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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06. 2020

해석의 갈등 2

폴리쾨르 읽기_양명수 머릿말

https://brunch.co.kr/@minnation/1623


절충하지 않고 종합하는 것은, 리쾨르가 볼 때 철학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인류의 사상의 역사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찾던 노력들, 그것들이 주체를 세우고 존재의 깊이를 찾는데 이바지하도록 이끈다. '해석의 갈등'이라는 책 제목도 그것을 뜻한다. 여러가지 학문이 삶을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으며 갈등을 빚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해석의 갈등은 여러가지 해석의 갈등을 뜻한다_해석의 갈등 14p


보는 법이 다르다. 보는 차원이 다르다. 보는 차원이 다른 것은 다른 궤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학문 간에는, 혹은 다른 견해 간에는 다름이 발생하는데, 차이가 심각하게 벌어진 경우 대부분은 그 차이들을 인정하고서는 그대로 놓아둔다. 물론 그 다음에 안 만나면 다행이지만, 계속 만나야 하는 사람, 학문, 관계에서는 어정쩡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하수는 절충하고 고수는 종합한다.
하수에게는 세상은 전쟁터이고 고수에게는 놀이터가 된다.


리쾨르의 해석학이 이룩하는 새로운 인간 이해는 새로운 주체를 정립한다. 우리가 리쾨르 해석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도 결국은 주체문제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에 주체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모델을 우리는 리쾨르에게서 본다. 주체를 말하는 것은 자유를 찾는 길이다. 아무리 존재론을 말하고 자연주의가 득세한다해도 주체를 말하지 않고 자유를 찾을 수는 없다. 자유는 구원이요, 해방이다. 철학이 인간의 자기 이해라고 했을 때, 자기 이해 속에는 주체를 세우려는 노력과 욕망이 들어 있다. 이해는 그런 노력과 욕망의 산물이다. 자연이나 다른 사람에 휘둘려지지 않는 자아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사상의 역사이다._같은책 15p


종합은 역량의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종합할줄 몰라서 절충하는 상태로 두면 커다란 문제가 생긴다. '정체성' 다시 말하면 '주체' 정립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주체가 사라진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기증명'을 스스로 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은 절충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장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리쾨르는 다시 주체의 문제를 꺼낸다. '종합'하는 방법은 바로 해석을 통한 자기이해에서이다. 그 자기이해는 바로 해석을 하고 있는 내가 하는 것이다. 해석을 하는 주체로 부활한 나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상황들을 해석하고선 그 안에 여러가지 갈등들을 소환하여 이야기하는 가운데 나의 것과 아닌 것, 실수한 것과 잘한 것들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현대를 넘어서 현재에 우리가 주체를 잃어버린 증상은 바로 '나의 이야기'가 없이, 복사와 갖다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쾨르를 어느정도 공부한 후에 리쾨르를 넘어갈 생각을 해야 한다. 리쾨르의 말대로라면 소위 '거인들의 어깨'에 걸터 앉아서 자신이 거인이 된 것처럼 구는 사람은 사실은 '주체'가 아닌 것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이 시대에 주체를 말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교만한 주체, 자신만한한 주체는 아니다. 코기토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존재의 깊이를 잃고 해방자의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코기토의 확실성은 인정하지만 내용이 없다. 데카르트처럼 '나는 나다je suis ce pue je suis'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해석학은코기토에 대립하는 철학의 모습을 띈다_같은책 16p


타자가 필요없이 자기를 스스로 인식하는 정신은 '한번도 집밖에 나갔다 온 적이 없는' 서양 정신을 상징한다.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 본 적이 없는 이는 얼마나 교만한가? 서양의 정신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시키고 자신만만하게 다른 사람들을 '야만'으로 부르면서 근대화를 이루어 왔다. 야만을 인식하는 나 역시 야만이라는 것을 잊어 버린 것이다. 야만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그 코기토가 어떻게 야만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더욱이 야만이라고 하려면 자신이 가진 것이 야만이 아니라는 이분법을 그어야 하는데, 그것은 야만이 정이면 자신이 '반'이 되는, 그러나 그 속에는 텅 비어있는 야만이 되는 것이다. 나를 인식하는 코기토의 내면에서는 인식하는 자체의 행위 외에 나를 증명해 줄수 있는 명징한 것들이 사실은 없다. 그래서 온갖 개념들을 끌어오고 맞춰간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광활한 대지에 나름의 구획을 정하고 생각의 농장을 일구고 개념의 도시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건은 자신감이 된다. 그야말로 자신으로 가득찬 성이 되는 것이다.


코기토는 자신이 지은 성에 자신이 갖혀 버린다.
자인식 과잉이 찾아오는 것이다.


해석학 역시 인간의 자기이해 문제를 다루고 주체를 말한다. 그러나 코기토와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말한다. 자기 이해는 자기로부터 자기에 의해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에둘러 일어난다. 내가 누구인지 직접 알 수 없다.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안다. 해석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것은 기초존재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남의 말을 풀면서 존재를 향한 개방의 길이 열린다. 이해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현현의 문제이다. 이해와 믿음의 '해석학적 순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품는다. 모든 이해의 방법들을 중시하되, 그것들을 이해의 존재론의 영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_같은책 16p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체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간다. 해석하는 사이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자신이 경험한 것과 당시의 감정과, 그 당시까지의 자기이해가 모두 현현present하는 지금 담기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context 상황의 문제에서 '화용론'의 문제가 나오긴한다. 다시말하면, 말하는 순간의 상황과 관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쾨르는 '행위'에서 '행위자'로 초점을 옮긴다.) 나를 개방하고, 내 안에 갖히 나를 개방하면 다른 차원들이 해석에 들어온다. 나의 이해와 타자의 이해가 만나서 더 입체적인 해석을 가져다준다. 오히려 열리는 순간 더 많은, 깊은, 넓은 해석을 할 수 있다.


의식은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라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되면서 자기 이해에 도달하고 온전한 의식을 얻는다. 인간은 자신만만한 주체가 아니라 치유되어야할 존재인 것이다. 해석되면서 해석한다.


던져진 존재는 타자에 의해서 해석되고, 타자는 나에 의해서 해석된다. 직접 내가 나를 인식하는 외로운 자아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읽어가는 가운데 해석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해석은 '반성'을 낳게 된다. 해석하면서 반성하고 이해하면서 '내가 잘못한 건 없나? 그 때 내가 잘한건가?'를 생각하는 사이에 인간의 영혼은 더욱 깊은 울림을 낳는다.




앞으로 살펴볼 내용


1. 해석학과 구조주의

2. 해석학과 정신분석학

3. 해석학과 현상학

4. 악의 상징과 해석학

5. 종교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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