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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r 08. 2020

스탠리하우어워스 _교회됨 강독

김동춘 교수님과 함께하는 '나우비전' 독서모임



0. 들어가기


<오늘 책읽기-스탠리 하우어워스>


1). 4장 교회로 교회되게 하라 (148-174)

이 챕터는 “교회의 내적 본질”을 말하기 보다 <교회가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에 함몰되지 않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현실정치보다는 "교회의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152). 그리고 교회는 교회 자신의 이야기, 즉 “덕의 윤리”를 배워야 하며, “덕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200308진행)


2). part II. 복음을 성품화하라 (177-292)

이 파트 전체는 교회가 <덕의 윤리>, <성품윤리>를 체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그야말로 이 책의 중심 내용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내러티브> 주제가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으니, 추가 설명 할 예정입니다. 우리가 이 파트를 제대로 읽는다면, 적어도 이 책을 제대로 독파한 셈이 됩니다.


이 파트의 전체 기저에는 <세상과 교회는 같은 것일 수 없다-교회와 세상은 전혀 다르다>, <세상은 교회일 수 없고, 교회는 세상이 아니다>(213)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의 논지의 전제에 대한 동의와 함께 반론과 문제제기가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꼭 꼭 씹어서 생각하면서 읽고 오세요!


https://brunch.co.kr/@minnation/1676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정 및 방식이 다소 변경되었다!





사회를 바꾸라?_교회됨이란 무엇인가?


세속적인 방식에 맞는 세속적인 교회가 필요한 것인가? 스텐리하우어워스가 말하는 변화에 대한 관점은 다소 '변혁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세속적인 context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자신의 text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상황화'하는 것은 상황자체에 매몰되어 버리는 한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스탠리하우어워스는 '교회됨'을 강조한다. 오히려 교회가 교회자체로 그 본질을 존재론적으로 지킬 때 세속적인 방식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바꾸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셜가스펠이라는 이름으로 '1) 월터 라우센부시 2) 라인홀트 리부어 3) 마틴루터 킹'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셜가스펠은 흔히 '사회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스탠리하우어워스의 '교회됨' 담론을 알아보기 위해서 한명씩 알아보는 시간을 갖다.


1) 월터 라우센부쉬


"예수님이 가르친 모든 것의 요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것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누구든 복음을 통하여 한번 이것을 알게 되면 다시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독일인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라우센부쉬는 1861년 뉴욕 로체스터에서 부터 시작해서 미국 전역에 만연해 있는 경건주의 신앙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속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기독교인의 자세에 대해서 설파한다. 특히 '하나님나라'에 근거한 예수님의 활동들은 실제적인 지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제는 이 사회는 이미 악의 구조, 악의 왕국이라는 것이며, 결국은 이 악의 왕국에서 처절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이 있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된다'라는 것처럼, 라우센부쉬의 방법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 스탠리하우어워스는 질문을 던진다.


2) 라인홀트 리부어


라인홀트니부어는 리차드니부어의 동생이면서 '도덕적인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를 펴냈다. 비록 개인이 선할지라도 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이 모이면 악해진다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악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기독교는 구조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사회악의 박멸을 위한 노력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인홀트리부어의 비판과 대안도 스탠리하우어워스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 저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3) 스탠리하우어워스의 비판


그러나 스텐리하우워어스는 이 두사람을 분석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변화되지 않았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기독교인이라면 사회에 나가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은 구호로는 좋으나 실재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스탠리하우어워스는 오히려 '교회 자체가 정치이다'라고 말하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판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회를 변화시켜야 겠다는 '정의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세속적인 방식으로는 힘들다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세속정치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도덕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정치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며, 이에 대한 교회의 책임은 교회 내의 정치를 제대로 이루는 것이다.



미국사회는 결함 투성이다.(솔제니친) 스탠리하우어워스스는 정치의 속성에 대해서 도덕성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덕을 상실한 후 실행되는 정치'는 매킨타이어의 지적처럼 시작부터 끝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덕을 회복할 수 있는 집단은 바로 '교회'이며, 교회가 덕을 회복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고, 이러한 덕이 회복된 정치적 교회의 존재는 사회 내에서 도덕을 부활시킨다는 것이다. '선'에 대한 지향은 '덕'을 회복한 후에야 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선한 사회가 되는 것은 결국 덕을 기반으로 해야하고, 덕의 회복은 교호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은 '선' 자체에 대한 '악'의 존재를 비판한다. 아니 오히려, 선악관념을 인간에게, 사회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악' 자체에 대한 경과는 사회자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미래전망 자체가 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이다.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선'의 상실은 '덕'의 상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덕' 자체도 '자유'라는 관점에서보면 타당하게 없어지는 혹은 판단을 유보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시작되는 공동체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인하는 '성품윤리'의 탄생이다. 아니 탄생이라기 보다는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선한 개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그러한 선한 개인이 공동체로 만들어지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인 것이다.


구조를 바꾸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구조가 바뀐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바뀔 것이라고 하는 구조주의적 방식은 옳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개인의 성품이 바뀌었을 때 비로소 공동체가, 사회가, 구조가 바뀔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우워어스의 논지이다.




민네이션 질문


1. 하우어워스는 '덕 이후'에서 가지고온 '덕'의 정치를 교회가 회복함으로써 '덕'이 전제된 '선'의 목표로 정치가 회복된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 질문은, 과연 덕의 생성이 단지 교회에서만인가? 아니면 다른 종교에서도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하우워어스가 말하는 '도덕'의 차원은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인가? 그 깊이에 있어서 인식론인가 존재론인가? 존재론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존재론에서 나오는 '덕'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답변

1. 덕의 정치는 교회안에서의 덕인가? 아니면 타종교까지인가? 하우어워스는 아무리도 <교회론적 덕 윤리, 혹은 성품윤리>를 강조하는 학자입니다. 그는 교회가 망각해 왔던 우리 자신의 고유의 윤리인 성경의 이야기(내러티브)로부터 생성된 덕윤리를 재발견하자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동안 기독교사회윤리, 그러니까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은 너무 시민종교적인 방식이었으며, 특히 자유주의적(자유민주주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적 기반위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하우어워스에게는 이 덕의 윤리가 타종교에서도 가능한가? 이런 질문 자체를 거의 던지지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 우선 교회의 윤리적 기반이 지금 붕괴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다른 종교에서의 가능성을 이야기 할 여유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북미신학자들가운데 기독교 윤리를 전개하면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처음부터 문을 열어 놓고 진행하는 학자를 그리 많이 보지는 못햇습니다.   

