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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25. 2019

에트루리아전을 다녀와서

국립중앙박물관_20190823

로마와 그리스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공백기가 있다. 로마 알파벳은 abc다음에 e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나오는 신들과 로마신화의 신들 사이에는 공백이 있다. 찬란한 문명의 마지막은 항상 죽음과 초월에서 서성인다.


에트루리아전을 다녀오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역사상으로 인간은 수 많은 전쟁과 다툼 속에서 역사속에서 문명을 만들고 또 허물어 뜨렸다. 로마가 에트루리아를 정복하고 나서 흡수되는 듯했지만 사실 로마인들의 정신은 에트루리아인들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현실주의와 역사주의 사이에서 고민이 많아지는 요즘. 에투루리아인들의 삶을 만났다.


금요일은 특별히 9시까지 연장이라서 정말 1명도 없는 전시실에서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들어가기


에트루리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독자는 그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가 구사하는 언어가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면,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유익을 얻고 있는 셈입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아니었다면, 라틴 문자는 (그리스어의 알파, 베타, 감마 또는 히브리어의 알레프, 베트, 기멜처럼) a, b, g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트루리아 문자가 a, b, c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언어학자들이 알고 있는데도, 에트루리아어는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에트루리아인들에 관한 수수께끼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여러 세기 동안, 역사가들은 가장 주목할 만한 이 문명의 기원에 관해 추측해 왔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에트루리아인들은 12개 도시로 이루어진 연방을 구성했으며, 유럽과 북아프리카로 넓게 뻗은 상업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4세기 후에, 그들은 부상하고 있던 로마의 세력 권내로 완전히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에트루리아인들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그 신비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비스러운 기원


역사가와 고고학자 및 언어학자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의 기원에 대해 오랫동안 고심해 왔습니다. 그들은 헤로도토스가 시사한 것처럼 소아시아에 있는 주(州)인 리디아에서 이주해 온 것입니까, 아니면 기원전 1세기에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가 주장한 대로 이탈리아의 토착민이었습니까? 또는 그들은 여러 기원에서 나왔을 수도 있습니까? 답이 무엇이든 간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웃 민족들과 워낙 차이가 많이 나서, 현재 우리는 그들의 기원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트루리아인들이 기원전 8세기경부터 중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번성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을 투스키 또는 에트루스키라고 불렀으며, 북쪽의 아르노 강과 남쪽의 테베레 강 사이에 있는,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토스카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때 에트루리아 문명은 약 50개 이탈리아계 민족을 지배하였습니다.


에트루리아어는 기본적으로 초기 형태의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해독하기가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려져 있는 그 어떤 언어와도 전혀 다릅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사용한 대부분의 어휘는 번역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문헌은 풍부합니다. 그들의 문화에서, 특히 종교와 관련된 문제에서 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에트루리아인들이 남긴 명각(銘刻)은 묘비, 장식용 단지, 설화 석고로 만든 석관에 그 예가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러한 명각에는 상대적으로 글이 매우 적어서 에트루리아어 단어의 기원과 의미를 설명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과 번영


에트루리아인들은 자치 도시 국가로 조직되었는데, 처음에는 왕의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는 행정 장관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 도시들은 결속이 그리 강하지 않은 종교·경제·정치 연합체인 에트루리아 연맹을 결성하였습니다. 에트루리아의 일부 집은 상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었고 집앞에는 포장 도로가 있었습니다. 배수 시설은 광범위하게 이용되었습니다. 에트루리아 왕들은 일단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던 로마를 하수도망을 갖춘 우아한 성읍으로 변모시켰는데, 그러한 하수도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클로아카 막시마도 포함됩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가까운 엘바 섬에 있는 철광처럼, 그들의 지배 아래 있는 지역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광물을 통해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금속을 사용하고 싶은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과 은과 구리를 가공하고, 심지어 영국 제도(諸島)에서 주석을 수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부(富) 외에도, 그들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는 비옥한 농지와 목초지가 있어 곡류와 올리브와 포도 및 목재를 생산하였습니다. 이러한 천연 자원뿐 아니라 광범위한 육상 및 해상 무역을 통해, 에트루리아인들은 경제가 활발해졌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훌륭한 뱃사람들이었습니다. 기원전 540년에, 에트루리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의 연합 함대는 그리스인들을 물리쳐 에트루리아인들의 해상 무역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전함에 붙이는 충각(衝角)을 발명한 그들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바다를 통해 유명한 부케로(검정 도기)와 같은 생산품을 멀리 스페인과 이집트로 수출하였습니다. 육상 무역로를 통해서는 갈리아(프랑스)와 게르마니아(독일)에 포도주를 수출하여 명성을 떨쳤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즐긴 삶


