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Dec 10. 2019

이웃을 이웃으로

테두리 바깥에서 생각하기

1.

국제개발협력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여러가지 삶의 단상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의 결과로 이 많은 이웃들이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렸다는 것과 함께,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의 분산, 개발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의 감정과 같은 것들. 요즘들어 부쩍 불편함을 많이 느낀다. 개발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

테두리 바깥에서 생각하려면 테두리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는 이들은 테두리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내부 논리, 내제적 관점에서만 현상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그럼 테두리 바깥에서 보여지는 현상 이면의 근본 원인을 볼 수 없게 된다. 소위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개발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이들은 멋진 툴들을 쓴다. log frame이라고 하는 논리모형을 쓰고, 논리에 맞게 사업을 하고, 그에 따른 활동과 결과를 평가하는 것을 최고의 방법론으로 여긴다. 이러한 사고의 배경에는 빈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원인이 전제로 깔려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한다면 가난한 상황에 처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 툴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논리모형이 가지고 있는 허점, 인간론에 대한 단적인 표상을 잘 보지 못한다.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니깐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는 경제학자들의 이상만을 가지고 개발경제학이나 개발협력을 이야기한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이 지나면 둘 중에 하나가 된다. 개발을 시작한 동네가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개발된 도시화가 되거나 또 다른 타지인들의 도움을 구걸하는 상황.


3.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항상 역사적으로 변화를 경험해왔다. 언제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였다가, 다른 때는 종교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치는 존재였다가, 소유를 중심으로 사고한다고 했다가, 경험으로 이루어진 성이라고 했다가, 어떤 전제도 필요없다는 선언을 하기까지. 국제개발은 이 중에 어떤 관점을 항상 가지고 온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정의나, 지금까지의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면에는 '우리가 더 우월하다'라는 것이 깔려 있고, 우월함의 기준은 다 자신들이 정하고 '문명'에 우위로 근거를 댄다. 크게 보면 역사의 진보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개발'이라는 잣대로 다가간다.


4.

예를 들어, 어떤 마을에 외부의 도움으로 학교가 지어졌다. 학교 건물은 북유럽식이고 학교 제도는 미국식이며, 선생님들은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치자. 그럼 그 마음에서는 어떤 아이들이 양성될까?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학생들로 바뀔 것인가? 우문현답이 아니라면 보통은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강조점을 두고 공간학을 외치는 이들은 '공간'이 가장 중요하니깐 북유럽의 사고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거나 미국식 제도에 익숙한 사람은 현실과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문제들을 다루는 학생들이 나올 것이라고 할 것이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토론과 설득을 통해서 실제로 경험한 것들에게서 진리를 찾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판을 뒤집어 보면 '그 상황과 현상은 그 자리, 그 시간에 어떤 관계'가 맺어지는 가에 따랄 달라진다라고 하는 관점이나,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인격'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학교의 의미와 성과를 다르게 판단할 것이다.  


5.

세계와 인간,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 자연과 우주, 미시와 거시의 양갈래에서 인간들은 너무나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았다. 그 선택을 도와주는 부모님들의 의식은 전통의 전통의 전통에서 왔으며, 국가의 제도와 문화적 분위기와 역사적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우리가 결정한단 말인가?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으며,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아무도 그럴 자격이 없다. 또한 그 어떤 누구도 그럴 능력이 없다. 이렇게 판단할려면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테두리 안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론 누군가에게 물어보거나 책을 보거나 자료들을 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누군가의 삶을 결정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미리 그려버리는 일을 테두리 안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6.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생각하는 것이 육체를 입으면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행동은 축적되고, 축적된 행동은 습관이 되며 습관은 자연스럽게 시스템을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정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아이디어였지만, 결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아이러니하게, 결정한 사람은 책임지지 않고 결정되어진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갈아넣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거야 그 사람들도 성인이니깐 알아서 결정하고, 결정한 것은 자기들이 책임져야지!'라고 말이다. 이러한 사고는 전형적인 테두리안에서의 사고이다. 당신이 실제로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당신의 선택이 자유로울까? 이런 질문만 던져도 자연스럽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로 결정하는 성향이 크고, 특히 개발학이 일어나는 곳, 국제개발이 진행되는 곳은 기본적인 디폴트가 너무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러니깐 누군가 결정을 해도 뭐라고 말 못하는 상황이겠지.


6.

테두리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존재란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테두리 안에서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진리가 타자의 내면에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 지금 같은 방법으로 절대로 안할것이다. 논리모형이나 변화이론이나 방법론이 중요하기 전에 내가 내 앞에 있는 대상과 수혜자로서의 이웃을 '어떻게 이웃의 자리로 다시 돌려 놓을까?'를 고민할 것이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좁아질 것이다. 이게 맞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함브로 정하지 말라. 아니 함브로가 아니라 정할려고 하지 말라. 정치는 여기서 시작된다. 다른 이들의 가치를 뺏어 오는 것이 정치의 전형처럼 느껴지는 요즘, 국제개발의 현장에서도 정치를 경험한다.


7.

프로그램과 프로젝트에 갖힌 국제개발을 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면밀히 본다. 효과성, 효율성, 책무성, 투명이라는 미명하에(물론 이것도 자신들이 정한 것이다!) 지역에 학교가 필요하고 유치원이 필요하고, 누군가 응답했을 때, 그것을 다시 논리모형으로 분해해 버리고 자신도 안하고 다른 사람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본다. 눈 앞에 있는 상황에 반응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도록 작은 디딤돌 정도가 좋지 않을까? 테두리 바깥에서 나가면 나갈 수록 더 많은 진리가 논리를 넘어 이웃들의 얼굴로부터 빛나오른다. 물론 인간은 때론 악하고, 실수하고,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되려 겁먹고선 미리 생각의 감옥을 만들어놓지 말고, 더 현실로, 원인으로, 근본으로, 본질로 나아가야 한다.


8.

은은하게 빛나는 사람들을 본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이웃들에게 쥐어주고 조용히 뒷문으로 나오는 이들의 뒷모습을 본다. 제국의 얼굴은 자본으로, 소유로, 개발로 멋드러지게 빛나지만 인간이 인간이 되는 길을 가는 이들은 오히려 뒷모습이 빛나는 법이다. 이들은 대부분 테두리 바깥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더라.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주 귀중한 깨달음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