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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02. 2019

선교적 조망

기대봉사단 훈련_신국원 교수

20191002_기아대책

기대봉사단 훈련

선교적 조망_신국원 교수(총신대 철학과 Ph.D)


목차


1. 구속 역사와 선교적 비전

2. 성경의 서사적 구조와 선교적 비전

3. 성경적 세계관과 선교적 비전

4. 선교적 해석학의 교훈




들어가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와 다양한 관점을 배웠고, 존재론적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피스메이커'에 대해서 고민했다. 오늘은 이러한 존재론ontology를 바탕으로 인식론epistemology로 접근할 것이다. 특히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관과 이야기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선교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볼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로써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_히브리서 11:1~2



그리스도인들의 비전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부분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하나님나라'가 될 것이다. 특히 하나님나라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은 디아코니아 '섬김'이 핵심이다. 그런데 요즘들어 디아코니아는 '정부'가 더 잘 하는 경향이 최근에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현대는 반대로 '보는 것을 믿는 시대'라고 '믿는 것을 보는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 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_히브리서 11장 13~16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 갔다. 믿음을 따라서 죽었고 나그네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과거의 믿음을 따라서 갔던 선조들과 우리는 어떤 관계인가? 그들이 살아간 시간과 지금 우리가 여기서 살아갈 시간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그네처럼 다른 길을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믿음'을 소유하고 믿음으로 약속을 취하면서 살아간다.



1. 선교적 조망_구속의 역사와 선교적 비전


'성경은 드라마다'라는 주제로 그레이그 바톨로메오는 이야기로 성경을 다시 해석한다.


이 책에서 저자인 그레이그 바돌로메오는 말한다. 세익스피어의 극에서 5막으로 갈 수록 클라이막스를 기다리듯이 성경으로 5막으로 간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소명은 세습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소명을 계속해서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비전을 찾을 수 있다. 비전의 회복은 다음세대를 세우는 교육이 될 것이다. rebible storytelling이며 Visiontelling이다. 이야기에서 정체성이 나오고 정체성에서 비전이 나온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이야기를 가지고 올 것인가? 성경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시작한다.


성경과 선교


성경 이야기를 잘 아는 것과 선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선교는 기본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 삶의 구석구석 / 다음세대에게까지 이르는 것이 선교의 3가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의 스토리텔링은 전인적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성경에서 인식론적인 접근을 할 때 스토리와 서사narrative가 가지고 있는 구조를 읽어야 한다. 성경은 이해의 책이고 해석의 책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선교적인 조망missional perpective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니이 이 땅에, 우리의 인생에, 지금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선교의 현장에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한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삶에서 스토리를 듣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사람들은 사실 스토리텔러들이다. 팀켈러나 스티브잡스, 엘러머스크는 모두 미래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은 우리는 점점 우리의 스토디를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를 뺏어 가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인디언 보호구역, Indian reservation, Paul Revere and the Raiders(1971)


아래 나오는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자. 인디언들이 빼앗겼던 많은 것들이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를 노래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아닌 것이다.


They took the whole Cherokee nation
그들은 체로키 땅 전부를 가져갔네
Put us on this reservation
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쳐박아두고
Took away our ways of life
우리의 생활 방식 , 돌도끼
The tomahawk and the bow and knife
그리고 활과 칼 마저 가져가 버렸네
Took away our native tongue
우리의 모국어도 빼앗고
And 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네
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꿴 구슬들은
Are nowadays made in Japan
지금은 일본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네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
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They took the whole Indian nation
그들은 인디안 부족 전부를 점령했네
Locked us on this reservation
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가둬놓았네
Though I wear a shirt and tie
내가 셔츠와 타이를 입기는 하지만
I'm still part redman deep inside
나는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선 인디언이라네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
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But maybe someday when we've learned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Cherokee nation will return, will return,
체로키 부족이 돌아 올거라는 것을
will return, will return, will return
돌아 올거야 돌아 올거야 돌아 올꺼야
 
-( 기다림의행복 )-

https://www.youtube.com/watch?v=2fXNC9Lp_cQ


스토리텔링, 비전텔링


이야기는 과거에 근원을 두고 미래를 지향한다

이야기는 한 사회의 꿈과 비전의 기초가 된다.

세계관은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된다.

세계관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교육의 핵심이다.


성경과 족보


성경에서는 왜 그렇게 족보가 많이 나올까? 세계관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교육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거대한 하나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의 형성은 이야기가 만든다. 이야기가 만드는 꿈과 비전에 대해서 마틴루터킹 2세의 'I have a Dream'은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IWjgnhockB4




2. 성경의 서사적 구조와 선교적 비전_구속 언약과 성취의 역사 이야기


성경의 장르는 무엇인가? 다양한 장르가 복합되어 있다. 66권이 각각 다른 장르로 만들어 진 듯도 하다. 이러한 다양한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가? 장르에 따라서 읽기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성경의 주요한 내러티브의 두드러진 확장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한번 이상 이야기된다. 동일한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면 다양한 관점에서 동일한 사건들을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성경장르의 다양성은 실재의 다양한 측면을 제공할 수 있게 하며, 여러 다른 방식으로 호소한다. 독자는 저자가 고안한 패턴을 따라서 감각과 상상력과 다양한 다른 능력을 행사함으로써 한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잘 설명한 책


