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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3. 2019

'바울과 하나님나라' 첫시간

권연경 교수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20190903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바울과 하나님나라_권경 교수

행위없는 구원? 1강_바울과 구원' intro


오늘은 오랜만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 왔다. 권경 교수님의 바울과 하나님나라를 6주간 진행하고, 배덕만 교수님의 '교회사의 이해'강의가 6주 진행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대안기독교신학교라고 볼 수 있고, 말그대로 쟁쟁한 교수님들이 재능기부를 하면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이미 1년정도를 다녔고 이번학기에는 화요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강의를 듣게 되었다.


홍대 앞에 위치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3층


경 교수님의 강의스타일 상 너무 똑똑하셔서 머릿속에 모든 텍스트가 들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책내용과 강의를 맞추기기 쉽지가 않고, 핵심을 딱딱 짚어주지는 않는다. (나도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이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듣는 사람으로서는 힘든 부분이 있구나!) 그럼에도 계속해서 내러티브가 되는 이야기들이 술술나온다는 것 신기한 이다.





민네이션, 들어가기


신약성경 전체는 행함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수 많은 메타포와 명제로 알려준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보자. 정말로 그런가? 칭의에 갖혀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멈춰 있는 사람들이다. 존재론과 행위론에서 그 두가지는 둘로 나뉘지 않는다. 시간개념에서 볼 때도 두가지가 분할되면 존재는 죽는다. 혹은 죽어 있는 상태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이 있고, 시간이 있는 것들은 현실이라는 4차원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존재론과 행위론은 연결된 것, 다시 말하면 행하는 것과 믿는 것은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독일식으로 인식론과 존재론과 윤리론을 나누는 식의 로고스 중심의 분할법만 옳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민네이션, 바울과 신약


우리는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 때문이다. 야고보서에도 행위를 강조하고 예수님의 여러가지 비유에도 행위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왜? 바울의 신학은 '의인이 되는 길은 믿음'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까?


이러한 고민은 우리가 성경을 잘못해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바울 텍스트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

잘못해석했다면 그러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석하는 우리가 문제일까?

해석을 전해준 사람이 문제일까?

바울텍스트를 잘 모르고 있다면 왜 모르게 된 것일까?

모르는 것이 문제인가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경, 시작하는 말


기독교 복음은 구원을 약속한다. 따라서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은 구운의 복음이라고 불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믿음을 갖는 것은 저급하며 아무 사심없이 믿음과 순종의 삶을 견지하는 것이 더 영웅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애초부터 기독교 복음보다는 칸트의 윤리학에 더 가까울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처음부터 구원을 염두해 둔 것이다(벧전 1:9) 구원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하며 그래서 우리 신앙의 종착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구원은  삶의 궁극적 지평을 형성한다. 그러기에 구원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구원론이라는 국지적 교리를 넘어 구원을 기다리는 삶, 혹은 그 구원에까지 이르는 우리의 삶 전부를 채색한다. 구원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는 현재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를 결정한다.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기독교 인들이 선행을 많이 하지만, 이는 모두 만약 선해을 하지 않으면 벼락을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는 확신, 곧 그들이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할 때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살밍 더 나은 삶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공로 없는 은총에 관해 아무리 열정적인 웅변을 토한다 해도 이 확신을 흔들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 어떤 형태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의미란 노력을 통해 얻어져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라 해도 선물로 던져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_William Muehl, Why Preach? Why Listen?



경, 믿음의 시점


이상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유독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미래시제'를 쓰지 않고 항상 과거시제를 쓰고 있다. 왜 그럴까? 성경의 여러부분은 아니고 가끔 보이는 '과거' 시점의 구원이 확대 해석한 결과이다. 구원 받았다라는 표현은 로마서나 에베소서에 간혹 나온다. 그러나 구원의 미래시점은 항상 여러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요한 부분은 '구원', '칭의'가 과거의 시점일 경우 우리는 행위자체에 대한 책임과 일관성과 관계성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기독교, 한국 기독교의 맹점이 있는 것일 것이다. 믿음이 구원과 과거시제로 연결되는 시점에서 소위 말하는 '과거구원론'은 '현재실천론'을 대신하고 현재의 풍부한 컨텍스트 속에서 믿음과 구원의 역사를 개인의 '자유의지'로 가두어 버리는 꼴이 된다.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나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순종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실천은 내가 하나님께 해주는 보너스 같은 거니깐 굳이 힘들여서 할 필요는 없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발짝씩 뒤로 뒤로 빠지게 되면 일어나는 일은 바로 '개인주의의 가시밭'에서 욕심과 욕망에 갖힌 기독교인으로 역성화되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텍스트에서는 '구원'은 항상 미래시점이다. 미래 시점이라는 것은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와 성도들의 삶이 기쁨과 즐거움과 거룩함이 충만하는 시점이라는 의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구원을 과거시점으로 놓고 아무렇게나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맥이 빠지고 부패하고 냄새나고 자기멋대로의 길로 가는 것을 대부분 경험한다. 인간이 타락한 존재라는 점에서 이것은 반펠라기우스 주의 혹은 어거스틴의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날마다 경험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놓치는 부분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항상 하나님을 등지고 나의 것을 어느정도만 내어 놓을까라는 '타락 후 아담과 하나님 관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부정해야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된다. 비참한 것이다. 비참한 것은 내가 마음대로 나의 자유를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굳이 그걸 버리고 외로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경, 바울의 관점


