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4_기아대책
기대봉사단 훈련
선교적 교회_한국일 교수(장로회신학대 선교학 교수)
장신대 한국일 교수님의 선교적 교회에 대한 비전
들어가기
한국교회에는 소망이 있는가? 한국 선교에는 소망이 있는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어디서 희망을 찾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어떤 교회론이 필요한가?
사람은 변하는가? 사람이 바뀔 수 있는가? 바뀔 수 있다면 언제인가? 그것은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날 때이다. 관점perspective의 변화는 계기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회개하고 삶을 돌이키고 마음을 돌이킬 기회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기회에 자신의 인식체계가 바뀌게 되면 우리의 삶은 완전한 변화를 이루게 된다.
보는 눈을 바꾸어 보자. 큰 교회, 성도수에 매장된 교회, 성장에만 목메는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목회의 방식으로 '선교적 교회'를 실천하고 있는 교회들의 예를 찾아보자.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교회의 이야기는 기존의 교회의 기준에 잘 맡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경험한 교회는 교회론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기반이 너무 부족하다. 교회에 대한 비판의 근거에는 자신이 경험한 2~3개의 교회에 대한 예시들만 있지 않은가? 우리가 눈을 더 크게 보고 넓게 보고 조그마한 모퉁이에 잘 보이지 않는 작지만 큰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살아있고, 교회가 공동체를 섬기면서 하나님나라가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그런 '희망'을 품는 교회를 기대해야 하지 않는가?
1973년 6월 3일 여의도 광장에 모인 110만명이 모였다. 빌리그레이험 목사의 부흥회로 많은 성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1.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공신력 그리고 영향력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1990년까지 거의 100년 동안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왔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발전에 다양한 영역(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에서 기여하였다. 한국교회는 1%미만이었던 시절에 사회에 건전한 문화를 형성하고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옥한음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
한국교회의 현주소
현재 한국교회는 사회적 신뢰와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축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종교인 모습이 많아지고, 시장논리와 물질적 가치에 지배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사회적 책임성이 약하고 개교회주의로 그들만의 잔치를 즐기는 배타적 모임으로 인식되었다. 교회로서 구별된 개신교의 종교적 영성을 찾아볼 수 없다.
60년대까지 모든 교회들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동네교회로 존재하였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며, 지역 주민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였다. 70년대 이후 교회의 급성장은 지역에 많은 교회들을 형성하였고, 개교회주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보다는 교회가 경쟁이 더 우선적 관심사였다.
설교하는 조용기 목사
한국교회의 기존 이미지는 어떤가? 전도와 영혼구원을 중심으로 '구원의 방주'모형이 지배적이고 교회와 세상의이원론적 분리가 일어나는 '분리된 교회론'을 가지고 있다. 건물중심의 교회론과 프로그램과 행사 중심의 교회론을 가지고 있다.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되어 고립된 '친교 없는 전도와 선교'활동을 전해하고 있으며, 지역교회가 지역사회에 전도는 하지만 지역사회에 관심은 없다. 결국 온전한 지역교회론의 회복이 필요하다.
산업화, 도시화 시대의 한국사회의 변화
6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산업화 도시화 현상을 겪으며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한다. 현대사회의 특징은 공동체성의 상실과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형성이 깊어졌다. 지역개념은 주민보다 토지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연대감이 약화되고, 관계와 소통이 단절된다. 업적주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이기주의와 같은 근대주의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도시화 현상을 겪으며 지역성을 상실하고 아파트 중심의 주거양식의 변화는 좁은 지역의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는 교회밀집지역을 형성하였다. 지역교회 역할을 상실하고 개교회간 성장과 생존을 위한 경쟁구조를 형성하였다. 농어천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촌 지역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농어촌 교회는 젊은 층과 어린이의 부재와 노인들만 거주하면서 자연적 소멸의 위기를 겪는다.
지역공동체로서 마을과 함께하는 교회
지역사회를 선교현장으로 인식하고 지역과 함께하는 교회 모형이 필요하다. 목화자는 교회 내부만을 활동영역으로 인식하는데서 지역 전체를 목회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 성장 패러다임이 '오는 구조' come-structure라면, 지역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가는 구조' go-structure로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회복과 마을 목회를 실천하는 선교적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케리그마(복음선포)는 코이노니아(성도의 교재) 다음에 나오는게 맞다. 이분법적 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세속적인 신앙이 아니라 통전적 관점에서 하나님나라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지역공동체로서 마을의 귀환이 필요하다. 지방자치제와 주민자치시대가 열리고 있다. 주민들이 지역사회의 주체가 되어 지역과 마을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마을은 우리의 마음을 담고 있는 공동체이다. 우리가 터 잡고 살아가는 가장 실질적인 일상생활의 둘레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특정한 마을 안에 둥지를 틀고 그 마을의 문화적 전통에 의존하여 일상의 삶을 누리게 된다."_김영순. 마을 만들기 운동은 지역공동체를 회복하는 운동이다.
