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에서 듣는 설교
디도서에서 사도바울은 디도를 부르고 있다. 속히 니고볼리로 오라고 말이다. 갑짜기 니고볼리로 오라고 하는지도 애매한데, 설교 제목이 ‘니고볼리’로 오라고 한다. 무슨 의미일까? 왜 이 본문을 택했을까? 니고볼리는 어디이고, 왜 니고볼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일단 니고볼리는 그리스북부지역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항구도시답게 여러곳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데, 니고볼리의 성경신학적 역할은 바울의 로마전도여행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아테나와 고린도지역에서의 복음전파가 끝나고 이제 마지막으로 ‘니고볼리’에서 한계절을 지난 후에 로마로 가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니고볼리는 사실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지역이다. 니고볼리 앞바다가 그 유명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혈전을 벌인 악티움이기 때문이다.
악티움해전에서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이기게 되고 로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악티움해전 이후에 지명을 ‘니고볼리’로 바꾸게 된다. 니고볼리는 상징적으로 그리스 문명 다시 말하면 헬레니즘 문화에서 마지막 사역을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다소 다급하게 디도를 부르고 있다. 시간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디도는 니고볼리에서 겨울까지 사역을 마치고 결국은 달마디아로 갔다. 사도바울에게는 사역을 같이 하자는 제안으로서의 명령일 수도 있지만, 디도에게는 선배 사역자와 함께 실제적인 변화와 방법을 배우는 시간도 되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찬 선배 사역자와 함께 한 지역에서 같이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함께 묵상하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물론 사도바울의 성격이 그렇게 좋다고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 가운데 디도에게는 내면의 변화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더욱 강력하게 타 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인생에서 '니고볼리'와 같은 때가 있다. 무엇인가 큰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면서, 누군가에게서 온전히 배워야 하는 시간들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큰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장이 무엇보다 그 일을 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기도 한다.
사도바울에게는 디도가 얼마나 이 겨울에 성장하는가와 니고볼리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열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이 잘 여물면, 로마에서의 마지막 사역으로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바울은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디도가 달마디아로 가는 내용이 나온다. 배우고 성장한 디도는 사도바울과 같이 열정적인 사역자가 되어서 자신의 길, 그리스도가 부르신 소명의 길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니고볼리로 와라'라고 부르시는 때가 있다. 우리는 어떤때는 그 이유를 잘 모를 때도 있고, 정말 가기 싫은 때도 있고, 실제로 그 부르심을 거절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반드시 '니고볼리'로 부르시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응답할 것인지, 아니면 거절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흥정하지 않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도 그 응답에 대답한다.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은 은혜와 사명과 기쁨을 주실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매우 힘들겠지만 말이다.
찬송가 408장 '내 맘에 주 계시니'는 바이킹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켈트족 선교사들이 만든 노래이다. 복음으로 열정에 불타던 선교사들의 마음에는 평화와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도 평안이 가득했다. 어느순간이 지나면 우리의 인생은 죽음으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죽음 너머의 부활을 보느냐는 순종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과 같다.
이 다음에, 더 있다라는 믿음은 그 한계까지 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혹시나 우리 삶에 변화가 없고, 힘이 없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면 내일도 똑같은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그 미래 이후에 꿈꾸는 것들이 없거나 절망적인 경우가 많다.
켈트족 선교사들의 노래를 가슴에 세기면서 우리는 '니고볼리'로 가야 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죽을 것 같이 힘든 겨울의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떼고 시작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길을 여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큰 계획 안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역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말보다 행동하는믿음으로 이 길을 같이 걸어가자.
