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해봄 발제_지그문트 바우만
함께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 신념으로 사회학스터디를 시작한 '사회혁신해봄협동조합' 친구들과 함께 '오늘의 사회이론가들'이란 책으로 스터디를 하고 있다. 내가 맡은 부분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상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변화점들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 의미있는 토론과 논의를 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무엇인가 뚜렷하게 잡히지는 않지만 '희망'이라는 것들이 불지펴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바우만의 사상을 중심으로 '액체근대'에 대해서 알아보자.
근대modernity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철학에서, 정치에서, 문화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겠지만 오늘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근대의 모습을 그려보자. 그럼 우리가 추구하려는 '사회혁신'에 있어서도 뚜렷한 방향성vector이 보이지 않을까?한다.
1) 고근대, High Modern
고근대의 특징은 근대성이 농후한 지점을 말한다. 근대성은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말한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자아의 발견을 통해서 새로운 인식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헤겔을 통해서 정신의 도약에 따른 지식의 발전은 절대정신으로 도달하는 것 같았다. 아울러서 과학주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분해하고 쪼개면서 이해의 표면적을 늘리는 작업들이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개인이라는 작은 단위에서 시작된 분석과 이해는 점점 사회와 국가,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자기통제에서 사회통제 그리고 세계통제까지 확장되는 세계관은 가장 작은 단위에서 통용되는 이론들이 가장 큰 단위에서도 통용된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했다. 근대에 발견한 '사회'라는 것은 그런의미에서 중간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개인의 속성들이 스케일을 넓혀갈수록 사회적인 특성으로 나타나고 사회적인 특성들의 합은 국가라는 단일한 통합체계로 나타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고근대적 특징을 우리는 월러스티의 '세계체제론'에서 살펴볼 수 있다.
2) 후근대, Late Modern
후근대는 탈근대와 고근대 사이의 특징을 향유한다. 완전히 체계가 탈바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체계가 완전하여서 항상 똑같은 산출물을 내는 것도 아니다. 부족한 부분들을 보수하면서 체게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사이에서 후 근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근대라는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주관성과 새로운 형태의 일상을 창조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고근대에서 행해지던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도 '비물질노동'이라는 새로운 노동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후근대론자들은 근대의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서 재근대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피터버거와 훅실드와 같은 학자들은 근대의 재발명을 통해서 근대의 미완의 기획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보면 프랑크프르트학파의 1세대(호르크하이머, 아노르노, 마르쿠제)가 고근대적 특징을 갖는다면 2세대인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의 회복을 위한 새로운 이성(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발견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것이 후근대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3) 탈근대, Post-modern
탈근대는 우리가 흔하게 들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진화, 효율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성, 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완전성에 대한 동시성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합리적인 사회를 기본 전제로 탑재하지 않는다. 합리적일수도 있고 그렇지 앟을 수도 있다.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양자역학의 시간대'가 펼쳐진다.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라는 책에서 장 프랑수아 료타르는 탈근대의 특징을 '자기 자신에게서만 레퍼런스를 찾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합리성이 지배하던 고근대와 후근대와는 다르게 비합리성을 기본으로 자기자신이 생산해낸 이론과 생각, 감정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바로 포스트모던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탈근대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내러티브가 중심이 되며 모순과 역설이 어디서나 등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도 연속적이지 않고 비연속적인 부분들이 증가하며 사실은 삶 자체가 원래 비연속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지점들을 찾는다. 포스트모던은 처음에는 근대를 해체하는 특성을 찾다가 마지막에는 새롭게 합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종단에서는 캐치문화(완전 유치한 수준의 이미지들)와 그로우테스크(완전 잔인하고 베르나르뷔페와 같은 굵은 선들의 어두운 배경)로 분할한다.
현대의 지성이라고 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은 양가성 개념과 함께 '액체근대'라는 개념으로 유명하다. 시대적인 흐름을 정확히 읽고 그 흐름 안에서 부유하는 개념들의 특징과 추이를 밝히면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새로운 이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위에서 살펴본 사회학적 지형도에서 볼 때 바우만은 후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요 사항인 '액체근대'는 후근대적 특징과 탈근대적 특징을 왔다 갔다가 하는 흐름flow에 대한 주장이 대부분이다.
