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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23. 2020

약한 자아와 견고한 자아

연애와 결혼에 관한 낭만적인 생각 #4

0. 들어가기


계속해서 연재할 생각으로 연애와 결혼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하던 시간들이 오래 지나갔다. 그동안에 또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들, 내 안에 정리된 것들, 그리고 내가 고쳐야 할 것들이 새벽이 되니깐 두~둥 떠오른다. 깊어져 가는 새벽과 함께 깊이 내려가 있는 생각들을 꺼내보는 시간이다. 이 시대에 내가 느끼고 살았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들이다. 오늘은 '자아'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들과 고민했던 것들을 한번 꺼내 보려고 한다.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흥미가 생겨서 써보기 시작했다


1. 약한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약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뭐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연애할 때는 약한 자아가 처음에는 나에게 의지하는 것 같아서 매우 기분이 좋다가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이 가장 힘들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을 느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충동적 자아인 이드와 당위적인 자아 슈퍼에고 사이에서 고민하는 에고가 있다고 한다. 간략하게 설명해보면, 슈퍼에고는 초월적으로 요구하는 것들을 말하며 보통은 제도, 법, 도덕으로 구성된다. 이드는 감정과 욕구에 기반해서 만들어지는 자아이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본적인 자아인 에고가 있다. 이드는 보통 리비도라고 부르는데, '성적 충동'을 기반으로 해서 자라나는 자아라서 어렸을 때 '성의 역할 모델'에 따라서 자신의 리비도의 근원을 결정한다고 한다.


약한 자아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성적으로 은폐되거나 성역할이 애매한 상황에서 자아가 계속 노출되면 리비도는 심각한 형태로 뒤틀려지고 이것을 규정하는 슈퍼에고는 더욱더 엄격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를 판단하는 슈퍼에고가 리비도가 다른 방식으로 방출되는 것과 비례해서 비대해지면 에고는 '죄책감'을 계속해서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슈퍼에고를 말하는 존재나 사회, 조직과 집단, 사람에게 굴종하게 되는 결과가 나온다. 프로이트를 새롭게 연구한 라크 라캉은 이것을 '대타자'에 굴종하는 자아라고 말했다.


그러니깐 약한 자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성에 대한, 성역할에 대한 뒤틀림이 발생하고 욕구는 다른 방식으로 분출되면서 스트레스나 강박, 심하게는 정서적 장애나 조현증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게 심한 경우가 아니라서 '약한 자아'를 가지게 된다. 물론 나는 프로이트 주의자도 아니고 리비도의 성격을 그렇게 강력하게 믿는 편도 아니라 어느 정도만 동의할 수 있지만.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약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약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매우 편하고 스스로가 수치스럽다고 말하면서 자기 존중이 별로 없는 모습을 경험해 왔다. 그러다 보니깐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유형이 만들어진다. 특히 약한 사람에게 강한 것은 약한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자신의 슈퍼에고가 나오는 것이다.




2. 견고한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독일은 어렸을 적부터 3가지를 교육을 시킨다. 첫 번째는 성교육이고, 두 번째는 민주주의 교육, 세 번째는 생태교육이다. 그리고 이것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성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과 이야기, 성 역할에 대한 토론은 자연스럽게 육체적 성을 넘어서 사회적인 성인 젠더이슈까지 발전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태계를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성교육은 매우 자유로운 게 특징인데, '성행위'를 부정하지 않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성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생태계 안에서, 민주주의 질서 안에서 '자유'는 책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책임이란 영어로 response+ability의 합성이다.


책임이란 영어로 response+ability의 합성이다. 그러니깐 반응한다라는 뜻과 능력이라는 뜻이 합쳐져서 책임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책임진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 말에 대해서 자신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니깐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자유가 있다. 응답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해서도 자유롭지만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행위에 반응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어렸을 적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공론화하고 서로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리비도로 표현되는 이드가 은폐되지 않고 자유로우나 책임질 수 있는 상태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견고한 자아는 이런 방식으로 시작해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존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생태계와 지구에 책임을 지는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견고한 자아는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억압되거나 은폐되지 않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죄책감이 아닌 책임의 관점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고민하면서 쓰고 나니, 나 조차도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게 견고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글쓰기는 결국 성장하는 글쓰기 되는 것 같기도 하다.)



3. 자기 개념과 자기 정체성


프로이트의 다음 세대인 칼 융은 '자아'와 '자기'의 개념을 나눈다. 자아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속성이라면, 자기는 사회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아'는 약한 자아와 견고한 자아가 있다고 하면 그런 자아들이 사회 속에서 가지게 되는 모습이 '자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분화해보면 '자기 개념'과 '자기 정체성'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자기 개념'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알려주는 나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 자기 개념은 때론 평판이기도 하고, 좋아요가 되기도 하고 댓글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만들어져 있는 나의 모습을 내가 인식하는 것이다. 보통은 친구들에게서 자기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재료들을 많이 얻기도 하고 공인들은 댓글이나 좋아요로 많이 듣기 때문에 '악성 댓글'에도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약한 자아와 자기 개념이 만나면 다른 사람들의 조그만 평가에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안전부절 못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대로 견고한 자아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을 느끼면 그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연습을 한다. 그러니깐 점점 사회 속에서도 견고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자기 정체성'은 '자아정체성'과 다르다.


