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첫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를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이룬 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낸 것이라면
당연히 그 공로를 인정받았을 거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하시는
일에 뛰어 들었다
그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바로 서려고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 세워주실 것을 신뢰했다
영성이라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경험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지성이 한 몸 안에서
실현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신뢰에서 영성은 시작된다
그럴려면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이 일상에서 걸어다니고
이야기하고 대화한다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저 위의 어떤 우주 공간으로 놓게 되면
당연히 지금 여기 이 지구의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보고는 있지만
직접 개입을 하거나 혹은 함께 호흡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친구는 아니게 된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으로 본다면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안계시니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게 된다
이 애매한 연결관계가 우리를 이원론으로
데리고 간다,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으로.
인간의 일생은 대부분
두려움과 사랑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이 궤적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삶 속에서는 위선이나 거만이나 허세가
혹은 두려움 근처에 야비함과
젠체와 인색함이 도사리고
결국은 하나님과 멀어지면서도
천국은 가고 싶은
그러니깐 주인은 만나기 싫지만
주인이 사는 집에는 들어가고 싶은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오시는게
엄청 부담이 되고 힘들어진다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선택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맞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기에.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몰아내고 헤롯을 왕으로 삼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은 시작된다
나에 어떠함으로 부터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높은 산도 넘어갈 수 있고
깊은 바다도 건널 수 있다
할 수 없고 있음이 나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또 모든 이들에게도 주시는 은혜의 한 가운데서
사랑으로 이끄시는 계획인지
그 뜻에 맞는지가 마음 속에 저울이 된다
이런 게 바로 영성이다
기도를 많이 하는 기도의 용사만이 아니라
헌금을 많이 내며
장로라고 뽐내는 인생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한땀한땀 하나님과 만나는
또 따로 또 함께 걷는 것이 영성이다
역사적으로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이 걸음을 걸었다
이 길을 걷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늘도
그 조그마한 오솔길이 열려져 있다
나는 오늘도 타박타박
어린이 같이 아장아장 그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