유고작인 레트로토피아Retrotopia에서는 우리가 희망하는 유토피아와 다르게 회고적인 유토피아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것은 우리가 꿈꾸던 시절의 유토피아는 그 시점이 도래한 지금에서는 확실하게 유토피아가 아닌 것이 확인되었다. 2049년 블레이드러너처럼 2019년이라는 미래의 시간이 도착한 지금은 사실 유토피아는 그리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레트로토피아는 그런의미에서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꿈꾸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약간 다른 것은 그 시점과 오늘의 시점이 다르지 않다는 것.
단일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시간 개념에서는 미래의 어떤 개념이 완전하게 구현되는 시간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변화들이 미래와 연결된 시간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 미래에도 하나의 조건들이 바뀌어진 전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조건들의 변화가 생긴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기억은 지워졌지만 미래의 후회하고 있는 내가 다시 태어난 시점이 바로 지금 이 질문을 하는 시점이다!'라는 것과 같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남겨 놓은 숙제들을 우리는 지금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를 바꾸는 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우만의 이론으로 들어가보자. 바우만이 이야기 했던 양가성의 개념과 고체근대와 액체근대의 개념을 살펴보고 그 사이에서 주체들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 생각해보자.
양가성의 개념은 '하나의 상황에서 대해서 두가지의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말한다. 원래는 심리학 용어였지만, 점차 사회적으로도 통용되면서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서 미움과 사랑의 감정이 발생하거나 완전히 다른 모순적인 생각들이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상황들을 일컫을 때 '양가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되었다.
바우만이 양가성을 느끼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근대의 개념이 분할되었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제임슨의 표현을 빌리자만 '실제의 변화에 대해서 상상이 여러 갈래로 갈리게 될 때'가 도래한 것이다.고체근대의 특성과 액체 근대의 특성이 현실에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은 그 안에 고체근대와 액체근대의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양 쪽을 모두 고민하게 되고, 동일한 감동과 동일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가성의 측면에서 동시대인들은 '우유부단'이라는 심리적 특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음 속에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양 쪽 모두에게 동일한 비중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양가성을 이러헥 바우만이 잡아낸 현대인의 특징이다.
그러면 이제 고체근대와 액체근대의 속성을 살펴보자. 먼저 고체근대solid modernity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포드주의에 입각해 있다. 규격화되고 단일화되어 있는 이성의 방향성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것들의 연속점들이 우리의 사회와 국가를 이룬다는 개념이다. 국민들이 자신의 자리를 중심으로 제대로된 시민의 역할을 다 할 때 국민국가는 완성되며, 이를 바탕으로 계급정치가 발전하게 된다. 플라톤의 부활과도 같은 계몽주의에 입각한 입법 이성은 법을 만들 수 아는 사람과 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나뉘고 공적 영역이라는 공론의 장에서 말할 수 있는 자와 듣는자로 나뉘게 된다.
고체근대를 지그문트 바우만은 정원사에 비유한다. 잘 다듬어진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 국가는 잔가지를 쳐내고 비료를 주고 벌레가 파먹지 않도록 약을 뿌린다. 고체 근대 이전에는 사냥터지기라고 불리우며 사냥터에 사냥감이 나타나기까지 기다리는 야경국가와 같았다면 고체근대에서는 자신들이 직접뿌린 씨앗이 발아하여 열매를 맺기까지 잘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이러한 합리적이고 계획적이며, 계산적인 정신 안에서 태동하는 유토피아는 매우 찬란했다. 이대로 발전하고 진보하게 되면 인류가 맞이하게 될 유토피아는 완전성과 무결점을 가진 천상의 왕국이 될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는 고체 근대와 다르게 개인화가 매우 깊이 진행된 사회이다. 공적영역보다는 사적 영역이 중요해지는 시기이며 포스트포드주의라고 하는 산업의 형태가 등장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혹은 하이딩거의 고양이와 같이 양자역학이 도래하는 시기에 액체근대는 정해진 어떤 점들의 연결이 아니라 계속해서 유동하는 점들이 매번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기존에 예측 가능하고, 계획된 경제나 정치, 사회의 발전은 예상할 수 없게 됨으로 고체 근대에서 주장하는 유토피아는 절대로 현실로 등장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이버공간이 탄생하고 '포노사피엔스'라고 하는 휴대폰으로 모든 것들을 해결하는 새로운 종이 등장한다.
