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혼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Sep 30. 2019

하나님나라와 선교

기아대책 기대봉사단 훈련_김동춘 교수

20190930_기아대책

69기 기대봉사단 훈련

하나님의 나라_김동춘교수(하이델베르크 대학 Ph.D)



0. 들어가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가지만 반대로 제대로도니 정의를 해주는 곳은 없다. 독일의 실존주의 신학의 배경에서 루돌프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실재로서의 부활'보다는 현재적 의미에서 상징으로서의 '부활'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아니라 자신이 의미부여하는 '구원의 상징'에 전적으로 신앙을 묶어 두고, '하나님나라'역시도 이러한 실존주의적 신학의 입장에서 역사성을 잃어 버리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실재하는 것이다.우리가 살아 있는한
우리는 실재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보쉬의 '변화하는 선교'나 레슬리뉴비긴의 저작들은 우리가 선교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지점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의 선교에 개념도 크리스토퍼라이트에게서 잘 정리되었다. 미시오데이라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은 선교적인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 역시도 하나님의 선교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선교란 한 국가와 도시 안에서 대안적이 삶의 형식을 형성forming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을 선교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대안적인 삶의 형식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공동체들과 신약에서 보여지는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선교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온 이러한 관점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대안적으로 볼 것인가, 대조적으로 볼 것인가, 대립적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오늘 강사는 '대안적 교회론'을 주장하고 있다.)



1. 내세적 천국관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죽어서만 갈 수 있는 곳인가? 천국의 위치개념을 '하늘'이라는 플로톤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놓고 시간개념을 '죽음 이후'로 놓게 되면 여기라는 우리의 삶의 공간과 지금이라는 현재의 삶의 시간은 정박할 곳이 없어진다. 그러면 공간과 시간 위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몸과 초월적인 영혼은 애매하고 이상한 결합을 한 상태로 현재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다분히 이것은 인식론적인 것이다.) 그래서 중세시대에 사람들은 이러한 내세관을 가지고 '순례자'로서 잠시 머물러 가는 정체성을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오직 이 땅에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전도'를 위한 것이되고 많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커녕 내 삶의 이유조차도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죽음'이 되어 버리는 역설적인 결과가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말 한국에서의 선교는 조선말기 문화와 일제의 의한 국권침탈이라는 현실 앞에서 반응해야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복음과 성경은 해석의 문제가 가장 크다. 해석을 하는 시점에서 해석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구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여기에서 실현하는 것은 제국주의 하의 식민치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제를 깔게 되면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다. 독립운동을 해야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실재로 내세천국으로 둔 기독교는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친일파로 돌아서기도 했다)



2. 차안성과 세속성


종교개혁 이전과 이후,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냉전과 이전과 이후와 같이 세계사적인 큰 흐름의 변화는 문제가 있을 때는 피안other worldly로 피했다가 평온한 시절에는 차안this worldly로 돌아왔다. 그래서 세속적인 신앙은 경제가 안정적이고 번영이 진행될 때 차안에서의 웰빙과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신학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반대로, 시대가 어둡고 삶이 힘들 때는 피안으로 떠나서 세상 자체를 세속적인 것으로 두는 기복신앙과 구좋선 신앙이 확산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 경제가 발전하면서 하나님이 원래 기획했던 에덴의 번영과 축복이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번영신학으로 확장되었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것이 복음'이라는 이상한 도식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에 한국에서는 차안 신학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선교단체가 등장하게 된다. 예수전도단이나 CCC, IVF, SFC와 같은 선교단체들은 강조점은 다르지만 나름대로 큰 흐름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이 땅에서 실천해보고자 공동체를 만들거나 출판을 하거나 캠퍼스 전도운동을 진했다.



자 여기까지 우리는 여러가지 고민들을 해 보았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는 것과 차안과 피안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각자가, 각 공동체가, 교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적인 정의와 성서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기나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3. 하나님 나라의 개념


하나님 나라를 정의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3가지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1)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서에서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의 주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고 성경전체에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고 있다.