하우어워스의 도덕론은 인식론보다는 존재론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존재윤리가 그의 기독교윤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덕윤리가 "인식론"이냐 "존재론"이냐, 이 질문은 "도덕철학"에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지는 좀 더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네요.    


2. '하나님의 형성'이 창세기 3장 이후에 파괴되었는데 이것이 부분타락인가, 아니면 전적 타락인가? 이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교회가 '덕을 회복하는 공동체로써 정치적인 존재'라는 것도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스탠리하어워스가 말하는 '도덕'에 대한 정의definition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답변

2.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상'은 부분 타락인가, 전적 타락인가? 글쎄요. 하우어워스는 죄론에서 다루어지는 <타락의 범위>에 대해 정확하게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는 아직 제가 확인된 바가 없네요. 참고로, 1). 루터교의 타락론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 타락했다 - 타락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마귀의 형상>이 되었다. 2). 가톨릭교회는 타락했지만 하나님을 알만한 것까지,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할 능력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다. 타락의 정도와 범위를 부분 타락으로 본다고 봐야 합니다. 3). 개혁교회(칼빈 전통)는 인간은 전적 타락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다. 일반은총의 효과로 인해 도덕성과 신인식 능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하우어워스는 성공회 교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는 <후기자유주의 신학 post-liberalism)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극렬하게 강조하는 신학자이지는 않다고 봅니다.    

2번 질문의 두번 째 항목은 <인간 타락의 정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교회가 덕 윤리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느냐>라는 해답이 얻어질 수 있을 것같다 라는 질문으로 해석하겠습니다.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덕 윤리, 성품윤리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을 뿐, (즉 성품의 회복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교리적인 방법에 대해서는(신의 형성 회복의 방식).... 글쎄요, 앞으로 더 살펴 보아야 할 과제인 듯 싶어요. 아마도 하나님 형상회복은 일반적으로 말하듯 성령의 작용(역사)에 의한 인간의 책임적 참여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텐데, 여기서 보수주의 신학은 성령의 절대적인 작용을 상당 부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면, 진보적인 신학은 그것을 인간의 책임적인 역할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자들중 <안토니 후쿠마> 같은 신학자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work)와 신자의 능동적인 참여,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책임의 결합으로 신적 형상회복이 "점진적이며",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한국교회 목회자중에 성화론 (결국 이것이 하나님 형상 회복의 문제이지요)을 강조하는 분은 박oo목사와 김oo 목사이고, 그 후계자 격이 화oo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 분들의 문제는 첫째, 성화론을 너무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부분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분들이 장로교 목사님들이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장로교 신학은 칼빈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화의 문제를 지나치게 개인적인 성화로 보고 사회적 성화, 정치적 성화, 문화적 성화의 차원까지 확장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장로교라 하더라도, 이 성화론을 네덜란드의 신칼빈주의 전통에서 가져 왔더라면, 그런 사회변혁적 성화론을 말할 수 있었을텐데,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평소에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니, 그런 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부탁이지요. 그런데 그래도 박영선목사님은 이 분들가운데 상당히 열린 관점을 표명하곤 합니다.  



3. 스탠리하우어워스어스가 비판하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가치 자체로 보면 '자유'와 '형평을 전제로 한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실 이 지점에서 비판받는 부분이 별로 없다. 오히려 미국식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하우어워스의 비판의 핵심이 아닌가? 그렇게 보면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맘몬'의 지배가 일어나고 있는가? 이렇게 보면 교회됨은 '정치의 회복, 덕의 회복'이 아니라 맘몬으로부터 하나님나라의 경제질서 자체를 지키는 존재가 더 적절하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을 독립변수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3번 질문을 다시 요약한다면, 하우어워스가 비판하는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도덕적 자유주의에 촛점을 두는데, 왜 경제적 불평등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지... 좋은 지적입니다. 맘몬으로부터 해방하는(자유케하는) 하나님나라의 경제질서를 수립해 가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적 경제 이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럼, 왜 하우어워스에게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가? 제 생각으로는 1).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윤리의 출발점은 가난, 인종차별, 환경위기와 같은 상황적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됨, 이 책 뒷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 그의 윤리적 주제는 가정, 성, 동성애와 같은 가정윤리적 범주에서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사회(구조)윤리"보다는 "성품윤리", "덕윤리"를 강조하는 학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필연적 결과가 아릴런지 생각도 됩니다. 2). 하우어워스의 윤리의 철학적 기반은 알리스더 매킨타이어이지, 칼 막스가 아니라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의 신학적 관심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문제를 염두에 두는 그런 의미의 "정치_경제적"이라기 보다, 교회의  정치, 혹은 교회의 정치적 본래성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교회의 정치", 혹은 <교회는 정치적이다>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정치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권력질서의 재편이라든가, 정치권력의 획득과 같은 의미의 협의적 정치가 아니라 광의의 정치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우어워스식의 윤리가 사회변화에 미칠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직접적인 변화를 꾀하는 기독교나 신학운동 역시 결과적으로 본다면, 과연 효과적인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이른바 이 세상의 (자본주의적 탐욕의) 경제질서와 구별된 대안적 사회로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해 나간다면, 이 방식이 미칠 영향력도 매우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우어워스가 비록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대한 직접적 비판과 혁신의 신학적 윤리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그가 말한 이 세상의 자유주의적 사회질서를 거스르는 <덕의 공동체>라는 명제를 경제학적으로 연결한다면, 얼마든지 폭발력있는 교회론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못지 않게, 우리의 삶의 방식안에 깊숙히 자리잡은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길들여 있으면서, "과잉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는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도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 점을 하우어워스가 재세레파 처럼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부자들의 탐욕과 그 경제질서를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질서안에서 익숙하게 살아가는 소비주의라는 반신앙적 정신(spirit)을 비판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을 하우어워스 신학이 보유하고 있는 윤리적 장점입니다.


