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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06. 2020

은유적 인간과  팩트적 인간

 연애와 결혼에 관한 낭만적인 생각 #3

0. 들어가기

 

연애와 결혼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밤을 세어보는 시간들이 많아진다. 남들보다 늦게 결혼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작년까지는 상당했는데, 이제는 그럼 이왕 이렇게 된거 벌어진 공간과 시간의 틈 속에서 잠시 머물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과 연애의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철학자인 '폴 리쾨르'는 '이야기와 타자'에서 "누군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그 이야기의 타자가 된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내가 글을 쓰고 나면 그 글에 대해서 나는 타자가 된다는 것이다. 쓴 글과 쓰고 있는 내가 분리되는 순간이면서 나를 객관적으로 타자화 시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순간 이제는 이 이야기가 나의 삶을 읽을 것이다. 객관화의 과정 후에 다시 주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이상과 현실 속에서 균형을 맞추어 가는 과정이 '성숙'이 아닐까?


https://brunch.co.kr/@minnation/1740



1. 은유는 메타포


은유는 메타포이다. 메타포는 현실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들과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메타포를 사용하면 우리는 두 번 이상의 생각을 해야만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해석'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메타포의 특징이면서 어려운 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점점 메타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 간다. 살다보니 팩트폭격을 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데, 무엇인가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비틀어서 은유를 사용해서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메타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매력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속에서 메타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더불어서 나는 얼마나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는가?


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육체의 무게만이 아니라, 삶의 무게, 어떤 한 사람의 무게, 마음의 무게. 우리는 어떤 무게감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 우리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욕망은 욕망의 무게가 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 뱉지 못했떤 말들은 영혼의 무덤에 쌓여서 영혼의 무게가 된다. 더 많이 침묵한 사람만이 더 깊은 영혼의 언어들을 꺼낼 수 있다. 영혼의 무게가 깊어져서 우리의 심연 깊이까지 닻을 내려야만 우리는 그 깊은 마음의 속살에서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언어를 꺼낼 수 있다.


팩트는 영혼의 깊이까지 못하고 우리 인식과 사물이 바로 만나는 지점에 있다. 바깥에 1이 있으면 우리 인식도 1이라고 여기는 것이 팩트적 인간의 특징이다. 그러니 팩트적 인간의 영혼은 한 없이 가벼워질 수 밖에 없다. 팩트적 인간은 점점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흐름에 따라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험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은유적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메타포의 의미를 되새기다가 그 말이 바깥으로 나와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때 또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서 그 메타포를 타고 다른 세계로 나간다.


 


3. 팩트적 인간


빠름이 미덕인 세상, 시간이 가속되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세상에서는 여러곳에서 팩트적 인간이 출몰한다. 조심해야 한다 나도 가속도의 열차를 타면 아주 쉽게 팩트적 인간이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팩트적 인간은 가벼움 자체를 기본적인 가치로 해서 짧고 넓게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들을 팩트로만 취한다. 구글링을 통해서 얻는 작은 정보로 자신의 판단의 기준을 삼고, 그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엄근지'라는 말은 사실 진지하게 생각하면 답이 지루하다는 팩트적 인간들의 언어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팩트적 인간을 많이 만나게 되어 있다. 깊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단숨에 대답하도록 유도하고 답답해 하는 팩트적 인간 앞에서는 알랭드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이 여러번 생각난다. 만약 배우자가 팩트적 인간의 기술을 시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반응하고 감정적인 동기를 짧고 넓은 팩트에서 가지고 와서 동의를 구한다면? 매번 그렇게 반응을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그 팩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하지 않을까?


조금 더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기다리면서 마음이 하나의 언어로 표현되기까지의 그 간격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은유적 인간은 그 시간을 '낭만'이라고 표현할텐지만 팩트적 인간은 이미 답답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쉽게 흥미를 잃어 버리는 팩트적 인간은 그래서 뒤끝도 별로 없다. 저 사람이 재미없는 사람 혹은 너무 진지한 사람이라는 '팩트'를 얻어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 곳으로, 더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면 되기 때문이다.


팩트가 중요한 건 알겠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도 그래야할까?


4. 팩트적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


팩트적 인간은 어떻게 나오게 될까? 팩트적 인간이 만들어지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몇 가지로 추려 볼 수 있다. 먼저는 방어기제의 연속으로 팩트를 찾게 된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말로 담아낼 수 없는 것, 이상한 감정이나 적절하지 못한 생각들을 표현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답을 해야 할 때, 빠르게 대답할 수 있는 팩트를 던지는 것은 그 상황을 쉽게 넘어갈 수 있게 만든다. 방어기제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방어기제로 보자면 어릴적부터 쌓여온 기억 중에서 자신이 '팩트'를 놓쳤기 때문에 남에게 공격을 받았거나 '팩트'를 놓쳐기 때문에 남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면 '팩트'는 삶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상위의 가치에 팩트가 올라져 있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팩트적 인간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기생충의 한 장면