2) 종말론의 주체로서의 하나님나라

기존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저작들은 대부분 신약전공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김세윤 교수나 조지레드나 미들턴같은 신학자들은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술할 때 시작점이나 범위정도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직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종말론'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종말론이 빠져있거나 빈약한 하나님나라의 전파는 지속가능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나라는 어디서 부터 언제까지인가?라고 했을 때 종말이 언제 오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3) 윤리적 주체로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몸 소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다. 삶의 방향성과 관계를 유지하는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는 개인과 공동체에 윤리적인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4. 하나님 나라와 논쟁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양한 논쟁들이 등장한다. 


1)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간의 문제는 '현재적인가? 미래적인가?'라는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2) 하나님 나라의 범위에 대해서는 심령의 나라, 개인의 나라, 영혼의 나라, 교회적인 나라, 사회적인 나라, 내재적인가 혹은 초월적인가?라는 논쟁들이 있었다.

3) 하나님의 통치는 주권적인가 은혜적인가?와 같은 논쟁들이 있을 수도 있다. 

4) 하나님 나라의 성격의 특징은 또한 윤리적인 나라인가, 전복적인 나라인가, 해방의 나라인가, 성품의 나라인가?라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논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시간의 문제에서 하나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는지를 살펴보자. 계속해서 논의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실현된 종말론, 철저종말론(결과적 종말) 실존적인 종말론,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실현된 종말론의 관점이 있다. Realized Eschatology, C.H Dodd의 관점으로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라고 통상 부른다.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공생에 사역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임했음으로,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실현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왔다는 말을 '이미, 임하였다'라고 간주한 것이다. 물론 기여한 점이 있따. 현재적으로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예수님의 시대가 지난 이후에 더 이상 하나님나라가 성취될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파악되었다. 시간 개념으로 보면 예수님 이후에 시간개념을 간과한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가 활동하는 십자가 이후 2000년의 시간이 애매한 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Dodd에게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만 있고 아직 임하지 않았지만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은 자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철저 종말론의 관점에서 결과적 종말론이 있다. Consequent eschatology라고 할 수 있다. 철저종말론이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철저히 종말론적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선포와 해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 주셨다. 이것은 바이스Weiss에 의해 촉발되고, 슈바이쳐Schweitzer에 의해서 확립된 종말론이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사역을 종말론적 토대 위에서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의 서포 속에 드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묵시적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임박한 미래이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유효한 중간윤리interim ethics일 뿐이다.


셋 째, 실존론적 종말론(R. Bultmann)은 하나님나라는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안에서 현재적으로 실현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실존론적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의 아류이다. 불트만은 하나님나라를 미래적이냐, 현재적이냐로 구분하는 시간성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실존적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선포의 임박성이란 그 케리그마를 듣는 자들에게 '지금 여기서', 결단하라는 임박한 요청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현실성, 사회성, 역사성은 상실된다. 다만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실졵속에서 실현될 뿐이다.


넷 째,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aleady, but not yet)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이다.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선포를 시작으로 이미 왔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미완의 나라이다. 그 나라는 선취된 것이지만, 예기anticipation된 성격과 함께 유보가 필요하다.



5. 하나님나라, 천국


하나님나라와 천국을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나라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장소개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상태개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졌을 때 혹은 이루어 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변혁과 도덕적인 방향성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국이라는 개념은 영어로도 heaven이라고 쓰는 것처럼 '장소'적인 개념이 매우 크고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어떤 공간에서으로 유입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 땅에 있지 않는 어떤 곳이 되기 때문에 지금 이 땅은 어차피 없어져야 하는, 없어질 폐기할 공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학자들 가운데서도 종말론과 관련해서 폐기론과 변형론으로 발전되었다.


실재 속에서 하나님나라는 드러난다.


6. 폐기론과 변형론


종말론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우리가 살 고 있는 이 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간개념으로 미래와 과거에 대한 것은 이야기가 가능한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어떻게 되는가? 그럼 지금 현재에서 우리가 만들고 있는 문화와 기술과 제도와 시스템은 어떤 의미를 남기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 학자들은 이 세상은 없어지고 완전히 폐기된다는 주장과 없어지지 않고 보시기에 좋았던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남게 되면서 완전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변형론의 주장이 있다. 변형론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고 우리가 어디론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하늘과 새 땅'이 내려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비로소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transformation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을 다고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윤리적인 성격이 나올 수 밖에 없다.


7. 미들튼과 라이트


최근 내세 천국에 쏠려 있떤 한국교회에 현세천국에 대한 신학적 충격과 비전을 제시해주었던 리차드 미들튼의 '새하늘과 새땅'과 톰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는 주목할 부분이다.