4. '악에 관하여',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이 오히려 세속적인 가치로 스탠리하우어워스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말은 없음에 대해서 '있음'이라는 방식으로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은 '윤리'는 삶으로 설득할 수 있으니 '진리'는 선포(케리그마)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진리의 차원에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설득'이라는 차원에서 진리의 방식은 아니지 않는가?


4번의 질문에서 첫 두 줄 문장은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우어워스는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을 아마도 악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문장은 질문하신 분 나름의 생각이 전제가 깔려 있어서 그런지 선듯 다가오지 않는군요. 시간 되실 때, 이 질문은 다시 풀어서 주시든지, 편안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하시지요.   






참고 1. 월터 라우센부쉬


사회복음은 구원의 오래된 메시지이지만, 널리 알려지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주의적 복음은 우리에게 죄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을 깨닫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넘쳐나는 사회구조의 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출처 : NEWS M(http://www.newsm.com)



미국 침례교 목사. 신학교수. 사회개혁가, 사회복음운동의 지도자. 부친은 독일에서 파송된 루터교 선교사였다. 1886년 뉴욕시에 있는 독일 침례교외의 목사가 되었다. 이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공장직공들과 그들의 가족이었다. 그는 온갖 사회악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사회개혁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1902년 로체스터신학교의 교회사 교수가 되었다. 당시의 교회는 개인의 구원문제에만 몰두한 나머지 오직 개인의 정신영역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우센부쉬는 정치적 혼란, 경제적 부정, 사회악의 만연 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기독교의 복음을 사회에 적용시켜 사회구원을 성취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자기의 종교사상과 사회사상을 동시에 관계지어 연구했다. 그의 주제는 "기독교의 근본 목표, 즉 모든 인간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재조정하고 재생시켜 인간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하려고 권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신학자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리츨 그리고 하르낙이었다. 그는 사회의 공동책임 또는 사회의 연대성을 강조했다. 그는 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구원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사회조직을 기독교적인 사회질서로 바꾸어야 하는 동시에, 산업의 민주화가 실현되지 않고서는 사회 안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민주화되지 않은 정치적 민주주의는 부도수표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적 사회질서는 노동계층의 보호와 사회정의의 기독교적 실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에 저술한 (사회복음의 신학) ( A Theology for the Social Gaspel)에서 이러한 제반 문제들을 조직신학적으로 해설해 놓았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57




참고 2. 알레스데어 메킨타이어




1929년 스코틀랜드에서 출생. 1945년 런던 대학교 퀸 메리 컬리지에 입학하여 1949년 고전학 학사를 시작으로 맨체스터 대학교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연구했다.[1] 그 이후 1951년부터 맨체스터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1969년 브랜다이스 대학교를 시작으로 수많은 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현재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재직중이고 노트르담 대학교[2]에서 선임 교수로 재직중이나 수업은 진행하지 않는 것 같다. 대표작으로는 <덕의 상실>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이고, 누군가의 사촌 또는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 또는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동업조합 또는 저 직업집단의 구성원이다. 나는 이 씨족에 속하고, 저 부족에 속하며, 이 민족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것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누구에게나 좋아야 한다. 이러한 역할의 담지자로서, 나는 나의 가족, 나의 도시, 나의 부족, 나의 민족으로부터 다양한 부채와 유산, 정당한 기대와 책무들을 물려받는다. 그것들은 나의 삶의 주어진 사실과 나의 도덕적 출발점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삶에 그 나름의 도덕적 특수성을 부분적으로 제공한다."


이 긴 인용문이 그의 사상을 요약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인용문과 같이 그는 공동체를 개인의 분명한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그에게 개인은 공동체가 지금까지 써온 이야기를 이어쓰는 서술자인 동시에 공동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틀 안에서 연기하는 연기자이다. 자연스럽게 개인은 공동체가 지금까지 유지해온 도덕적 틀, 덕목들을 지킴과 동시에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이것이 공동체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서사를 계속 써야하는 책무를 가진다. 이와 같은 구조로 공동체주의와 덕윤리 모두를 포괄하는 큰 철학적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그는 절대 공동체가 가져온 것을 '군말말고 따라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용문 이후 부분에서 그는 나쁜 것은 계속해서 바꿔가야 하며,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써내려가는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개인이 공동체에 어느 정도 갇혀있다고 보는 이상 다른 서양의 개인주의적 사상들에 비해 바꿔나가기 어렵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이 골자를 완성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부터 신약 성서, 제인 오스틴 등등 수많은 도덕 개념을 정리하여 덕을 정립하는 대규모 작업을 거친다. 매킨타이어가 중요하게 제시하는 덕목 3가지는 정의, 용기, 정직 3가지이다. 어떻게보면 위의 설명과 동떨어져 있는 내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렇게 덕 개념을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덕이 공동체가 만들어온 서사 위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논증해내기 때문에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이상 나무위키에서 발췌했습니다.)







참고 3. 최종원_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로



콘텍스트를 통해 텍스트 읽기


1. ‘텍스트’에 갇힌 교회


제도(권) 교회를 공부하는 제 고민의 출발점은 수많이 제기되는 새 관점이나 새로운 신학적 사유들과, 오늘 21세기 한국교회라는 제도 교회의 상황 사이 연결성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재 제도 교회의 관심은 경전 텍스트의 정합성을 찾고 오늘 따를 신조를 확인하는 내부적인 것으로 제한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종교개혁가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그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제도 교회라는 치열한 현장, 즉 콘텍스트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립되는 이들은 상아탑 속에 갇혀 있던 스콜라 신학자들이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나 교회 타락이 성경을 떠나서 생겨난 것이기에 다시 성경의 가르침을 붙들자고 했다는 식의 단순한 도식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 속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가톨릭 구조에 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콘텍스트의 변화에 따라 텍스트를 해석하는 최종 권한을 더 이상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성서 시대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수용하고 지키자는 의미를 넘어 중세의 질서와 결별하고 새로운 종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새 종교, 새 구조를 만들자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순서는 오늘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이 사회와 문화, 공동체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명제는 실은 당시 면죄부로 대표되는 (종교적 구원조차도 물질로 획득할 수 있다는) 타락한 욕망을 간파하여 자신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절대적인 신의 은총을 갈구한 것이며, 성경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 은총,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조차도 왜곡될 소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의 교회 현실은 ‘오직 성경, 오직 은총’이 이 땅의 이웃과 주변의 고통과 아픔을 효과적으로, 또는 정당하게 비껴가기 위한 도구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성경을 붙들어야 한다든가, 우리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하니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끓어야 한다든가 하는 식의 표현들은, 우리 내면에 자리한 타자를 외면하는 불편함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화는 기제로 종종 활용됩니다. 즉 성경이 우리 주변의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할 근거로 오용되곤 하는 것입니다.


