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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5. 2020

로완윌리엄스_성경

로완윌리엄스_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2장



성경에서는 유비가 중요하다


성경에서 불완전하나 중요한 유비를 하나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실 때 그저 율법만을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분은 날카롭고 극적인 작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는데, 그 이야기들을 들려 주는데, 그 이야기들을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일은 여러분의 몫입니다...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 이야기에서 너는 누구냐?"입니다. 여러분은 집으로 돌아온 탕자입니까, 아니면 언짢은 채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며 문간에 팔짱끼고 서 있는 맏아들입니까?"_p53


유진피터슨의 '비유로 말하라'의 영어 제목은 tell it slant이다. 비껴서 말하기 말이다. 예수님의 언어는 이렇게 파라클레오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다. 내러티브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들은 이것들을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거대한 계획을 거대한 언어의 구조 속에서 보라는 명령이다. 유비로 말하면서 우리는 언어를 넘어서서 삶 속에서 다양하게 다가오는 현실을 감싸안는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일획일점도 사라지면 안되지만, 그것을 오늘도 동일하게 적용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의 의도이고, 이 의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전체로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은, 존재론적 질문을 해야 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


이야기 전체는 영향을 끼치도록 의도된 점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러분을 끌어 들여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여러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말한 모든 것을 예수께서 인정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이 어찌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불의한 재판관이라든가 자기 왕국으로 돌아와 원수들을 살육한 폭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줄 때, 그런 일은 해도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그 분은 그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결론 부분에서 여러분에게 너는 어느 쪽이며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_p54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아무리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하더라도 등장인물이 있고 그 인물들 사이에서 사건과 시간에 따른 추이가 있다. 성경은 66권이 하나로 묶여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의도한 바에 따라서 구성과 중요점, 이야기의 빠르기와 흐름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많은 시간, 하나님의 의도보다는 우리의 의도를 강조하면서 살아왔다. 우리가 살아가고있는 이 시대는 '자유의지'가 충만한 시대이다. 우리의 자유가 완전한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능동성의 충족은 곧 자신이 만들어낸 의도를 충실하게 프로젝트로 반영하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래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읽기와 적용은 매우 시간이 짧다. 읽는데도 짧고 적용하는 데도 짧다. 마치 인스턴트와 같이. 그렇기 때문에 인생 전체를, 역사 전체를, 성경 전체를 읽고 고민하고 비유를 풀어보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안하게 된다.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속에서도 그렇다. 성경 안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점점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블랙홀처럼 깊이 수~욱 내려간다. 그러므로 너무 세부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오히려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자신이 필요한 것들만 취하고서 나머지는 버리는 인스턴트시대와 같다. 그러므로,


세부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도움이 안됩니다



커다란 비극


지금껏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여 온 방식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오류이자 비극 가운데 하나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이 저지른 일을 "성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옳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런 가정 위에서 폭력과 노예제도, 여성 억압과 학대, 동성애에 대한 심각한 편견이 정당화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악이라고 간주해야만 하는 일까지도 정당화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이 "좋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체 이야기에서 별것 아닌 작은 부분을 뽑아 그것을 우리 행동을 인도하는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그런 잘못된 길로 빠졌으며 그 모임이 썩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을 예수에 관한 비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_p57


우상숭배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가 '만들어낸 신'을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자기 자신에게 절하면서 왕노릇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이들에게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는 '정죄와 단죄와 악함을 정당화함과 자기합리화와 무지'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드는 듯한 사람들은 모두 악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 모든 것들은 사실 하나의 전제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이다.


그 진리는 성경 자체이고 그 성경에 대한 해석의 자유함은 오로지 자신들만 가진 채로, 그대로 적용하고자 하면서 부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로완윌리엄스는 이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전체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어떤 의도를 파악할 것인가? 그리고 남의 죄와 문제가 드러나기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다.


성경 전체는 여러분 자신을 새롭고 좀 더 바르게 보게 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초청이요, 선물이자 도전입니다.