펠라기우스주의로 넘어가는 오해를 넘어서서 자유의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행위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고 미래 관점에서 '행위없는 구원은 없다'라는 것을 앞으로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행위가 없어도 되는 구원이 얼마나 빈대떡 먹는 것처럼 쉽고 맛있는지.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볼 때 얼마나 우리 마음대로 여기 붙였다가 저기 붙일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성경의 권위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의 신비로 잃어 버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는 성찰도 멈춘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바랬던 삶이 아니다.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지워 버리고 머물러 있는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이 그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행위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행위가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행위가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로마서에서 행위의 관점에서 '믿음'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이미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롭게 읽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해보면 믿음은 행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행위없는 구원? 책소개


믿음 없는 행위와 행위 없는 믿음, 다시 화해시키기에는 때가 늦은 것일까?


행위에 자신이 없는 자는 믿음의 속죄부에 매달리고, 신앙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은혜의 능력을 너무나 가볍게 여긴다. 불가능할 것 같은 화해의 과정에 실마리는 무엇인가? 오랫동안 통전적 신앙을 강조해 온 저자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와 그 의미에 대해 저자만의 매우 쉬운 용어와 독특한 수사적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구원과 관련하여 믿음과 행위를 이분법적으로 접근해 왔다. 그것은 전통적인 신학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구분하여 접근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논리적으로 면밀히 살펴보면 믿음과 구원은 별개로 분리해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권연경 교수는 오랫동안 이 점에 대해 연구해 왔다. 특히, 한국의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제자도의 실천 없이 '값싼 은혜'만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교회의 윤리성이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권교수의 주석연구가 현실 교회와 사회의 상황에 대한 윤리적(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도적인) 접근을 매우 중요하게 고민해 왔다. 이 책은 바울의 대표적인 저작인 로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면밀하게 살피면서 이러한 논증을 증명해 내고 있다. 신약에서 대표적으로 행위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와 마태복음의 핵심적 메시지를 새롭게 담금질하면서 권교수의 논증은 점점 바울의 생생한 목소리를 새롭게 재현해 내고 있다. 결국 권 교수가 이런 접근에 집중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통전적 제자도'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서다.   


* 추천사


구원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 구원과 행위의 관계의 중요성이 바르게 인식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부정되기까지 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현재적 삶이 자신들의 구원과 무관한 듯한 착각에 빠지도록 하는 심각한 혼란과 위험을 조성하고 있다. 이처럼 왜곡된 구원관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서신을 깊이 그리고 폭넓게 연구한 학자인 권연경 교수는 바울서신들에 나타난 구원과 행위의 긴밀한 관계를 참으로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차근차근 정리해 준다.

권 교수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구호 자체를 인정하지만, 그 구호의 핵심인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을 던진다. 권 교수는 그 믿음이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필수적으로 수반한다는 사실을 바울서신(특히, 로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 전반에 대한 섬세한 해석 작업을 통해 설득력 있게 입증해 보인다. 그리고 권 교수는 이러한 탄탄한 해석 작업에 근거하여 바울의 ‘믿음’ 구원관이 마태와 야고보의 ‘행위’ 구원관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결론에 도달한다. 구원과 믿음, 구원과 행위, 믿음과 행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등과 같은 복음의 핵심 주제들과 더불어 씨름해 온 성도라면 누구든지 이 책을 통해 참으로 신선한 도움을 얻으리라 믿는다.

