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혼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Mar 17. 2020

기독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인가?

행복은 결과인과 목적인가?에 대한 고민

1. 행복함'이라는 고민


지인으로 부터 고민거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기독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고,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데요, 이게 맞나요? 예수님은 분명히 행복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거나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지 않았는데, 헷갈려요!"라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것인데, 곰곰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이전에 생각할 때부터 어느정도의 길이 보이기는 했는데 한번 정리해 보아야 겠다.


2. 시대가 낳은 사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담으면서 매킨타이어, 왈쩌, 드워킨, 롤스, 샌델을 소개시켜주었던 애덤스위프트는 최근 '정치의 생각'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자신이 소개했던 이론들이나 사상가들이 '시대의 자녀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사상'이라는 것은 항상 장소와 시간 위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이 지속될 때 형성되는데, '자유, 평등, 형제애, 정의, 행복'과 같은 것들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상'이 된다는 것이다. 사상은 시대정신이고, 시대정신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행복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이 마치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것은 이 시대가 낳은 사상이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깐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인류전통의 모든 문명에서, 모든 시대가 추구하던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19세기 이후에 마치 발명된 것처럼 역사 속에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면, 원래부터 그랬구나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시대가 낳은 사상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3.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선택


19세기를 휘감아 돌던 모더니즘은 세계대전을 시작으로해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합리성과 계몽주의, 발전과 진보 아래서 평안함을 누리던 경제와 정치, 사회가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거대 담론이나 인류사적인 사상을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런의미에서 사상의 출처를 자신에게 두는 사상이다. 모더니즘은 사상을 학자들이나 시대정신에 두었기 때문에 유동적이지 않고 전세계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사상의 출처가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니 인상주의는 내가 받은 인상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해석하고, 구성주의는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형성해 가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행복이나, 진리나, 정의나, 자유나 하는 것들은 다 개인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4. 성경과 행복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그럼 기독교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선택의 종교인가? 종교의 선택인가? 진리인가 아니면 설득인가? 이런 고민을 조금만 해 보면 우리시대가 주는 '행복을 추구함'에 대한 균열이 생긴다. 내가 믿고 있는 시대적 전제가 나에게 요청하는 것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행복을 구함은 지금 생활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 인간은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홈트레이닝을 한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삶을 산다. 그리고 선택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다. 성경에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교회들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복받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신약에서는 거의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신약에서도 행복이라는 단어는 관계적이지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로다.



5. 왜 이렇게 되었나?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겠지만,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에서 나는 어느정도 원인을 찾고 싶다. 신자유주의는 사실 고전적자유주의가 추구했던 정치적 자유, 사회적 자유, 경제적 자유, 종교적 자유에서 '경제적 자유'만 극대화된 것이다. 경제적인 자유를 극대화하기위해서 국가시스템, 사회구조를 모두 자유롭게 개인들간의 경쟁으로 열어 놓고, 종교는 결과적으로 따라오도록 셋팅해 놓은 시스템이다. 그러니 신자유주의에 물들게 되면 '한가지의 관점'으로 정치, 사회, 종교를 판단하게 된다. '자본'이 기준이 되어서 '돈이 되느냐 아니야?'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치환하고 모든 것들에 가격을 매기면, 가격표가 매겨진 것들은 교환이 가능해진다. 사람에게 연봉이 붙으면 사람들을 인적자원으로 분류하고 사람들을 트레이트해서 교환하고, 물건에 가격이 붙으면 다른 종류의 노동과 가치가 있는대도 교환할 수 있다. 교회에 가격이 붙으면 교회 건물과 목사들의 월급, 성도수에 따라서 교환이 가능해진다. 교회 안에서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과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이 나누어진다. 돈을 많이 벌 수록 장로에 가까워지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돈을 못 벌수록 하찮다고 생각하는 일에 내몰린다. 비단 장년들만이겠나? 청년들도 대기업에 취직하지 못하거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교회에 나오기가 힘들어지는 구조가 되었다. 맘몬을 섬긴 결과 교회에서는 '번영신학'이 자리잡고서 모든 것들을 자본으로 환산해 버린다. 그러니 건축헌금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겠나?


6. 하나님과 함께 함이 복


가끔 집앞에 교회에 새벽기도를 하러 간다. 그럼 그 새벽에 포스터 하나에 큰 감동을 받고 지하 기도실로 내려갔더랬다. 포스터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 73:28)이 써 있었다. 나는 태생이 가난하게 태어났고 지금도 가난하고 앞으로도 그런 직업을 선택할 것이라서 계속 그렇게 살것 같아서 '행복'이라고 하면 매우 이질적인 것 같았다. 이 시대가 추구하는 행복하고는 다른 관점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행복함'의 근원을 자꾸 신자유주의적인 것에서 교묘하게 꺼내오는 것 때문에 불편했다. 그런데 시편에서 아삽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 복의 근원이라고 했다. 기독교에서는 사실 이것이 맞다. 예수님도 자신을 임마누이라고 하셨고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여러 성경구절에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행복은 결국 다른 사람으로 부터 오고, 기독교인들의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함에서 온다. 기독교가 세속적으로 변할 수록 행복의 출처가 달라지는 것을 본다.