액체근대는 '사낭꾼'의 시대이다. 사냥터에서 앉아서 기다리거나 파종하여 수확물을 기르고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아니라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직접 찾아 다니는 사냥꾼의 시대 말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어느 누구의 목적도 아니다. 내가 필요하고, 내가 욕망하고, 내가 타켓으로 삼은 것이기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오직 자아의 내면에서 발현된 이유로 움직이게 된다. 액체 근대는 이렇게 의지도, 욕망도, 관계도, 정신도 계속해서 이리저리 흘러가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희망하는 미래의 개념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디서나 존재하는 잠정적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는 미래의 어느시점에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흘러넘치다가 한 곳에서 등장하다가 사라지고 다시 다른 지점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유비쿼터스 파노피아Ubiquitous Parnopia이다.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자. 액체근대의 특성은 바우만에 의하면 1980년대 이후부터 등장한다고 한다.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무한 경쟁시대와 함께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탈근대 이론의 등장, 인터넷기술로 인해서 새롭게 등장한 인류는 액체 근대의 특징은 여러곳에서 드러냈다. 그러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하는 과거와 현재의 중첩은 완전히 고체 근대의 특성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액체근대의 특성이 사회 전반에 흘러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고층빌딩 가득한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전통 한옥집이 존재하듯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서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70년대 독재시대의 향수를 가지는 사람이 있듯이, 미래 기술로 가득찬 기술들이 등장함에도 패션은 복고retro 돌아가는 것처럼.
이러한 근대의 분할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양가감정을 가지게 한다. 고체근대의 속성을 가진 회사에 다니면서 액체근대의 속성을 가진 동호회 친구들과 자유로운 연대를 이룬다. 정치에 대해서 양가감정을 가지게 되면 '필요는 하지만 꼭 저렇게 해야하나?'라는 애증의 관점에서 정치를 필요악으로 규정하게 되고, 경제에 대해서도 먹고 살아야 하니깐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도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달리다가 섰다가 다시 달리다가 뒤를 돌아봤다가 하는 양가성은 현대인들의 특징이 되어 버렸다. 더불어서 정신분열증과 편집증이 동시에 찾아오게 되는 불안한 일상을 살게 되기도 한다. 흘러가는 액체 근대의 어느지점에서는 자신을 지키려고 편집증에 시달리다가, 고체 근대의 지점에 들어오면 너무 고착된 질서에 숨이 막히게 된다.
바우만은 양가성이 등장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은 책의 순서로 본다. '실천으로서의 문화 - 현대성과 양가성-탈현대 윤리-유동적 현대-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바로 그것이다. 바우만에게서 양가성은 사회가 발달하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등장하는 것은 오래전부터라고 한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양가성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실천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거대담론에서 미시담론으로 축소된 전제들은 이제 인간 내면에서도 소멸해버린다. 그러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사라져버리는 포스트휴머즘의 시대가 온다. 액체근대로 유동적으로 흘러가는 정체성이 인간들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과 자연과 우주를 넘나든다. (들뢰즈는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영역을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인간과 연대하는 차원을 훨씬 확장시킨 인간이외의 것들과의 연대가 시작된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에서 인간은 특별하고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존재의 차원으로 내려 간다. 포스트모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이렇게 연결된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주체를 고민해야 한다. 예전에는 인간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주체'의 문제를 '호명이론'이나 '구조주의이론'으로 정의했으나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이외의 것들까지 놓고 주체를 이야기 해야한다.