21세기 들어와 전 지역이 마을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전개한다. 지역주민 중심의 마을 만들기 운동이 그 예이다.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지역공동체 회복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시민차원에서 사회의 발전을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 "국가와 시장 단위가 아니라 먼저 지역과 마을 단위로 생각하고 일해야 한다. 마을에서 함께 모여 밥먹고 아이들과 같이 키우고, 오순도순 살고, 동네 식당도 차려보고 사회적 기업, 마을 기업도 하면서 잘 살아 보는 것이지요."_조한혜정 교수
2. 지역공동체와 지역교회_선교적 교회
지역공동체와 지역교회 참여
마을을 목회와 선교현장으로 인식한다.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속한 지역에서 우선적으로 실천한다. 지역사회는 지역교회의 일차적인 선교현장이다. 오늘의 지역교회의 과제는 지역교회가 어떻게 지역사회와 함께 공존하고 동행할 수 있는가에 선교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개교회성장으로부터 목회를 마을로 확장한다. 하나님 나라를 추상적 개념에서 지역교회가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구원을 기독교적 가치의 틀 안에서 구현하며 살아간다.
지역공동체와 선교적 교회운동
선교적 교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이 사랑과 선포하는 복음을
지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진정성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소통하고
그것을 선포할 뿐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세계선교와 함께 지역교회 차원의 선교운동이다.
선교적 교회의 성서적 근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성육신을 통한 구체적 실천_요한복음 3장 16절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선교적 공동체(교회, 그리스도인)_요한복음 20장 21절, 요한복음 17장 18절
교회의 본질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_에베소서 1장 23절
선교적 교회의 성서적 근거 1_세상, 하나님의 선교 현장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일하며 선교활동을 전개하신다.
세상은 크게 세가지 차원을 갖는다.
1.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답고 좋은 세상_창세기 1장 31절
2.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선교적 교회론의 성서적 근거2_세상으로 파송받은 선교적 공동체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선교공동체이다.
세상으로 파송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보편적 소명이다.
성도는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도록 보냄을 받은 선교적 그리스도인이다.
지역교회는 일차적으로 지역사회로 보냄을 받은 공동체이다.
선교적 교회론의 성서적 근거3_교회, 세상을 충만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
에베소서 1장 23절_"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몸이다.(코이노니아,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한느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다.(세계를 품는 교회)
지역사회 안에서 선교적 교회의 세차원
1. 지역교회는 지역사회 안에서 열린 관계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_개방성과 공존
2. 지역교회는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대화의 관계를갖는다_소통과 대화
3. 지역교회는 지역사회에 다양한 영역에서 참여하고 변혁을 지향한다_참여와 변혁
* 지역교회는 활동 이전에 본질적으로 "세상을 향한 운동성"을 갖는다.
선교적 교회의 성서적 근거는 에베소서 1장 23절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에 기초한 생명공동체로서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면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된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 소통과 대화, 공존과 열린관계, 참여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3. 선교적 교회의 실제적 원리 8가지
1) 교회 안에 닫히 목회로부터 지역사회를 향한 열린 목회
2) '친고 없는 전도와 선고'로 부터 '친교 안에 있는' 전도와 선교
3) '선교적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정체성_교인과 지역주민의 병행
4) 지역의 필요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선교
5) 교회 안에 자원과 성도의 은사 발견
6) 지역교회를 지역사회의 플랫폼(마당)으로
7)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지역의 다양한 기관들과 협력
8) 지역 에큐메이즘_지역교회의 연합과 협력
3p 원리_구성의 원리
1. 철학phiolsophy
2. 원리principle
3. 프로그램program
참고 1. 한국일 교수 관련 기사
“목회자의 초법적 권위, 불투명한 재정 사용 등 대형교회 현상이 양산한 부작용을 직시하고 변화시키지 않으면 교회는 사회로부터 더욱 외면 받을 것입니다.”
한국선교신학회(회장 전석재 교수)가 지난달 28일 서울 연세대에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주제로 개최한 2015년 제1차 정기학술대회에서 장로회신학대 한국일(선교신학·사진) 교수는 이같이 주장했다.
‘대형교회의 문제 진단과 평가’를 제목으로 발표한 한 교수는 먼저 한국교회 대형화의 배경과 원인을 설명했다. 그는 “교회의 대형화는 1970~80년대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이농인구의 도시유입과 성장주의 때문에 탄생한 독특한 현상”이라며 “교회의 급성장과 대형교회가 출현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친 세속적 가치가 교회성장을 촉진하는 원리로 사용돼 교회 본질을 훼손하거나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한 교수는 ‘담임목회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조직과 구조’ ‘교회 중심적인 신앙관과 선교관에 기초해 교인들을 교회성장의 도구로 전락시킨 풍토’ 등을 대형교회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그는 “목회자의 초법적 권위와 독주, 도덕적 타락과 불투명한 재정 사용, 개교회주의와 성장을 위한 무한경쟁과 무리한 건축, 교회 내부 분열 등 교회 본질을 벗어난 행위의 대부분이 대형교회에서 발생한다”며 “대형교회의 내부적 특성과 구조에 원인이 내재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 교수는 이를 타개할 대안으로 ‘인격적 관계를 실현하는 교회론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교회 생명력을 성도의 숫자나 건물 크기, 규모로 측정하지 않고 성도의 인격적 관계와 공동체로 이해해야 한다”며 “건물과 조직, 프로그램 중심의 실용주의적 교회론에서 벗어나 ‘성도가 교회’라는 성도 교회론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목회자와 성도들이 헌신한 결과이지만 산업화와 도시화 같은 시대적 요인의 영향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며 “현대에는 단순한 개인전도 방식보다 지역사회 안에서 일상적인 삶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경제적으로도 급성장하다 어느 수준에 이르면 그 속도가 늦어지거나 멈추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한국교회는 현재 성장 정체기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그동안 양적 성장에 취해 미처 돌보지 못했던 성도들을 살피고 내실 있는 신앙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한국일 교수 약력
장로회신학대학교(B. 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Th. M.)
