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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9. 2020

스텐리하우어워스를 읽다

나우미션_스텐리하우어워스 강좌_김동춘 교수님


0. 들어가기


스텐리하우어워스는 최근들어서 한국에서 각광받고 있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이미 10여년전부터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나의 아이'나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책이 한국에서 유명한데, 사실 하우어워스의 핵심적인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IVP에서 '교회의 정치학'이 번역이 되면서 하우어워스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져 가는 모멘텀을 마련했다.

김동춘교수님께서 나우미션에서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앞으로 6주간 강의를 들으면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크코비의 '스텐리하우어워스'에서부터 시작해서 '교회됨'과 '교회의 정치학'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스텐리하우어워스


스텐리하우어워스


존경받는 신학자이자 윤리학자다. 1940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나 사우스웨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후 오거스태나 대학교, 노터데임 대학교를 거쳐 2013년 은퇴할 때까지 듀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쳤다.

2001년 인문학 분야에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기포드 강좌 강연자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타임」지에서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되었다. 현재는 듀크 대학교 신학부 및 법학부의 길버트 로우 명예 교수로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연구해 온 신학의 흐름, 삶의 깊은 상처들마저 있는 그대로 담긴 회고록 『한나의 아이』(IVP)는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선정한 2010년 종교 분야 최고의 책, 「허핑턴포스트」가 선정한 2010년 최고의 종교 서적 열 권 가운데 한 권으로 꼽혔다. 국내에 소개된 다른 저서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장 바니에 공저) 『덕과 성품』(이상 IVP),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윌리엄 윌리몬 공저) 『십계명』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이상 복있는사람), 『십자가 위의 예수』(새물결플러스), 『교회됨』(북코리아), 『신학자의 기도』(비아), 『마태복음』(SFC출판부) 등이 있다.



https://ichungeoram.com/11156





스텐리하우워어스를 읽기 전에



1. 교회에 관한 두 가지 흐름


교회와 국가는 일치하는가? 다시 말하면 정교분리는 잘못된 것인가?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국가와 종교를 연결하는 시도를 해 왔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국가를 동치시킴으로써 이 세상의 질서를 변화시켜서 권력과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미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과 반대로 아나베프티스트로 물리는 재세례파들은 오히려 산상수훈의 내용들을 가지고 와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삶 속에서 작게 세부적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했다.


기존의 교회사에서는 여러가지 흐름들이 있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대로 칼빈과 루터의 흐름이다. 칼빈의 정치신학적인 방점이 찍힌 종교개혁이 있었던 반면에 루터의 개인적이고 자유적인 종교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서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제 3의 흐름이 바로 재세례파들이 시도했던 종교개혁있었다. 이러한 재세례파의 유명한 학자중에 '예수의 정치학'을 쓴 존 하워드 요더가 있다. 스탠리하워워어스는 로더가 이야기한 신학과 정치적인 관계를 매우 많은 부분 옹호하고 있다.


2. 교회에 대한 재정리


교회는 이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교회가 세상에 동요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너무 따뜻하고 온정주의적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하우워어스는 대항론을 뚜렷하게 제시하면서도 분리주의모델을 빗겨간다.

대항모델로서 교회의 정체성이 스탠리하우워어스에 와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서 있는 현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어떤 미션을 취할 것인지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현실에 너무 적응한 나머지 공동체의 원래의 목적을 잊어 버리고 적응하거나 동요되고 있다.


3. 구원과 십계명


구원이라면 무엇인가? 구원이란 결별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삶 속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며 완성점이나 천국티켓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관점에서 세례파는 삶의 결과로서의 복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우워어스는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믿음으로 본받아서 함께 만들어저져 가는 과정, 즉 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들에게 통용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십계명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기로 결단한 그리스도인들을 이야기한다.




교회는 예수 윤리를 본받아 자유주의적 세상 문화를 거절하고, 거스르며,
세상문화의 대조적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체류자들sojorners이며,
철저 제자도 공동체이다.


1. 그리스도인에 대한 재정리


그리스도인 하면 흔히 "예수 믿는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더 정확히 하면,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배갛며, 세례받아 교회 회원이 되어, 정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종교 관습이나 종교활동이라는 측면에서 크리스천을 설명한다면 그들은 주일 성수를 하며, 장로교이든 감리교이든, 침례교이든, 오순절이든 특정한 교회에 속해 있으며, 자신이 속한 교회의 공예배에 출석하여 예배하는 사람이며 매일 기도와 성경을 묵상하며 술, 담배를 머리하는 사람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인됨의 진정한 표식이라기보다 외적인 표지에 부로가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교리에 대한 고백을 한다거나 지역교호에 소속되어 있따는 것만으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됨의 특질은 기독교 교리를 입술로 고백한다거나, 믿음의 지적인 동의나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혹은 교회라는 외형적 제도, 질서, 조직에 형식적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인격적으로 본받고 따르며imitation and following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믿음이란 반드시 삶의 변화와 변혁을 동반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속죄신앙을 넘어 모범신앙, 본받음의 신앙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전적인 변화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제자도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즉 제자도의 삶은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어야 한다.