성경 장르

역사서 history / chronicles

이야기 Narrative

법전, 규례집, 예정 law

전기 biography

잠언집

철학서

묵시록

예언서

서간집

성경전체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구속의 신비


구속의 신비는 너누마 풍성하고 다양해서 하나의 은유나 이미지로 간단명료하게 정이할 수 없다. 그래서 '몇 가지 그림'이 필요하다. 상충되는 그러나 그 이면의 깊은 공통적 신비를 가진 진리이다. 여러가지 추천할 책이 있지만 레슬리뉴비긴의 책들을 통해서 성경에서 스토리가 빠져버리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구조화하는 하나의 내러티브다. 성경을 이루는구성요소가 아무리 다양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일무이한 이야기임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이야기, 우주와 그 안에서의 인간의 삶에 관한 참된 이야기이다_레슬리뉴비긴


영어제목은 Truth and Authority and Modernity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의 전통에서 볼 때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과 개념적 개관을 위한틀이자 신학을 체계화하는 원칙으로 언약을 사용하는 전통이다.





3. 성경적 세계관과 선교적 비전


성경은 안경이다. 성경은 자연인의 안목을 고쳐주는 안경이다라고 요한 칼빈이 500년전에 이야기했다. 우리는 안경을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지는 않는다.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을 잊어 버려야만 제대로 볼수 있게 된다. 성경이 안경이라면 성경은 바라볼 책이 아니라 통해서 볼 책look at/look through하는 책이다.


나는 성경이 교회의 삶에서, 린드벡이 제안하는 방식대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때 올바른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그 일부를 이루는 참된 이야기의 역할을 하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기 보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실제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다룰 수 있게 된다_Lesslie Newbigin<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자. 성경은 이러한 3중적 진리의 안목을 주는 특수한 안경이다. 창조하신 이야기부터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와 그것을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4. 선교적/선교학적 해석학의 교훈_missional/missionlogical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의 이야기와 비전이다. Mission Dei는 하나님 중심적/하나님이 주도적 선교에 교회의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비전이다. 근대 인문주의 문화와의 유착과 패착이나 후근대 자본주으의 문화와의 유착과 패척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고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선교학에 있어서도 cross-cultureal missiology가 되어야 하고 교회주도-중심적 해외/간문화적 선교가 되어야 한다. 간문화적 croos-cultural 선교에서 얻은 통찰을 문화내적 intracultural 반성을 통해서 서구 문화와 교회의 관계 맥락에서 재적용해야 한다.



https://www.worldview.or.kr/



민네이션, 생각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이 고민을 계속해서 해 나가야 한다.

나의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된다.

프레데릭제임슨은 '실제-상상-상징'으로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먼저 창조가 있었고 그 다음에 그것을 보고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언어로 상징화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실재 자체가 없고, 경험이 없고, 본 것이 없는 상황에서 상상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만들어질 경우 '이데올로기'가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믿음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참고1. 신국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과(B. A.)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M. A., M. Div., Th. M.)를 거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를 거쳐, 미국 미시간 주 칼빈대학교 언론학부와 어바나 샴페인에 있는 일리노이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연구소에서 객원연구교수로 문화이론을 연구했고, 칼빈대학교 헨리 미터 센터(Henry Meeter Center)에서 펠로 교수를 역임했다. 미국 앤아버(Ann Arbor) 한인성서교회를 담임한 바 있는 그는,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과 철학 담당 교수이자 삼일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니고데모의 안경』『신국원의 문화 이야기』『포스트모더니즘』『변혁과 샬롬의 대중문화론』(IVP), 『대중문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예영커뮤니케이션, 공저), 『기독교인의 생활윤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Hermeneutic Utopia: Hans-Georg Gadamer’s Philosophy of Culture (TfT Press) 등이 있으며, 『대중문화전쟁』(예영커뮤니케이션), 『변증학』(개혁주의신학사), 『서양 사상의 황혼에서』(크리스챤다이제스트), 『행동하는 예술』(IVP)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은퇴식에서 ‘기독교 세계관’ 강연


https://www.youtube.com/watch?v=cvnOtA-i0UY

▲은퇴식 정년퇴임 기념 강의 중인 신국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국원 교수 은퇴식 ‘어제의 감사와 오늘의 치열함과 내일의 소망’이 12일 오후 삼일교회 본당에서 개최됐다.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에 대한 연구를 이어온 신국원 교수는 이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강연하며 창조, 타락, 구속, 하나님 나라, 다원주의 등을 설명했다.


먼저 히브리서 11장 1~2절을 언급한 신 교수는 “세상은 보는 것을 믿지만 성도는 믿는 것을 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좋은 예”라며 “히브리서11장은 믿음으로 살았던 이들의 열전이다. 믿음은 그들의 비전이자 실상이었다”고 했다.


