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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20. 2020

남강 이승훈의 교육사상

방통대_교육사 중간고사

『교육사』교재에 소개된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교육사상가 및 실천가 중 1명을 선정하여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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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강 이승훈의 생애

2. 남강 이승훈 교육사상의 특징

3. 남강 이승훈 교육 사상에 대한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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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교육은 100년을 바라보고 세운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깔려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적인 교육 방식은 인간을 바라볼 때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율성'을 지닌 주체로 보고, 사회 속에서 법률과 절차에서 일정한 기준만 세워주면 어디서든지 자신들의 잠재성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양의 공동체주의적 특성에서 교육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깨닫고 배우는 친구의 관계로 인의 이성은 인성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 동양교육의 특징이었다.


조선말기를 지나서 근대의 교육제도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면서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것과 받아들어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서양의 기술만 가지고 올 것인가? 아니면 내용도 같이 가지고 올 것인가하는 동도서기론이 있었는가 하면 중국에서는 중체서용인지, 서체 중요인지에 대한 이분법적인 분할작업과 그 다음의 통합작업이 한참 갈래를 나누어서 싸우게 되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개념이라는 것은 항상 장소와 시간 안에서 생겨나는 결합이라서 시간을 옮기거나 장소를 옮기면 그 자체로 다른 개념이 되어 버린다. 교육사상도 마찬가지로 서양에서 들어온 기술과 그에 따른 방법론과 실천론으로서의 학문과 원래 인간을 정의내렸던 조선시대의 방식이 근대라는 '대한제국'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를 일제 강점기하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지키고 성장시키고 성숙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강 이승훈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을 공유하는 흥사단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도산 선생님의 동료와 함께 수련하면서 성장해 가는 주체성의 철학이 남강 선생님의 교육철학에서도 많이 들여다 볼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교육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극보수화되어 가는 시대 속에서 남강 선생님이 100년전에 남겨 놓은 교육의 씨앗을 찾는 작업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1. 남강 이승훈의 생애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은 1864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빈한한 민중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16세에 유기상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10여 년 동안 유기 곧 놋그릇 행상)과 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고 평양 자기회사, 태극서관을 경영했다.

남강은 뛰어난 사업가로서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노동환경을 혁신하였다. 노동자들의 신분이나 계급에따라서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접하여 생산능률을 높였으며 품질로 좋아져서 사업이 계속 발전하였다. 흡사 협동조합의 창시자인 영국의 로버트 오언과 같은 인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부분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무역에도 참여하여 국제무역회사를 세웠고, 곧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지만, 엽전을 가지고 오는 배가 일제 군함과 충돌하여 파선하고 더욱이 1904년 러일 전쟁의 발발로 사업이 파산하게 되었다.

1905년에는 대한제국이  을사조약 체결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였는데, 남강은 평양에서 만민공동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물론 이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이미 이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사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다. 아무튼 남강과 안창호 선생님은 여러모로 민족운동의 결을 같이 했다.

남강은 40대의 나이에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교육 사업을 시작했했고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신식학교인 오산학교까지 한평생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 봉사했다. 초등학교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중등과정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워서 인재 양성을 통해 부국강병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였다. 1910년 대한예수교 장로교 신자가 되었으며,1916년 장로로 선출되었다.

1922년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이상재,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지만,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하여  불교,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선정되었으며, 이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래서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도 교원들이 모두 검거되었고, 민족교육의 핵심이었던 오산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오산학교의 정신과 인성교육에 흐름을 잘 이어 받은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다시 지어져서 후대를 양성하게 되었다.

1922년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웠다. 약 천여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로 운영하였으며 이와 함께 오산학교 경영에 박찰을 가하였다.

더욱이 이상재, 유진태 등과 함께 교육에 대한 미래를 그리고자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였다. 이후에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낸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1930년에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강은 경성제국대학에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일제에 의해서 거부당했다.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무일푼으로 태어났지만 자수성가해서 자신과 가족을 챙기고 남을 만큼 편안한 삶이 장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의 독립에 자신의 열정과 노력과 땀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러한 100년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 이후 유영모, 함석헌 선생님으로까지 이어져서 민족정신의 커다란 영향ㅇ르 미쳤다.