1) 미들트의 새하늘과 새땅은 문화명령에 근거하여 현세에서 문화변혁을 강조하는 기독교세계관, 즉 신칼빈주의의 세계변형의 종말관의 대표적인 성경해석이다. 그는 여기서 죽어가 들어가는 천국이란 사실상 신약성경이 말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이 세상,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한 책임적 삶많이 요구될 뿐이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https://youtu.be/H-_7Xm8SKDs

톰라이트와 던의 새관점에 대한 설명


2)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현세성과 지상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구원과 영혼구원을 희망하는 내세관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통한 전 세계, 피조물 전체의 갱신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개인적 종말론과 내세 종말론은 극복하도록 성서학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8. 초월성과 내재성


김세윤 교수는 인간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나라는 은혜성과 주권성이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니마라는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의 나라가 아니므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를 질적으로 분리된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느 논리를 말한다. 그 외에 칼 헨리나 데이비드 웰즈는 초월 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정의한다.


내재적 나라로서 하나님나라는 주로 내재서의 기울어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을 상실한 내재성의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곧 세속화된 하나님나라를 말한다. 스캇 맥나이트나 월터 라우쉰부쉬, 문화개신교주의등이 이러한 방식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내재성 속에서 드러나면서도 부분적으로 초월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하나님나라의 특성이 모든 곳에서, 모든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는 잠정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9. 하나님 나라의 범위


하나님 나라의 범위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3가지가 있다. 개인적인 하나님나라, 교회적 하나님나라, 사회적 하나님나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하나님나라는 개인의 차원에만 축소되지 않는다면, 또한 개인에서만 멈추지 않는다면 범위적으로는 인정될 수 있으나 끝은 아니다. 교회적 하나님나라는 교회라는 측면에서만 갖혀 있지만 않으면 확자오디는 개념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교회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항상 교회를 세상과 구분짓는 이원론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 우리는 선교적 교회로 가야 한다. 그러나 더더욱 교회의 변화와 함께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회적 하나님나라가 개인과 교회 속에서와 함께 여전히 같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교회와 개인과 사회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0. 하나님나라의 유형


하나님나라의 유형은 분리모형 / 군림모형 / 일치 모형 / 공존모형 / 변혁 모형 / 대안모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분리모형 : 하나님의 나는 세상 나라와 분리된다.

군림모형 :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를 통치한다.

일치모형 :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는 다르지 않다.(조화, 일치) / 문화개신교주의 / 자유주의 기독교

공존모형 :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는 구별되지만, 서로 공존한다./ 자크엘룰, 마틴루터

변혁모형 : 하나님나라는 세상을 변혁한다. / 기독교 세계관, 해방신학

대안모형 :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와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나라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고 거절한다. 그 나라의 특징은 구속받은 구별된 공동체 안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냐야 한다. / 존 하워드 요더, 스탠리하우어스


11. 하나님나라, 제언


하나님나라는 윤리적, 도덕성 하나님 나라이다.

공평과 정의로 개념화된 하나님나라의 특성은 사회적-정치적 하나님나라에 한정됨으로, 차별과 배제를 거부하고, 환대와 포용을 특성으로 하는 '문화적 차원의 한님나라론'이 발전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애 새로운 키워드를 더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계시의 구체성의 측면에서 논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공간성은 구체적으로 확장된다.


12. 결론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는 대결하는 나라이고 충돌, 저항하는 나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는 때로는 어느정도 공존, 공생하는 나라가 되기도 한다. 이 둘의 관계는 유비속에서 비유비와 나라요, 일치속에서 불일치의 날아다. 하나님나라는 어디에 건설되는가?? 내세 저편에 들어감으로 그 나라가 실현되는가? 아니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 세상 이 편, 창조 세계속에서 문화명령을 위임받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다. 하나님나라가 세계 저편에서 세워진다면 우리에게 이 세상은 단지 지나쳐야 할 임시 정류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통과하지 않고 이곳을 건너뛰는 비약의 나라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음을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하나님의 직접적 통치인가, 아니면 단지 영적 통치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위힘받은 교회의 구두적 선포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그것은 산상수훈적 삶의 방식에 따른 '전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말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말할 때,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 '초대에 응하라', '회개하라',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나라의 질서를 '합당하게 살라'는 의도로 말하는 등,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나라'임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를 산다라거나 살아내야 한다는 용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에 하나님나라를 들어가는 곳, 들어가서 영원한 삶을 사는 곳이란느 의미로서 장소개념이었다면, 그래서 그 의미는 다분히 정태적 개념이었다면, 지금 하나님나라는 현재적 개념, 지금 바로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원리와 질서에 따른 삶을 살아내는 통태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나라는 당위적 현실이면서 의무의 현실, 그리고 추구되어야 할 현실로서 우리에게 요구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세상나라와 구별되고도 근원적인 삶의 방식으로 추구되어야할 나라임을 역설한다.