2. 콘텍스트를 통해 텍스트 읽기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들은 자칫 우리에게 돌아갈, 회복할 가시적인 원형이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는 ‘당위의 전쟁’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에 이러이러하게 표현되어 있으니까, 성소수자들은 혐오해도 돼.” “성경에 이러이러하게 나와 있으니까 지도자가 어떤 수준의 사람이건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에 순종해야 해.”

이렇듯 우리가 주장하는 당위를 지지할 근거를 성경 텍스트에서 끌어옵니다. 그런데 성경 텍스트에서 답을 찾는 일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콘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당위와 교조적인 시각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동의하건 하지 않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당위와 규범적 주장에 이의를 제기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천착한다면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토대인 콘텍스트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해석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이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삼은 규범적 언설은 동성애에 관해서건, 예멘 난민 혹은 이슬람에 관해서건,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위를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합의된 고민을 바탕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돌아가야 할 권위이지 출발점은 아닙니다. 성경의 존재 자체가 그저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또 선포한다고 하여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권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를 해석하고 분석한 후에 그것을 최종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권위와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과 제도 교회의 역사는 헌법과 법원 판례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판례는 끊임없이 콘텍스트에 부합되게 조정됩니다. 한 20년 전의 동성동본 혼인에 대한 수용, 한 10년 전 호주제에 대한 판단, 그리고 얼마 전 대체복무제 허용 판결 등은 여전히 헌법의 권위 내에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첨예한 이슈에 대해 전향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급심 판례에서 무죄가 계속 나왔기 때문입니다. 대체복무제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성경이 무오하며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을 하려면, 우리 믿음에 반하는 사회 변화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고, 문자적으로 성경을 붙들기보다는, 시대 변화와 과학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의 가르침이 충족성을 지니고 있음을 믿고 적극적으로 그 변화를 담보해 낼 가치를 성경에서 찾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날 숱하게 쏟아지는 신학적, 목회적 논의에도 한국교회 현실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는 듯한 불균형의 핵심은, 신학과 목회가 텍스트에 몰두하는 만큼 그 텍스트가 구현되는 현실에 밀접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텍스트가 텍스트답게 되기 위해서는 콘텍스트 속에서 정합성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네 교회 현실을 우리네 시각과 방식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 천 년의 가톨릭은 대중 종교라고 불립니다. 얼핏 성직자들이 중심이 된 엘리트 종교로 지배한 것 같으나 교회는 끊임없이 대중의 필요와 종교적 열망에 반응하여 변천을 거듭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종교개혁은 엘리트 종교가 대중들과 분리된 결과로 일어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스콜라 신학이라고 불리는 상아탑 신학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의 고민과 문제에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루터, 츠빙글리, 칼뱅의 종교개혁은 이런 시민 대중의 욕구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그들 학문의 출발점은 대학에서 라틴어로 가르치는 스콜라학이 아니라, 성직자들이 속되다며 ‘속어’라고 부른 대중들의 언어로 하는 인문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종교개혁은 신학이 가장 발전했던 파리대학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학들의 풍토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 대학들은 종교개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박했습니다. 중세 말 종교개혁은 스콜라학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신학이 제기한 논쟁이 현실의 문제에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3. 세계종교가 된 비결: 기독교의 가치가 사회의 보편 가치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소개되고 연구되는 신학 담론 속에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당위’를 찾아가려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답’을 찾는 것이 우리 신앙과 삶과 공부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 공부란 콘텍스트에 대한 고민으로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담백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해야 할 고민은 이처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여전히 정합성을 유지하며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질적이고 낯선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열린 만남을 시도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엄밀하게는 성서의 이상이 구현된 기록이기보다는 교회와 세상의 상호작용의 기록입니다. 그 상호작용의 적실성을 유지할 때 교회는 존속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초대교회의 콘텍스트를 얘기할 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이 두 사상의 충돌과 결합을 얘기합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다른 시각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헬레니즘은 우월한 헬라 문화를 기반으로 그렇지 못한 것을 야만으로 치부하는 ‘문화적 인종주의’였으며, 헤브라이즘은 선택 받은 유대민족 외의 모든 혈통은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혈통적 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토대에서 기독교가 태동한 것은 분명하지만, 갈릴리 변방에서 출발한 이 흐름이 거대한 양대 흐름을 넘어갈 수 있었던 건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당연시 되던 그 시대 정서 속에서 기독교는 출신 배경이나 혈통을 넘어선 보편의 인간애를 추구했습니다. 영아 살해, 특히 여아 살해가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로마 사회에서 그 악습이 폐기된 것도, 노예제가 폐기된 것도, 차별 없는 이 복음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특수해 보이는 그들의 인간에 대한 가치가 보편적인 신적 가치의 반영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초월성이 사회 속으로 내재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규범과 당위로서 확장된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일반적인 인간관(남성·성인·자유민만 인간으로 규정하는)을 뒤집은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근원은 무엇일까요? 복음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믿음일까요? 오히려 그보다는 복음에서 제기하는 인간관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인간의 보편 가치를 반영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노예와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 숫자에 들지 못하는 것이 보편이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친교를 나누는 밥상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특수해 보이지만, 시대가 지향해야 할 보편의 가치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핍박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향하는 대상은 타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유대인의 혈통적 배타성뿐 아니라, 헬라의 문화적 배타성까지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성의 구조에 편입되고자 했다면 다른 여타 식민지의 종교들처럼 존중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당한 핍박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고 다녔기 때문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체계가 헬라의 통념을 넘어서는 급진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은, 특수해 보이는 기독교의 가치가 사회의 보편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유대교와 헬라의 인종주의가 두려워 빗장을 걸었다면 제3의 대안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4. 교회의 쇠퇴 이유: 문화적·혈통적 인종주의