독일 Heidelberg 대학(Dr. theol.)
산본푸른교회 담임 역임
한국선교신학회 회장 역임(2004–2006)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참고 2. 농촌목회
자전거와 보름달
<농촌과 목회> 발행인 한경호 목사
고추밭에 나가 종일 진땀을 뺐는지 눈가가 다 진물린 듯했다. 늦은 저녁을 마친 한경호(52) 목사와 대청마루 같은 거실에 찰진 옥수수 그릇, 수박 접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평생에 하나 이룰까 말까 할 일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해내는 인물들이 있다. 남들보다 몇 배의 일도 작대기 하나 들고 처마 밑에 도랑치듯 직 그어내는 이들이 있다. 그가 한경호 목사다. 타고난 팔자가 그렇다며 맞장구 치는 그와 마주앉았을 때 말보다 우선 그의 인상을 때마침 산자락에 걸터앉은 보름달이 일러준다. 달의 정기가 오늘은 유난하다고, 이글이글 타는 빛을 애써 자제하며 뜬 해같은 달은 영락없이 그와 닮아 있었다.
70년대 양서(良書)협동조합운동을 조직해 전국적으로 확산, 수원 YWCA에서 친(親)민중신학에 입각한 성경을 신학생에게 가르치던 평신도, 원주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의 역군, 농촌목회자시찰모임 농민회조직, 환경운동연합, 대안학교 등은 그의 이름 앞에 수식되는 역할들이다.
농촌과 목회일기
한국교회마저 농촌목회에 거의 자포자기하는 지경인데 그는 참 배짱이 두둑하다. <농촌과 목회>라는 농촌전문지를 다 발간하다니. 99년부터 계간지 형태로 발행하기 시작한 <농촌과 목회>는 농촌현장에서 나름의 대안과 철학을 겸비한 이들의 전문적인 안목이 돋보이는 유일한 잡지다. 농촌이라는 카테고리가 분명하지만 조금만 더 의지를 갖고 본다면 한국교회 전체와 사회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생명의 순환으로 극복하려는 의도가 명료하다.
첫 목회지 강원도 호저교회를 떠나 잡지를 발간하게 된 데는 목회의 지평을 넓혀 보겠다는 고심 끝이 보인다. 생협이며 해 오던 일들이 정상 궤도에 오르니까, 교회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닿는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떻게 더 진전시킬까 고민하다가 일반목회로 눈을 돌렸다. 교회 안에 있으면 운신의 폭이 좁아 할 수 없는 일들 중에는 농촌 목회자들이 농사지으면서 선교할 선구적 목회방법도 포함되어 있다.
◇지신밟기, 대보름 등 전통 농촌 문화와 기독교는 어떻게 만날 것인가? <농촌과 목회> 좌담회에 아빠를 따라온 여고생은 ‘우리 문화니까 그냥 하면 되지, 뭘 이렇게 어려운 말로 고민 하냐’며 반문 했다. 과연 기독교는 어른들의 닫힌 사고 안에 갇혀 있는게 문제일까?
“나중에 정리하기를 농촌선교는 모델리티(규범, 체제화된 조직)에서 소델리티(뜻있는 사람들의 조직체)로 강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교회가 모델리티적인 현실에 안주하려고 했을 때 소델리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 그 한계를 뛰어넘게 했거든요. 1만5천 농촌교회가 지금 한계에 직면하고 있어요. 목회적 과제가 없어 도시교회에 기대어 근근히 사는데 도시교회는 이런 형편의 농촌을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오인해 비전을 실축시킵니다. 농촌교회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입장에 서서 교회가 중심체로 지역과 함께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한데 잡지는 그 자구책이기도 해요.”
교회가 언제까지나 ‘성안의 장수’ 모냥 교회 안에서 교인들과만 씨름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려면 목회자들이 변해야 한다. 잡지는 목회자가 지역사회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꾸려나가길 바란 데서 탄생되었다. 버리면서 유지되는 교회? 목회자 중심의 교회를 버리고 경제적인 수준과 목회적 지위를 낮추며 자비량 목회를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잡지는 그의 농촌에 대한 목회관인 ‘경제적 측면 아닌 문화적 차원’이 담겨 새로운 시각을 열기도 했다.