2. 남강 이승훈 교육사상의 특징


인성교육

남강은 1907년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민족을 위하는 길이 바로 신식 교육임을 깨달았다. 마치 동도서기론과 같이 교육 방식을 신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했고 빠르게 혁신했다. 그리하여 8월에 소학교인 ‘강명의숙’과 12월 에 중등학교인 ‘오산학교’를 설립한다. 남강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 고 나라의 발전에 충성할 인재를 기르려고 했으며 민족 독립을 지향하는 고품의 인성을 지닌 민족 지도자를 양성했다.


신앙

남강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했다. 현실의 문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 내면에서 나오는 힘을 양성함으로 이전의 방식으로 살지 않은 새사람이 되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성경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강조하면서 먼저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을 돕고 민죽과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강상을 제시했다. 이는 기독교 철학에서도 '복음주의'의 사회관을 담고 있으며 세상을 변혁해 가는 종교로서 기독교의 철학을 조선에 적용하려고 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남강의 기독교적 인성교육과 신앙교육의 목적에 따라 오산학교의 교사들은 유영모, 조만식 등이며 대표적인 기독교적 인성에 기초한 애국지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선생님들 밑에서 오산학교 학생이었던 주기철, 한경직, 김소월, 김홍일, 함석헌은 후일에 기독교 인성으로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간 인물들로 성장하게 된다.


실용교육

남강선생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기반으로 해서 국가의 기반인 경제와 산업, 무역에 대한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신식교육의 핵심에는 경제학과 사회학이 있었으며 근대국가에 걸맞은 산업을 일으키고 운영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려고 했다. 또한 1926년 오산학교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고등보통학교로 인가 받은 후에는 교육사업의 범위를 넓게 확장하여 여성교육을 위한 여학교와 농과대학의 설립했다. 따라서 오산학교 근교의 제석산과 연향산에 실습림, 안 주의 매립지를 이용한 임해농장, 절골에 직조공장, 제사공장 등을 세워서 실제로 교육과 사업이 연결되는 방식의 교육을 꿈꾸었다. 또한 용동에 마을공동체 자치기구 자면회를 구성하여 용동을 중심으로 신식 협동조합을 꿈꾸면서 드디어 조선에서도 농촌경제방식의 공동생산을 하는 이상촌건설 계획도 추진하였다.‘식산흥업’이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산업을 살리고 업으로서의 산업들에 민족의 구서원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 수 있는 당시의 '소득주도 성장'을 꿈꾼다. 이와 함께  민족운동과 ‘국권회복’의 전략으로서 자본을 모아 공공 산업을 부흥하고 사회전반적인 인프라를 증가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해 간다.



3. 남강 이승훈 교육 사상에 대한 의견


남강 선생님의 교육방식은 마치 조선후기 '실사구시'를 방불케 한다. 현실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혁신의 방편으로서 산업과 실무에 힘쓰는 한편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바뀌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교육훈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나에게는 많은 도전과 일깨움을 준다. 인간이 다른 사람과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성만도 아니고, 실제 자기의 일과 자존감과 효능감을 위한 '주체의식'이라는 점에서 오산학교의 위대함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명한 협동조합인 몬드라곤도 처음에는 호세마리아신부의 사상에서 '사랑과 우애, 그리고 실천'의 방식이 구현된 것처럼 남강 선생의 철학이 오산학교와 다양한 민족운동을 통해서 전개되었고 이를 더 발전시킨 조만식 선생님과 유영모 선생님은 민족을 일으킬 제자들을 키웠다. 자유만 강조하지 않고 인성과 함께 공의와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윤리적인 부분에서 국가와 민족을 품을 수 있는 인재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배울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식산흥업과 같이, 산업과 경제에 대한 공부와 실천을 중심한 점은 남강 이승훈 선생님의 혜안이 돋보이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발달된 문물들이 이루어낼 미래는 1차 산업인 농업이 아니라 2차, 3차 산업의 발전된 생산관계를 가진 고도화 산업사회였기 때문에 무역은 당연하고 금융과 기술은 중요한 기반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꿈꾸고 이루어내기 위한 실제적인 전략으로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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