우리는 세상나라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 나라는 이 세상 현실을 살지만, 그 안에서 전적으로 구별된 그나라 백성의 삶의 준칙에 따라 살도록, 그것을 추구하도록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는 가능태이면서 현실태요, 현실태이면서 가능태인 것이다.


느헤미야에서 진행하는 하나님나라 세미나


13. 하나님나라와 Vision Of Community


하나님나라는 개인에게만,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와 사회와 국가를 넘나드는 우주적인 것이다.

개인의 변화는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와 가정과 사회를 넘어서 계속되어서 넘쳐난다.

하나님나라의 구체성은 그 공동체에게 주시는 실재적인 비전으로 보여진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자원과 사람과 아이디어를 적정하게 공동체에 제공한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시간적인 범위 안에서 공간은 계속해서 확장해 간다.



참고 1. 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은 비펠슈테데에서 태어났고,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올덴부르크에 있는 알테스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Abitur)를 획득한 뒤, 그는 튀빙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두 학기가 지난 후, 불트만은 몇 학기 동안 베를린 대학으로 갔고, 결국 마르부르크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는 자신의 학위를 1910년 마르부르크에서 사도 바울의 서신에 대한 논문으로 취득하였다. 2년의 훈련을 거친 후에, 그는 마르부르크에서 신약 성서를 강의하게 되었다. 베를린기센에서 잠시 강사로 재직한 후, 그는 1921년 마르부르크로 돌아와서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1951년 은퇴할 때까지 마르부르크에 머물렀다.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 귄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그리고 헬무트 쾨스터(Helmut Koester)가 그 제자 중에 있다.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 해석학파가 형성되었다. 불트만은 고백교회[1] 의 구성원이었으면, 국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학대와 과도한 민족주의 그리고 아리안 인종이 아닌 기독교 성직자의 퇴출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성서의 비신화화

불트만은 현대의 남성과 여성에게 우주의 외계인을 그리게 하는, 하늘의 도시나 삼층적 우주 같은 신화적인 용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그런 신화적 용어들 때문에 많은 현대인들이, 성서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에 나타나는 고유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대적이고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현대의 남성과 여성은, 신화적인 용어가 더 이상 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불트만은 그의 신학적 저술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신화적인 표현을, 새롭고 실존적인 해석으로 교체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성서의 역사적 관점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성서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요청하는 불트만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았다.            


양식비평의 목표는, 주 예수의 말씀이나 비유, 또는 이야기의 조각이 지니는, 원래의 양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차적인 추가와 양식들을 구분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러한 배움은 전통의 역사에서 중요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불트만의 《공관복음서 전승사》(1921년)는 여전히 복음서 연구에서, 틀에 박힌 수사학적인 어구나, 모여서 복음서를 형성한 이야기 단위들에 대한 그의 분석과 불트만이 가장 영향력있는 해설자이었던 이른바 "양식 비평"이라는, 역사적으로 기원을 분석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학자들에게조차 필수적인 도구로 간주된다.


양식비평

1941년, 그는 요한복음서에 양식비평을 적용하였다. 그 글에서 그는 요한이라는 복음서 저자가 의존하고 있던, 잃어버린 "복음 표적들"(Signs Gospel)[3] 의 존재를 구분하여 드러내었다. 이 학술논문은 당시 상당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하나의 이정표이다. 같은 해에 이루어진 그의 신약성서와 신화 강의는,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비신화화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비신화화의 문제는, 해석자들에게 전통적인 신학을 마르틴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동료가 지닌 철학으로 대체할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현대의 독자들이 예수가 가르친 메시지의 실재에 접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불트만은 예수의 삶이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의 구조에서 우리는 그것이 희생제사 신학(offering theology)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야기의 교훈들은 신화의 익숙한 언어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설명이다. 불트만은 신앙이 현재의 실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에게, 세계의 사람들은 항상 실망스럽거나 소란스러웠다. 신앙은 의지의 결정된 중대한 행동이어야만 하고, 그것은 "고대의 증거들"을 추려 모으거나 격찬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불트만처럼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적인 신뢰도를 의심하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비판한다. 불트만의 모든 영향력은 영어판으로 《케리그마와 신화》(Kerygma and Myth, 1948년)가 출판되고 나서야 비로소 발휘되었다.