이런 사안들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청주에서 <농촌과 목회> 좌담회를 연다고 했다. ‘농촌의 전통 마을문화 어떻게 소화하고 살릴 수 있는가?’의 기독교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그 날 모인 이야기 손님들은 사회에 신광철 교수 외에도 화가 김봉준 선생, 허병섭 목사, 이정훈 목사, 임락경 목사 등이 먼 길을 줄달음쳐 왔다. 쟁쟁한 분들을 한꺼번에 한자리에서 뵙게 된 감격에 전날 늦게까지 이어졌던 피로감도 다 달아나버렸다. 명절날 가족들을 만나듯 마음이 달떴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농촌에 살을 섞고 도란도란 정을 키우는 분들이니 당연하다.
목회를 종교적 행위보다는 삶으로 승화시킨 이로 평판이 난 허병섭 목사는 ‘논밭에 나가 초목을 보고 설교한다’는 말로 좌담회의 주제를 이끌어 주었다. <돌파리 잔소리>로 유명한 임락경 목사 또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로 문화를 정의하며 그 동안 물과 기름 같았던 마을 안에서의 기독교의 위치에 일침을 가했다. 한경호 목사의 말대로 전통문화 안에서의 마을 개념은 그야말로 신명을 담보한다. 이 신명을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을까 기독교는? (자세한 내용은 <농촌과 목회> 가을호에서 볼 수 있다.)
◇원주지방의 생태와 문화, 예술전반에 걸친 문화지 <평론원주>, '호저교회' 목회활동을 정리한 선교학 석사 논문 등.
농촌으로 돌아가
농촌을 위해 직접 일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 떠나고 들만 남은 농촌에 뜻을 두고 농대에 진학했었다. 땅 한 뙈기 없는 삼팔따라지라 농대를 나와도 농부의 삶하곤 언감생심 멀기만한 정부기관 공무원 노릇이 전부였다. 덧대어 늘 관심거리였던 역사와 신학까지 뭉쳐 마음은 항상 콩밭에 가 있었다고 한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짓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어요. 농촌을 위하는 길이 꼭 농대를 나와야 되는 줄 알았어. 의사해서 면 소재지에 병원 하나 내도 좋았을 것을. 의사들이라고 기득권층이 되놓으니까 시골에 아무도 안 오잖아. 의사이면서 목사하면 참 이상적이었을 텐데.”
농촌의 현실을 곁다리로 꼬집는 무의식적인 발언이지만 이 가슴 속의 말은 그의 평생의 업을 일궈 주었다. 다니던 멀쩡한 직장을 접고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갔던 것이다. 입학 무렵 <농어촌 선교회>가 꾸려지고 있었지만 농촌에 투신한 졸업생들이 하나도 없었던 당시에, 그는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던 그 동아리의 첫 농촌 목회자가 되었다. 땅뙈기 하나 없는 그의 처지상 목사였던 아버지의 연고를 따라 강원도에 발을 들여놓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농촌 미자립교회에 여섯 식구가 천정 낮은 시골 토담집에서 살림살이를 시작했다. 밤이면 천장에서 운동회를 벌이는 생쥐들과도 정이 들 정도의 긴 세월. 그 곳에서 생산자 중심의 호저생협을 일궈 생명농법으로 먹거리를 생산하고 생협을 통해 직거래유통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농사라곤 지어본 적도 없는 그가 대대로 농사꾼인 농부들을 어떻게 감당했을지는 불보듯 뻔하다.
“글쎄요, 가봐야 알죠.” 다음 모임날짜를 정하자고 하면 농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농사가 시간통제도 안 되고 인위적이지 않다는 걸 잘 몰랐었던 그에게는 숨통을 조이는 모순된 정서였다. 하늘과 자연에 의지해 있기 때문에 조직적 생활도 공사구별도 없어 협의와 의논이 안 돼 모임 끌어가기가 힘에 부쳤다. 좌절할 때 그를 일으킨 건 새벽기도의 힘이었다. ‘자급자족의 농사와 자발적인 청빈’, ‘농사를 통한 영성’을 밑거름으로 새로운 교회를 생각하게 된 계기도 그 때였다. 힘을 얻은 그는 농한기 때면 정농회를 비롯해 유기농업협회에 동네농민들을 파견시켜 벼농사부터 독려해 나갔다.
“구심점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만으로는 역부족이죠. 정신적인 동기를 다져가야 해 정농회를 돌며 강사 초청도 하고, 겨울이면 3박4일씩 전국을 돌며 배우기도 하고. 믿는 사람은 신앙고백으로 농사지어야 합니다. 농민 스스로 쌀값을 정하고 수매하는 혁명적인 유통 과정은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그 일을 농민이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다니. ”
농사이야기
귀래에 와서야 겨우 농사꾼이 되어간다는 그는 <온생명농사공동체>의 12가정을 꾸리며 유기농농업운동, 지역사회환경, 수질, 생태조사를 위해 귀래지역목회자모임을 결성하며 본격적인 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의 영성은 온유의 영성이어야 해요. 생명을 키우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하는데 ‘기업(基業)’이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삶을 말해요. 땅의 영성과 농민의 영성도 온유인데 회귀성이 있고 품고 녹여내고 살려내곤 하죠. 자본주의 영성이 농민에게도 들어와 생명을 넣어 힘써 길러야 하는데 농심이 사라지고 있어…“
인내 또한 필수인 농사, 한두 고랑이 아닌 긴 밭고랑은 끝없이 펼쳐져 있어도 농사는 해치우는 게 아니다. 작물 한 포기 한 포기와 통하면서 (대상화할 물건이 아니다) 생명의 기운을 나눠야 한다. 그는 이런 농민의 뚝심이 사실은 역사를 떠받쳐 왔다고 생각한다.