이른바, 리좀적 다양성의 시대가 왔다. 줄기 하나에서 여러가지 갈래가 나오는 방식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출처에서 다른 방식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하는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진, 리좀적 다양성 말이다. 시대는 자신에게 맞는 주체의 옷을 입기 마련이다. 혹은 주체는 자신에게 맞는 시대의 옷을 입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에 포스트휴머니즘이 태동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바우만이 보았던 양가성의 감정이 이제는 다양성의 측면으로 확대되면서 완전히 액체근대 이후로 발전해 버릴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context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매번 변한다. 그리고 시간 위의 존재는 그 상황과 마주해서 함께 변화해 간다. 원래 그리스에서는 개념이라는 것은 시간tempo과 공간topos이 만나는 지점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달라지거나, 공간이 달라지면 ‘개념’도 그에 맞춰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고체 근대의 속성을 가지고 주체를 설정해 온 경험이 많다. 시대가 흘러가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변하지 않는 주체 개념 때문에 바깥의 사고나 탈주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매번 시대를 너무 앞서간다면서 곤혹을 치뤄야 했다. 액체근대의 시대에서 주체는 정해진 것이 없이 순간순간 생성되면서 변화되면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특징을 보인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 변화는 이제 범위를 확장해서 인간을 벗어나서까지 흘라가는 유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준비해야 한다. 너와 내가 다르다가 아니라 ‘같음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너의 말과 생각은 원래 나랑 다른 전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만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들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퍼실리테이션의 기술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존재론이 탑재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예전에 지구가 하나의 생명으로 부터 탄생했다는 가이아이론이 유행했었다. 마찬가지로 포스트휴머니즘은 어쩌면 가이아 이론, 대지의 어머니와 같은 자연과 어떻게 상생하면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는 지점에서 부터시작하면 제한된 인간들 안에서 계층을 나누는 방식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시대는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고 우리는 매번 새로운 주체의 옷을 입을 것이다.
양가성은 어쩌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사이에서, 고체근대와 액체근대 사이에서,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사이에서 발생하는 과도기적 특징일 것이다. 양가성이 확장되는 형태가 점점 줄어들고 어떤 큰 흐름이 생기는 지점에서 우리는 또 새로운 유토피아, 희망의 나라를 꿈꿔야 하겠지만, 지금은 부지런히 양쪽 모두를 바라보면서 어떤 것이 현실에 맞는지를 계속 고민해야 겠다. 그러다가 양가성이 줄어들고 어떤 지점에서 극소세계로 축소해서 들어가는 지점이 발생할 것인데 그것은 새로운 주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양자역학적 주체’일 것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으며 한 장소에 같이 존재하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 어떤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나 역시 그 관찰대상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그 상태에서의 양방향적 주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주체를 생각해 보면 유동성이 양가성에 의해서 두 갈래로 나누어서 존재하되 한 곳에만 관측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동시에 관측되는 현상도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가성에서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고민이 아니라 동시에 선택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현실을 이해하고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수 많은 논쟁 중에서 ‘고체근대에서 액체근대로, 액체근대에서 양자역학’으로 가는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에 대한 기대감만 가져본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상을 통해서 ‘액체근대’의 개념과 ‘양가성’의 개념이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한 시대적 흐름 안에서 ‘주체’의 개념도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양자역학적 주체’라는 개념으로 변화될 수 있음도 살펴보았다. 결정된 것들의 미래가 아니라 비결정된 것들의 미래가 오히려 더 현실적인 이 느낌은 양가성일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닫는다.
참고 1.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에 바르샤바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에서 잠시 가르치다 1971년 리즈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다. 1990년 정년퇴직 후 리즈대학교와 바르샤바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활발한 학문 활동을 했으며, 2017년 1월 9일 91세 일기로 별세했다.
1989년에 발표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MODERNITY AND THE HOLOCAUST》를 펴낸 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90년대 탈근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명성을 쌓았고, 2000년대 현대사회의 유동성과 인간의 조건을 분석하는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 시리즈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1992년에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 상을, 1998년 아도르노 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지금 유럽의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스투리아스 상을 수상했다. 《레트로토피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 《유동하는 공포》,《쓰레기가 되는 삶들》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