뒤집어 보면, 교회가 쇠퇴한 이유나 결과는 대부분 인종주의로 귀결됩니다. 초대교회 말기는 공의회라고 불리는 전 세계 교회의 회의를 통해 기독교 신조가 결정된 시기이지만, 세속사에서는 로마제국이 망해가는 시기입니다. 로마의 철학자들은 제국이 처한 위기의 원인이 유약한 기독교가 로마의 남성성을 거세했기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렸습니다. 교회는 대내외적인 도전에 맞서 신조와 직제를 마련했지만, 그와 동시에 차별을 제도화했습니다. 가장 높게 드리워진 벽은 교부들의 저작을 통해 확산된 ‘여성에 대한 배타’라는 벽이었습니다.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인종주의는 근대 유럽에서는 제국주의와 결부되었습니다. 근대 유럽 제국들은 고대 그리스를 이상적인 체제로 규정하고, 고대 문화와 자신들을 동일시했습니다. 이를 통해 제국의 약소국 침략과 야만적인 문화 약탈을 정당화한 것이지요. 현대 한국교회 역시 교세가 크게 확장된 이후 ‘종교적 인종주의’의 덫에 걸려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 성 소수자, 타종교 등 타자에 대한 배려를 교회 공동체 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초대교회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심각한 일탈입니다. 오늘 기독교가 직면한 진정한 도전은 포스트모더니즘, 이슬람, 동성애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기독교의 외피를 입은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에 갇혀 있는 현실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문화적·혈통적 인종주의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한 헬레니즘 및 유대주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복음은 국가와 혈통의 가치를 넘어선 보편의 가치를 담지하고 있으며, 교회는 본래 이를 구현하기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뿌리가 있으며, 이는 우리가 낯선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타자를 우리 쪽으로 동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결국 동화되리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대응적 시각이 문화우월주의와 타자에 대한 배타주의를 낳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이는 신학적인 질문인 동시에 문화적, 사회적인 질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낮은 자리로 내려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공동체로 자랐습니다. 본회퍼 목사님 말씀처럼 타자를 지향하는 수도원 공동체였습니다. 제도 교회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답을 확인하거나 찾기보다, 우선 답은 늘 바뀔 수 있는 유보적인 가치임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회 속에서 강자의 의지를 반영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함께 가기 위해 기꺼이 변화를 선택하는 넉넉한 품을 지니는 일 말입니다. 문제는 그 성취 방식이겠지요. 깊이 있는 성경공부가 대안일까요?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에 앞서 성경의 가르침이 구현되어야 하는 콘텍스트에 대한 공부, 사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타자를 만나고 이해하면서 축적하게 되는 절대적인 양의 경험만이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줄 수 있습니다.


5. 문화 우월주의의 실패와 타자 수용


요즘 첨예한 이슈로 등장한 예멘 난민 문제는 어떨까요? 합의하여 선택할 하나의 정답이 나올 문제인지는 조심스럽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문제의 본질이 그들에게 있다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수용하든 하지 않든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떤가 하는 점입니다. 한국 거주 외국인 수가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웬만한 규모의 광역시 인구를 뛰어 넘는 수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라는 범주에 ‘그들’이 들어올 수 있을까요?

유럽의 예를 들어보자면, 2000년대 들어 유럽 각국은 앞다투어 다문화주의 실패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런던 지하철 테러에서 보듯 유럽에서 태어난 무슬림들이 자생적인 테러조직에 가담하는 현실에 부닥치자 당황한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2차대전 이후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앞다투어 옛 식민지 국민들의 이민을 받아들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우월한’ 유럽 문화에 그들이 ‘동화’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근대의 문화 우월주의인 헬라주의에 거세게 반발했고,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유지했습니다.

사회는 통합되기는커녕 분열되었습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만, 타자를 받아들인다면서 그들의 문화를 동등한 가치로 인정하기보다는 문명 대 비문명, 우월한 문화 대 열등한 문화의 구도로 접근한 것입니다. 한 TV 다큐멘터리에서 백인 택시운전사와 파키스탄인 택시운전사의 24시간을 추적한 결과 동선이 겹치는 지역은 기차역이 유일했습니다. 이 고민 해결책의 한 방편으로 영국 정부는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모여 사는 집단 거주 마을을 만드는 시도를 했습니다. 건축 형태는 중립적으로 비잔틴 양식으로 했습니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급기야 로완 윌리엄스 전 캔터베리 대주교는 사회통합을 위해 이슬람의 샤리아법도 필요한 경우 수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의회의 한 의원은 일부다처제 전통의 국가에서 온 여성들의 복지 사각지대를 막기 위해 그들을 대상으로 한시적 일부다처를 허용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 장벽을 세우겠다고 했을 때 우리는 우려했습니다. 그가 불법 이민 온 부모와 아이들을 분리시켰을 때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멀리 있는 그들의 아픔에는 공명하면서, 우리 곁에 와 있는 타자나 예멘 난민 신청자들에 대해서는 단서가 많이 붙습니다. 심지어 예멘인들은 불법 입국을 한 것도 아니고 난민 ‘신청’을 한 상황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이를 사회학에서는 ‘준거 기준의 이중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겐 타자와 만난 경험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당위를 묻는 건 의미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다름과 타자에 대한 우리의 경험 수준이 우리의 수용 수준을 말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귀국한 2008년 시골 마을 여기저기에는 한 동남아 국가의 여성들을 지칭하며, “◯◯◯ 여자 도망가지 않습니다”라고 쓴 국제결혼업체 광고가 버젓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딱 10년 전의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타자와 조우하는 충분한 경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6. 그럼에도 교회에 희망이 있다면