경제영역에서도 제자도를 실천한다.

단순한 삶을 실천한다.

결국 세속, 국가와의 결별과 분리를 강조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된 대조사회contrast society로서 교회를 세우며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고자 힘쓴다.


2. 로널드 사이더의 가시적 대안 교회


1)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

복음전도와 사회행동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 '복음의 총체성'과 총체적 복음화'wholistic evangelization를 강조하는 사이더는 재세례파의 하나인 '그리스도 형제단'의 유산아래 있다. 사이더는 교회는 하나님나라 복음의 일부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단지 죄용서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가시적인 공동체'로 창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바울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인종과 민족의 장벽과 차별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회질서가 도래했음을 도래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초기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유물을 나누어주며 공유하는 재산공유적 공동체까지 보여줌으로써 그 당시 현존하던 이방 사회와 전혀 다른 "새롭고 가시적이며 구속된 사회질서"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본을 보여주었고 가르쳤던 급진적 하나님나라의 윤리에 따라 살아갈 수 있었으며 그런 본을 따라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혼, 경제적 공유, 인종, 원수사랑 등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새로운 메시야적 공동체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비가시적이고, 영적인 것이 아니라 가시적이고 공동체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현실이다.


2) 대항 공동체로서 교회

예수의 메시야적 공동체인 교회는 대항문화적 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이다. 예수를 신실하게 따르면서 살아가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방인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나그네요, 낯선 이들임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리차드니버의 '문화의 대립하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를 창출해야 할 청지기적 사명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교회는 문화속에 스며든 죄의 편만함에 맞서 세상 문화에 대항하며 사랑야 한다는 의미에서 대항문화적이며, 삶의 양식을 새롭게 변화되고 구속된 형태로 문화를 형성해가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교회란 국가주의 포로처럼, 시민적 순응이나 동화됨으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적 윤리와 급진 제자도의 윤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살아가면서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대조적 존재양식이 사회체제에 커다란 도전을 주면서 사회변화의 원리가 된다.


3. 스탠리 하우워어스의 교회론 : 낯선 거류민alien residents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기존질서에 순응과 적응하기보다 거절, 비타협, 대항 공동체이다. 하우워어스는 교회가 콘스탄틴주의적 유혹에 빠진다고 경고한다. 그는 기독교현실주의자가 미국을 변혁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사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국가에 충성하는 시민으로서 정체성보다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기독교화하려는 신학과 교회는 교회를 미국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오늘날 북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샘 아저씨의 가치, 하나님의 축복과 아메리칸 드림이 지닌 개인주의를 분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성경을 따르는 백성에게는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가 더 중요한 문제이며 철저 제자도의 교회가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의 진짜 적은 무신론이 아니라 친철함이다. 교회성장학도 그는 강하게 비판한다. 교회가 로터리클럽이 될 때 교회는 사라질 것이다.

낯선 나그네들의 교회는 교회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인이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인식하면서 이 세상은 우리에게 식민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질서와 삶의 방식이 낯설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나그네들이다. 기독교는 나그네된 백성,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을 알기에 차별화된 백성이 되어 살라는 초청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선에서 볼 때 다른 세계가 이곳에 세운 식민지 백성이 되는 것, 낯선 거류민이 되는 것이다.

구원은 새로운 모험으로 출발하는 여행이다. 구원이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일종의 중간지점에서 출발하는 시작이다.

교회는 성품 공동체이다. Church as a Charater Community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 내셔서 이 세상이 자기 스스로를 이룰 수 없는 대안적인 사회를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는 가시적인 대안 사회로서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친히 다스리는 방법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메시야 공동체의 백성이 되라고 초청하는 것이다.

대항문화로서 교회는 교회가 교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교회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서 사회를 변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영적으로 변화되면, 즉 개인이 복음화될 때, 사회는 저절로 변화될 것이다.