_양용의 교수(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학자들의 좋은 글이 자주 평범한 독자들의 외면을 당한다. 내용은 좋지만 표현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 박사님의 글은 명쾌하고 깊이가 있으면서도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점이 참 좋다. 한국교회의 역사가 120년을 넘어서지만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척박한 우리의 현실에 하나님께서 권 박사님을 통해서 귀한 선물을 주신 것을 감사한다.

_박은조(분당샘물교회 담임목사)


* 목차


시작하는 말

제 1부 신약의 가르침과 바울 사도의 목표

제 1장 잊힌 목소리: 마태복음과 야고보서

제 2장 다시 듣는 목소리 : 바울의 사명과 바울 복음의 성격

제 2부 세 편지의 메시지: 구원의 소망과 복음적 삶

제 3장 구원의 소망과 하나님께 합당한 삶: 데살로니가전후서

제 4장 성령으로 기다리는 의의 소망: 갈라디아서

제 5장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 로마서

제 3부 새롭게 보는 바울복음의 핵심코드 : 믿음과 은혜

제 6장 믿음 :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제 7장 은혜 : 하나님의 통치   



권연경, 소개


서울대(영문과)를 졸업하였고, 미국 풀러신학교(M.Div.) 및 예일대 신학부(S.T.M.)를 거쳐 King's College London에서 갈라디아서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바울의 목회자적 자의식과 목회적 정황에 대한 연구, 특별히 한국교회에서 소홀히 취급되는 복음의 미래지향적 차원과 실천적 차원을 조명하는데 관심이 많으며, 또한 성경적 교회관 정립을 위한 사역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Eschatology in Galatians: Rethinking Paul's Response to the Crisis in Galatia (Tubingen: Mohr Siebeck, 2004)가 있고, 역서로는 「IVP 성경신학사전」(IVP, 2004), 「기독교와 문학: 세계를 보는 창」(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부활 (청림, 2006) 등이 있다. 현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참고자료 1. 뉴스엔조이 기사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능력


로마서 하면 '이신칭의'를 떠올린다. 사실, 이신칭의는 로마서를 다 설명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바울은 여러 방식으로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개진했다. 이신칭의 역시 다양한 가르침 중 하나다.

로마서 핵심 논지는 '(복음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여기서 바울은 '모든'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할례자, 무할례자 '모두'를 아무런 차별 없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의롭게 한다는 사실 말이다.

아브라함 사례가 분명히 보여 준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본질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는 것이다. 100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를 살려 아들을 허락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온 세상 주로 삼았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면, 의로움과 구원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미래다


많은 이가 '칭의-성화-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서정'에 익숙하다. 여기서 칭의를 그리스도 대속으로 죄를 용서받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인간에게 전가돼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사람들은 이해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선행이 일체 개입되지 않는다.

개신교 전통은 칭의가 인간의 선행과 무관하며, 반드시 성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칭의와 성화는 분리할 수 없다. 그런데 개신교 전통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성화와 칭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선을 긋는다. 이는 인간의 선행을 동반하는 윤리적 변화를 '칭의'에서 배제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윤리적 변화가 구원 사건의 근거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칼뱅은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주어지는 동시적 은사들이며, 어느 하나 없이 다른 하나가 주어지는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구원이 칭의뿐 아니라 성화 역시 요구하고 있다면, 성화 역시 구원의 필수 요건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칼뱅은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을 묵상하면서, 선행은 구원에 이르는 필수 '과정', '계단'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은혜가 인간의 선행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고로 인간의 선행은 구원의 종속적 원인이라 불릴 수 있다.

문제는 성경에서 우리 구원과 현재의 삶을 묘사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본질적으로 미래다(살전 1:10, 벧전 1:3-12). 갈라디아서는 이를 '의의 소망'(5:5), '하나님나라'(5:21), '영생'(6:8) 등으로 표현한다. 칭의조차도 미래 소망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로마서에서도 구원을 소망의 대상으로 규정한다(2:6-11, 5:9-10, 10:9).            



기독교는 행위 심판 사상 전제


구원이 미래 목표로 설정되면, 당연히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순종이 중요해진다. 칼뱅 말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의롭다 함을 얻은 교인들이 선행이라는 과정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약은 '행위 심판'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원칙은 공평무사한 하나님 성품에 근거한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가져야 할 도덕적 의무는 상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약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구약 원리를 자주 인용한다(마 16:27, 벧전 1:17). 흥미롭게도 신약에서 '행위 심판' 원리를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서신이 '이신칭의' 교리 교본으로 여겨지는 로마서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행한 대로 갚을 것이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의 심판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나와 있다(2:6-11).