그 실행 여부와는 별개로 교회는 여전히 이 사회 속에서 타자를 지향하는 가치를 보편의 가치로 믿고 있습니다. 여전히 제도 교회에 희망을 거둘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적실성을 가질 때는 교회의 특수성이 사회의 보편성에 호응할 때입니다. 그 호응 여부가 교회의 존재 의미를 판단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낯설고 힘들지라도 부대끼면서 알아가고 살아가는 경험치가 쌓여야 합니다. 더디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지난 몇 년간 의식 있는 개인들이 함께한 아래로부터의 몸부림을 통해 강고한 구조를 바꾸어 낸 힘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을 이제 교회에서도 공유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우리 삶의 목표는 믿는 바를 확인하고 다지기 위한 것이기보다, 신앙의 이름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여러 교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 구조가 우리 사회 속에 적실성을 가지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는 상상 속 교회의 이상적인 원형이나 이미지를 갖고 당위로 접근하는 시각에서 한 걸음 물러서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고민해야 할 것은, 오늘 몸 담고 있는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느냐, 사회가 교회를 수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나간다면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차원에서 교회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요? 거친 표현일 수 있습니다만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 가치와 타협하자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특수성이 사회의 보편성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의 특수성이 사회의 보편성을 형성했습니다. 사회의 대안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가치는 급진적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시도하면 좋겠습니다. 막아서는 것, 벽을 세우는 것이 길인지, 흘러 나가고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인지, 거꾸로도 보고 뒤집어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의 경험을 통해, 역사를 거기, 그때,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 오늘, 우리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제도 교회가 부딪친 문제에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험을 통해 성찰을 쌓아가는 길입니다.


최종원 약력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최종원 goscon@goscon.co.kr


http://mdkumc.org/ministry/?p=3490



참고 4.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교회론” 과 막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 비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교회론” 과 막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의 “공공신학” 비교

이영환

https://cy.cyworld.com/home/22242709/post/4DF1C879A2557635D35A8401



(1)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설교가이며 동료 교수이기도 한 윌리엄 윌리몬(William H. Willimon)과의 공저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Resident Aliens)에서 “교회는 사회 전략을 갖지 않는다. 교회 자체가 사회 전략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그가 전개하는 논지를 살펴보면 왜 그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내셔서 이 세상이 자기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대안적 사회를 세우셨으며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그것이 바로 곧 진리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도시, 문화 안에서 태어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교회가 해야할 본질적인 일은 사회적 논쟁거리들과 관란해 좌파와 하나가 되게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예수를 교회가 아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 때 하우어워스는 바르트와 틸리히를 비교하며 바르트의 손을 들어준다. 하우어워스가 비판하는 것은 19-20세기에 등장한 현대 신학의 문제점이다. 현대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서의 언어를 현대인들에게 어떻게든 이해시키고 믿게 만드려는 목적으로 지나치게 실존주의적으로 번역, 해석하였다는 점이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이 같은 현대 번역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한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기본적인 관념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운동에 참여하고 한 백성이 되라는 초청을 받는다. 그러나 현대 신학이 번역에 지나친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복음을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하우어워스가 바르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바르트가 복음을 세상 속의 현실 체제에 맞추기를 거부하고 교회를 복음에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협이 아니라 회심을 통해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지식을 얻게 된다. 또한 그 하나님이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분이며, 인간이 보기에 의로운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심오한 기준을 따라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인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의 비전에 의해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교회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고, 모험을 감행하는 식민지로 존재한다. 그리고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한 곳에 정착하고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울타리 치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식민지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 식민지는 전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때에만 의미가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리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시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를 식민지라고 할 때 그 식민지는 신학적, 지리학적 의미의 장소, 요새화된 진지를 뜻하지 않는다. 식민지에 거주하는 이들은 예수의 첫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예수를 따라가고자 애쓰면서 이동하는 백성이며 그들의 삶은 곧 모험이다.
따라서 하우어워스가 “교회는 사회 전략이다.”라고 말할 때의 교회의 의미는, 필자가 볼 때, 기능론적 의미보다 존재론적 의미가 크다. 교회가 세상의 사회적 논쟁거리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그러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본질적인 역할, 존재 목적이 아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그의 논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근대 민족국가가 제공한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개인의 권리라는 관념과 기독교를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부족주의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교회보다는 미합중국이나 로마 제국, 쿠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훨씬 큰 충성을 바치게 될 때에 부족주의가 생겨난다.
이와 같은 하우어워스의 주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를 비판하는 진영에서 들려오는 가장 큰 목소리는 바로 하우어워스의 주장은 “분파주의” 또는 “부족주의” 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주장과 “분파주의”와 상당히 밀접하지 않은가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속적으로 “교회”와 “세상”을 도식적으로 분리시킨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해하기에 하우어워스의 주장을 단순히 “분파주의”로 함몰시킬 수 없다. 하우어워스는 자신에 대한 “분파주의”라는 비판에 교회만이 세상에 알려 줄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들고 교회가 세상과 만날 때, 이것을 “분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반문한다.