이어 “이 비전은 성경이 보여주는 구속의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라며 “타락으로 망쳐진 선한 창조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과정의 복된 소식이 이 비전의 핵심이다. 우리도 같은 비전을 따라 아직 이루어져야 할 이야기의 남은 부분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런 시각을 ‘선교적(missional)’ 관점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신 교수는 “창조의 진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완성을 향해 가는 시작에 관한 교훈이다. 창조가 불완전했거나 부족했다는 것이 아니”라며 “창조진리에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선교적이며 종말론적 비전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타락’에 대해 “죄와 악, 죽음은 우리를 절망케 한다. 종교와 철학, 예술은 이 질문에 답하려고 몸부림쳐 왔는데 이에 관한 성경의 대답은 정말 독특하다. 성경이 진리임은 여기서 가장 밝히 드러난다”며 “분명한 것은 죄가 세상에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은 세상이 죄악으로 얼룩지게 된 이유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마음대로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의 근원되신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죄악의 뿌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악의 구조화’에 대해 “성경은 철저히 이런 사상을 배격한다. 오로지 선이 있었을 뿐이고 악은 실체가 없다. 오직 성경만이 죄와 악의 원인을 인격적인 것, 그것도 관계적 배신에서 찾는다”며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모르면 유일한 해결책인 복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선악과’에 대한 오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고 선과 악을 택할 자유를 주셨다. 이것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존중하는 은총”이라며 “선악과는 율법과 비슷하다. 율법을 주신 것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이 의며 악인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교통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경찰이 따라와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기에 “인간이 따먹을 줄 알면서 왜 만드셨냐, 라던가 왜 막지 않았는지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이 아니”라고 했다.


또 신 교수는 ‘구속’에 대해 “구속은 죄인과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구속은 redemption이고 거듭남과 중생은 regeneration, rebirth다. 본래 창조의 계획대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참된 회복을 말한다”며 “그런데 죄는 그냥 용서될 수 없다. 누군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셨을뿐 아니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 죄인을 의롭다하는 선언을 신학에선 ‘칭의’라고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이중 진리”라고 했다.


이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안전하지만 완전하지 않다. 온전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권리와 의무의 회복을 통해 거룩한 삶을 누려야 진짜”라며 “많은 이들이 ‘성화’의 가치를 모르고 포기하고 산다. 비전이 없다. 우린 구원을 위해 노력할 수 없지만 성화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한 신 교수는 “성경과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구원의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자연히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비전은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다”며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천국, 하늘나라는 불교에서 생각하는 극락 세계가 아니다. 마음 속에만 있는 것, 내면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도 큰 오해다. 세상은 본래 전부 하나님의 것이다. 당연히 회복의 목표는 그 전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에서 넓혀져 가야 한다”고 했다.


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될 것을 기다리는 시기에 살고 있다는 이중 구조에 대한 바른 이해는 너무나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누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나라를 기다리는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며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성령이 임하시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주목하도록 하셨다”고 했다.


끝으로 ‘기독교 세계관과 다원주의 사회와의 선교적 대면’에 대해 신 교수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얘기하듯 삶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학교, 회사 가정, 예술, 사업 모든 일, 특히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야 한다. 또 공동체가 과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님을 신실하게 증언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각자의 격변을 지날 수 있지만 우리가 한 공동체란 걸 잊으면 안된다. 나만 옳다 여기고 상대는 이단이 되어야 하면 그 길은 기독교인이 갈 길이 아니”라며 “비전의 끝은 살롬이어야 할 것 같다. 포기 하지 않으면, 낙심하지 읺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신다. 여러분 사랑한다. 감사드린다”며 정년퇴임 기념 강의를 마쳤다.


이후 특송, 발자취 소개, 토크쇼, 재학생과 졸업생의 송사, 감사 메시지 전달, 감사패 증정, 신국원 교수의 답사, 내빈인사, 기념촬영, 리셉션이 이어졌다.


영상을 통해 감사의 메시지를 전한 강연안 교수는 “신국원 교수는 특별히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학문, 세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또 문화 철학 분야의 기본적 토대를 쌓았다”며 “은퇴 후에도 계속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을 생각하고 글을 쓰고, 사회나 문화를 통해 지속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답사를 전한 신국원 교수는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 때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쓸모 없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건지셔서 신학 공부도 하게 하시고 목사가 되게 하시고 선생까지 되게 하셨다’라는 생각이 맨 밑 바닥에 깔려있다”며 “오늘도 감사한 마음 뿐인데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고, 여러분들 사랑에 보답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살 수 있도록 잊지 않고 계속 기도해주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한편 신국원교수는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삼일교회 협동목사, 미국 칼빈대학교 헨리미터센터 펠로우 교수, 미국 칼빈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객원교수,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Institute of Communications Research 객원연구교수, 미국 앤아버 성서교회 담임목사, 왕십리교회 청년지도 목사, 분당중앙교회 협동목사/설교목사, 성덕중앙교회 설교목사, 미국 톨리도 한인교회 설교목사, 충신교회 설교 봉사로 섬겨왔다.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7647




참고 2. 니고데모의 안경



니고데모의 안경


존 칼빈, 기독교강요. “성경은 자연인의 안목을 고치는 안경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것만을 바라보아야 할 책이 아니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보아야 할 책, 즉 안경이다.


성경적 세계관 자체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진리에 익숙하고 그것이 몸에 익어 매사를 말씀에 따라 봐야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을 ‘아는’것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걷고 행해야 제대로 된 것이다. 성경은 ‘행하면 진리인 줄 알게 되는’ 책이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은 세상을 바로 이해하는 성경의 삼중 렌즈다. 이들 진리는 하나로 통일된 관점을 준다. 서로 맞물려 우리의 눈을 밝혀 준다.


