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이 쓰임이 됩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으 내어 방을 만드는 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있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 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나눔과 공감
1.
노자의 사상은 조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노자를 제외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은 '목표'를 상정하고 나아감에 있다면 노자사상은 한사람한사람의 자연스러움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노자사상을 처음에는 아나키스트와 같은 느낌도 들지만, 사회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들이 국가라는 큰 틀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혁신협동조합안에서 여러가지 '해봄' 모임이 있는데, 이 모임들이 '조화'를 이루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노자사상의 흐름을 이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2.
무위자연'과 같은 노장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는 자연인이 되는 것이 노자의 핵심사상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단편적이라는 것과 시대적 맥락을 잘 읽지 못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유가와 노자의 대립은 '통치질서'에 대한 부분에서 강하게 부딪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유가가 통치의 주요한 사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승리자의 입장에서 노자의 사상은 묻히거나 파편화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자연에 가깝게 실철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는 '상선약수'의 핵심이다. 물의 특징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가장 넓게 편만하게 펼쳐지는 속성을 가진다.
'거선지'는 현실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든 혁신이든 현실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땅에 거해야 하고 마음을 비우고 사사로운 목표와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애정과 연대와 신뢰가 필요하다. 우리의 주장이 신뢰를 얻어야 한다. 방법론도 평화적인 방법론을 추구해야 한다.
전문성도 필요하다. 세상을 보는 시선과 통찰력과 함께 능력과 용이 필요하다.
3.
무위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론과 실천의 방식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위와 유행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든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로가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적인 재생산이 될려면 공로는 누군가의 몸에 붙어서 위력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행'을 하려면 '공'이 세력이나 신뢰를 만들어내서 현실을 바꿀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노자는 이런 방식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모든 정치는 백성들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것을 믿겠끔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정치조직의 지속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무위'하려는 힘과 '무위'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지 않는가? 사회생활을 할 때도 어떤 변화를 만들어갈 때 이미 친한 사람들을 제외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하고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아예 안 믿으면 하지 못하게 되는데 말이다.
통치의 수단으로 '드러난 사람'은 이용당한다. 쉽게 우리는 이러한 이용과 조종의 방식을 사용하게 되는데, 노자사상에서 볼 때 이렇게 되지 않을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결국은 다른 길, 혹은 다른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일까?
4.
동양고전을 읽을 때 지금 현재의 사고방식으로 고전이 쓰일 당시를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한문 자체가 상징성을 그대로 현실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역시 해석이 필요하다.
한자는 추상적이기 어렵고 현실에 안착할 수 밖에 없다. 상형문자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추상화하는 과정이 어려울 수 있다.
물과 무위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사회와 개인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관계를 짓는가? 사회의 범주를 어디까지 놓아야 하는가? 노자를 보면서 자연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본다.
인위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지는가? 유가의 경우는 이미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은 사사로움이 투사된 것이다. 그러나 무위는 잠재성의 측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생성과 변화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 변화라는 것이 개인과 외부로서의 사회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도' 나 '자연'은 외부의 규칙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범주로 귀속되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지 않을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건축에서도 노자와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공간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무는 고요함이다' 고요함은 시작하기 직전, 공간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한다. 고요함은 Volume zoro라고 할 수 있고 빛은 드러남 혹은 반사라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을 통해서 사물을 만지고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개인은 공간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안에서 잠재성은 여전히 고요함 속에서 숨쉬고 있고 빛이 비추면서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만나게 된다.
'추'나 '미'라는 개념은 사회 안에서 동일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회에서 판단을 내리는 기준으로 미의 개념이 만들어지는데, 그런 관점이라면 '유와 무'도 같은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유와 무가 원래 하나였다면 '미와 오, 미와 추'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는 소유와 자본으로 귀속되고 교환가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노자의 사상으로 사회를 다시 규정하고 자연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공동체의 정치와 근대국가의 정치는 다른 부분이 많다. 공동체의 정치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민네이션, 생각
1.
노자사상은 흔히 '무위도식'이라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잘못된 인식은 그래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도를 따르는 순간 이미 그 도는 인간의 인식에서부터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것이다. 도를 따르려고 하는 순간 말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순간 무에서 유로 바뀌고 유는 다시 소유의 개념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비교하지 않고 내면에서 끌어나오는 자연스러움이 무위일 것이다.
2.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할 때 '법가'사상을 통해서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엄격하고 비인격적인 법치사상은 통치구조로는 오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교는 위계질서에 신뢰를 더해서 전쟁상황이 아닐 때 자연스러운 시민의식과 백성과 신하의 도, 아버지의 도와 자신의 도를 제시한다. 그러나 노자는 이것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회는 오히려 자연을 닮아야 하고 자연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수권정당으로서 주용한 것은 통치제도와 통치이념의 조화이다. 노자의 사상에서 통치이념은 무위라면 통치제도는 정리하기에 약간 어려움이 있다.
3.
니체와 스피노자의 도움을 받아보자. 니체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설과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노자사상과 그 맥이 통한다. 분할하고 나누고 다시 섞고 조합하는 방식은 사실 인위적이며 인간의 의식과 인식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합성된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가 정한 합성방식이 제도가 되고 국가가 되고 운영원칙이 되면 그것 자체가 '권력'이 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자연으로 돌아가서 모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사회운영원리로 제시한다.