예수님이 오셨던 고대근동의 1세기에는 로마의 압제가 이미 몇백년을 지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한 신앙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신앙이 희미해지면 누구라도 ‘보이는 기적’을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독’은 실제로 기적을 보여줘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이상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믿음을 지켜나가기 보다는 더 큰 기적을 바라게 되어 있고, 신앙은 점점 병들어서 일상의 예배와 의식과 태도가 위선으로 떨어지게 된다. 위선으로 가득찬 인생에서는 하나님도 쉽게 문을 열고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힘들게 된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기적을 계속해서 바라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타락하고 위선적인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생각이 바뀌고, 삶을 바꾸는 내면으로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요즘도 그렇지만 내면에서부터 변화된 사람, 누군가의 압박이나 강제가 아닌 자기 안에서의 혁명을 경험한 사람은 외부의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내면으로부터 변화를 맛본 사람은 누구든지 용감하게 살았다. 로마의 압제는 더욱 심해졌으나, 성도들은 더욱 용맹해졌다. 대부분은 사자의 밥이 되었고, 창에 찔렸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불에 탔다. 하지만 그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거나 배교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더 큰 기적이 필요한게 아니라, 더 깊은 내면에서의 변화inside-out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다. 기적을 중심에 놓는 신앙은 오병이어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 위대함을 이야기하지만, 내면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오병이어가 가지고 있는 상징과 의미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물고기와 빵의 상징은 실제로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금액이 필요한 상황에서의 모든 사람들을 먹였던 것이지만, 이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은 ‘나눔’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나누었다. 자원의 부족함들은 때론 계층을 만들고, 더 중요한 사람들만 혜택?을 입게하는 나쁜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 구조 가운데서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보다는 ‘어떤 경주에서 승리한 사람’들만 중요하게 되는, 그러니까 이긴사람이나 지는 사람이나 모두가 소중한 존재는 아닌 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축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신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오병이어라도 모든 사람이 능히 먹고 마시는 변화multiply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주면 받는다. 받으면 준다.라는 단순한 공유와 나눔 사이에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넘어서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살아가면서 느끼고 결단해야 하는 인간성으로 접근한다. 오병이어와 다음에 나오는 물고기를 잡는 부분은 예수님의 축복이 오히려 이전에, 베드로와 함께 잡았던 물고기를 생각나게 한다.
베드로를 만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비유를 전하고서는 베드로의 배의 타셨다. 밤이 맞도록 물고기를 하나도 잡지못했던 베드로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깊은 곳으로 갔다.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게되었다. 이것을 기적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예수님의 태도와 방법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보통 베드로물고기Peter's Fish라고 부르는 민물고기는 한국에서는 달고기로 분류된다. 민물에서 살기는 하지만 수심이 깊은 곳에서 살고 주행성이다. 물고기들도 잠을 자고 활동하는 시간대가 있다. 만약 달고기를 잡으려면 수심이 깊은 곳에서, 낮에 잡아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곳으로 가라고 하면서 그물을 내리라고 한다. 낮에 달고기가 많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던 베드로의 순종은 사실 예수님이 명령한 것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우리가 먼저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있다. 특히 자연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작은 정보만 알고 있다. 개체적 특성으만 봐도, 미시적관점이나 거시적 관점으로만 봐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만드신 분이다. 예수님은 기적에 사람들이, 베드로가 복종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이 되도록 가르쳐준 것이다. '생각이 결과를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바뀌는 것은 이번 경우에는 믿음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결과를 얻고 이것이 다시 생각을 바꾸고 삶의 질서까지 바꾸는 것을 볼 수 있다.
깊은 곳에 사는 주행성의 달고기, 베드로 고기를 잡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는 예수님과 베드로이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개발사역자들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의 길은, 예수님의 방법은, 예수님의 태도는 어땠었나? 오늘 설교의 마지막으로 간다.
실제적이면서, 지속가능하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계속 풍성하게 주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다 한다. 그리고 더 있는 자는 더 나누고, 더 가진 자는 더 나누라는 명령을 하신다.
우리의 변화는 예수님이 하시는 방법과 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inside-out'이면서 'upside-down'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이 변화는 결국 우리의 행동과 삶의 모습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더욱 주시고, 섬기시고, 알려주시고, 봄을 보이신다. 최소한의 기적들을 사용하시면서(물론 아직도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징인지, 과학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해석학의 영역은 온전히 신학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모든 삶의 분야에서 일어나는 총체적인 변화였으면서도, 인간의 영과 육과 생각까지 확대되는 전인적인 사역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개인의 변화가 모두 통환되는 통전적인 사역이었다.
기독교는 세상을 만들어가는wold-formative 종교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곳에서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변화시켜가고transform 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우리의 삶도 계속해서 변화를 이끌어 간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던unformed 곳에서 형태를 만드시고deform, 잘못된 것을 바꾸셔서reform 결국은 우리가 세상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형태의 변화transform를 일으키신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그 많던 고기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제 잡았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낚였던 물고기가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동일한 은혜와, 동일한 만남으로 항상 채우시고 또한 나누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만들어가면서 이웃과 함께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 삶으로 우리는 지금도 초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