두 번 달을 보며 그와 만나고 헤어졌다. 메밀꽃이 피려는지 두 번째 날 달빛은 유난히 희끄무레했었다. 곱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농사꾼 하늘 위로 왜 그리도 유난스런 달이 뜨는지, 농사꾼에게 왜 ‘목가’가 있는지 달은 말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산새가 정막을 깰 뿐인 산길을 자전거를 몰며 터벅터벅 걸으며 ‘이만하면 차 한 대 정도 있을 법도 한데. 이래저래 필요를 갖다 붙이면 그깟 차 한 대가 별 대수일까’라는 오락가락한 생각을 빌려 말을 건넸지만 그는 확실히 심지가 곧았다. 대답대신 나는 환경운동가라며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 사이로 흰 이가 너그럽게 웃는다. 그날 밤 산길 야행은 그의 자전거의 톱니바퀴 소리에 피로고 어색함이고 다 별이 되어 당실당실 뜨고 말았다.
<농촌과 목회> 033)764-8098 http://rm.urm.or.kr
이상진 목사(충남 광시송림교회)는 20년 전부터 주변 목사들에게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순 밭일만 하고 장사에 눈이 멀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회 초창기부터 교회 인근 밭에다 콩을 잔뜩 심고 수확기가 되면 두부 가공에 열을 올렸다. 누가 보면 저 사람이 목사인지 농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농사일에 몰두했다.
첫 농사는 말아먹었다. 2년간 열심히 했는데 결국 허탕이었다. 콩 농사 지어서 두부도 만들고 콩나물도 재배했는데 수확이 변변찮았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콩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신참내기가 겁 없이 덤벼든 탓에 땅도 작물도 순순히 받아 주지 않은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 병까지 얻었다.
병명은 당뇨병 합병증. 시력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리 한 쪽은 마비 증세가 악화돼 병원에서는 아무래도 절단해야 할 거 같다고 했다. 점점 나빠지던 시력은 급기야 실명 위기에 놓였다. 담당 의사는 시한부 이야기까지 꺼내는 판이었다. 눈앞만 캄캄해진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어두워졌다. 목회도 농사도 건강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병원 치료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식이요법으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는 음식들을 연구했고, 양파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엑기스를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몸을 살리고 소생시키는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자기 몸으로 실험하면서 효과를 직접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몰라보게 몸이 나아졌다. 시력도 되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됐다는 것을 스스로 체감할 수 있었다. 먹거리가 몸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이 목사는 그 뒤로 몸 살리는 먹거리를 만들고 알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양파 농사를 본격으로 지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 이상진 목사는 20여 명이 모이는 농촌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그러면서 양파 농사도 짓고 양파즙을 내서 팔기도 한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소 먹이 실어 나르는 마을 전도사
강형주 목사(선장중앙교회)는 20대 후반 전도사 시절 아내와 갓난 딸을 안고 홍성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거기서 7년을 목회했다. 부임 당시 교인은 5명밖에 없었고, 목회자 사례비로 20만 원이 책정돼 있었다.
애초에 농촌 목회를 하리라 마음먹고 들어가서인지 동네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네 부역이라고 해서 길을 닦고 각종 공공시설 정비 사업이 있을 때마다 팔을 걷어붙였다. 동네 이장님들이 와서 전도사님이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말리기도 했지만 당연하게 여기고 참여했다.
마을 꼬마 애들을 데리고 읍내까지 유치원 통학 버스를 운행하기도 했다. 읍내까지 누구도 데려다 주질 않아서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던 아이들이었다. 매일 반복하는 통학 버스 운전에 마을 주민들이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저 양반, 마을 일에 관심 많은 분이다'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이유는 또 있었다. 홍성은 한우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런데 동네에 소 먹이를 차로 실어 나를 사람이 없어서 늘 골머리를 앓았다. 이것도 역시 젊은 전도사의 몫이 됐다. 2.5톤 트럭을 몰고 30~40km를 운전해서 소 먹이를 실어 날랐다. 마을 어르신들이 농촌에 온 젊은 전도사가 마을 일에 적극 나선다고 칭찬했다. 교회 소문이 좋게 나면서 성도들도 늘었다. 강 목사가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직전에 30명 가까이 출석하게 됐다.
