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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6. 2022

기독교윤리는 필요한가?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_제4장_기독교윤리의 기초가 되는 교회

0. 들어가기


이번장에서는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윤리'의 차원에서 지나친 근본주의와 지나친 자유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국가를 하나님의 나라로 동치시키는 근본주의나 개인의 삶을 자유의지로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하며 '교회'의 '교회다움'에서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은 깨뜨리기 쉽지 않다. 그런 사고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독특한 전통에 일치하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의 윤리적 관점을 판단하지 않고, 기독교 윤리를 카이사르가 얼마나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시할 수 있는지를 잣대로 자신의 윤리적 견해를 비판한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기독교 윤리에 물을 타고 '생명의 권리'나 '선택의 자유'같은 철저히 세속적인 기준에 맞춰 기독교 윤리를 걸러내고, 전세계를 향해 그것을 보편적으로 통하는 상식이라고 자랑하며, 나아가 그것을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에서 도덕주의적 기독교로, 자유주의적 기독교로 이동해 왔다. 관용과 환대, 다양성을 존중하는 기독교로 발전하고 있다. 지성적이면서 합리적일 수록 이런 경향은 강해지고 있다. 도덕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철학을 옹오하고 있으며, 사적인 공간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터치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기독교흐름이 한국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에서 스텐리하우어워스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한국교회가 하지 못하는 기독교 윤리를 어떻게 전파하는지 말이다. 



https://brunch.co.kr/@minnation/2856



1. 너희는 ~한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이미 알고 있는 것, 세상이 선한 행동이라고 여기는 것, 모든 사람이 다 합당하다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내용을 보면 식민지를 세우는 것을 필수적인 일로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제자들이 변화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믿고 그대로 따라 살기만 하면 그 설교가 우리를 바구고 또 이 세상은 우리에게 낯선 곳이며 참으로 기이한 곳이어서,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도 우리 이외의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철저히 배척당한다.

일반적인 윤리에서는 '이에는 이로 갚아라'라거나 '행한대로 받는다'라고 들었지만 산상수훈에서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기 때문에 화평케하는자가 되고, 애통한자가 복을 받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하우어워스의 관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의 방법은 스스로 실천할 수 없고, 공동체가 빚어낸 인간만이 그 삶을 살아낼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2. 기독교 윤리는 곧 사회 윤리다



기독교윤리는 일반적인 윤리가 아니다. 성경이라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전통에서 계속확인되어지는 윤리이다.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윤리도 아니다. 물론 평화와 사랑이 연결될 수는 있으나 그것 자체가 기독교윤리는 아니다. 

스텐리하우어워스는 평화주의 윤리이고 라인홀트니부어는 현실주의 윤리를 가지고 있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1950년대에 핵무기, 한국전쟁, 내전, 배트남 전쟁까지 영향을 미쳤다. 

스텐리하우워스와 요더는 '산상수훈'이 현실속에서 문자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부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경본문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부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사랑의 관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정의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니부어는 19세기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성을 가진 존재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될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어느정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더나 스텐리하우어워스는 비폭력저항주의이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하는 부분에 의해서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에 의하면, 교회만이 참된 곳일 수가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삶은 교회 안에서 더 나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교회는 진리위에 세워진 공동체이며 그 진리란 곳 기로가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리스도이시다. 

산상설교는 개인적인 자아를 가장 중요한 윤리적 단위로 보고 그것과 씨름했던 유럽의 게몽주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교회가 가장 중요한 윤리적 단위다. 

어떻게 보면 '사회 윤리'라는 전통적인 용어는 동어반복이다. 모든 기독교 윤리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니며 정치적인 출발점, 즉 교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우리의 윤리는 곧 사회윤리다. 

우리의 모든 윤리적 응답이 바로 여기, 교회에서 시작한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2032



3. 눈으로 보는 것 그대로


윤리적인 면에서 볼 때, 산상설교 앞부분에 나오는 팔복에서 예수께서 어떤 일을 행하라는 규율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흥미를 끈다. 

팔복은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가 가장 먼저 듣는 말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이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주로 우리가 무엇을 해얗라 것인지를 규정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산상설교의 윤리에서 기초가 되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이다. 뺨을 돌려대는 일이 옹호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느냐의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한느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시다. 이웃과 화해하는 것은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인홀트 니부어의 관점은 스텐리하우어워스와 정반대에 있다



4. 세상의 끝


산상설교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산상설교는 교회가 따라야할 길을 보여주는 길이다. 

산상설교는 종말론적이다. 그것은 만물의 끝, 곧 하나님께서 이 셋아을 이끌어 가는 최종 목적지와 관계가 있다. 

교회는 긴 여행길을 나섰고, 첫째 강림과 다음 강림 사이의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공동체는, 우리가 두 시기 사이에 살고 있으며 또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너무도 쉽게 잊어 버린다는 점을 깨우쳐 주고 나아가 하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여주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알기에 산상설교가 제시하는 그림을 보고 용기를 얻고,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구속하신 세상에서 만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그 그림에 의지해서 발을 내딛는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850



0. 나오기


결국은 스텐리하우어워스가 말하는 결론은 '교회의 교회됨'이다. 물론 이를 비판하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교회론이 아닌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우어워스는 탈포스트주의의 관점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이 회복되었을 때 기독교 윤리가 회복되는 것이 지속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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