앞서 말하였다시피 필자가 이해하기에 하우어워스의 교회론은 물론, 기능론적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존재론적 의미가 더 크다. 만약 하우어워스의 교회를 일종의 “구역”(sector)로 이해하고 마치 교회가 그 구역의 경계에 담장을 쌓아올리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의 교회론은 자연히 “분파주의”가 될 심산이 크다. 물론 그가 교회를 “식민지”라고 표현했을 때 이러한 “구역”적인 의미를 포함시켰을 것이다. 마치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분리되고 독립적인 공간으로 존재하는 구역으로서의 교회가 그것이다. 이 같은 비판은 그의 교회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하우어워스의 견해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인 것이다. 하우어워스 자신이 밝혔듯이 “식민지”는 단순히 신학적, 지정학적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우어워스에게 있어서 교회는 “구역”의 의미보다 “장(場, field)” 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보여 진다. 이 “장”은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이 같은 이해는 필자가 동의하는 바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임된 위업을 달성하기에 적합한 인물 - 하우어워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범한 인간 - 이 훈련되고 성장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알 수 없는, 교회 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대안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교회론을 지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우어워스는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구원은 모험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한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성경의 일관된 플롯(Plot)으로 신약성경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신약성경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그 삶에 매혹되어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독자들이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도록 훈련할 목적으로 책을 썼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지 않고서는 그를 알 수 없다. 예수와 함께하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필수 조건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우리 삶의 의미와 통일성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신앙 공동체 없이는 우리의 성취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여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미덕을 계발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이며 이는 혁명의 윤리이다.
둘째, 인간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다. 하우어워스는 이에 대한 근거로 산상설교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산상설교는 식민지를 세우는 것을 필수적인 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산상 설교를 믿고 그대로 따라 살기만 하면 그 설교가 우리를 바꾸고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 우리 이외의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철저히 배척당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는 이유는 문화의 대세를 이루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처럼 행동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또 개인적 영역에서 도덕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 말씀은 식민지 백성들을 위한 말씀이고 개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산상설교의 윤리에서 기초가 되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어떤 효과가 있느냐의 기준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산상설교가 제시하는 교회가 가야할 길은 종말론적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종말론을 제거할 수 없다. 산상설교가 신자들에게 결코 이 세상을 부인하거나 세상의 삶을 포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산상설교는 우리가 세상을 바르게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라고 요청한다. 산상설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로 시작한다. 이것은 종말론의 배경에서 분명해진다. 무엇보다 산상설교는“이 세상에서 사는 실제적인 방법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산상설교의 세상은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산상설교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시며,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과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 세상이다. 즉 예수는 종말론적인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서 이 세상은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우리의 책임이 현실 세상 자체를 보존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산상설교를 통해 보았듯이 우리에게 윤리란 ‘행함doing’의 문제이기 전에 먼저 ‘봄seeing’의 방식이다. 교회의 ‘윤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사람들을 이끌어 기독교적인 삶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인물과 만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기독교 윤리’는 나사렛 출신인 한 유대인,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백성이 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 바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서 공동체를 통해 이야기를 듣고 구원의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이는 ‘행함doing’ 이전에 ‘봄seeing’의 문제이며 우리는 오직 부활하시고 참된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우어워스는 “우리의 과업은 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백성이 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확인하도록 도와서 모험심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 모험의 길은 반드시 세상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주지하듯이 이 길은 예수 가셨던 십자기의 길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동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동되는 세상 속에 교회는 당연히 식민지일 수 밖에 없다. 현대 신학의 문제는 지나치게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합리적, 계산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동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대안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바로 이 곳에서 사람들은 예배, 설교, 성만찬 들을 통해, 이야기로, 공동체를 통해, 예수의 삶과 모범적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봄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하게 오리엔테이션 되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의회에 압력을 가해 법을 통과시키거나 세금을 책정하게 만드는 일만으로도 우리의 윤리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 우리는 필연적으로 기독교 윤리의 공동체적인 특성을 놓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믿는 것, 곧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이루어진 것을 기준으로 볼 때만 타당하다. 결정적으로 하우어워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곤경에 처한 우리 사회를 돕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법을 제정케 하거나 의회를 지원해 주고 사회 프로그램에 기금을 제공하는 일에 힘쓸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런 일들이 우리 기독교가 줄 수 있는 가장 신나고 창조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제시해야 할 가장 창조적인 사회 전략은 바로 교회다.
결국 교회는 존재적으로 세상 속에 식민지로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달려가는 세상에 대안적 삶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분명 교회가 게토(ghetto)화 되고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의 소종파적인 친목단체로 전락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것은 “나를 따르라” 였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은 근본적으로 세상과 병립할 수 없는 대단히 급진적(radical)이고 공격적이고 정치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예수는 체제 자체를 바꾸려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체제를 거부하고 체제의 모순, 사회악, 부조리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공평하고 자비로운지 일깨워주길 원하셨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후 2천 년간 끊임없이 교회가 스스로 던졌던 질문은 여전히, 어쩌면 지나친 단순화로 보일 수 있겠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가 될 수밖에 없으며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여전히 이 질문에 적절한 응답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논지에서 필자는 “교회가 곧 사회 윤리이며 사회 전략이다.” 라는 말에 동의하는 바이다.