교회는 종교기관도 아니며, 국가도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공동체이다. 사회를 향한 교회의 최선 방법은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전적으로 구별된 대조 사회를 가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4. 교회의 사회전략에 대한 하우워어스는 분석


1) 행동주의 교회activist church

사회의 구조악을 개선하고 인간화된 사회를 건설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이 교회의 정치는 종교로 치장된 자유주의가 되어 버린다'


2) 회심주의 교회conversionist church

사회의 구조는 결국 인간의 죄로부터 발생하므로 이 교회는 사회구조의 변혁으로부터 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로 바꿔 버린다. 교회는 오직 인간의 내적 변화를 위해서 일한다.


3) 고백적 교회confessional church

고백적 교회는 회심주의자들의 개인주의와 행동주의자들의 세속주의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고백적 교회의 사회변혁 입장은 개인의 정신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혁하는데 있지 않고 먼저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하는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고백적 교회도 회심을 말하는데, 여기서 회심이란 '세례를 받아 새로운 백성, 즉 대안적인 폴리스이자 교회라 불리는 대항문화적인 사회조직을 접붙혀지는 긴 과정을 의미한다'

고백적 교회는 이 사회속에서 가시적인 대조 공동체, 즉 대조사회가 되려고 한다.


참고, 재세례파는 후터파, 메노나이트, 그리스도교 형제단, 아미쉬로로 구분된다. 우리는 보통 아미쉬를 메노나이트와 비슷하게 보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민네이션 질문


1. 스텐리하우워어스가 '분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2.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기존의 하나님나라의 개념과 하우워어스의 '나그네된 백성'이 말하는 식민지로서의 이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와 이해를 가져야 하는가?


3. 하우워어스가 말하는 '공동체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메킨타이어류의 공동체주의가 가지고 있는 부분인데, 그렇다면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잠재력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4. 개인윤리와 집단의 윤리, 공적의 윤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기독교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공적윤리는 개인의 윤리로서 제시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적용되는 범위가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5. 존롤스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하우워어스를 본다면 어떤 비판을 할 수 있는가?


6. 교회론에 대해서 대항론, 대안론, 대비론으로 구성될 수 있다면 스탠리하우워어스는 대항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대항론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는가?


7. 무리와 제자는 로완윌리엄스와 하우워어스에서 어떤 방식으로 갈라지는가?


8. 자유주의와 다르게 공동체주의는 오히려 인간, 개념, 자유에 대해서 공동체 안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하우워어스가 말하는 것도 그가 속한 공동체, 특히 미국문화에서 극복하지 못한 공동체 안에서 나오는 대안을 진리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9. 우리시대에 교회를 공동체로 볼 것인가? 네트워크로 볼 것인가? 제도로 볼 것인가?


10. 자유주의 기독교가 문제인가? 근본적인 기독교가 문제인가? 문제라고 할 때 어떤 것이 비판, 평가의 기준이 되는가?





민네이션 생각


공동체주의는 쉽게 지역이기주의나 집단주의 혹은 심하면 전체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공동체 안에서 성경과 해석, 이해와 역사를 다룬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형성되어가고 함께 만들어져 가는 가운데 법과 질서가 만들어진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해석의 갈등이 있다. 공동체가 해석의 툴을 제시하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공동체는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가 지고 있는 '공공의 선'과 '공유된 규범'이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정체성은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이야기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하우워어스는 명확하게 성품윤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품윤리는 공동체 안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이미 그 사람이 그 공동체를 선택하고 지속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들이 국가문화에 충격을 주고 변화를 준다고 말한다.

공동체로서 교회의 존재방식은 '대항문화'의 방식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반문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국가와 자본의 문화에 대응하여 반대하는 문화적 시도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하우워어스나 로완윌리엄스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신약성격의 의도로 본다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부분이 보여지는 것이다.

하우워어스는 교회의 정치학에서 국가적, 제도적 교회가 붕괴되거나 지나간 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를 고민한다. 결국 사회주의가 프랜시스후크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 나오듯 붕괴한 것처럼, 변혁주의자나 현실주의자들이 도전했던 크리스천국가라는 시도가 실패한 후에 무엇이 오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그 사회에서 제외되거나 배제되는 형식을 배격하고 사회 안에서 재구성하려는 논의이며 사회의 변화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하우워어스는 이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아예 처음부터 그런 기획은 실패라는 것이다. 오히려 낯섬과 비타협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금 다른 것은 네오리버럴리즘이라고 부르긴 한다.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학적인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기독교적 문법은 따로 있고 이것은 기존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우워어스는 국가 혹은 제도로서 기독교 이후에는 '교회'라는 것이다. 어쩌면 교회의 진짜 존재론적인 도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대안으로서의 교회, 존재론적으로서의 교회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정체성은 스토리텔링에서 시작한다. 스토리텔링은 서사 혹은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사건과 인물이 있고 이것을 말하는 화자의 해석과 이해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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