중심이신 그리스도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응답하는 인간의 일ㅇ르 기록한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의 중심 사실을 축으로 삼습니다. 그 중심이 되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순종과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보게 됩니다. 여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이 참으로 흠 없고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따라서 그런 응답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행위를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응답이 완전히 조화되는 것을 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인간의 응답을 기록한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 선명한 중심인 예수의 이야기를 기준ㅇ로 삼아 나머지 이야기들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살다가 죽었고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 여러분의 교회에 성령을 불어 넣으신 예수, 바로 그 분에 비추어서 여러분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읽습니다_p64


구약은 가운데로 모이는 구심력이었다면 그 구심력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포함해서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이야기'라는 정체성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신약은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된 땅의 공간에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시간과 공간을 봉합하고 실제로 그 나라를 열어가심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에덴을 열어가는 원심력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서 제자 삼아라!라고 하시면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지키게 하고 길과 진리이고 생명이 되는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간다. 우리는 구약의 방식으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로 모여진 이야기가 이제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나의 내면에서 다시 세상으로 확장해가는 그리스도의 삶, 하나님의 나라가 침노해나가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읽습니다



호세아와 예후_충격적인 반전


엄청난 대량학살을 저지른 극악한 예후는 아합 왕과 이세벨의 가족과 친척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거의 다 처단합니다. 심지어 그는 이 일을 하도록 예언자 엘리사에게 기름부음을 받기까지 합니다.

마구잡이 살육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분명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이 그 문제를 인식하는 데는 20세기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시대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약자 호세아의 책에 따르면 그로부터 몇 세대 후 이스라엘의 한 예안자가 바로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이스르엘의 한 예언자가 바로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이스르엘은 승리가 아니라 역사의 수치를 담고 있는 이름이요 또 예후의 잔인한 행위는 벌을 받아 마땅한다고 말한느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호 1:4)

무슨 일인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관점이 변하였습니다. 만일 호세아에게 당신이 말한 게 무슨뜻이냐고 물어본다면, 그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선배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것이라고 절대 확신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아합 왕 집안의 학정과 우상숭배는 폐지되어야 마땅한 불행이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는 일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신실하게 저항하라고 말씀하신 게 분명 한데도 사람들은 그 말씀을 변개하여 인간이 저지른 더 혹독한 폭력과 학정을 변명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려 마땅하다"_p67


충격적이다. 예후의 살육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이야기였고, 하나님은 도살하고 살인을 마구 저지르는 무서운 신이었는데, 신약에서 돌연 사이코패스처럼 변해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라고 하는 스토리가 너무 자주 있었기 때문다. 그런데 구약에서 구약을 다시 해석하는 호세아(예수님과 이름과 뜻이 똑같은) 선지자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선지자가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로, 자신의 욕심을 그대로 역사에 투영해버리는 짓?을 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것을 듣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물어보지 않고 하는 기도는 항상 빠른 속도로, 큰소리로 하는 경향이 많은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나 부터 되짚어 보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만물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시고 날마다 창조를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만들어내는 수 많은 문제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 구불구불한 길에 직선을 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본다.





민네이션 생각


그리스도인과 그리스인


그리스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와 같이 분석적이고 철학적이면서 과학적인 방식으로 분할과 연결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핵심은 자기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그리스도가 왜 이 길을 갔는지, 왜 이 길에서 고민하면서 사람들을 만났는지, 그리스도의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영역이 모든 영역이 아닌게 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의도'


구약과 신약에 대해서 '의도'의 관점에서보면 하나님의 의도는 확실하다.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는 구약의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여러가지의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도 있지만 구약의 의도는 '그럼에도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의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다.


고고학과 계보학


고고학과 계보학은 각각의 의도가 다르다. 고고학은 과거에 실제로 그 사건과 사람들이 존재했는가?를 본다면 계보학은 정말로 이 사람이 그 아버지, 그 민족, 그 국가에서 태어나고 그 혈통이 이어지고 있는가?에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구약은 계보학적으로 읽고 신약은 고고학적으로 일거양 하는가? 아니면 반대가 되어야 하는가?



의미와 무의미


인간에게 의미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무의미라는 것은 무엇인가?는 매우 쉬운일이 된다. 인간은 부정적인 것이 더 많은 일상을 살아갈 경우 부정형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쉬운 법이다. 다시 말하면, 무의미한 것들이 축제를 열고 그 축제가 마치 나를 감싸주는 것 같은 기분을 잠시 느끼게 할 지라도 그거 축제는 결국은 무의미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의미있는 것들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에게 무의미한 것들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조용히 눈을 감고 나에게 던져 본다. 나에게 무의미한 것들은 무엇인가? 그 무의미의 축제 속에서 나는 흥겨워 하고 있지만 사실은 도착한 지점에서 회상하고 있는 과거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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