에트루리아인들에 관해 가장 많은 사실을 밝혀 주는 가장 영구적인 근원으로는 그들의 예술 작품이 있습니다. 호화로운 것을 좋아했던 에트루리아인들은 귀고리, 브로치, 늘어뜨린 장식, 팔찌, 목걸이를 포함하여 사치스러운 금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선(線)세공과 아주 작은 금 알갱이를 사용하는 디자인으로 정교한 명품을 공들여 만든 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은이나 그 밖의 귀금속으로 술잔, 식기, 컵, 정찬용 식기 세트를 만들었으며, 또한 상아와 같은 그 밖의 귀중한 재료로 조각품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조각과 예술 작품 및 벽화가 발견됨으로 에트루리아인들이 어떠한 삶을 즐겼는지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차 경주, 권투 경기, 레슬링 경기, 운동 경기 관람을 즐겼습니다. 왕도 이러한 것들을 관람했는데, 아마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사로잡아 온 노예들에게 둘러싸인 채 상아 의자에 앉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자주색 튜닉은 나중에 로마인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식사 시간에 왕은 궁궐에서 왕비와 나란히 기대앉아 플루트나 더블파이프 소리를 들으며 춤을 관람했는데, 그러는 동안 노예들이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이게도, 에트루리아 사회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사교 행사를 즐겼습니다. 에트루리아 여자들은 이름과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법적 권리를 행사할 권한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신앙


1세기의 한 역사가는 에트루리아인들을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종교 관습에 열심인 민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매우 많은 신을 숭배하였는데, 삼위일체 신을 좋아하여 삼위일체 신을 모시는 삼중 신전 즉 방이 세 개인 신전을 지었습니다. 방마다 형상이 있었습니다. 에트루리아 문명은 바빌론의 신비주의적 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내세와 저승에 관한 사상이었습니다. 시체는 매장하거나 화장하였습니다. 화장할 경우에는, 모양이나 형태가 다양한 유골 단지에 재를 넣었습니다. 의식을 거행하고 제물과 헌주를 바치면서, 저승 생활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과 함께 유골 단지를 무덤에 안치하였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묻힌 무덤은 벽을 다양한 색깔의 프레스코화로 장식하였는데, 다양한 장면을 묘사하는 이 프레스코화는 악귀들이나 여러 가지 무서운 동물들로 특징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자료에서 이렇게 알려 주는 바와 같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항상 괴물을 좋아하였다.”
에트루리아인들이 행한 간장(肝腸) 점치기 즉 점술의 한 형태로 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그 기원이 바빌론까지 소급해 갈 수 있습니다. (비교 에스겔 21:21) 그들의 생활과 그들이 내린 결정의 모든 부면은 신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조를 얻기 위해 땅이나 하늘을 살피곤 하였습니다. 점술이 어찌나 흔히 행해졌던지 이러한 형태의 관습이 디스키플리나 에트루스카 즉 에트루리아 과학으로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흡수와 소멸



기원전 509년, 1세기 동안이나 로마를 통치하던 에트루리아 왕조의 가계가 끊겼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있게 될 일의 전조였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북쪽으로부터 켈트족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들의 침략으로 인해 그 지역에 대한 에트루리아의 지배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이탈리아계 민족들과 국경 분쟁이 계속되는 바람에 세력 기반이 약해져 사회의 내부적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토는 로마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문화의 확산기 즉 로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90년에 로마의 시민권이 모든 이탈리아계 민족에게 주어지면서 에트루리아인들의 독자성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로마 세계로 흡수되었습니다.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들의 문학 작품을 번역하기는커녕 보존하려고 노력한 학자조차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에트루리아 문명은 신비를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에트루리아 문명은 유산도 남겼습니다.



영구적인 유산


에트루리아인들의 유산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로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피터·주노·미네르바의 삼신에게 바쳐진 카피톨리노 신전, 삼중 신전, 최초의 성벽, 광장에서 나오는 물이 배수되던 하수도는 에트루리아인들 덕분에 로마인들이 갖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로마의 상징인 카피톨리노의 이리(루파 카피톨리나)도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그에 더해서 로마인들은, 죽을 때까지 벌이는 격투나 동물과의 싸움과 같은, 에트루리아인들의 여러 가지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비교 고린도 첫째 15:32) 바울이 든 여러 가지 예 가운데 하나에서 그가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형태의 개선 행렬은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한 것입니다.—고린도 둘째 2:14.
에트루리아인들의 상징물 역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주교가 사용하는 주교장(主教杖)의 기원은, 양치기의 끝이 굽은 지팡이와 비슷한 에트루리아 사제의 지팡이임이 밝혀졌습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권표(權標)(도끼 둘레에 여러 개의 막대기를 묶어 만든 것)를 로마인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하였고, 프랑스 혁명 중에는 혁명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으며, 20세기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에서도 사용하였습니다.
고고학자들이 과거를 밝혀 내기 위해 합동으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에트루리아인들의 기원과 그들의 생활의 여러 부면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https://wol.jw.org/ko/wol/d/r8/lp-ko/101997807#h=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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