이 세진리가 함께 작동하는 성경의 세계관은 철저히 일원적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음양의 대립, 선악의 근원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의 세계관은 다원적이지 않다.


다른 세계관들은 통합적이지 않다. 이원론적 관점들은 세상을 하나의 통합된 관점으로 설명하거나 의미를 주지 못한다. 다신론과 다원론의 관점은 마치 잠자리 눈처럼 초점이 여럿이다. 눈의 초점이 한군데로 모아지지 않는 안경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2) 이 말씀에 나오는 새로운 안목에 관한 도전을 중시해야 한다.


세계관은 개인이 만들기보다 문화를 통해 전수받는다. 세계관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그리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밑그림과도 같다. 우리는 그 밑그림을 토대로 나머지 그림을 그려 나간다.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 문제는 안목이다. 그리스도인의 안목은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오른눈이 범죄하면 빼어버리라.” 세계관적으로 눈을 뺄 수 없다면 차라리 바로된 안경을 쓰는 게 문제 해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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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하나님의 창조계회


신학은 실천적 학문이다. 신학은 특히 이단이나 불신 사상의 도전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고 변증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따라서 신론이나 교회론이 가장 먼저 발전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근래까지 진화론 외에는 창조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끔 한 도전이 없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이 부분의 성경적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이 있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 //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문제는 도전적인 세계관들의 공세가 아니라 다원주의 사회에서 모든 진리가 상대화되는 분위기 속에 사람들의 태도 자체가 무관심으로 흐르는 것이다.


옛 성도들은 일상 속에서 창조의 진리를 체험하며 살았다. 또 그 감격을 생생한 찬양으로 노래함으로써 창조주께 영광을 돌린다. 피조세계의 아름다움과 창조에 대해 시편이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소한 안락 때문에 대자연이 주는 깊고 심오한 기쁨과 아름다움을 잃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만유에 가득한 하나님의 음성과 모습을 볼 눈을 잃었으니, 이 얼마나 옹졸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 바울은 창조의 진리에 비추어 원론적인 판단을 한다. 즉 모든 음식은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므로 먹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문화에 입각해서 행해지는 절 의식에 참여하는 것도 우상에게 절하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치부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상을 기리고 공경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술과 담배에 대해서도 그렇게 적용할 수 있다. 술과 담배에는 기호품의 성격이 있으니까. // 창조 질서에서 본질적 규범을 찾되 그와 더불어 목회적 판단(사안별 절충)이 필요한 문제들이다.


직선적이고 완성(의미와 목적)이 있는 역사관이 기독교적이다. 역사와 문화는 창조 계획의 일부이며, 창조 계획은 창조에서 시작하여 완성에 이르러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계획하셨기 때문에 역사는 창조를 시작점으로 하여 완성을 향하여 진행,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시작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종말론적 비전을 담은 채 이루어졌다.


계시록은 창세기가 쓰인 지 수천년 후 다른 문화 속에서 다른 언어로 쓰였다. 모세와 요한은 그들의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일 것을 알지 못했다. 성경을 어떻게 시작하고 마쳐야 멋진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의논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시작과 마침은 흡사 고딕 성당의 좌우편처럼 같은 모양으로 완벽하게 서로 대칭을 이룬다. 둘 다 같은 세계(타락하지 않은 창조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에덴은 동산인 반면, 새 예루살렘은 도시요 성이라는 점이다. 자연에서 시작하여 점차 문화의 모습을 띄어간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중력의 작용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주관하시기 때문인가? 문제는 그 힘을 중력으로 부를까 하나님의 섭리로 부를까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문제는  중력으로 불리는 그 힘이 물리 법칙에 의한 것임은 인식하지만 그 배후에 있는 존재가 비인격적인 질서라고 하는 관념에 많은 사람들이 강하게 잠겨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배후의 질서는 하나님이시다.


창조는 ‘가라사대 있으라’의 말씀과 ‘아멘’의 순종으로 이루어졌다.(창조의 체계) 만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곧 의미이다.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완전히 어긋나는 세계관은 없다. 모든 세계관의 뿌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것이 서로 동일하며 차이는 미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미묘함이 함축한 결과는 엄청나게 크다. 바른 질서는 오직 한가지 뿐이다.


질서는 하나이지만 행하는 법은 다양하다. 과도한 예정론과 과도한 규범은 오히려 유해하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방법은 창의성과 유희성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질서와 함께 자유를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 안에서 자유하라.


제4장

사람이 특별한 이유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 위치하는 독특한 존재라고 말해 준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편)


인간의 창조는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외로우셨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나눌 대상을 만드신 위대한 결단이자 위험한 모험이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본질을 타고 났다. 그러니 외모의 차이, 신체적 결함의 존재, 품성의 단점이 어찌 그리 큰 문제가 될까.)



가꾸고 다스리는 자. 집사. 사역자. 부제(vice-regent). 영주. 청지기. 지휘자. 역사의 대리인. 자율적이지만 소유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 맡은 일이므로 성경은 그토록 반복적으로 ‘순종’을 강조한다. 인간의 제1원칙은 순종이다. 다만 그 순종에 자율이라는 특권이 따르는 점에서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반드시 인구가 많아진 것에 기인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을 돌보는 대신 착취하고 남용하여 피폐하게 하고 파괴시키는데 기인한다. 환경파괴의 책임은 사람에 따라 경중이 다르다. 한 사람의 권력자가 갖는 파괴력은 가공할 정도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환경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죄의 발생은 점만큼 작은 얼룩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질서대로 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기계공학이든 생물학이든 철학이든.