▲ 강형주 목사는 마을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목회 초창기부터 마을 일에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목사가 '농사꾼' 된 이유
이상진 목사가 농사일에 매진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목회 초창기 콩 농사가 실패하긴 했지만, 농사일을 관둘 생각은 없었다. 마침 전환한 양파 농사로 이제 제법 매출도 궤도에 올랐지만 지금도 농사로 생계를 이어 갈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럼 농사를 짓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었다. 이 목사는 "이왕 농촌에 와서 목회하는데 농부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직접 흙 만지고 작물을 재배하고 농사 지은 걸 내다 파는 모든 과정을 나도 겪어 보고 싶었다. 그래야 이분들의 고충이 뭔지 헤아릴 수 있지 않겠나. 목사가 뭘 도와 드려야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교회 인근에 있는 양파밭으로 데리고 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밭이 가까워오자 표정이 밝아졌다. 여지없는 농사꾼의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땅을 밟아 보라고 했다. 보드랍고 푹신한 느낌이 발바닥 전체로 전해져 왔다. 이 목사는 그것이 땅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양파밭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왜 풀을 안 뽑는지 물었다. 이 목사는 땅은 만물이 자라고 숨 쉬는 터전이라고 답했다. 풀이며 곤충이며 벌레며 다 함께 더불어 자라는 곳이 바로 땅이라는 것이다. 상품 작물을 키우겠다고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를 뿌려 대면 땅은 제 구실을 잃고 그렇게 자란 작물이 몸에 생기를 불어 넣을 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풀과 곤충, 벌레의 각축에서 튼튼하게 제힘을 기르며 자란 곡식이 인간의 몸에 활력을 가져다준다고도 했다.
농사꾼만 된 게 아니라 농의 철학이 온몸에 배인 천생 농부가 다 되었다. 이상진 목사는 교우들과 양파를 친환경 유기농으로 기르고 양파즙을 내서 판매하는 전 과정을 함께한다. 교우들이 재배한 양파를 정상가에 수매해서 즙 만드는 기계로 양파즙을 낸다. 직거래 판매까지 담당한다. 이 목사는 포장하는 일을 도맡아서 하고 나머지는 각자 분업을 통해 협력한다.
교인들 살림살이가 몰라보게 나아졌다. 전에는 거대 유통 업체가 양파값 허리를 싹뚝 잘라 대기 일쑤였다. 수지 타산을 이유로 턱없이 가격을 내리 깎아서 분통 터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땀 흘린 만큼 제값 주고 농산물을 내줄 수 있게 되었다. 교인들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이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교회를 참 곱게 알고 있다고 한다.
내년부터는 동네에서 추수하는 쌀을 서울시 소재 학교들에 친환경 식재료로 보내기로 했다. 서울시장과 얼마 전 면담을 하고 왔다는 이 목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빛이 환해졌다. 실은 부임하고 10년 가까이 교회 십자가 네온사인에 불을 넣지 않았다. 마을을 비추는 몫을 제대로 못 하면서 십자가에만 불을 켜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3년 전부터 불을 밝혔다. 마을분들이 교회가 마을을 위해서 있다고 여기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를 전혀 안 쓴다는 이상진 목사의 밭은 밟으면 푹신푹신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키워서 남 준다'
다시 선장중앙교회 이야기다. 강형주 목사는 이제 농촌 목회 24년 차가 되었다. 24년간의 목회 이야기를 하다가 뭐 보여 줄 것이 있다며 교회 바깥으로 나갔다. 강 목사도 밭 구경을 시켜 줬다. 눈빛이 반짝이면서 손가락으로 이쪽저쪽을 부산하게 가리켰다. 저기는 매실나무, 저기는 아로니아, 저기는 단감나무, 저기는 블루베리.
강 목사 역시 농사와 목회가 분리된 적이 없었다. 1,000평 밭농사로 오랫동안 고구마를 키웠고, 각종 묘목을 심어서 열매 나무로 키우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심고 기르다 보니 애정이 생겨 그런지 묘목은 어떻게 기르면 좋은지 열매 나무들을 어떻게 가꿔야 하는지 노하우가 정교하고 세세하다. 일장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 이분이 목회자인지 농부인지 헷갈릴 정도다.
강 목사는 '키워서 남 준다'를 지론으로 삼고 있다. 열매 나무들에서 나는 과실들은 모두 교인들 몫이다. 묘목은 자유롭게 나누어 준다. 인근 농촌 작은 교회 목사들에게도 그 몫이 돌아간다. 강 목사는 미자립 농촌 교회 목회자들에게 시골 땅 100평이라도 사서 블루베리나 아로니아 묘목을 심을 것을 권했다. 심다 보면 열매도 나고 목사 가정 살림에 보탠다기보다는 그걸로 남 주기 좋지 않겠느냐는 게 이유였다.
▲ 묘목을 정성스럽게 키우는 손길이 교회 주변 곳곳에 엿보였다. 매실, 단감, 아로니아, 블루베리 등 종류도 다양했다. 과실은 모두 교인과 주민들 몫이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설교 준비나 기도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강 목사는 "여태껏 새벽 예배에 빠져본 적이 없다. 수요일, 토요일에는 다른 약속을 안 잡는다. 지금도 빼놓지 않고 원고 설교를 고수한다. 여러 일을 하긴 하지만 영성 훈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인들이 대번에 알아챈다. 책 읽고 성경 연구하고 기도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도록 스스로 원칙을 세워서 지낸다"고 했다.