팩트적 인간은 또한 모델링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별로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이나 다양한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정보를 그대로 수용해서 그 정보로 계산을 하던가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는 것을 반복해서 보고, 듣고 경험한다면 아주 쉽게 팩트적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것이다. 알버트 반두라의 '모델링'에 의한 사회학습효과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을 못 만났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필립네모와의 인터뷰에서 사유의 시작은 '이별, 슬픈 사건, 폭력, 고통'과 같은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들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인가 사유가 깊어지는 지점은 팩트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드러날 때이다. 팩트적 인간은 안탑깝게도 이러한 상황을 별로 못 만나보았을 것이다.


쉽게, 아주 쉽게 우리의 삶은 무의미의 축제가 되어 버릴 지경이다. 정말!!



5. 은유적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


음악이 흘러나오는 어느 카페에 앉아 있다. 옆에 누군가가 있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음악에서 과거의 한 장면이 자신을 사로잡고 그시간, 그 장소로 대리고 간다. 지나간 첫 사랑의 기억일 수도 있고, 아픈 사랑의 기억일 수도 있고, 행복했던 때일 수도 있다.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팩트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서. 은유적 인간은 이것을 쉽게 시로 표현한다. '음표에 선율을 따라서 사진첩이 펼쳐지듯이 지나간 시간들이 주는 낭만'과 같은 표현들이 흘러 나올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시적언어'라고 말했다. 실재의 상황과 상상안에서의 개념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의 상징계는 한번 정해지면 그 연결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팩트는 두 가지가 1:1의 결합을 얼마나 잘 했는가를 돌아보는 작업이라면 은유는 그 결합을 완전히 비틀어 버려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낸다. 실재 상황에서 내가 느낀 감정과 기억과 사유가 새로운 개념을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개념이 실재의 적용되는 지점은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깐 이것을 표현하는 길은 '시적언어' 밖에 없다. 우리의 인식에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을 은유가 막아주기도 하는 것이다.


은유적 인간은 이 틈을 보는 사람이다,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다양한 비명소리와 인생의 복잡한 그림자들이 서로의 짝을 찾느라 아우성을 칠 때 그것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은유적 인간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필수적이고, 그 틈에서 머무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삶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한다. 스스로 목적하지도 않아도 낭만이 흐르는 것은 언제나 그렇지만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작업이 낭만이기 때문이다.


은유적 인간이 차에 물을 따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작은 순간에도 무슨 향기가 퍼져 나오는 것처럼 그윽한 시적언어들이 몸에서도 감돌고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고통과 문제들 가운데, 수없이 씨름한 결과로 그의 삶 자체가 노래가 되어버린 은유적 인간은 한 동작 한 동작에도 다양한 감정을 담아낸다.


보기만해도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은유적 인간의 모습들


6. 은유적 인간을 만나고 싶다


팩트에 반응하느라 지쳐버렸다. 팩트는 어디서나 널려 있으면서 데이터와 같이 양자역학적 속성을 가진다. 언제나 다양한 팩트가 생산되기 때문에 일일히 반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은유를 사용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발견하면 좋겠고, 나 역시도 그렇게 은유를 사용해서 다른 이들과 더 풍성과 관계를 만들어내면 좋겠다.


어느날 햇빛이 빛을 발하게 될 때 당신의 얼굴에서 그 빛이 이어서 나왔으면 좋겠듯이, 나역시도 그 빛을 머금은 미소로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 너무 많은 팩트들을 받아들이다보니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명확하고 확실한 것만 이해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림자 속에서 숨어 있는 다양한 빛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배우자에게 바라듯이 나도 은유적 인간이 되어야 겠다. 메타포라는 부메랑을 아침에 던져 놓고 저녁에 찾으면서 오늘 내가 고민하고 사유했던 메타포의 의미와 사람들 사이에서 느꼈던 감정의 바다가 하나의 화폭에 담겼으면 좋겠다. 쉽게 잠이 오지 않은 밤, 마음 속에 다양한 그림들을 꺼내 놓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만남들이 라라랜드의 결말이 되지 않았음 좋겠다.


0. 나오기


편견들로 가득찬 글쓰기.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다. 리쾨르의 말처럼 이렇게 쓰고 보니 나를 다시 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왜 그토록 방어기제처럼 팩트만 말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지, 왜 지하철에서도 유독 종이로 편 소설책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지 말이다. 원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행운이지만, 왜 쓰면 쓸 수록 나는 이렇게 준비가 안되어 있고 못난이?같은 비루함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자신과 만나는 이 직시하는 시간에 나는 좀 더 어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앞으로도 결혼과 연애에 관한 여러가지 편견들을 써 볼 텐데, 쓰는 시간동안 여러번의 변화를 경험하리라는 믿음과 신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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