한편으로, '자기 정체성'은 '자아정체성'과 다르다. 자아정체성이 스스로 생각하는 자아에 대한 감정과 생각, 어떤 느낌이라면 '자기 정체성'은 사회 속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선택했던 결과의 총체이다. 이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순간에 선택하는 것들의 총합이니깐 말이다. 문제는 그 선택이 약한 자아에게서인가, 혹은 견고한 자아에서인가이다. 약한 자아에게서 만들어진 자기 정체성이라면 대부분이 자신의 죄책감이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고 '약한 자아-약한 자기정체성'은 결국 사람들 눈치 때문에 매번 다른 선택을 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혼자 있으면 잘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고 있으면 잘 못하는 사람 말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이런 경로를 거쳐 온 것이라고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반대로 견고한 자아에게서 나온 자기 정체성은 매번 자신에게 당당하기 때문에 결정에 대한 책임도, 그에 대한 실수 혹은 안 좋은 결과도 맞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을 다음에는 조금 더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더 나은 실패를 할 뿐이다'라고 하면서 바로 자신의 결정을 객관적으로 보고 고친다. 사람들은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고 보통 부른다. 견고한 자아와 연결된 자기 정체성은 결국 '자기 개념'에 있어서도 완전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런 사람은 투명성, 순수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의도에 있어서도 바르며,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어떤 느낌인지를 조작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이런 사람과 있으면 맑고 깨끗한 기본과 함께 행복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고,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해서 책임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게 만들어준 드라마



4. 그럼 연애와 결혼에서는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자 이렇게 밑판을 깔아 보았으니, 이제 연애와 결혼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상대방이 약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처음에는 매우 의존적인 태도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책임감이 강하고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상대방은 그것을 오히려 행복의 요소로 여기면서 이것저것 다 들어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긋나는 경우가 생기는데,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한다. 나를 의지하고 칭찬하는 상대방의 태도가 돌변하면서 오히려 살 어름판을 걷는 것 같은 한기가 느껴지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시'하는 감정들이 점점 마음을 얼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죄책감을 전가하거나 혹은 다른 요구들을 한다. 그것은 한번 더 확인해보는 것이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그러니깐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연애할 때는 이 모습이 안 보이다가 결혼을 하면 책임질 일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무리 견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자기 개념'이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날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견고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결정하는 '선택'에 심각한 의심을 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포장하여 '선택'을 의심한다. 그래서 시간이 점점 자라날수록 그 의심을 인식한 견고한 자아를 가진 상대방의 '결정'은 점점 힘을 잃어 간다.


부부는 동질한 시간과 공간을 함께 누리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보고 자란다. 그러니 상대방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거나 찡그리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으면 당연히 영향을 받게 된다. 힘든 경우는 둘 다 약한 자아를 가진 경우이다. 그럼 어떻게 될까? 대부분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헤어지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고 매우 빠른 시기에 다른 의존할 사람을 찾는 것도 볼 수 있다. 여성들만 그러는 것 같지만, 사람은 거의 똑같은 것 같다. 이별의 시간에도 '이별의 슬픔'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아파할 줄 아는 것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견고한 자아의 특권이긴 하다.


진짜 이러지는 말자~! 이 남자의 자아를 보라!


5. 같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나 상처는 있고, 죄책감도 어느 정도 있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어떤 환경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부모님과 살았는가에 따라서 당연히 연약한 자아가 될 가능성이 많다. (매우 강력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반전이다. 그 강력한 자아는 리비도가 슈퍼에고와 거의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연약한 자아의 다른 모습이다. 견고한 자아는 고집불통이나 안하무인이 아니다.)


그러나 먼저는 서로의 약점을 털어놓고, 자신의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는 서로의 약점을 털어놓고, 자신의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나하나 꺼내 놓고 서로의 햇빛에 말리는 과정을 통해서 축축했던 자아는 금방 뽀송뽀송해지고 서로에게 감촉 좋은 이불이 될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덮어지는 이불 말이다.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그동안의 선택의 순간들과 결과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했는지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사건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공감대가 생기고 그다음으로 자아의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다. 연약한 자아라면 금방 나오겠지만, 이미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야기를 꺼냈다면 연약한 자아는 방어기제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청할 수 도 있다. 그 도움은 의지하겠다는 도움이 아니라 '나를 그냥 이대로 봐줘'라고 하는 청이다. 가끔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안돼?'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이다.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만, 판단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도 그것을 말했으니깐 '너가 이제 이건 건드리지마'라고 하긴 보다는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연약한 자아가 계속해서 책임지지 못하는 선택에 대해서 함께 '책임지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로는 이런 방식으로 얽혀 가면서 이들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



0. 나오기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이다. 연애의 상대방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인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 사람이 가진 직업이나 소유, 집안 배경이나 학벌은 오히려 그 사람의 자아를 연약하게 만들어주거나, 자기 개념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 물론 모든 부분에서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지키는 게 쉽지 않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인간의 습관이 참 무서운 법이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도, 그리고 상대방과 함께 내린 결정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견고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상대방을 보면서 나도 성장하고 성숙하고, 또 미래의 아이들이 이런 부모의 모습 가운데서 태어나서 자유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다.


똑같다. 쓰고 나면 항상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쓰는 동안 나의 지난날의 선택과 죄책감의 순간들이 앞을 가린다. 다시 나를 돌아보고 조금 더 깊어지고 성찰하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연약한 부분에서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 아직 스스로에게도 비밀인 것들을 찾아보는 여행을 해야겠다. 항상 이 주제로 쓰는 글은 처음에는 즐겁고 흥미롭게 쓰다가 마지막에는 괴롭고 의미 있는 것 같다.


아름답게 남아 있는 영화, 해가 뜨기 전에! 그렇지 해가 뜨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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