침례교농선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강형주 목사는 1년에 한 차례씩 농어촌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를 열고 자립, 자활 기금을 마련해 어려운 형편의 목회자들을 돕는 사역도 하고 있다. 무슨 사역인지 물었더니 묘목 키우길 원하는 목회자들을 돕는 지원 사역이라고 답했다. 오미자, 아로니아, 블루베리, 여주 등 뭐든 키워 보겠다고 하는 분들에게 지원금을 보태 주고 있다.
농촌 목회 자립의 길을 물어 보려고 찾아갔는데, 두 목사는 자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농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삶이 더 중요하고 우선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상진 목사가 한 말이다.
"목회자들이 긍지를 가지고 목회하면 좋겠다. 도시 사역이 꽤 삭막하지 않은가? 농촌으로 내려와서 농부들 사랑하면서 목회하면 참 신바람 나는데… 자립도 어렵지 않다. 여기에 뼈 묻을 생각을 하면 자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농부들 생각하면서 뭘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립은 자연스럽게 되는 거 같다. 그리고 먹고사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먹는 거 입는 거는 다 주실 거라고 믿는다."
마을을 섬기는 시골 교회 워크숍
목회멘토링사역원은 5월 2일(월) 대전 늘사랑교회에서 '마을을 섬기는 시골 교회 워크숍'을 개최합니다. 농촌 목회 현장의 고민을 나누고, 마을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교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시골 교회, 농촌 목회를 놓고 고민을 나누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이상진 목사는 농촌 목회가 행복하다고 했다. 마을 속으로 들어가 농부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하면 자립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참고 3. 홍동완 목사
<2> 강원도 홍천 도심리교회
홍동완 목사가 도심리교회로 가자 푸들이 홍 목사에게 안아달라고 달려들고 있다.
홍동완 목사 꿈은 아프리카 선교
호주서 선교사끼리 갈등 보고 짐 싸‘예수 믿으라고 하지 말 것’ 약속하고
겨우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목사 내려놓고 허드렛일 도맡아
어르신들도 그저 “동완이”로 불러그래도 뒷담화 이어지다 결국 칭찬
마을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반장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기적 일어나
마을제사에 기도하라더니 “아멘”칠순 맞은 할아버지 첫 세례자 되고
주민 절반이 줄줄이 교회로주일마다 한 집씩 돕는 섬김예배
곰취 심어 함께 가꾸고 수익 나눠길 끝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강원도 홍천군 화천면 도심리교회다. 그 옛날 화전민들이 살던 곳에 자리 잡은 터다. 12평 교회가 고적한 산골에 별처럼 박혀 반짝인다. 이토록 앙징맞은 교회가 인적이 드문 산골에 있어 아쉽고, 이렇게 ‘자연스런’ 교회가 세속의 홍수에 휨쓸려가지않고 방주로 남아있어 다행이다.홍천읍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심리 마을입구에서부터 교회로 올라가는 5킬로미터 가량 잘 단장된 길가에 개복숭아와 돌배가 심어져있다. 도심리 30가구 주민들이 공동으로 심어 3년 전부터 생과와 농축액으로 팔아 수익을 올리는 과실수다. 이 도심리반장이 홍동완 목사(54)다.홍 목사는 애초 아프리카 선교를 꿈꿨다. 이를 위해 먼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년간 선교훈련차 머물렀다. 그곳에서 선교사들은 하나 되기는 커녕 반복하고 갈등하고 비방했다. 옆교회에 망하든말든 오직 내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개교회주의가 치성한 교회들이 파송한 선교사들 역시 한국교회 이전투구의 압축판이었다. 같은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귀국후 선교단체에서 일하던 젊은이들과 2002년 이 산골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디선가 공동체를 한다는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장애인시설을 한다는 걸로 알고는 아예 길을 막아 차량 통행까지 막았다. 홍 목사가 주민들을 찾아가 부탁하자 반상회가 열렸다. 반상회에 가자 주민들은 그에게 장애인시설과 기도원을 하지않을 것과 환경오염을 하지않는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이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말것을 약속하라고 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사가 됐는데 말도 말라니 “하나님 어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말’에 힘을 준 약속이었다. 그는 그순간 속으로 말했다고 했다.“그래. ‘말’로 하지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삶과 행동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도심리 밭에서 더덕을 캐는 마을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는 홍동완 목사(오른쪽 두번째).