참고 2 데이비드 보쉬_변화하는 선교


저자는 프레토리아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남아프리카대학교 선교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남아프리카 기독교지도자연합 총장으로 봉직하였다. 저서로는 Witness to the World가 있다.


우리는 점점 더 종말적 상황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되는데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폭력과 억압은 우파와 좌파 모두에서 고조되고 있다. 선교하는 교회는 이러한 현실들에 대하여 눈을 감아서는 안 되는데, “우리 시대의 혼란 속에서 교회의 방식은 철저하게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 p.41.



그레고리 대제 자신이 베네딕트 수도사였는데, 그는 “해외선교”를 계획하여 이탈리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주의 심장부로부터 영국의 켄트(Kent) 왕국으로 수도사 어거스틴을 보내서 이교도 영국인들 중에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어거스틴이 켄터베리(Canterbury)에 도착한 백 년 안에 교회가 영국에 굳건하게 세워졌는데 베네딕트 선교 사업 때문만이 아니라, 순례하는 켈트 선교사들 때문이기도 했다. --- p.383.



교회의 선교는 계속적으로 갱신되고 재고되어야 한다. 선교는 다른 종교들과의 경쟁이 아니고 개종 활동이 아니며 신앙을 확산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다. 따라서 교회의 관심은 개종, 교회성장, 하나님의 통치, 경


제, 사회, 정치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이다!



참고 3. 조지 레드 George Eldon Ladd, 1911-1982


저자는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의 신약학 교수였다. 복음주의 신학계의 거성이었던 그의 저서들의 특징은 알기 쉽게 깊이 있는 진리들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책 『하나님 나라』는 또 다른 저서 『신약신학』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더 자세히


조지 엘던 래드 (George Eldon Ladd, 1911-1982)는 F. F. 브루스, 윌리엄 바클레이 등과 더불어 20세기의 위대한 신약학자였다. 특히 하나님 나라 개념에 대해서 많은 저서를 낸 신약학계의 거성이었다. 또한 그는 깊은 내용을 알기 쉽게 집필하여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이다. 그는 갈등하는 견해들의 균형 잡힌 해석과 깊은 성경적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래드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 “하나님의 통치” 개념에서 열쇠를 찾고 있다. 오스월드 J. 스미스(Oswald J. Smith)는, 래드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 대한 해설은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래드의 책들은 일급의 책이며, 많은 사람들의 필독서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 개념을 평신도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내 판단에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래드 박사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차례차례 지도하여 더 분명하게 이해시켜 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 F. F. 브루스(F. F. Bruce)


“래드 박사는 성경적 종말론의 모든 분야를 마스터했다. 그의 저서들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아주 유용할 것이다.” ― 로저 니콜(Roger Nicole), 고든 신학대학원



참고 4.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칼빈신학교에서 예술과 신학을 전공했으며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칼빈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칼빈신학교의 총장으로 섬겼다. 현재 칼빈신학교 명예총장으로, 칼빈대학 부속기관인 ‘칼빈 기독교 예배 연구소’에서 연구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전공인 신학 외에 영화·문학·철학·역사 등에도 해박하여, 전문적인 신학 주제를 현대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몇 안 되는 신학의 거장이다. 2003년 이후로는 해마다 ‘설교를 위한 독서 세미나’를 개최하여 설교자들이 시대와 사람을 이해하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세미나에서 만난 수많은 설교자들과 모은 독서의 지혜를 이 책 『설교자의 서재』로 엮어내어, 2014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Book Awards 교회·목회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1996년 올해의 책 Not the Way It’s Supposed to Be, 2003년 올해의 책 『기독 지성의 책임』(Engaging God’s World, 규장)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걷는 믿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