다시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으로 돌아가 보자. 복음은, 십자가 대속이 행한 대로 갚는다는 원칙을 대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복음이 '복된' 것은 이 원칙을 파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한다. 십자가와 죄 용서는 바로 이런 새로운 삶을 위한 하나님의 관대한 조치로 이해된다.

복음은 행위 심판 원리를 회피하면서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위 심판 원리와 더불어 작동한다. 복음의 요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해 마지막 구원으로 이끄는 능력에 있다.

구원이 소망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지키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복음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7664






참고 2. 펠라기우스 주의


펠라기우스는 350년경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4세기 말 로마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시민들의 도덕적 해이와 비윤리적인 삶을 접한 후 도덕적 갱신을 촉구했다. 펠라기우스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을 믿었기 때문에 당시 다수의 그리스도인이 그를 신뢰했다”1)고 전해진다.


펠라기우스와 펠라기우스주의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펠라기우스에 대해 “교회 역사상 가장 강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킨 인물”2)이라고 평가한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대척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흔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불리는 이 사상이 펠라기우스 혼자만의 사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펠라기우스는 로마교회 내부의 도덕적 개혁을 촉구함으로 신학 사상보다 도덕적 개혁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 루피누스, 율리아누스 등의 혼합사상으로 볼 수 있다는 학자들의 연구를 무시할 수 없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의 사상과 강조점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이 운동과 연계된 다른 사상들은 다른 인물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죽음과 죄의 전이에 관한 견해는 펠라기우스보다 켈레스티우스와 루피누스에게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3)고 전한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실용주의자에 가까우며 “그런 행실을 격려하는 신학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은 인물은 오히려 켈레스티우스와 루피누스였다 따라서 어느 것이 펠라기우스 개인의 신학 사상이고, 어느 것이 이른바 펠라기우스라는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구별하기는 상당히 어렵다”4)라고 밝혔다.



▲펠라기우스(좌)와 아우구스티누스(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어떤 사상을 주장했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중심사상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었다. 목창균 교수는 “펠라기우스 사상 체계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자유의지와 인간의 책임이었으며, 그가 강조한 것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였다”5)고 전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인간은 선과 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담의 범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며, 인간은 타락 이전의 아담처럼 죄가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의 전적부패와 원죄를 부정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며, 아담의 죽음 역시 죄에 기인한 문제가 아닌 창조 때부터 정해진 것이라고 보았다. 죽음을 죄의 결과가 아닌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6)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복음이 아닌 율법으로도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이신칭의 역시 부정했다. 브루스 데머리스트는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칭의는 죄악 된 습성을 극복하고 고상한 윤리적 목표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사람들과 관계된다.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칭의를 실현시킬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많은 이가 그렇게 한다고 펠라기우스는 주장했다”7)라고 밝힌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대해 목창균 교수는 “펠라기우스의 인간 이해는 자연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것이 특징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행이나 악행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자신의 의지 활동의 결과”8)라고 평가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


펠라기우스주의는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성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한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만이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그 후손이 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했다. “타락의 결과로 죄에 오염되었다”9)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죄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적인 질병과 같았다.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죄성은 인간을 오염시키고, “죄스러운 행위를 선호하는 본유의 편견”10)을 가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이 선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할 수 없다고 전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차이를 “인간의 상황”과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과 관련해 설명한다.1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은 손상된 상태에서 스스로 그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존재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것을 부인하는 자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펠라기우스주의는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조시모 교황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로마 관리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황제 호노리우스는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로마에서 추방하려했다. 조시모 교황 역시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하게 된다. 이들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다시 한번 정죄 되는데, 이후의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전해진다.



1) 저스틴 홀콤, 이단을 알면 교회사가 보인다(부흥과개혁사, 2015), 154.

2)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포이에마, 2011), 239.

3) 같은 책, 240.

4) 같은 책, 240.

5) 목창균, 이단 논쟁(두란노, 2016), 164.

6) 저스틴 홀콤, 이단을 알면 교회사가 보인다(부흥과개혁사, 2015), 159.

7) 부르스 데머리스트, 십자가와 구원(부흥과개혁사, 2006), 517.

8) 목창균, 이단 논쟁(두란노, 2016), 197.

9) 같은 책, 245.

10)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포이에마, 2011), 247.

11) 같은 책,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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