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쾨르_해석의 갈등 3
구조주의는 과학에 속하고 해석학은 철학에 속한다. 의미가 효과를 내는 수준이 다르다. 구조주의는 엄밀하고 객관적인 지성이며, 해석학은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이 있고 앎과 믿음의 순환이 있어 명상에 가까운 지성이다. 구조주의는 떨어져서 보는 것이고, 해석은 보는 것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으면서 보는 것이다. 리쾨르의 무게중심은 물론 해석쪽에 있다. 해석학에서 볼 때 구조주의에는 중대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역시 객관성의 문제에서 구조주의는 해석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_p17
해석은 보는 것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으면서 보는 것이다
닫힌 기표 안에서만 과학이 가능하다. 그러나 해석은 닫힌 기표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언어를 붙들지만 동시에 언어가 언어를 빠져나간다. 차이의 체계 안에서 계속 도는 것이 아니다. 해석학이 붙드는 상징 언어는 '무엇에 대해 무엇을 말한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해석은 그 말을 풀어야 한다. 1차 의미가 죽으면서 2차 의미를 향한다. 언어는 죽었다가 다시 산다. 구조 분석으로 찾은 의미 단위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고 결합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_p17
그러나 언어는 말이다. 랑그lague보다는 파롤parole이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가 기호이기를 넘어서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으로 가는 것이다. 언어는 사라지기를 바란다. 대상으로서는 죽기를 바란다. 구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조를 넘어서기를 언어자체가 바라고 있다. 언어는 언어 바깥의 삶의 현실이나 존재현실을 가리키는 수단이다. 폐쇄된 기호체계 대신에 말 사건의 개방이 있다_p17
구조를 넘어서기를 언어자체가 바라고 있다
결국 구조주의는 현실을 탈마술화하고 비신비화하는 과학 정신의 산물이다. 구조언어학은 특별히 인간의 말을 비신비화하고 있다. 시나 거룩한 상징이라 할지라도 의미소 변수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사전용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시도 자체도 과학을 비신비화해야 하듯이 비신비화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언어의 신비와 삶의 신비를 말해야 한다. 철학의 사명은 거기에 있다. 말과 담론 수준에서 발생하는 겹뜻의 문제, 해석학은 거기에 주목하고 말뜻을 통해 전개되는 존재의 의밀르 찾는다. 구조 분석으로도 상징을 말할 수 있지만, 상징의 맛을 잃는다. 언어의 저 밑에서 상징이 구성되고 신비가 없다. 상징이 뜻하는 것, 그 문제에서 구조언어학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_p18
구조 설명은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으로,뜻을 찾는 과정에서 거치는 한단계이다. 한 낱말이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낱말과의 차이 때문이다. 낱말은 다른 낱말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차이를 통해 낱말에 상징성을 준다. 다시 말해서 상징은 동떨어진 개별 상징이 아니고 다른 상징과의 관계에서 상징이다. 상징과 상징은 어떤 끈으로 묶여 있으며 그 차이로 말미암아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