(2) 막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의 “공공신학”과 하우어워스의 “교회가 곧 사회전략이다.”


최근 기독교 윤리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신학이 “공공신학”이다. 특히 프린스톤신학대학원 은퇴교수인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는 이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스택하우스는 자신이 연구한 세계화의 과정 가운데 오늘날 신학의 과제가 무엇인지, 또 교회의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지 살핀다.
스택하우스는 현대 사회는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사회이며 이러한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현대 신학은 공동의 삶에 관하여 신학적이고 윤리적 관심을 가져야 하며 더욱 세계적이고 에큐메니컬하며 보편적인 접근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택하우스에 따르면 “신학은 문화 속에 있는 공동의 삶(common life)의 주요 분야들(areas)를 해석해주고 발전가능한 시민사회의 형성과 지탱을 위한 윤리적 가이드를 줄 수 있는 공적 담론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일견으로는 그의 공공신학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교회 윤리와 마치 정반대 위치에 놓여있다는 인상을 준다. 앞서 살폈듯이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사회적 담론, 정치 문제에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거나 참여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우어워스는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고, 여기서 교회답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사랑과 뜻에 의해 구동되는 대안적 공동체, 곧 식민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스택하우스는 교회가 공공의 삶(common life)에 공적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둘의 주장은 전혀 상반된 주장인가? 접점은 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하우어워스와 스택하우스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잠시 고찰하자면, 공공신학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시민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틴 마티(Martin Marty)나 윌 허버그(Will Herberg)같은 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시민종교”(Civil Religion)는, 물론 종교 사회학자나 정치 평론가들이 사용하는 의미는 각기 다른 면이 있지만, 특정 지역 또는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내재적, 도덕적, 정신적 기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스택하우스가 이러한 시민종교를 설명하며 드는 대표적인 예는 “애국주의”이다. 특히 나찌 독일, 공산주의 소련, 이탈리아의 파시즘, 미국주의 등 일종의 국가적 제의(national cults)의 특징을 보이는 모습들을 통해 모든 국가와 사회에는 종교성을 띠는 제의적 기반이 깊게 내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스택하우스가 말하는 공공신학은 단순히 그러한 배경을 갖는 사회에 어떤 정치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공공신학은 각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 종교적 에토스(ethos)를 그 근원부터 성철하고 그에 적절한 공적 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택하우스는 각 지역의 종교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전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도의 힌두교와 카스트제도를 깊게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인도의 전통을 이해할 수 없고 이는 인도에 올바른 선교를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택하우스는 공공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종교들과, 종교들의 신학적 전제들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교회가 정치권력을 추구해야 하느냐? 스택하우스는 이같은 질문에 대해선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교회가 정책을 수립하면 신정(神政)을 초래하고, 교회를 정당으로 만들게 된다. 공공신학은 무엇보다 도덕적, 영적인 에토스ethos를 형성하여 간접적인 형태의 영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회 전반적인 에토스를 형성하고 평신도의 윤리를 성숙시켜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살펴본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과 하우어워스의 “교회가 바로 사회 전략이다.”라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상기시킨다. 바로 “교회됨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모든 학자들이 그렇지만 이 두 학자 또한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책임적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이 두 학자의 견해의 접점을 찾자면, 물론 단순하고 쉽게 결합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회는 공동체적” 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두 학자의 글에 대한 필자의 견해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신학적 성찰과 현실 문제에 대한 응답의 근거를 얻어야 하는 일차적 자료는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의 성경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고 다른 답을 얻어내지만 그러함에도 성경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 그리고 모든 이들이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도록 선별된 백성” 이다. 이들의 선별은 단순히 이원적인 성속(聖俗)의 대립적 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거하길 원하신다. 그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세상은 탐욕과 타락의 온상이고 자신의 욕구 실현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곳인데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과 대립되는 세상인 것이다. 기독교 구호단체인 월드비전(World Vision)의 회장 리처드 스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이 신구약 전반에 걸쳐 분명히 밝힌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기본적인 필요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보살필 책임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계시적 백성을 통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구동되는 세상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바라볼 때 “움켜쥐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소유를 축적하고 축적할 수 록 주변에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돌아가지 않는데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지 못한 사회이다. 인간 자체로서 살아갈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매정한 사회, 사랑이 메마르고 탐욕의 노예가 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은 진노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구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필히 섬겨야할 사회적 약자였다. 특히 왕조 말기에 많은 외침에 의해 전쟁고아, 빈한자들이 늘어가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그들의 아픔과 괴로움은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이스라엘 기득권과 귀족들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의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했다.(사58:1-12 등)
하우어워스의 말대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메시지, 아니, 더 확대하여 성경 전체가 말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개인의 윤리적, 도덕적 계발의 차원을 벗어난다. 성경의 메시지는 이보다 더 급진적이고 공격적이며 도전적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한 번도 공동체적이지 않은 적이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라면 그것은 복음을 단순히 개인의 영달(榮達)의 차원으로 희석시키고 축소시키고 왜곡시킨 것이다. 성공주의, 성장주의, 자본의 논리에 물든 많은 교회들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예수 추종자”들의 모임이다. 예수 추종자는 분명 세상적 방식과 다르게 구동되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단순히 개인의 평화, 안락의 차원에 머무른 복음은 성경적 복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또 다시 “교회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우리는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앞서 말하였다시피 필자는 하우어워스의 표어에 동의한다. “교회는 그 자체로 사회 전략이다.” 바꿔 말하면, 교회가 사회 전략이 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교회를 세우셨단 말인가?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수행해야 한단 말인가? 분명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인자가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게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ion)을 위임하셨다. 마28:19-20은 오늘날 전세계 교회의 선교적 모티브가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의 수 많은 말씀 중에 지나치게 그 말씀에만 집중하였다. 하우어워스가 분석하는 대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의 총화인 “산상설교”는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도덕적 설교로만 인용될 뿐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나를 따르라”는 말에 응답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의 잔칫상에서 고상한 율법을 토론하지 않으시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와 함께 식사하시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뜨거운 정오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이방인을 고치시고, 아픈 자를 위로하신 삶을 보고 있는가?


(3) 결론


정리하자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교회 자체가 사회 전략이다.”라는 말은 오늘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 속에 어떤 지평에 서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오늘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자문하게 한다. 반면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은 콘스탄틴적 제국주의 종교로 군림해온 기독교의 세상에 대한 배타적 시선이 과연 적절한지 반문하게 한다. “공공신학”은 세사을 단순히 악하게만 보는 전통적 기독교의 배타적 입장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공공”(Public)이라는 용어는 20세기 이후 등장한 용어가 아니다. 20세기 이후 많이 회자되고 있긴 하지만 복음은 본래 “공공적”이다. 여기서 공공적이라는 말은 하우어워스나 스택하우스가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사회 속에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공동체적이며, 교회는 세상 속에서 공동체적(common)으로 그리고 유기적(organic)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신학은 세상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그 안에는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긍정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또한 세상 속에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할지 반문해볼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악하고 음란하고 도저히 가망이 없는 세상으로만 보는가? 이쪽은 거룩하고 선하지만 저쪽은 악하고 변혁되어야만 하는 곳이라는 배타적 ․ 제국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진 않은지 반문해볼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안적 세상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리엔테이션 되고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구동되는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게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 목적과 일치하는 삶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평안이요 능력임을 발견한다.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세상에 공적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각각의 교회가 지역사회의 문제에 민감하게 그리고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대처해야 함을 말한다. 교회는 빛과 소금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지역 사회의 문제를 외면한 채 “예배와 기도” 만을 위해서 모인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토록 경멸하시던 의미 없는 제사(사58:1-5)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파멸시키는 사회악과 구조악이 교회가 싸워야할 대상이다. 세상을 단순히 악하게만 보는 시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창조 목적에 맞게 살아가도록 변화되길 원하신다.


(4) 참고 문헌

Stanley Hauerwas and William H. Willimon, Resident Aliens, 김기철 역,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서울:복 있는 사람, 2008)
새세대 교회윤리연구소 편,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서울:북코리아, 2008)
Richard Stearns , The Hole In Our Gospel, 홍종락 역, 『구멍난 복음』, (서울:홍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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