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쾨르 읽기_양명수 머릿말
절충하지 않고 종합하는 것은, 리쾨르가 볼 때 철학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인류의 사상의 역사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찾던 노력들, 그것들이 주체를 세우고 존재의 깊이를 찾는데 이바지하도록 이끈다. '해석의 갈등'이라는 책 제목도 그것을 뜻한다. 여러가지 학문이 삶을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으며 갈등을 빚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해석의 갈등은 여러가지 해석의 갈등을 뜻한다_해석의 갈등 14p
하수는 절충하고 고수는 종합한다.
하수에게는 세상은 전쟁터이고 고수에게는 놀이터가 된다.
리쾨르의 해석학이 이룩하는 새로운 인간 이해는 새로운 주체를 정립한다. 우리가 리쾨르 해석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도 결국은 주체문제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에 주체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모델을 우리는 리쾨르에게서 본다. 주체를 말하는 것은 자유를 찾는 길이다. 아무리 존재론을 말하고 자연주의가 득세한다해도 주체를 말하지 않고 자유를 찾을 수는 없다. 자유는 구원이요, 해방이다. 철학이 인간의 자기 이해라고 했을 때, 자기 이해 속에는 주체를 세우려는 노력과 욕망이 들어 있다. 이해는 그런 노력과 욕망의 산물이다. 자연이나 다른 사람에 휘둘려지지 않는 자아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사상의 역사이다._같은책 15p
리쾨르의 해석학은 이 시대에 주체를 말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교만한 주체, 자신만한한 주체는 아니다. 코기토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존재의 깊이를 잃고 해방자의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코기토의 확실성은 인정하지만 내용이 없다. 데카르트처럼 '나는 나다je suis ce pue je suis'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해석학은코기토에 대립하는 철학의 모습을 띈다_같은책 16p
코기토는 자신이 지은 성에 자신이 갖혀 버린다.
자인식 과잉이 찾아오는 것이다.
해석학 역시 인간의 자기이해 문제를 다루고 주체를 말한다. 그러나 코기토와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말한다. 자기 이해는 자기로부터 자기에 의해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에둘러 일어난다. 내가 누구인지 직접 알 수 없다.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안다. 해석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것은 기초존재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남의 말을 풀면서 존재를 향한 개방의 길이 열린다. 이해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현현의 문제이다. 이해와 믿음의 '해석학적 순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품는다. 모든 이해의 방법들을 중시하되, 그것들을 이해의 존재론의 영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_같은책 16p
의식은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라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되면서 자기 이해에 도달하고 온전한 의식을 얻는다. 인간은 자신만만한 주체가 아니라 치유되어야할 존재인 것이다. 해석되면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