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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25. 2020

해석학과 구조주의_해석의 갈등 3

폴리쾨르_해석의 갈등 3

https://brunch.co.kr/@minnation/1624


해석은 언제나 갈등을 겪는다. 우리가 경험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겪은 사건에 대해서 각자가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개인 내면에서도 해석의 갈등은 시작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이 시작되고 육체와 정신의 갈등이 시작된다. 나의 지나간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머리는 그때의 논리적인 구성으로 해석을 마무리하지만, 문을 잠그는 것을 막는 감정의 해석은 다시 새로운 문을 열게 한다. 해석의 갈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겪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오늘은 리쾨르의 해석학에서 구조주의와 어떤 대칭점을 두고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구조주의는 과학에 속하고 해석학은 철학에 속한다. 의미가 효과를 내는 수준이 다르다. 구조주의는 엄밀하고 객관적인 지성이며, 해석학은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이 있고 앎과 믿음의 순환이 있어 명상에 가까운 지성이다. 구조주의는 떨어져서 보는 것이고, 해석은 보는 것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으면서 보는 것이다. 리쾨르의 무게중심은 물론 해석쪽에 있다. 해석학에서 볼 때 구조주의에는 중대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역시 객관성의 문제에서 구조주의는 해석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_p17


구조주의는 과학에 속한다. 과학은 정해진 답이 있고, 원리와 방법이 있다. 그러나 과학의 시작은 언제나 자연과 우주였다. 문제는 '인격'이라는 의미에서 구조주의가 '주체'를 상실시킨다는 점이다. 해석학은 이것과 완전히 다른 곳에서 시작한다. 주체가 있고, 주체와 의지가 해석을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매번 매번. 그래서 해석을 하는 순간 인간은 주체가 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해석하는 '이야기'에 와서 붙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살이 되고 기억의 중심에서 자신이 한 이야기를 자신이 가장 먼저 듣는다. 해석학과 구조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과의 거리에 있다. 구조주의는 현실에서 멀어져야만 구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떨어져 있는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해석학은 자신이 해석하고 있으면서 해석의 대상이 되는 학문이다. 그래서 해석학에는 현상을 해석하는 자신을 포함해서 해석의 해석을 하게 된다.


해석은 보는 것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으면서 보는 것이다


닫힌 기표 안에서만 과학이 가능하다. 그러나 해석은 닫힌 기표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언어를 붙들지만 동시에 언어가 언어를 빠져나간다. 차이의 체계 안에서 계속 도는 것이 아니다. 해석학이 붙드는 상징 언어는 '무엇에 대해 무엇을 말한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해석은 그 말을 풀어야 한다. 1차 의미가 죽으면서 2차 의미를 향한다. 언어는 죽었다가 다시 산다. 구조 분석으로 찾은 의미 단위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고 결합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_p17


세상은 언제나 간단하게 두 가지가 서로 대응해 왔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움직이는 것은 운동이 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체계가 되었다. 과학은 움직이지 않은 명징한 것들을 가지고서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해석학은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서 같이 움직이면서 상황 속에서 해석하면서 주체가 된다. 나중에 마지막으로 폴 리쾨르는 자신의 책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이야기하는 주체에 대해서 말한다.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는 일단 언어체계를 사용해야 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반응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과거의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오로지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언어는 말이다. 랑그lague보다는 파롤parole이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가 기호이기를 넘어서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으로 가는 것이다. 언어는 사라지기를 바란다. 대상으로서는 죽기를 바란다. 구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조를 넘어서기를 언어자체가 바라고 있다. 언어는 언어 바깥의 삶의 현실이나 존재현실을 가리키는 수단이다. 폐쇄된 기호체계 대신에 말 사건의 개방이 있다_p17


언어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살아 있다. 살아서 개방된 체계 안에서 여러가지를 끌어오고 잡아오고 연결시킨다. 그래서 원래의 랑그의 원리보다 현재의 파롤이 더 많은 활동성을 가진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서 파롤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감싸고 표현하고 인용하고 이해한다. 이러는 사이에 언어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운동이 체계를 조금ㅆ기 바꾸고 현실의 과거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주체를 미래로 밀어낸다.


구조를 넘어서기를 언어자체가 바라고 있다

결국 구조주의는 현실을 탈마술화하고 비신비화하는 과학 정신의 산물이다. 구조언어학은 특별히 인간의 말을 비신비화하고 있다. 시나 거룩한 상징이라 할지라도 의미소 변수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사전용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시도 자체도 과학을 비신비화해야 하듯이 비신비화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언어의 신비와 삶의 신비를 말해야 한다. 철학의 사명은 거기에 있다. 말과 담론 수준에서 발생하는 겹뜻의 문제, 해석학은 거기에 주목하고 말뜻을 통해 전개되는 존재의 의밀르 찾는다. 구조 분석으로도 상징을 말할 수 있지만, 상징의 맛을 잃는다. 언어의 저 밑에서 상징이 구성되고 신비가 없다. 상징이 뜻하는 것, 그 문제에서 구조언어학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_p18


구조주의가 진행하고 있는 신비를 벗겨내는 작업, 미신을 쫓아내는 작업은 과학의 방법론을 사용한다. 그것은 정확학 팩트와 이론을 바탕으로 다른 요소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보이는 것들로 구성된 전체를 총체성으로 가지고 가려는 것이다. 리쾨르는 여기서 멈춘다. 바로 그러한 시도자체가 바로 신비화과정이라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방법론의 비신비화의 신비화말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성된 현실에서 보이는 것들로만 구성된 실제를 모으면 그것은 절충이다. 배치이면서 구분이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삶읜 '종합'되어서 나타나지 않으면 시간 위에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들이 그렇다. 음성들의 구성과 배치인 '언어'가 새로운 뜻과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것은 과학적인 형태소와 의미소의 구분과 배치에 따른 것인가? 전혀 아니다. 바로 여기에 해석학의 묘미가 있다. 물론, 화용론의 묘미도 있다. 총체적으로 구성된 인간의 삶을 보이는 것들로만 구성하는 유물론적 구조주의는 그래서 언제나 한계에 부딪힌다.


구조 설명은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으로,뜻을 찾는 과정에서 거치는 한단계이다. 한 낱말이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낱말과의 차이 때문이다. 낱말은 다른 낱말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차이를 통해 낱말에 상징성을 준다. 다시 말해서 상징은 동떨어진 개별 상징이 아니고 다른 상징과의 관계에서 상징이다. 상징과 상징은 어떤 끈으로 묶여 있으며 그 차이로 말미암아 상징이다.


절충하지 않고 종합하는 것, 그것이 리쾨르의 작업이다. 구조주의를 비판만 하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 만들어내는 과정자체를 구조주의에서 찾되 상징들끼리의 놀이에서는 상징 자체를 해석하는 주체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구조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지 않지만 구조에서 나오는 상징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상징의 상징을 만들어낸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처럼 상징들은 더 깊은 상징에서 끌어 올려지는 것과 같다. 다른 것과의 차이는 다른 곳에서부터 출발한 의미, 다른 구조에서 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상징들의 관계를 가지고 또 다른 상징을 만들어내거나 상징의 층위와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것, 우리는 이것을 '이야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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