네는 공원녹지사업의 일환이라고 하면서 곳곳에 나무가 심겨지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허물어졌다. 산동네는 말 그대로 산에 있는 동네라서 산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살던 집도 다 철거하고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나는 10살까지의 기억이 아련히 묻혀 있는 산동네를 떠나는 것이 여간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사를 간다는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드디어 친구라도 초대할 수 있는 집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연희동 고개를 넘어서서서 홍남교가 가까이에 있는 저지대에 위치한 집으로 갔다. 산동네보다는 집이 넓었지만 비가 많이 오면 비가 많이 새어 들어와서 계속 풀을 퍼야 했다. 반지하는 아니었지만 지대가 낮아서 비가 많이 오면 매번 큰 걱정을 하였던 때였다. 어느날은 비가 정말 억수로 많이 왔는데, 깨어진 기와 사이로 천장의 물이 새어들어와서 결국은 천장의 반이 무너질것처럼 내려 앉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것을 하는 수 없이 최대한 비닐로 포개어 싸매어서 물이 방으로는 못들어오게 만들었다. 천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런 말이었던 걸까? 매우 불안하게 잠을 자는 내내 비가 오면 항상 걱정되는 어린시절의 순간들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아 나는 언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4. 다리밑에서 주왔다


어머니는 어릴적에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너 다리밑에서 주워왔는데, 이제 니네 친부모한테 보내버린다’라고 으름장을 주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다리밑에 살던 친구가 생각나서 ‘아 잘못했어요, 절대 안그럴께요’라면서 빌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왜 너네 친부모가 아주 부자라서 좋은차 타고 너 데릴러 올 껀데?’라고 하면서 나를 달래셨다. 그게 달랬던 것인지 놀리던 것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의 세계에서는, 꿈나라에서 실제로 그 집에서 멋진 자가용을 보내서 나를 태우러 오는 상상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는 표현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양분된 두 세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때론 내가 불쌍하기도 했다가, 어떨때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가. 여러가지 감정들이 오고갔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어느정도 성장해 있었고 이 사회에서 ‘계층’이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다리밑에 들어갈 만큼 절박한 사람들의 삶은 보통 어떤 미결된 문제들이 도사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객관적인 말투로 과거를 요리조리 불쌍해 보일 것 같은 소재들을 먼가 있어보이는 의미부여로 표현하였다. 과거를 어느정도 미화하고 나니 나는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는 것도 어머니의 입담이나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 보이면서 내 기억 속에 ‘그 친구’는 절대로 꺼내지 않는 교묘함도 보이게 되었다. 아니 스스로 느껴지게 되었다.



5. 환한 미소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돌아오는 귀국길에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감추고서 환한 미소를 띄면서 걸어오는 봉준호 감독을 보고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받지 말아아햘, 아니 받기에는 황송한 상을 받았기 때문에 저렇게 미묘한 표정에 가끔씩 환한 미소가 비춰지는 걸까? 의아했다. 그리고 ‘기생충’이라는 영화의 이름만 들어도 그의 생각이 환하게 보였지만, 무엇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길래 상도 받고 저 사람의 표정도 저렇게 되었을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영화를 보았다. 예상하던 대로 내가 이상하게 보이던 부분에서 단서를 찾았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과 거리가 있을 수록 가난은 아우라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아우라화된 소재는 영화에서는 빛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 소재로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큼 말이다. 환한미소는 그 영화가 가져온 아우라를 자신의 얼굴로 가져온 것이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했다.



6. 포르노


에로스와 포르노의 결정적인 차이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다. 다른 사람이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영역에 있는가가 에로스가 탄생하는 조건이라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마음대로 부리고 이용하고 때리고 데리고 오고 무릎꿇히는 것은 포르노이다. 더군다나 타자에 대한 어떤 존경이 없는 상태로 실제를 바로 드러내 보일 때 포르노는 일상이 된다. 그래서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한 어린시절의 이야기는 나를 항상, 나의 과거와 나의 가족들을 ‘가난한 사람들’로 치부되어 버리는 포르노의 장으로 넣어 버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 어떤 상황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포르노를 넘어서 누구나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그 어린시절의 다리밑에 사는 친구와 같이 되어 버린다. 기생충에서 보여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여과없이 포르노로 전락하여 1000만관객 아니 전세계에 알려졌다. 식탁에 앉으면 보이는 사람들의 종아리, 방바닥보다 높은 좌변기의 위치, 통로가 거실이 되어 버리는 축소된 방구조, 환풍기 하나 없이 먹은 것들이 모두 옷으로 흡수되는 주방과 거실의 일체화, 대학을 2번이나 떨어지고 일자리도 구하기 힘든 아들,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버린 딸의 미래, 과거에는 운동선수였지만 지금은 할일없이 대충옷을 입고 앉아 있는 어머니의 일상, 무계획이 계획이라면서 할 말은 없지만 아들의 신분세탁에도 ‘너는 그래도 계획이 있구나’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단상. 주인집 지하에 살면서 주인이 주는 음식과 공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스부호로 주인의 오는 길을 맞이하는 대왕카스테라 사건으로 망했던 지하에 사는 가난한 이, 가난한 사람들이끼리 더 싸운다는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식의 설정,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어느곳에 사는가에 따라서 다른 삶을 살게 되고 결국은 존귀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는 감독의 시선, 단순하고 심플하게 삶을 살아가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속임을 당하면서도 소파에서의 성생활도 잘 즐기는 주인아주머니, 게임회사 혹은 잘나가는 스타트업에서 사장을 하면서도 아들의 작은 부탁에 죽고 못사는 어떤 중년의 부잣집 가장,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이것이 숨겨진 이야기입니다!;라던지 ‘이장면이 가지고 있는 상징들’이라면서 조횟수 올리려고 작정한 유투버들, 자기일 아니라면서 ‘봉준호는 그래서 말이야~’라며 영화평론가가 되신 사람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포르노처럼 보인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실제로 그 하나로 평가되고 판단되는 그래서 신비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가난한 이들의 삶은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그들의 가난한 삶이 ‘아우라’처럼 빛나는 영화의 소재로 쓰이는 그런 포르노 말이다.