결국은 정체 드러낼 것’ 의구심그 때부터 마을의 막내인 그는 주로 노인들인 주민들의 해결사가 되었다. 힘이 필요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목사’라는 것을 내세우지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동완이’로 불렸다. 교회도 개척하지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구심은 쉽게 사그라지지않았다. 결국은 언제가 정체를 드러낼 것이라며 비방이 그치지않았다.그러나 그는 이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선행 뒤 어떤 의도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주민들을 인위적으로 교묘하게 전도할 생각을 하지않겠다는 다짐이었다.그는 그 마음으로 남이 보는데서나 보이지않은데서나 한결 같이 일했다. 부인 이은림씨(53)는 “마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안보는 처럼 행동했지만 나중에 보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주민들끼리 모여 ‘길 가운데 있던 돌 누가 치웠지?’라고 물으면 다른 주민이 ‘누가 치우긴 누가 치워 동완이 아니면 치울 사람 있어’라는 대화들이 오가며 비방이 어느 순간 칭찬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주민들은 마을총회를 열어 만장일치 박수로 그를 도심리 반장으로 뽑았다. 그 때부터 호칭도 ‘동완이’에서 ‘홍반장’으로 바뀌었다.그는 더 바빠졌다. 자식들이 있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아 생계를 잇기 어려운 할머니를 위해 치료의사들을 만나 장애등급을 받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기초생활수급을 받게 해 할머니의 그늘진 얼굴에 미소를 찾아준 것도 홍반장이었다. 비만 오면 새는 집을 위해 군청에서 컨테이너를 얻어다가 설치해준 것도 그였다. 도심리 주민들은 다 자연수를 이용하는데 모터펌프가 고장날 것에 대비해 아예 사비로 장비와 부품을 사놓고 일분대기조처럼 달려나가 해결해주는 것도 그였다.그러던 어느해 정월 대보름날 거리에 돼지머리와 시루떡과 북어와 과일들을 제사상에 올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에 주민들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에게 대표기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해와 달과 별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로 기도를 시작했다. 적막한 산골에 그의 기도가 울려퍼졌다. 그의 집 이외 주민 가운데 크리스찬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멘”하고 화답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비닐하우스를 하는 마을 어르신을 찾아 얘기를 나누는 홍동완 목사(맨 오른쪽).
“교회의 빛과 소금 되라 한 것 아니다”마을 주민의 칠순잔치에 갔을 때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주인공 할아버지가 그에게 “우리 마을에서도 낮엔 일하고 밤엔 기도하고 찬송하는 교회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술김에 한 말이려거니 했는데 그가 정말 이 마을 첫번째 세례자가 되었다. 그렇게 8년전 교회가 시작되었다.4년 전엔 그가 처음 왔을 때 예수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당시 반장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 신자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처음 홍반장을 예수쟁이라고 얼마나 비방하고 다녔는데…”라며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이렇게 크리스찬 한명 없던 마을에서 이제 주민 45명 가운데 절반이 교회에 나온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도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예배 때는 모두 교회에 모인다. 추수감사절 때는 수확물을 모두 제단에 올리고 함께 감사예배를 올린다.도심리교회는 독특한게 많다. 십일조가 없다. 또한 주일날에도 예배는 오전에 한번만 드리고 오후가 되면 지역섬김예배로 대체한다. 교회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 한집씩을 골라 농사일과 허드렛일을 집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홍 목사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지,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한게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그것이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놓기보다는 자신이 주민들을 위해 교회를 나서는 이유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교회를 개척한게 아니라 12명의 제자들과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그는 믿음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교회 위 밭 1천평에 곰취를 심어 함께 주민들과 가꾸고 있다. 곰취 판매대금은 함께 나눈다.이렇듯 나누니 도심리엔 신자와 비신자, 토박이와 귀촌자간의 갈등이나 반목은 남얘기다. 얼마전엔 화촌면 마을만들기 경진대회에서 18개리중 1위를 차지해 어르신들은 “다 도심리에 복덩어리가 굴러들어와서”라고 말한다.
도심리 가장 깊은 산골에 있는 12평 도심리교회.
“도심리에 굴러들어온 복덩이”귀촌자인 최회님씨(61)는 “나도 서울에서 통장을 해봤지만, 반장이라고 이렇게까지 주민들을 알뜰 살뜰하게 보살펴주는 분은 보다 보다 처음”이라고 했다. 남편 김병렬씨(65)는 “우리도 곧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귀띰했다.언젠가 마을 어르신이 “성직자는 원래 그렇게 화를 안내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도 속이 쌔까맣게 탄 적이 많아요”라고 답했다. 여전히 016쓰는 홍 목사의 낡은 투지폰엔 ‘절대 불노(화를 안냄)’란 글이 써있다. 그에겐 삶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수도장이다.처음올때 초등학교 1,3학년이던 두 딸도 성인이 돼 서울로 가고 이제 부부만 남은 산골에서 그들은 텔레비전도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간은 저녁을 물린뒤 7시반부터 한시간 반동안 둘이서 교회에 앉아 세상사람들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란다.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려면 물고기가 많은 큰곳에 갈 것이지 왜 이 산골에서 이러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도라는 이름의 탐욕마저 내려놓고 ‘작은 불씨’ 하나 심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긴다. 또한 이곳이 그 무엇보다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의 큰교회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인격적 교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정 수가 넘으면 관리가 되어버려. 대기업식 고객관리나 다름없게 되어버려서 뜬구름공동체가 되어버린다며 그러면 사람이 많고 프로그램과 시설과 서비스가 좋아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건강한 몸은 서로 연결돼 있어야 해요. 연결되면 얼마나 행복한 지 몰라요. 그렇게 인격적 교제가 일어나야 행복해져요. 그렇게 마을 주민들과 자연과 늘 함께 친한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세계인데 왜 행복하지않겠어요.”홍천/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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