7. 인생 망했다.


친구들과 자주 '우리 인생 망했다' 그러니 '너무 잘 살려고 하지 말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시대에 잘 살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경우에 종교와 믿음은 수단이 된다. 그러니 잘 살려고 목적을 정하지 않은 순간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더욱이, 기독교에서 잘 살려고 하지 않은 이상 반드시 질문하게 된다.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생을 왜 지으시고 이 세상을 왜 만드셨나?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말이다. 이제 비로소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제대로된 표준에 들어간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말이다. '너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것들을 다 알고 있으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라는 것 말이다. 망한 인생인데 하나님과 함께 하니 새로운 인생이 된다. 물론 진짜로 인생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원동력은 '욕망'인데 그 욕망을 내려 놓으니 잠시 망한 것 같지만, 이제는 다른 길로 걸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8. 대조론과 대항론


행복함을 추구함에서 이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함'으로 넘어오면 또 큰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교회론에 있어서 '대조교회, 대항교회, 대안교회'에 관한 입장이다. 대조교회는 이 세상이 너무 지독하게 악하고 허물어져 가니 우리가 제대로된 본을 보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교단이나 보수적인 신앙들은 이 대조교회론을 옹호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물론 부작용도 많다. 우리가 교회가 짱이고, 우리 지역식구들 챙기고 우리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헌신하고. 그러나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된다. 일도 '세속적인 일'이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한계도 결국 '교회 안에 갖혀 버리는 결과'가 나온다. 대항교회론은 좀 더 심하다. 이 세상의 악함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면서 잘못된 것들과는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나 낙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혐오는 바로 대항교회론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세상과 등을 지고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본 떼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대조 교회론보다 심한게 대항론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이 사실은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항론을 외치는 교회에서 오히려 성폭력이나 성희롱이 더 많이 일어나고 불륜도 많이 일어난다. 성결에 대한 부분도 모순적인 부분이 많다. 물론 좋은 점도 많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고, 하루를 살아가는 보람을 제일 많이 느끼는 모델이기도 하다. 십자군 전쟁이나 미국의 성전'으로 치부되는 이라크 전쟁 같은 경우가 '자기효능감'이 최고조에 다다랐던 대항론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9. 대안론은 안되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안론을 비판한다.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에 각 영역에서 구조를 바꾸자고 하는 변혁주의는 말을 그럴싸 하지만 대부분 세상의 감염되어서 결국 자기 자신도 망한다는 이야기는 한다. 괴물을 상대하다가 괴물이 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변혁주의를 추구하는 많은 청년들의 기를 꺽으면서도 노파심에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자신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정말 대안론은 안되나? 대안을 만들고 부지런히 사회의 여러가지 모습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헛된 것일까? 모든 좋은 것들, 선한 것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면 우리 안에 선함과 아름다운 것들이 구조와 방향을 만들어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며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비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역할들을 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노력하고 준비하면 안되는 것인가? '부정적인 전이' 현상은 자신들이 실패한 경험들을 다른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 생긴다. '내가 해 보니깐 안되더라'고 하는 말보다는 '우리는 더 나은 실패를 할 뿐이다'라는 것으로 대답하고 싶다. 나는 정치도 하고 사회혁신도 하면서 세상의 악함과 싸우고 비통함에 대해서 응답하고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과 부단히 끊임없이 만나려고 한다. 이러다가 죽겠지만 그 다음 세대는 이 노력 위에서 또 나은 걸음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10.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근본적으로 행복함을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것의 차이는 '하나님나라가 여기에 지금 임하는가?'에 대한 대답에서 나뉜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실 것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혼자 결정하지는 않을실 것이고, 함께 함이 복이라고 하셨으니 무엇이든지 함께 하실 텐데. 그럼 내가 살아가는 한 순간 순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음이 될 것이고, 내 마음대로 못살지만 오히려 함께 결정하고 선택하고 고민하고 울고 웃는 것이 행복함이겠지. 행복함은 결국 결론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이지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걷고 있다면 우리 이웃들의 아픔과 어려움과 슬픔에 모른척 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뒷모습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듯이 우리가 이웃들과 함께하는 뒷모습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다. 시대가 주는대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시대를 바라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기를 미래의 나에게 외쳐 본다.



기독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행복은 그 결과로 보여지는 모습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읽다_교회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