미셸 푸코의 주장처럼 사물의 질서는 곧 말의 질서다. 그러므로 말의 질서가 하나님이 만드신 사물의 질서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푸코의 말처럼 폭력이 개입될 수 있다. 인간은 사물의 본성을 파악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 때에 만드신 것들을 열어 발전시킨다. 마치 레고의 포장을 뜯어 창조력을 발휘하여 조립하듯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열어 상상력을 발휘하여 개발하는 일이다. 이것이 창조와 문화 명령(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라)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하나님의 선물(gift, gabe)와 소명(calling, aufgabe)은 늘 함께 있다.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문화의 터전으로 주신 은혜의 선물이며 거룩한 소명이다. 문화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에 세상적인 기준에서 생각하는 성공이나 찬란한 무엇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의 표지는 샬롬, 즉 의와 화평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가장 잘 포착한 표현은 ‘본능에 대해 열려있음’이다. 인간은 열린 존재이다. 지능이 뛰어남, 이성을 가짐, 언어를 가짐 등의 특성은 이에 비해 부차적이다. 인간이 본능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에야말로 상황의 지배를 의지로 극복할 수 있고, 유한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인 동시에 인격적 결단을 통해 만들어지고 혁신되는 존재이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자유와 의지적 결단을 통해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행위를 하기에 그의 삶은 반드시 윤리적 성격을 띤다.(정신병자의 경우는? 책임질 수 없는 경우는?) 살인이나 간음을 한 사람이 타고난 급한 성경, 분노, 음욕, 나쁜 환경을 탓할 수는 없다.


인격의 구성요소인 선택의 자유, 인격적 교제에 들어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내면의 종교의 씨앗, 타고난 신성의 감각, 하나님에 대해 갈망하는 본성. 종교적인 존재로서의 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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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악과 고통의 문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변호하려는 신정론(神正論, 신은 언제나 옳다)은 악의 충격 앞에서는 펄럭이는 종이처럼 느껴진다. 악과 고통의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이다. 역시 가장 많은 반응은 ‘모른다’이다.


삶이 왜 비정상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는 삶에 큰 차이를 만든다.


세상은 죄와 악의 근원을 구조적인 결함에서 찾는다. 구조적 결함이란 세상과 인간성이 본래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 타고나기를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고, 오히려 잘못된 것 때문에 보상을 받아야 할 뿐이다. 자동차를 산 첫날 고장이 났다면 보상을 받아야 한다.


성경은 악이 하나님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악은 하나님을 떠난 것,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죄와 악은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고 현존하는 실체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사탄의 타락과 그의 악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다.(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악에 주목한다. 그것은 사탄의 유혹이 있었지만 전적으로 인간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 따라서 악과 타락을 세상에 들인 것은 바로 인간이다. // 성경적 세계관만이 죄와 악을 명백하게 인간의 책임으로 돌린다. 반면 다른 종교들은(세계관은) 악과 선의 이원론을 말한다. 악은 선천적이었다고.


죄와 악의 구조화 변명. “그것들은 본래 있었다”라고 하는 변명은 죄와 악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궁극적으로는 뱀과 여인을 만든 하나님에게 죄와 악의 원인을 돌리는 아담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인간에 대한 자부심이 바닥을 친 상태다. 지난날 큰 기대감을 제시하던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깨진 지 오래다.


병의 발생 원인은 놔두고 증상에만 주목하는 것이 잘못된 접근법이듯 죄의 근원적인 심각성(타락)을 놔두고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어기는 일에만 주목하는 것도 죄에 대한 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타락은 원인이고 죄는 증상이다.


탕자의 경우와 같이, 타락의 비극으로 인해 생긴 슬픔은 하나님 쪽이 인간보다 훨씬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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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아담이 태어난 후 선악과를 먹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천 년일 수도 있고 만 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수명이 무슨 상관일까? 그의 범죄로 인해 우리에게는 죽음이 운명지어졌는데.


인간이 먹을 줄 미리 알았으면서도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느냐고 묻는 것은 하나님이 왜 인간을 시키는대로만 하는 기계로 만들지 않았냐고 묻는 것과 같다. 선악과는 곧 자유의지의 상징이다. 인간을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는 존재로 만드시는 대신 하나님이 내거신 조건은 인간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가 아닌 자신에게 복종하는 존재(종교적 언약관계)로 만드시는 것이었다. 동산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이 준수해야할 언약관계 안에 있는지 측정하고 표시하는 경보장치와 같다.


선악과나 그 나무 자체에는 죄에 빠지게 만드는 성분이 없다. 아무리 먹어도 그 자체가 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 있어 선악과는 상징적이다. 동산 가운데에 나무 막대기를 꼽아 놓아도 문제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불순종행위 발생 여부이기 때문에, 팔을 뻗어 따서 입으로 베어 무는 순간 이미 타락은 완료되었다.