7. 개새끼


봉준호 개새끼라는 말을 들었다. 청년들과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사는 시대, 나역시. 그런 욕을 입에 담았다. 가난도 영화의 소재가 되고, 빈곤함도 소설의 소재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삶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기생충처럼 사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벌려진 포르노의 속살에서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기발하다 정말’이려면서 브르디외의 말처럼 ‘구별짓기’에 성공한 이들은 점점 더 자신들이 가난한 이들의 삶을 까발리고 이해하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아우라’를 가져오기에 힘쓰는 장면들. 개새끼. 욕이 나왔다. 이제는 빼앗길 것이 없어서 우리의 삶 조차도 누군가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소재로 쓰이는 것일까? 비오는 밤 물이 새고, 천장이 무너질까봐서 두려움으로 떨었던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삶을 살고 있을 우리 아이들의 삶 그것이 자신들을 빛내기 위한 소재로 쓰인다는 것이 얼마나 열받는 일인가? 어릴적부터 할아버지가 모으던 돌을 보고 소재로 삼았던 감독, 젊은 시절 연대에 다니면서 과외를 하던 경험을 영화에 아낌없이 쏟아 부은 감독의 말. 나는 어느것 하나 탐탁치 않았다. 예술이라면서 예술은 정말 이렇게 다 까발리고 열어놓고, 다 보여주고서는 그냥 사라져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그래서 ‘자유’로운 표현을 그렇게 외친 것인가? 개새끼.



8. 거기 누구 없소?


좋은 외제차를 타고 누군가 나타났음 좋겠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없었을까? 모든 것이 나의 노력으로만 된다는 믿음으로 불굴의 정신, 삶을 이겨낸 성공스토리의 사람들 말고, 지금도 버스탈돈 없어 조금이라도 걸어다니고, 학교에서 책살돈이 없어서 선생님한테 따귀를 맡고(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 당했던 실화), 반짝거리지 않는 미래를 겨우 붙잡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기계보다 더 뻐르게 일하는 어떤 청년. 매일 저녁 아니 밤 12시가 넘었음에도 오히려 폐지가 더 많이 나오는 시간이라며 밤잠을 잊으신 할머니의 입가의 흐느낌과 지하철역 빅이슈를 파시는 아저씨들의 뒷모습. 거기 누구 없소? 정말 거기 누구 없나요? 개새끼 말고요, 정말 누구 없어요?



9. 무계획


며칠동안 밤을 설쳤다. 겨우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써 놓는다. 내가 어느순간 본심을 잃고 개새끼가 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무계획이다. 어떤 대안도 내 안에는 없는 것 같다. 단지 이게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이들이 인생을 포기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냄새를 들켜서 칼로 찌르기도 하고, 지하실속에 처박혀 버리는 자존심을 회복하느라 주먹을 날리기도 하겠고. 무계획이다.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그런데 마음 속에 계속 불편함들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눈물이 나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은 화라기 보다는 오히려 희망일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무계획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럼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희망말이다. 적어도 다른 이들의 아픔을 이용하거나, 예술이라고 하면서 다른 이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자신의 아우라로 치환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무계획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제도를 바꾸거나 문화를 움직이거나, 스스로 땅에 처 발리면서라도 이것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무계획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이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10. 예언


다소 과격한 표현들이 나왔다. 어느순간 후회하겠지만, 미래에 나에게 말한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아 내가 이때 이렇게 생각했었지? 내가 너무 어렸어.’라거나 ‘근데 사람마다 다른 거지 머 그럴 걸 가지고’라는 말을 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라. 너가 누구인지, 그리고 너 앞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다. 정말 지금과 같은 생의 감각을 잊어 버렸다면 너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새로 시작하거나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아직도 이렇게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면서 그럼에도 한발짝 걸어가고 있다면, 한걸음 더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지만 함석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씨알의 소리로 너 안에 켜켜히 흐르는 그 고귀한 삶을 잘 살고 있노라고. 그래서 너를 만나는 사람마다 인간이란 쉽게 판단할 수 없으며 누구나 그 안에 선한 잠재력으로 지금 놓여진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있었다고, 그리고 너가 지금까지 그래도 까치발로 잘 걸어왔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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