4.
의식에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것. 언어나 상징이 없이, 제도나 원리가 없이 바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 인위가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의 질서대로 살아가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통치구조와 통치제돌르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노자의 정치사상이다.
5.
무위의 관계는 오히려 '친구'일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투영해서 만들어 놓은 법칙과 제도를 삶들 안에서 구현하지 않을려면 오히려 다른 방식의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사장님과 선배가 아니고, '친구'가 아닐까? 함께 걷는 친구. 자연과 친구가 되고, 노인과 아이가 친구가 되고.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
민네이션, 비판
1.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위적이고, 자연과 다르다고 하다면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나온 '유'라면 만들어지고 나서 '유'가 새로운 '현'과 '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도 자연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흡사 '이신론'과 같은 것이 아닌가?
2.
인간의 악함, 욕심으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구조를 무너뜨리거나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나는 무위를 영위하고 있지만, 너무 많이 현실에서 잘못된 구조와 방향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노자사상으로는 어떻게 대입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것이 너무 높은 이상이지 않은가?
참고 1. 선거는 민주적인가?
17세기 이후 탁월함이라는 기준으로 선거는 '대표'의 자질을 평가하는 판이 되었다. 선고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그 후 수 많은 제도와 인간관계들을 어떻게 하면 바꾸어 볼 수 있을까? 노자사상에서 어느정도의 힌트를 얻어볼 수 있지 않을까?
"선거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정치의 위기는 어디에 있는가? 근본적으로 대표와 대표되는 사람 사이의 간극에 그 원인이 있다. 정치 지형이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 일 때, 정치 전문가들은 갈등을 사유화하고 사회 균열을 편향적으로 동원하며, 정치계급화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제도는? 합법적인 것으론 선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선거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피통치자의 유일무이한 심판 수단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선거권이 확장되고 절차가 제도화 되었는데도 대표와 대표되는 사람 사이의 간극은 여전한 것이 아닌가? 아니, 오히려 절차의 제도화와 더불어 그 간극은 심화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은 이와 같은 질문에서 시작해 고대 직접민주정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러 대의민주제가 제도화되기까지의 역사를 통해, 선거가 가진 불평등주의적, 귀족주의적 측면을 고찰한다.
선거보다는 추첨이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교체를 더 확실하게 보장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에는 선거가 아니라 추첨을 통해서 대표를 선출했다. 따라서 정치 역시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추첨을 통해 획득된 평등은 재능과 노력에 따라 관직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기회의 평등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은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동일한 몫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중적 상이함은 추첨이 평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평등은 정의에 대한 현대 이론들이 간과한 세 번째 형태, 즉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는 평등한 가능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본문60쪽)
그러다가 근대국가가 성립과 함께 선거가 제도화된다. 근대 자연법 이론가들은 선거를 세습적 귀족세력으로부터 그들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그 권리가 민중들의 권리로는 나아가지 않도록 제어하는 수단으로 제도화했다. 선거 절차가 구조화 될수록, 탁월성을 가진 사람만이 선거를 통해 선출될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는 인민의 통치에서 인민의 동의로 축소됐다.
“대의 정부가 등장했을 무렵에 중요했던 정치적 평등은, 권력에의 동의에 대한 평등한 권리였지 관직을 가질 기회가 아니었다. 이것은 새로운 시민권의 개념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 관직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간주되었다.
… 이로 인해 우리가 특정한 시민권 개념(18세기에 형성된)에 대한 우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시민들이 관직을 얻고 싶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분치 못 한 재화인 관직이, 대의 제도를 통해 어떻게 시민들에게 배분되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본문121쪽)”
이 책의 논의는 고대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거’ 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귀족적인 동시에 민주적이며 불평등하면서 평등한,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 선거가 어떻게 우리에게 한편의 의의로만 비춰지게 된 것인지를 그 역사를 통해 밝힌다.
우리가 선거의 한 쪽 측면만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얼마큼이나 빈약해진 것인지 다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얼마 만큼이나 제한한 것인지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민주주의의 생명력은 다른 가능성을 사유 할 수 있는 힘, 변화를 제도화 하는 힘에 있다고 한다. 알고 있듯, 변화의 시작은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에 자신을 놓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대화상대로 충분하다.
접기
목차
서론
1장 직접 민주주의와 대표성
2장 선거제도의 승리
공화주의 전통에서의 추첨과 선거 : 역사의 교훈
17,18세기의 선거와 추첨
선거의 승리 : 관직 수행에서 권력에 대한 동의로
3장 탁월성의 원칙
영국
프랑스
미국
4장 민주주의적 귀족정
선거의 귀족주의적 특성 : 순수 이론
선거의 두 가지 얼굴 : 모호성의 이점
선거와 근대 자연권의 원칙들
5장 인민의 평결
대표의 부분적 독립성
여론의 자유
선거의 반복적 성격
토론에 의한 심판
6장 대의 정부의 변형들
의회 정치
정당 민주주의
"청중" 민주주의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