선악과의 또 한가지 기능은 인간을 인간답게 성숙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범하지 않고 언약 안에서 생을 지속할수록 점점 성숙한다. 즉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능력,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역사가 시작과 완성의 직선적 구조 속에서 점차 완성되어 가는 구조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악과가 없었다면 시간의 척도에 따라 인간의 성숙을 측정할 도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필연적이다.) // 성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선악과가 주는 끊임없는 유혹에 지속적으로 대항하면서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거룩한 긴장이야말로 인간의 인격적 성숙을 가져온다.



제6장

타락의 결과는 기억상실증과 무기력증


데카르트는 인본주의 철학을 일으켜 자율적인 사고와 인식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의 간섭을 잘라내었는지 모르지만 그와 함께 인간이 디디고 선 발아래 땅, 즉 하나님의 보호마저도 동시에 잘라내는 실수를 한 것이다. 인본주의 철학은 사람에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를 가져다주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신적, 영적 생명유지선을 잘라내고서야 다른 무엇도 소용이 없다. 영적으로 죽었는데 철학이 무슨 소용인가?


인간의 정체성은 생각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믿음에서 나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엄마가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면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녀석이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셨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 인간의 기원에 대한 온갖 설명들은 다 종교적이요 믿음의 대상이다. 그 중에 성경적 세계관이 가장 현실에 적합하기에 나는 성경을 믿는 것이다.


전적 타락,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지-정-의를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몸은 정욕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본 타락의 결과이다.


특히나 지-정-의 중에서 정의 변화가 무섭다. 유혹에 흔들리고 굴복하는 마음에서 모든 비극이 일어난다. 흔히 지, 즉 인간의 이성이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성은 유혹에 굴복하는 마음 앞에서 그저 발만 구르는 무능한 녀석이다. 이성 자체는 착하다 하여도 언제나 악한 마음에게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산산이 흩어진 비행기의 잔해와 같다. 그것을 조립해서 처음에 어떤 모양이었는지, 그것이 날 수 있는 물건이기나 한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 그처럼 인간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비행기의 잔해를 일종의 비행기로 볼 수 있다면 지금의 인간도 인간으로 볼 수 있겠다.


전적인 타락 안에서 인류는 급속도로 자멸의 길을 간다.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파멸을 향해서 치닫는 것이 인간의 세상이다. 인류에게도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열역학의 법칙은 여지 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인 관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의 홍수를 심판이 아닌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는 점이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saved by water)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나 겨우 여덟 명 뿐이라”(베드로전서 3:20) 노아시대에 급속도로 자멸로 치닫고 있던 세상에서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 죄를 일시적으로 쓸어내고 몇몇 인간을 살리셨던 것이다. 홍수가 없었으면 노아의 가족도 다 죽어버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홍수로 행하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가시가 자란다. 등에 날아와 박힌 가시는 그 뾰족한 형태대로 점점 길어진다. 모든 사람의 등에 박힌 그 가시의 씨앗은 밖으로 자라고 안으로도 자란다. 사람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것이 두려워 서로 접근하지 못하고 외로움에 울부짖는다. 가시는 안으로도 자라 몸을 파고 들고 서서히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죄는 타락으로 인해 날아와 박힌 가시의 씨앗이다.


욥기의 묵상 :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고통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허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은 악과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그 팔로 보호하실 수 있지만 때로는 그 팔을 거두기도 하신다. 모든 복과 재앙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지만 재앙에 있어서만큼은 하나님은 사탄과 인간 옆의 제3자이다.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재앙은 사탄에게로부터)


타락은 선한 것을 망쳐놓는 원리다. 그것은 구조적인 변질을 가져오지 않으나 선한 구조에 기생하면서 원래의 목적을 비틀고 왜곡한다. 타락으로 인해 즉각적인 존재론적 파국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야 말로 그 남은 것에 기생하는 악이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 악은 진실된 말에 기생하여서 거짓말로 만든다. 거짓말은 90%의 참말로 구성된다.


타락으로 인해 생명선을 잘라내 버린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시고 그대로 방치할 경우 급속도로 자멸로 치닫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발하신다.(창세기 3장) 일종의 생명유지장치였다. 그것이 에덴에서의 추방, 노동의 고통, 해산의 고통, 긴장과 경쟁이었다. 즉 인간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보다는 노예의 신분으로라도 존속하는 것이 낫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하지만 그 이전에 상황과 비교한다면 너무나 엄청난 지위의 이동임은 부인할 수 없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으며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망각하였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계시하시지만 인간은 그마저도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지속적인 개입으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셨다. 산소를 공급하시고 환부를 도려내며 영양을 주입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른다.


제7장

세상의 소망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성품에 비추어 인간의 타락으로 빚어진 결과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간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완전함의 성품을 흠집내는 것은 아닌지? 일어난 일의 상황을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도록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하신 인간을 임의로 없애버리실 수는 없었다.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상 그 소유자의 처분에 맡겨질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현격히 구별되는 지위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한편 사탄의 유혹을 빌미로 사탄만을 제거하는 것도 타락의 행위주체가 사탄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점에서 논점일탈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과 창조목적에 어긋나지 않지만, 가장 힘든 선택을 하셨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였다.


여자의 후손. 인자. 메시아.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 인류의 소망.


왜 예수인가? 왜 인자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창조의 동역자로 만드셨다. 그래서 타락으로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도 동참시키시기로 하셨다.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회복까지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시작하지 않으심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다. 너무나 작동하지 않는 세계 회복의 계획이었지만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끝까지 함께 일하신다.


