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_제3장_구원은 모험이다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책은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대표작이다. 영어로는 Resident Aliens라고 한다. 여기에 살고있지만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하우어워스는 재세례파라고 부르는 메노나이트계열과 칼바르트의 관점을 이어받아서 '교회의 교회됨'을 강조하고 공동체의 회복을 추구한다. 다소 보수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유연하게 풀어내는 하우어워스는 최근 신학계에서는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다. 오늘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 3장 구원은 모험이다라는 부분을 살펴보자.
오늘날 교회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고, 모험을 감행하는 식민지로 존재한다. 불신앙의 사회인 서구 문화 속에서는 여행의식이나 모험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서구 문화는 계속 가라앉는 자기 보존과 자기 주장의 지평을 지켜내는 일에나 몰두할 뿐 그 이상의 일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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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기독교가 이해한 구원관은 예수 믿고 내 영혼의 평안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은 다음 영혼의 영생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구원이란 모험이다. 즉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행동이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고 있다. 세상(문화)은 우리의 영구적으로 머물 정박지가 아니라 식민지다. 우리는 지금 불신앙의 세계에서 다른 가치와 지향점을 가지고 세속 문화와 충돌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현대 사회의 특징: 자기중심주의, 고독, 피상성, 소비자중심주의
무신론적 문화에서 우리는 낯선 거주자로 살면서 기독교적인 미덕에 끈질기게 공격과 비난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기독교 식민지에서 세상(문화)의 도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교회는 하나의 식민지다.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한 곳에 정착하고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울타리를 치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온갖 교활한 방식으로 믿음에 공격을 가해 오는 이 세상 속에서 식미지가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79).
교회가 식민지란 의미는 , 예수를 따라가고자 애쓰면서 이동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민지는 모험이다
구원이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일종의 중간 지점에서 출발하는 시작이다.
신앙이란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수 안에서 창조하신 새 백성의 사역에 동참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구원받는 다는 것은,
1) 온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인 그 모험(새로운 삶의 방식에 뛰어 들라는)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2)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구원이란 우리의 새로운 자기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구원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며, 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말한다.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구원이란
1). 믿음을 고백한 즉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사영리식의 구원도 아니며(구원은 완료형이 아니다),
2). 먼 미래에 들어갈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사는 것도 아니며(구원은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다),
3). 불신앙의 세계에서 식민지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예수적 윤리(십자가와 평화주의)를 따르는 제자도의 공동체, 즉 새로운 이야기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전적으로 따른 다는 것을 말한다. 믿는다는 것은 제자도다(To Believe is to Follow).
그리스도인은 매일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인격적으로 본받고 따르는 제자도를 의미한다..
2). 속죄신앙을 넘어 모범신앙을 강조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 용서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속죄의 은총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Savior)만이 아니라 삶속에서 본받아야 할 주님(Lord)도 되신다.
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그리고 전적인(total) 변화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전적으로 새로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보라 새로운 창조(new creation)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세상이로다”(고후 5:16-17). 그리스도인은 세상질서에서 새로운 질서로 들어 온 사람이다. 이제 옛 세상, 옛 가치와 삶의 원리에 포박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적 가르침, 하나님나라의 가치, 그런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한다.
4).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즉 제자도의 삶은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우리안에 만연된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이겨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외로운 개인으로, 익명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낸다. 주안에서 부름받은 형제 자매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개인주의적으로, 탐욕적으로 만들어 가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를 경계하며 살아가는 삶일 수 밖에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된 대조사회(contrast society)로서 교회를 세우며 세상속에 빛과 소금이 되고자 힘쓴다.
교회는 예수 윤리를 본받아 자유주의적 세상 문화를 거절하고, 거스르며, 세상문화와 대조적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체류자들(sojourners)이며, 제자도 공동체이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346
민네이션, 생각
나는 다소 자유주의적 기독교를 지향한다.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의지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누군가가 이정해줘야 하는 '권리'나 '책임'과 같은 법적인 근거 이전에 인간이 만들어진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서로 더 사랑하는 과정에서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칼바르트의 논의는 관점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한게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간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바르트는 인간이 당혹스럽고, 놀라고 기쁨을 수반하는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지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감정과 존재, 인생과 역사로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원은 모험이다'라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도 되고 동의도 된다. 구원은 모험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현실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확장해가야하는 개척과도 같다. 삶의 개척은 인생의 개척과도 연결된다.
재세례파는 '구원'에 있어서 '획득'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은 이루어 가야하는 것으로 본다.
http://chedulife.com.au/%EC%97%90%EB%B0%80-%EB%92%A4%EB%A5%B4%EC%BC%90-emile-durkheim-1858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