신구약을 통틀어 언약과 구원의 중심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이 구속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중심이다. 이 역사는 아브라함을 불러 유대인이라는 특별한 민족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우시고 그 역사를 통해서 조금씩 단계별로 이루어 오신 구원의 과정을 말한다. 수천 년의 역사가 이 사건(복음의 완성)에 소요되었다.


존 스토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뜻이다.

  i)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면서 성육신한 하나님이시다.

  ii)예수님의 일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다.

  iii)구원은 이상의 내용을 믿고 시인할 때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어떤 성인도 스스로를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가르치는 경우는 없었다. 석가는 스스로를 신격화하지 않았다. 누가 마호메트를 알라라고 불렀다면 그는 신성 모독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로고스나 제우스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음을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공자에게 당신이 예와 도의 화신이냐고 물으면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깨달은 진리의 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있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처럼 예수는 결코 성인이 아니다. 누가 예수를 4대 성인 중 한명이라 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나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해 오시고 또 죽으셨다는 사실이 실감 나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로부터 족히 1년 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솟구쳤고 시간이 가면서 눈물은 말랐지만 눈은 분명히 새롭게 열렸다. 그러고 나서 내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은총의 대상인 것을 알게 되었다. (느끼게 되었다.)


“믿는다”는 동사는 타동사여서, 믿는 대상과 내용이 반드시 밝혀져야만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구속의 내용은 부실하게 가르치면서 그저 믿음만 강조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수많은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사실 믿음의 내용은 신비이다. 믿음의 고백은 단순히 정보전달이 아니고 말로 할 수 없는 감격과 감사와 소망의 확신이 담겨 있어야 진짜다.


제8장

구속된 세상


구속은 타락으로 휘어진 바퀴축을 핸들과 일치하게 바로잡는 교정과정이다. 아무리 원하는 방향으로 핸들을 돌려도 바퀴축이 한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인생은 언제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만다.


구원은 회복이다. redemption, reconciliation, regeneration, rebirth, re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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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죄 사함-죄 값을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께서 대신 갚아 주신 것(구속)-이고 적극적으로는 거듭남-의롭게 된 새사람으로 지음 받음-이다. 여기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다.


구속은 죄 사함만을 의미한다. 구속은 죽음을 가져오는 원죄에 대한 형벌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원죄를 짐으로 진 자는 율법을 어긴 자라는 정죄감과 양심의 죄책에 시달린다. 구속은 이러한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속에는 언제나 그러한 구속을 하시기로 마음먹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 그 은총에서 나오는 태초의 구속 계획과 비전이 함께 결부된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구속이 일어나는 대가로 요구되는 제물이다. 구속은 대가를 지불하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온다는 표면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바 영혼의 구속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물을 희생하는 대신에 잃었던 죄인의 영혼을 되찾아 온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로 예표되었던 어린 양 대신에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영혼의 구속을 위해 희생되는 제물이 된다.


마지막으로 구속에 있어 드려지는 제물과 관련하여 죄 사함의 객체가 되는 우리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속이 순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 즉 은총임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인 거듭남은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진다.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이다. 주권적이기 때문에 일회적이면서도 종국적인 효력을 지닌다. 하나님은 죄인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 분만이 칭의 선언에 있어서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다.


칭의의 중요한 성질은 죄인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거룩한 삶, 즉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할 의무도 있다.


칭의와 함께 강조되어야 할 개념은 성화이다. 칭의는 일회적인 반면 성화는 지속적이다. 세계의 차원에서 볼 때 십자가의 죽음이 이 세상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회복의 역사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개인 차원에서 볼 때 개인의 구속과 함께 칭의가 일어나지만 성화는 죽고 나서 완성된다.


성화의 완성을 영화(榮化)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성도의 견인(堅忍), 즉 하나님께서 성도의 변화 과정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으신다는 개념이 결부된다. 성화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양쪽 모두에서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지속적인 싸움과 경주의 과정이다. 그 끝은 오직 죽음 이전에는 없다.


자의든 타의든 성화를 칭의만큼 주목하지 않는 믿음(신앙)은 구원을 균형 있게(온전히)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 태도는 패배주의적이고 자조적인 신앙이다. 성령께서 성화의 역사를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실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온전한 믿음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이 말씀에서 언급된 심령은 마음과 영혼 모두를 뜻하는데 마음과 영혼이 모두 거듭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이요 성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칭의는 선물이면서 개인적이지만 성화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부과하며 개인적이기도 하고 공동체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삶에 있어 성도의 무게 중심은 성화에 두어져야 한다.


흔히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구원을 얻었으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행태가 벌어지곤 한다. 이른바 값싼 구원 현상이다. 이는 성화의 단계를 지나치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접 후에도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 불안에 떨며 행동을 조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성화를 인정하지만 칭의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한 번 주어진 의로움의 선언은 철회되지 않는다. 핵심은 구원의 탄탄한 안식 속에 거하면서, 죽기 전까지는 성화를 이루어가기 위해 살아가는 태도의 변화가 아닐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절차를 ‘부르심 - 거듭남(중생) - 믿음과 회개 - 칭의 - 양자 삼으심‘으로 구분한다. 절차라는 점에서 이는 동시적 과정은 아니다. 그렇지만 절차라고 해서 반드시 물리적 시간 순서에 따르는 것은 아니며 개념상의 구분일 뿐이다. 믿음의 고백과 회개의 고백은 시간의 틀 안에서 일어나지만 거듭남이나 칭의도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런데 교리로 정착된 구원의 절차에서 소극적 의미의 죄 사함과 적극적 의미의 성화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애매한 것 같다.)


(칭의를 받지도 않았는데 성화를 포함하는 중생의 단계가 그 이전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제9장

하나님 나라의 내림


천국은 극락처럼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있지 않고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처럼 실체가 없는 곳도 아니다. 천국은 이 땅에 임했고 또 장차 이 곳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다.


천국과 지옥을 둘러싼 종말론적인 비전에 들어있는 상상력의 함량 미달이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큰 위기에 일조하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천국에 대해 상상하는 그림은 너무나 지리멸렬해서 천국에 대해서 흥분과 동경을 느낄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세계가 회복되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은 동일하다. 하나님 나라의 ‘나라’를 뜻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영역 혹은 지역’의 의미보다 ‘주권, 통치, 지배’ 등의 뜻이 강하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이 인정되고 실행되는 곳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의 원리가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피조세계 전체에 임한다. 말 그대로 이 세상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유무형의 것들에 임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성도의 삶, 문화, 일터, 교회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세계관과 교리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는 늘 지-정-의와 육체를 포함한다고 이야기된다. // 복음의 진리를 신령한 지식의 차원으로만 축소해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예가 영지주의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처럼 복음의 진리가 전 삶의 부분에서 드러나고 살아나는 모습을 포착한 개념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의 우선순위 설정에 관계된 것이다. 복음의 진리가 드러날 수 있는 원리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갈망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이 안에 모든 기도가 다 들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는 기도,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 은혜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기도도 이 안에 들어가 있다.


교회가 확장되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 확장이라는 대역사를 하나님과 함께 감당하기 위해 성도가 속한 공동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성질은 도구적이다. 따라서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면 다양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교회는 도구적 역할만을 감당해야 하며 능력과 자원을 선교와 교회 밖에서의 성도의 삶을 지원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교회 내부의 투자도 제자훈련, 상처치유, 문화창조 등 간접적으로나마 선교와 성도를 지원하는 목적이 명확해야 한다.


직접적인 복음 전도와 선교가 한 축이 되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의 일상적 삶이 다른 축이 되어야만 올바른 결과로서 사회와 문화의 변화, 즉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실현이 나타난다.


전투적인 교회는 보다 먼 곳까지 군사를 파견한다. 전선은 본부에서 먼 곳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미래의 완성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해의 왜곡은 잘못된 신앙과 삶의 태도를 낳기 때문이다.


  I)이미 임한 나라만 강조하면 현세적이 된다. 자칫 인간 스스로 당세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혁명적인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신학은 그 나라의 시민을 ‘혁명의 주체로 간주되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와 동일시하여 그렇지 않는 계층에 대해 배타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자칫 무신론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유토피아주의자들과 결과적으로 비슷해져버리는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결코 특정 형태의 정치체제나 문화, 사상의 모습을 취한 것이 아니다. 복음의 어디에도 그러한 체제에 대한 언급은 없다.


  ii)반면 아직 오지 않은 나라에만 주목하면 내세적이고 비현실적인 신앙을 가지게 될 위험이 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오직 내세를 위한 대기소일 뿐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재림의 날짜를 정해서 소동을 일으키는 이단이 나타나기도 한다. 무책임하고 수동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기 쉽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비전은 삶에 진정한 활력을 준다. 이 비전이 우리의 안목을 세상에 매이지 않게 해준다. 우리의 안목은 이 비전을 통해 영원을 향해 열린다. 우리의 우선순위도 늘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맞춰지게 될 것이다.


제10장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공식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시기, 과도기적 시기에 살고 있다. 2000년 세월이니 과도기치고는 길기는 하다. 이 과도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지금 여기서 경험하여, 소망 중에 아직도 임할 그 나라를 기다리며 산다.


소망은 잡을 수 있는 실상이어서, 현재 임한 천국을 살면서 다가올 천국을 미리 맛 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믿음의 일종이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천국에 대해 보증금을 받아둔 사람이다. 반면에 착각, 허상, 환상, 꿈은 그저 구두 약속에 불과하다.


히브리서 11장의 성도들은 모두 믿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 삶을 살았다. 세상은 보는 것을 믿지만 이들은 믿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믿는 것을 보는 비전은 시력보다 훨씬 강했다.


연약한 존재에게는 현실을 예상하지도, 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데서 오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근심이 엄습한다. 그렇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탄탄한 복음적 진리로 받쳐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천국의 비전으로 그것들을 이길 수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책읽기에도 언제나 믿음, 소망과 인내의 원리가 적용된다. 진정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은 믿음, 소망과 때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결언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울과 어거스틴의 신앙 회복은 루터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개혁주의 신앙인 칼빈주의의 특징은 ‘하나님 주권 사상’인데, 이것이 바로 성경적 세계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데 있어 개혁주의 전통이 기여하는 바이다. 개혁주의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큰 안목과 그 고백에서 특징을 가진다. 바로 이 고백에서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신학 체계이기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자 삶의 조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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